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난장판이다.
- 1차 수술 준비.
신스 다이나믹스의 기계 인간은 냉병기를 꺼내 들었다. 총탄 같은 것은 전쟁 중에 전부 소모했다. 강철 칼날이나 전기톱이나 송곳 같은 것이 팔뚝에서 튀어나오고, 섬뜩한 빛을 흩뿌렸다.
- 필요 없는 장기와 신체를 제거하라. 기계로 대체하라.
그리고, 그것들의 머리에서 노이즈가 튀었다.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에게, 더 많은 작품을 가지고 돌아가자.
이것들도 협회장에게 당해 회로가 돌아버렸다. 협회장이 사라졌어도, 조금 자유로워진 의지는 여전히 협회장을 위해 움직였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전장에 있어 살아남은 귀신들도 마찬가지.
마법진과 뿌려진 가루를 피해 멀리 있던 귀신들이 증오 가득한 정신파를 내뿜었다.
- 그분께서 원하신 사후세계가 쪼개졌으니, 더 많은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들어 슬픔을 달래드려야 한다!
- 복수도 할 겸 말이야!
지독한 정신오염이다. 모든 의지와 정신이 협회장을 중심으로 비틀렸다.
병원의 보안요원들은 묵묵히 무기를 들었다. 3단봉이나 권총이나 테이저 건.
“유령은 몰라도 저놈들은 상대할 수 있습니다. 안전구역만 지키면 됩니다.”
“당신들만으로는 전력이 부족한데. 남는 총 있습니까?”
“저 있습니다.”
이연우가 에코백을 뒤집었다. 이제 얼마 안 남은 클럽의 권총이 우르르 쏟아졌다.
‘어차피 정보상한테 받을 총이야. 여기서 다 써도 문제없어.’
특전대 소속 전투원들이 얼른 권총을 챙긴다. 또한 신스 다이나믹스를 상대해본 전투원은 빠르게 지침을 내렸다.
“테이저 건은 쓰지 마십시오. 그걸로 전력 충전하는 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간 부분을 노리십시오. 저것들도 피 흘리면 죽습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
이연우는 귀 기울여 들으며, 슬쩍 양쪽의 전력을 가늠했다.
‘일단 저 기계 인간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유령은 괜찮고. 핵폭발의 정령 같은 것도 여기에는 없어 보이고.’
그때, 이연우의 시선은 두 사람을 잡았다.
보호구역을 만들어낸 마법사.
“….”
입을 다문 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갑자기 팔찌를 깨부순 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이니까 도망친 것이다. 다른 차원으로.
그걸 부러운 눈으로 보기도 잠시.
이연우는 마크 정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기억소거제?”
마크 정은 사라진 기억을 인지한 후 상황을 파악하다가, 무심코 핸드폰을 보고 다시 정신조작에 당해 기억소거제 몇 방울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사라진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다가, 다시 핸드폰을 보고 기억소거제를 마시고.
계속해서 핸드폰을 보고, 다시 마시고를 반복하고 있다.
그쯤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쏴! ”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병원의 복도가 총성으로 가득 찼다. 기계 인간들은 협회장에게 헌신하기 위해, 더 많은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총탄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는다. 총탄이 기계 부분을 맞추고 튕겨 나가기도 하고, 붉은 피나 윤활유를 흘리기도 하고, 치명타를 맞아 쓰러지기도 하고.
‘거리가 좁혀지면 불리한데.’
이연우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다가, 얼른 마크 정의 핸드폰과 기억소거제를 빼앗았다.
“지금 상황이, 그건 제-”
마크 정은 혼란한 표정을 짓다가 빼앗겼고, 이연우는 핸드폰 화면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얼른 핸드폰을 앞으로 내세웠다.
“이쪽 보지 말고, 비키세요!”
숙련된 회사원은 곧장 길을 열었다. 이연우의 앞으로 텅 빈 공간이 생기고, 이연우는 얼른 앞으로 달려갔다.
