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73)화 (173/194)

인간

모든 게 돌아왔다. 보호장비를 껴입은 것처럼 안정감이 찾아왔고, 개인 하나에 매몰되어 있던 정신도 여유를 찾고 주변을 넓게 인식했다.

이연우가 은은하게 풍기던 이질감이 감춰졌다. 이연우는 힘이 빠져 그대로 뒤로 누웠다. 두 손으로 쥔 자격증을 천장 높이 들었다.

삐뚤빼둘하게 붙여진 증명사진과 못나게 쓰인 글씨.

“하하.”

괜히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만든 장비. 누가 취소하지도 못하는 오롯한 자신만의 자격증.

바스락, 이연우가 종잇조각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는 버리고, 내면의 감각에 집중했다. 생존본능이나 주사위의 오염 같은 것.

‘됐다.’

주사위의 오염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생존본능이 더 이상 오염을 막지 않았다. 위험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 자격증이 자아를 보호할 테니까.

주사위를 6레벨로 올릴 길이 열렸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는 생존본능과 주사위로 6레벨에 오를 것이다.

이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제 조금 자신감이 생기네.’

이 정도면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그럭저럭 당당하게 살아갈 자격을 얻은 게 아닐까?

이연우는 희망찬 미래를 그리다가, 까무룩 잠에 들었다. 긴장이 풀렸고, 힘이 다했다. 좁은 방에 이연우가 쌕쌕 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며칠이 지났다.

휴가라며 며칠 동안 방에서 푹 쉰 이연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늦게 출근했다. 개운하게 씻고, 자격증을 몇 번이고 살피고, 오랜만에 낡은 정장을 입고.

“안녕하십니까!”

쾌활한 인사가 터졌다.

이미 출근해 있던 조사반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이연우를 보았다.

이연우의 상태가 안 좋아 보여 따로 찾아가지도 않았기에, 인간자격증을 만든 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이질감이 없다. 마음도 추스른 것 같다.

반장이 말했다.

“어, 연우야. 자격증 되찾았냐?”

“방법이 없어서 제가 만들었습니다.”

이연우가 자랑스럽게 인간자격증을 꺼냈다. A4 용지로 대충 만든 자격증.

그걸 본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이제는 공문서 위조까지 하는구나, 애착인형이 없어져서 비슷하게 만들었구나, 주사위로 대체품을 만들었구나 등등.

경악, 동정, 이해, 최재민부터 반장까지 여러 사람의 머리에 생각이 스쳤다.

어찌 되었든 잘된 일이었다.

사실 신경이 곤두선 이연우가 옆에 있으면 이쪽까지 불안해지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래. 잘 돼서 다행이네.”

“그럼 이제 다시 의뢰받고 일해요?”

유지유가 묻자, 이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의뢰는 당분간 쉴 예정입니다.”

일이 중요한가. 시간만 잘 보내면 주사위가 6레벨이 되는데. 지금 중요한 건 잘 먹고 잘 자며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어차피 생존본능 덕분에 위험한 일은 없긴 한데….’

일하기는 귀찮고, 꺼림칙했다.

당장 본사의 의뢰를 받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무인이랑 싸우지 않았나. 사고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이연우는 자리에 앉으며 인사치레 삼아 질문했다.

“조사 업무는 요즘 없으십니까?”

“어. 요즘 업무 안 들어오긴 하네. 사실 조사반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반장이 말했다. 처음 꺼내는 이야기다. 중요한 이야기도 했다.

유지유와 최재민이 휘릭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잔뜩 커졌다.

“폐, 폐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쩌고요?”

“안 돼요! 여기 폐지되면 저 실험실 가잖아요! 아니면 어디 이상한 부서 갈지도 모른다고요!”

조사원에게는 단순히 부서 하나가 없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생계가, 나아가 삶이 걸린 일이었다.

하지만 반장은 태연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부서야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지. 우리야 유능한 인력이니까 다른 부서로 이동될 거고. 그런데.”

말을 질질 끌다가 웃는다. 최재민과 유지유는 물론 이연우도 귀를 기울였다. 반장이 말했다.

“폐지 이야기 사라졌단다. 우리가 스스로 이상개체를 조사해서.”

“…우리가요?”

최재민과 유지유가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그, 뭐야. 멸망주의자 테러도 잘 대처하고, 사랑의 묘약도 회수하고, 얼마 전에는 아기도 주웠잖냐.”

상부가 결정을 미뤘다.

조사반이나 조사원도 저 이연우만큼이나 이상개체를 끌어들이는 미끼 아닐까? 일단 두고 보면서 이용 가치를 찾는 게 낫지 않나?

거기에 건물도 반장이 건물주로서 소유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전하자, 이연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체질이 원인이었다.

‘이게 도움도 되네.’

