오염
아무래도 무턱대고 들이댔다가는 죽을 것 같다. 위험한 인간이 너무 많다.
이연우는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에 섞여 돌을 쥐고, 형광조끼를 꺼내 입었다. 두 개의 인식 왜곡이 시끄러운 환경에 녹아든다.
“한국 공격할 사람 모여주세요! 우리끼리 타격지점 정합시다.”
“폭발하는 밥 짓는 밥솥 있습니다!”
“나는 질식하는 손 선풍기 있는데.”
한 달 뒤를 위해 바쁘게 떠들고 모이는 사람들. 짧은 시간 안에 정리되지 않을 듯한 열기.
이연우는 천천히 걸어 다니며 우두머리급의 멸망주의자를 살피다가, 안경을 쓴 멸망주의자가 어딘가로 왔다 갔다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
“이거 받아 가세요. 정보랑 무기.”
한 번 오갈 때마다 손에 든 서류가 바뀌고 이상기후의 구성 개체를 들고 오는 것으로 보아, 따로 장소가 있다.
이연우는 그쯤에서 움직였다.
‘이상개체를 훔치든, 정보를 빼내든. 해보자.’
안경 쓴 멸망주의자가 오간 길로 걸음을 옮긴다. 잔디가 깔린 섬에 자그맣게 깔린 오솔길을 조금 걸으니, 텐트 몇 개와 컨테이너 몇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부지가 나왔다.
경계를 서는 사람이 몇 있지만, 다들 바닥에 엎어져 하품하고 있다.
“햇빛 따듯해….”
“졸려….”
이연우를 알아채지는 못했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고, 졸린 눈을 비빌 뿐.
이연우는 자연스럽게 텐트부터 들어갔다. 가장 가까운 텐트부터 하나하나.
‘여기는 자는 곳이고. 여기는 밥 하는 곳이고. 여기는…. 일하는 곳?’
이상한 발전기로 전기를 만들고, 조명과 컴퓨터와 책장과 탁자 따위가 놓여 있는 넓은 텐트. 커피 냄새와 종이 냄새가 은은하다.
이연우는 괜히 텐트 바깥을 슬쩍 보았다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손을 뻗어 가까운 책장의 문서부터 살짝 빼내었다.
그 이름을 본 이연우는 눈을 크게 뜨고 다른 문서들을 보았다.
‘국가멸망시나리오? 지구멸망시나리오? 인류멸종시나리오? 전부 회사 기밀문서잖아?’
회사가 걱정하고 예방하는 위험들. 하지만 멸망주의자에게는 그들의 꿈을 이뤄줄 최선의 시나리오.
이연우는 잠깐 생각하다가, 문서를 다시 책장에 밀어 넣었다. 원래 있던 모습 그대로. 문서의 순서나 앞으로 나와 있던 디테일까지 신경 써서.
‘멸망주의자면 가장 먼저 빼낼 정보긴 해. 이런 것보다는 당장 전쟁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를 알아내야지.’
이연우의 눈이 스탠드 등이 하얀빛을 내리쬐는 책상에 향했다. 딱딱 자리 잡은 서류 따위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자세히 보인다. 지도였다.
검은 강 한 편에 드문드문 늘어선 회사의 전력. 병력 전개를 계획한 문서.
강 반대쪽에 그려진 클럽이며 협회의 전력 예상도.
그리고, 문서.
[사후세계를 지구로 끌어내리는 법]
찾았다. 이연우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한 장 한 장 찍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사진이 촬영됐다.
비어버린 지구를 공격하여 시선을 끌고, 진짜 멸망주의자는 전쟁이 한창인 사후세계를 끌어내려 지구를 터트리겠다는 계획. 파괴도 파괴지만, 핵폭탄의 방사능처럼 전쟁의 오염을 흩뿌리겠다는 계획.
오직 지구의 파괴만을 바라는, 인간의 죽음만을 바라는, 악의로 가득한 계획.