기억소거제를 마시라고 강제하는 화면을 방패처럼 내세우며.
순간, 기계인간들의 동공이 그 화면을 잡았다. 사람의 눈이, 카메라 렌즈가 일제히 그것을 보았다.
- 1순위 명령 변경, 변경 불가, 변경, 변경 불가, 변경, 치직.
협회장의 영향력과 회사가 준비한 강제력이 충돌한다. 이사 직속 직원으로서 암시가 걸린 마크 정의 몸은 명령대로 움직였지만, 기계 인간의 정신에서는 순수하게 두 이상개체가 힘을 겨뤘다.
치직-
기계 인간들의 움직임이 멈춘다. 총탄이 빗발치는데도, 그것의 두뇌와 회로는 과부하에 걸려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 1순위 명령. 더 많은 작품을 가지고 그분께 향하라. 변경. 기억소거제를 마셔라. 변경 불가. 변경.
하나둘 부서져 나갈 무렵, 협회장의 영향력이 회사의 명령을 밀어냈다.
- 1순위 명령 유지.
- 그분을 기쁘게 하라!
이제 몇 안 남은 기계 인간은 맹렬하게 달려들었으나, 총탄 세례 앞에서 쓰러졌고, 귀신들은 아쉬움에 흐느꼈다.
- 저 결계도 못 뚫고 죽다니!
기계 인간을 막아낸 회사원들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는 도망쳤습니까?”
“마법사가 여기 남을 이유가 없긴 하죠. 도망 잘 치는 인간들이기도 하고.”
“그러면 저 유령은….”
이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귀신과 널브러진 기계 인간의 잔해를 보았다.
‘협회장…. 그게 정신 오염이라고?’
위화감. 이상구역으로 변한 병원. 자욱한 화약 냄새와 귀가 아픈 총성. 기이한 행동과 언행. 정신조작과 충돌하는 협회장의 영향력.
모든 상황이 종합되어 정신을 두드린다.
하지만 차마 그녀를 의심하자니….
‘내가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협회장은 다른데.’
이연우는 마크 정을 툭 쳤다.
긴장된 표정을 지은 마크 정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품을 뒤지다가, 툭 튀어나온 평범한 총탄을 보고 기겁하고 있었다.
“이게 왜 나한테 있어!”
“저기요.”
“아, 이연우 씨.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됩니까? 지금 상황은 또 뭐고요?”
이연우는 짧게 설명했다.
전쟁이 제대로 망했다고. 악마랑 예술가가 제대로 망쳤다고.
“전쟁. 분명 계획 중이라고 했던 걸 기억합니다. 한 달가량의 기억이 사라진 모양입니다. 그런데 기억소거제는 왜.”
마크 정은 곤란한 기색이었지만, 이연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예술가 협회장을 봤습니다.”
“아. 그래서 기억소거제를. 어쩐지 가슴이 아프더니.”
마크 정은 상황을 파악하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협회장을 잊었지만, 강제로 지워진 기억의 빈자리는 씁쓸한 고통을 호소했다.
가장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린 고통. 잃어버린 기억이 뭔지도 알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이연우를 경계했다.
“이연우 씨는 기억소거제를 안 마신 것 같습니다.”
“예. 그 협회장, 정신 오염입니까?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들어서요.”
“정신 오염으로만 말하기는 조금 부족하지만, 얼추 맞습니다. 빨리 기억소거제 마시세요.”
마크 정이 이연우에게 빼앗긴 기억소거제 병을 가리켰지만, 이연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평범한 총탄이 장전된 권총을 보며 생각한다.
‘정신오염이라고.’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그녀가 정신을 조작했다니. 하지만 믿지 않았을 때가 조금 더 안전하기에 이연우는 생각을 비틀었다.
‘기억소거제는 안 내켜. 진짜 정신오염이면, 시간이 지나면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묻어두자.’
주사위를 굴리기는 조금 그렇다. 자신이 아니라, 그녀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과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니까.