조사원이 다른 부서에 가면 재미 없고 답답, 아니, 적응하기 힘들 테니까. 수틀리면 도망치던 사람들이 특전대나 보안요원이 되면 문제가 많을 것이다.

조사반도 조사원처럼 끈질긴 생존능력을 선보인 그때였다.

이연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마크 정의 전화였다. 이연우가 서둘러 핸드폰을 들었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 잘 지내셨습니까.

피로가 그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기고, 가라앉은 목소리. 이연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 괜찮으십니까?”

- 아뇨. 죽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인간자격시험이 갑자기 미쳐서 변했습니다. 그거 막던 데이터 센터가 뒤집어져서, 그거 때문에, 아….

마크 정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인간자격시험이 세상에 나오기 힘들게 무수한 모의시험을 진행하던 데이터 센터. 모의시험을 진행하던 AI가 이상자격시험에 합격해 난장판이 벌어졌다고….

- 데이터 센터가 마비됐습니다. 예비 센터에도 합격자가 나와, 시험이 세상에 자유롭게 풀려났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또 이상개체가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이상異常을 만드는 이상異常이 자유를 얻었다.

이연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어, 어? 이거 내가 사고 친 건데? 어?’

침을 꿀꺽 삼킨다.

“그, 안전조치 001로 어떻게 안 됩니까?”

- 그건 지역을 억누르는 방식이라…. 시험이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지금 광범위하게 누르는 힘으로는 못 막습니다.

현상으로 존재하는 이상異常이 제일 막기 힘들다며, 마크 정이 탄식했다.

- 위험레벨을 5까지 격상하고, 일단 억제까지는 성공했지만 피해가 너무 많습니다.

마크 정은 고통을 나누고 싶은지, 이연우의 메신저로 영상 하나를 보냈다.

양심에 찔린 이연우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보여주실 필요는 없는데….”

- 이건 부탁을 위해 보여드리는 겁니다. 이상異常을 만드는 판정이 잘못되면 이렇게 되니까, 본사가 했던 의뢰는 자제해주시라고요.

일단 이연우가 이상자격시험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다.

딸깍, 이연우가 마지못해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곳은 양계장이었는데, 계란 품질 검사가 갑자기 이상자격시험으로 변했고, 달걀이 이상개체가 되었다.

갑자기 양계장 직원이 달걀을 들어 올렸다. 깨달음이 가득한 목소리.

- 삶은 달걀이다! 삶은 달걀이야!

- 김 씨! 달걀 가지고 뭐, 삶은 달걀이다! 삶은 달걀이었어! LIFE IS 달걀! 우리의 삶은 달걀이야!

양계장 직원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계란을 우러러보더니, 그 계란과 함께 우르르 몰려 나가며 외쳤다.

- 삶은 달걀이다!

“….”

이연우가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보았다. 영상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부검이 진행 중인 부검실. 부검 자체가 이상자격시험이 되었고, 시체가 이상개체가 되어 벌떡 일어났다.

- 끄에에엑!

좀비처럼 움직이는 시체가 부검실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검시관이 기지를 발휘해 좀비에게 불을 붙였다.

좀비가 타들어 간다. 피부와 살점이 까맣게 타 점점 떨어졌고, 다음 순간 시체가 부르르 떨었다. 살점이 떨어지고 새하얀 뼈가 드러났다.

- 살점이란 봉인이 풀렸구나! 나는 해골의 왕! 세상에 만연한 살점의 속박을 풀어내겠다!

좀비가 스켈레톤이 되었다. 푸른 도깨비불이 눈동자가 되어 눈구멍에 맺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시관이 내리친 망치에 두개골이 깨져 죽었다.

깡!

“….”

이연우는 눈을 질끈 감고, 영상을 꺼버렸다.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고를 쳐도 크게 쳤다. 아니, 아니다.

‘고작 인간자격증 달라고 했다고 변신한 이상개체 잘못이지.’

아무튼 나는 인간이고, 어쨌든 이상개체가 잘못했다.

그럼에도 쿡쿡 쑤시는 양심의 고통 때문에 이연우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 아뇨, 괜찮습니다. 이연우 님이 나설 만큼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일단 수습도 했고요.

그냥 일이 엄청 많아져서 문제지.

마크 정이 한숨을 잔뜩 섞어 말했다가, 억지로 목소리 톤을 높였다.

- 그보다 저번에 본사 일이 마무리되어 보상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전화드렸습니다.

“보, 보상이요?”

- 예. 어쨌든 실험의 성과가 상상 이상으로 훌륭했고, 무인도 붙잡으셨으니까요.

양심, 양심이 아프다.

이연우가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허공에 손을 저었다.

“아뇨, 보상은 괜찮습니다. 사실 사고 친 건데, 차라리 격리당하는 징계를 받을 일-”

- 아닙니다. 이런 일에 포상도 안 주면 직원들이 왜 일하겠습니까.