‘진짜 미친놈들인가? 진심으로 지구가 멸망하기를 바란다고? 왜?’
이연우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살짝 떨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였다.
‘왜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거지?’
그렇게 문서를 하나하나 찍을 즈음이었다.
바스락, 발걸음이 다가온다. 확성기로 들었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고 있습니까? 지금 상황에?”
“안 자요!”
“경계 서고 있는데요?”
이연우가 휙 돌아보니, 텐트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안경을 쓴 멸망주의자가 누워 있는 경비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그림자.
이연우는 다급하게 서류를 정리했다. 원래 있던 모양으로 돌려놓는다.
“지금 이쪽에 신경 돌린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회사도 그렇고, 다른 집단도 그렇고, 스파이도 있는데. 정신 차리십시오.”
“정신 차리고 있는데요?”
“아니, 하. 알겠습니다.”
천만 드리워져 있던 입구로 손이 들어온다. 손은 바로 천을 걷었고, 안경을 쓴 멸망주의자가 걸어왔다.
역광을 받아 어두운 인영, 안경만이 반짝였다. 이연우는 벽에 바짝 붙었다. 안경의 빛이 이연우를 비춘다. 빛이 점점 강해졌다.
멸망주의자가 가까워진 탓이다. 저벅저벅, 한 걸음씩 다가온 멸망주의자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짝 붙었고,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이걸 안 걸렸나?’
이연우가 의문을 품는 순간이었다.
쪼르륵-
멸망주의자가 커피포트에서 물을 따르며 말했다.
“그래서 그쪽 손님은 어디서 오셨는지?”
“….”
이연우는 침묵했고, 등을 보인 멸망주의자는 태연하게 두 번째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는 커피며 차 따위가 놓인 박스를 앞으로 가져왔다.
“커피? 홍차? 아니면 물? 아. 불청객한테 선택권을 주는 건 너무 자비롭나?”
멸망주의자가 돌아섰다. 안경은 정확히 이연우에게 향했고, 컵 또한 이연우를 향해 내밀어졌다.
“물. 마셔.”
인식 왜곡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 이럴 수도 있을 것 같았지.’
단순히 장비 두 개로 기만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이연우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고, 사고가 고속으로 흘렀다.
나름대로 발각되었을 때를 대비하고 계획을 세웠다.
‘싸움은 피하는 게 낫지. 여기는 적진이니까. 차라리 정신 나간 멸망주의자인 척 해보자.’
이연우가 상대의 안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그 안경. 탐나는데.”
***
멸망주의자 중 머리 역할을 하는 그는 무심코 안경을 고쳐 썼다.
현실에 드러난 것을 분석하는 안경은 그와 하나가 되어 감각과 인지능력을 대폭 상승시켰다.
그렇기에 이연우가 진심임을 알아봤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뭐지? 누구지?’
회사나 다른 집단이 올 줄 알았는데. 뭔가 다른 느낌이다.
안경의 빛이 강해졌다. 현실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낱낱이 분석한다. 날카로운 시선이 이연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분장. 목소리도 어색해. 그리고 이상개체.’
형광조끼를 입었고, 돌을 쥐었다. 품에 숨긴 공간 확장 가방, 주머니에 넣어둔 시간을 사는 지폐와 라이터. 거의 사라졌지만 악마 냄새도 조금 난다.
잘 모르겠는 이상개체들의 흔적도 보인다. 뭔지 모르겠는 것에 오염도 되었다.
‘회사, 클럽, 악마숭배자, 알 수 없음?’
온갖 이상개체가 마구잡이로 섞여 있다. 이건 차라리 멸망주의자에 가까웠다. 남들의 이상개체를 약탈해 쓰는 멸망주의자.
그는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개인 활동하는 멸망주의자인가?’
멸망주의자라고 집단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집회를 거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동료 의식 같은 것도 없고.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번 집회를 기회 삼아 탐나는 이상개체를 약탈하러 온 인간이라고?’