이연우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나와 함께 가자. 그런데 그녀는 혼자 갔잖아. 이미 깨진 약속이야. 함께 가자고 했는데 내가 혼자 찾아가는 건 이상하지.’
그리고.
‘예술가 협회장이 어디 있겠어. 예술가 협회 본진에 있을 거 아냐. 거길 혼자 찾아가라고?’
심리적인 장벽을 계속해서 세운다. 협회장의 영향력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연우는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족쇄를 벗어던진 기분.
그쯤에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
병원의 생존자들은 안전구역 안에 있었고, 귀신들은 저 멀리서 생존자를 노려봤다.
생존자는 귀신을 죽일 수 없어서, 귀신은 안전구역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시간만 보낼 뿐인 눈싸움이 계속됐다.
- 나와! 비겁한 이승 놈들아!
“네놈들이 들어와.”
- …꼭 저놈들만 상대할 필요는 없어. 여기에는 사람이 많으니까.
어떤 귀신이 깨달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저 마법진은 교묘하게 계단과 통하는 복도 중앙을 가로막았지만, 아래층에도 사람은 있다.
귀신들이 흉흉한 기색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병원과 융합한 사후세계가 현실을 조금 더 침식했다.
병원에서 죽어간 회사원들이 귀신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부상을 입은 전투원, 병색이 짙은 연구원, 고통 가득한 표정을 지은 조사원.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멍하니 반투명한 자기 몸을 보았다.
- 이건. 난 죽었는데?
- 이차원 융합? 이상개체로 살아났다고?
그때, 안전구역 안에 있는 전투원 한 명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그 목소리에 전투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 난 네 아버지가 아니다. 사람은 죽으면 끝이야. 네 앞에 있는 건 이상개체다.
그 냉정한 목소리. 전투원이 정신을 차렸다. 그의 기억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회사원 귀신들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악의 가득한, 협회장에게 당한 귀신들을 보았다.
- …이 병원이 이상개체로 변했네. 이차원 융합 때문이야. 아마 사후세계가 추락한 거 같은데.
- 이놈들부터 처리합시다. 딱 봐도 적대등급 높은 놈들인데.
- 이왕 이상개체로 살아났는데, 회사랑 우호적인 관계부터 맺어야죠. 열심히 일합시다.
그들은 눈을 번쩍이며, 멍하니 있던 귀신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귀신들이 엉키며 싸움을 벌였다.
사람들이 당황할 때, 뜻밖에도 조사원 귀신은 지긋지긋한 표정으로 악을 썼다.
- 죽어서도 회사 밑에서 일하라고? 계속 위험에 시달리라고? 나는 죽음을 택하겠다!
펑-!
조사원 귀신이 터졌다. 위험도 일도 없는, 영원한 잠에 빠졌다.
***
각 집단의 전쟁지휘부는 빠르게 회복했다.
회사는 준비된 절차를 따라 기억소거제를 마셨고, 예비인력들이 지휘부를 대체했다.
“파편 위치 추적하고, 위성병기, 정예요원, 종말방어장치 다 대기시켜.”
“협회장한테 당한 이상개체들이 폭주할 거야.”
“마법사들한테 연락 돌려! 추방마법이든 이동마법이든 준비하라고! 붉은 거인이나 정신을 쪼아먹는 새는 다른 차원에 버린다!”
마법사들은 신나서 대화했다.
“붉은 거인은 어디로 날릴까요?”
“그, 어디야. 무스펠헤임? 거기 보내면 잘 살지 않을까?”
클럽의 회장은 미리 준비해둔 ‘보험’으로 정신을 차리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황금 가져오십시오.”
“얼마나 가져올까요?”
비서의 질문에 회장은 냉담하게 답했다.
“예술가 협회장하고 싸울 만큼.”
위험레벨 6은 이상세계의 핵폭탄이다. 그게 전쟁을 관전하던 고위층을 타격했다. 아무리 좋게 넘어가려는 클럽이어도 이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회사야 사고 수습하기 바쁠 테니, 클럽이라도 협회장에게 경고해야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