마크 정은 번쩍 정신이 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사실 훈장이나 상장을 주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건 싫어하실 것 같아서 다른 보상을 준비했습니다.

정예요원쯤 되면 단순한 물질로 보상하기 힘들었다. 필요하면 자기가 얻거나,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명예나 다른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보상했지만, 이연우는 생존주의자라 도리어 물질적인 보상이 좋았다.

이연우가 순간 혹한 기색을 보였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입니까?”

- 아. 집은, 아닌데….

마크 정이 당황했다.

집을 줘봤자 펑 터질 텐데, 집은 좀.

“그러면 혹시 평범한 총탄?”

- 예? 아니, 그것도 아닙니다.

평범한 총탄은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실험할 때 한 발, 무인을 사살할 때 한 번 더 써서.

그걸 양산할 기술도 개발이 가능해졌다고는 들었는데, 회사는 총탄 개발은 신경도 안 쓰고 무슨 다른 짓에 집중하는 것 같았고.

이연우가 실망한 기색을 억지로 감췄다.

이상자격시험이 묻힌 것만 해도 다행이다. 아니면 나중에 밝혀질 때를 대비해 아껴두어도 되고.

“음, 그러면 보상은 조금만 받겠습니다.”

- 원하는 게 있으시면 말하십시오. 최대한 요구에 맞춰 드리겠습니다.

“본격적인 군대 장비 가능합니까?”

이연우가 눈을 빛냈다. 사소한 요구다.

- 그게, 미사일이나 전함이나 전투기 수준이면 무리가, 있는데요.

띄엄띄엄 던져지는 말에 이연우가 기겁했다.

저런 건 줘도 안 가진다. 개인의 장비가 아니다. 활주로 같은 기반 시설에, 정비까지 필요하니까. 줘도 못 쓴다.

그리고 어차피 필요할 때 요구하면 빌릴 수 있어 보이기도 했고.

“그거 말고, 특전대 장비 같은 거요. 전투 슈트? 방탄 헬멧이나 방탄복?”

- 그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도 보상으로 너무 부족한-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제가 의도치 않은 실수로 사고 쳤을 때 눈 감아 주시는 걸로 충분합니다.”

이연우는 능청스럽게 답했고, 마크 정은 이연우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통화가 끝났다. 이연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방탄복 있으면 평범한 총탄도 문제가 아니지.’

***

이사회가 열렸다. 화상회의로 모인 이사들은 자기가 받은 보고서를 가만히 보았다.

프로젝트 평범한 세계. 그들의 이상향은 긴 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었으나, 이연우가 닫힌 문을 열었다.

주사위로 얻은 이상異常이 아닐 가능성. 평범함의 기준.

연구원들이 다각도로 세웠던 수많은 이론들을 입증하는 데이터.

거기에, 열린 문에 쐐기가 박혔다.

이상자격시험.

어떤 이사가 말했다.

“이상개체가 시험에 탈락해 이상異常이 아니게 된 케이스를 확보했다고요.”

이상異常이 이상異常이 아니게 되는 과정.

평범한 세계로 향하는 문은 활짝 열렸고, 이제 그들은 그 길을 닦고 있었다. 문만 열렸으면 길을 준비하고 걷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리의 다른 기술과 연계하면 평범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

핵심 이론과 기술이 확보되었다. 최종 목표에 필요한 다른 기술도 이미 준비가 되었다.

남은 건 시행착오뿐이다. 시험을 위해 행동하고, 잘못을 고치고, 최종적으로 평범한 세계를 만든다.

“…그래도 너무 성급하게 진행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이사가 걱정스럽게 문서를 뒤적였다. 그곳에는 이번 실험을 위한 기술이 적혀 있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최후의 보루로 준비한 것이지만, 아직 완성도 안 됐고, 불안정한 부분이 많습니다. 잘못되면 재앙이 될 겁니다.”

“맞아요. 차라리 천천히, 차근차근 한 걸음씩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급하게 진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몇몇 이사가 반대하였으나, 많은 이사는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망하면 망하는 거지. 우리가 망해도 평행세계, 이차원의 인간들이 사명을 이어갈 거야. 차라리 우리가 희생하고 데이터를 전하는 편이 낫지.”

“실패해도 어차피 인류에 위험한 결과는 안 나올 거요.”

“표결이나 합시다. 여기서 생각 바꿀 사람 없으니까.”

투표가 진행되었다.

결과는 과반수의 승낙이었다. 위험한 실험이 결재를 얻었다.

이사들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내었다. 탄성, 기대, 불안, 거부감. 그들의 눈은 모두 문서에 쏠려 있었다.

이번 실험. 완성되지 않은 최후의 보루.

[멸종방어장치 : 세계 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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