이연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보고 있었고, 그 시선은 압박이 되어 그를 짓눌렀다.
안경을 쓴 멸망주의자는 물이 담긴 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물이 싫으면, 하하. 안 마셔도 됩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축제가 한 달 뒤다. 죽어도 그건 보고 죽어야지.
그 목소리가 컸다.
바깥에서 경비 서던 사람이 엎드린 상태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도마뱀처럼 머리만 돌아갔고, 쉭쉭, 뱀의 혓소리가 같은 것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에 무슨 일 있어요?”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텐트에 드리운 사람의 그림자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형태가 변화했다.
손톱이 길어지고, 목이 나오고, 파충류의 머리로.
“없습니다. 이제 일 대강 끝났으니까, 당신네 대장한테 돌아가세요.”
“와! 끝났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변해, 경비 서던 사람들이 분주하게 떠난다.
이연우가 입꼬리를 내렸다.
“헛짓하네.”
저렇게 부자연스럽게 경비가 돌아가면 당연히 문제가 생겼음을 알 텐데. 이건 다른 우두머리급 멸망주의자에게 알리는 짓이다.
렙틸리언 전염병의 숙주인 멸망주의자에게.
이제 시간이 없다. 침입이 알려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탈취자가 열어둔 문을 넘어가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이 인간인데.’
신분은 숨긴 것 같지만, 만만치 않다. 대놓고 신호를 보낸 것도 수상했다.
이연우는 망설이지 않고 에코백을 펼치며 클럽의 권총을 꺼냈고, 멸망주의자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철컥, 총이 상대를 겨눴다.
'인식 왜곡을 꿰뚫어보고, 분장한 얼굴을 봤어. 못해도 안경은 처리해야 해.'
선명한 살기 앞에서도 멸망주의자는 고개를 저었다. 친절한 목소리가 나왔다.
“클럽의 권총? 안경을 빼앗기에는 나쁜 방법이네요. 지금 총을 쏘면 총성이 크게 울리지 않습니까. 문제가 생겼다고 알리는 꼴입니다.”
“…그런가?”
“제 안경을 빼앗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조끼와 돌. 단순한 도구일 뿐 아닙니까.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옳은 말이다. 몰래 도망쳐야 하는데, 총이라니. 좀비가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서 스피커가 터져라 노래를 트는 꼴 아닌가.
‘그러면 역시 공구지.’
이연우는 권총을 도로 집어넣고, 전동 드릴을 꺼냈다. 여기에 지폐를 더하면 바로 상대를 처리할 수 있다.
돌을 쥔 손이 주머니로 들어가, 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 끝에 지폐를 붙여놔, 불만 붙이면 바로 지폐가 타오른다.
그 순간 멸망주의자가 고개를 저었다.
“지폐. 쓸만하죠. 하지만 그게 전부 불타야 효과가 생기지 않습니까. 과연 제가 그게 끝까지 탈 때까지 보고만 있을까요?”
여유롭게 손을 뻗어 물컵을 쥐었다. 여차하면 흩뿌릴 자세로.
“몸싸움에 자신은 없는데. 불을 끌 정도는 됩니다.”
이 또한 옳은 말이다. 이연우는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괜히 몸싸움 따위를 벌이면 시간만 버리는-
‘…내가 왜 저 인간 말을 듣고 있지? 지금 시간을 얼마나 낭비했지?’
겨울인 한국과 달리 따듯한 섬이다. 그런데도 이연우는 냉기가 등골을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머리털이 삐죽 서고, 동공이 확장된다.
‘심리조작? 행동유도?’
멸망주의자는 웃고 있었다. 안경의 빛 때문에 눈은 보이지 않으나, 입만은 히죽 미소를 짓고 있다.
“눈치챘군요. 하하. 안경이 전부라면 제가 왜 혼자 무방비하게 있겠습니까. 제가 당신이라면 안경은 포기하고 지금 바로 도망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