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78)화 (178/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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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당한다! 내 몸에 도청 장치가 있다!’

그럭저럭 합리적인 의심이 피해망상의 수준까지 과장되는 순간이었다. 이연우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온몸을 뒤틀어가며 펄쩍펄쩍 뛰어다니던 이연우가 우뚝 멈췄다. 괜히 거칠게 옷을 털던 손을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아니, 그건 아니지.”

희번득거리던 눈에 냉정한 이성이 돌아왔다.

기계장치 따위를 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예요원한테 그렇게 들키기 쉬운 직접적인 수단을 쓸 정도로 회사가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시한다면 괴상한 이상개체나 위성 감시나 통화 감청 수준이겠지.

‘지금 뭘 해야 하지?’

이연우가 고민에 빠졌다.

조각가는 그런 이연우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보았다. 잘만 있다가 갑자기 흥분하더니, 미친 자처럼 날뛰었다. 그 생각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 뭐, 뭐가 문제-”

“잠깐 조용히 해주십시오. 생각할 게 있어서.”

조각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쳐 뒷문 앞으로 가고, 여차하면 조각상을 움직일 준비를 갖췄다.

아틀리에에 전시된 부엉이 조각상이나 기사 조각상, 늑대 조각상 따위가 몸을 살짝 움츠린다.

“….”

“….”

몇 초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연우는 갑자기 몸을 휙 날려, 쓰레기통을 뒤졌다. 방금 집어던진 핸드폰을 다시 찾았다.

‘그래. 일단 회사 이사 쪽 분위기부터 알아보자. 그냥 내 망상일지도 모르잖아.’

던지면서 깨진 핸드폰. 금이 간 화면이 계속 잘못 눌려, 한참 동안 손가락을 놀린 이연우가 겨우 마크 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접니다.”

- 예, 이연우 님. 무슨 일이십니까?

마크 정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연우는 핸드폰을 얼굴 앞으로 가져오고는, 단순한 통화 화면을 노려봤다. 사소한 단서라도 놓치지 않는다. 목소리, 감정, 기색.

이연우가 신중하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요. 혹시 회사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 글쎄요. 얼마 전에 실험 실패해서 장치 터진 것 말고는…. 아. 이사회가 며칠 동안 이어지긴 했습니다.

이사회가 열렸다고? 이연우의 눈이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주먹을 꽉 쥐어가며 겨우 평정을 유지한 이연우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혹시 그 이사회, 장치 터지고 열렸습니까?”

- 예. 시간상은 그런데….

마크 정의 목소리에도 미심쩍은 기색이 섞였다.

- 장치 하나 터졌다고 이사회가 이렇게 오래 열릴 리가 없는데. 진짜 무슨 사고가 났나?

“혹시 이사회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는-”

- 그건 저도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이사만 아는 비밀입니다.

이연우가 입을 다물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벌벌 떨렸다.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머릿속에서 비명이 메아리쳤다.

‘개변을 알아낸 거잖아! 아니, 처음부터 알고 이제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거겠지! 회사의 머리가 인류보호회사로 돌아갔다고!’

망했다. 진짜 망했다. 어디 부서 하나도 아니고, 이사회다. 최악의 상황이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

이연우가 간신히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음. 혹시 제가 도울 일 있으면 연락해주십시오. 어쨌든 회사원 아닙니까. 회사의 문제가 제 문제지요.”

- 예, 알겠습니다. 상황 파악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불안이 전염된 듯, 마크 정의 떨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통화가 종료됐다.

이연우는 곧바로 핸드폰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우당탕 흔들리는 쓰레기통을, 이연우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려보았다.

“진짜 좀 조용히, 평온하게 살 수 없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다. 죽지 않고 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온 세상이 그를 괴롭혔다.

다음 순간 이연우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맺혔다. 그의 유일한 소망, 생존. 그 소망을 방해하는 것은 가만히 둘 수 없다.

‘세상보다 회사가 더 무섭지. 이러면 클럽도 나설 수밖에 없어. 아니, 아예 6레벨끼리 동맹을 맺어야 해.’

이사만 날리든, 회사를 터트리든, 혼자서는 힘들다. 행동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연우가 눈동자를 데구륵 굴렸다. 시선이 꽉 눌린 용수철 같은 조각상들을 스치고, 뒷문을 슬그머니 여는 조각가를 보았다.

조각가가 석상처럼 굳었다.

“이, 이야기 끝났으면-”

“협회장 대리로 오셨죠? 부탁 하나만 합시다.”

이연우가 빠르게 말했다.

“협회장님한테 클럽 회장이랑 대화해달라고 요청하세요. 협회장이 아는 것 공유하고, 6레벨끼리 회의 좀 하자고요. …악마숭배자 쪽은 제가 접촉하겠습니다.”

“반드시 말 전하겠소. 그러면 이만 가겠소!”

조각가가 후다닥 도망친다. 거칠게 열린 뒷문이 덜컹덜컹 흔들리고, 이연우는 곧바로 몸을 돌려 아틀리에를 떠났다.

‘악마숭배자. 이야기만 몇 번 들었는데. 설득할 수 있겠지.’

습격은 불시에 일어나야 하는 법. 일분일초를 아낀다. 예술가 협회장이 클럽 회장을 설득하는 동안 자신은 악마숭배자를 설득한다.

그리하여, 6레벨 넷이 손을 잡고 생존을 위협하는 회사를 무너뜨린다.

“죽기 전에 죽여야지.”

이연우가 중얼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눈동자에는 주사위가 흐릿하게 비치는 듯했고, 걸음은 시간과 가능성을 디디며 생존이라는 미래로 향하는 듯했다.

***

이연우는 주사위를 굴려 가며 악마자치구로 향했다. 거리를 줄이기도 했고, 공간좌표를 이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악마자치구의 영역.

이연우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케흑, 냄새.”

유황 냄새가 풀풀 풍긴다. 독한 연기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그 위의 하늘은 온통 새까맣다. 때때로 불꽃이 비가 되어 쏟아지기도 했고, 번개가 마구잡이로 내리치기도 했다.

멀리 보이는 황야는 빙하가 솟아 있었고, 그 옆에는 용암 호수가 펄펄 끓었다.

“아니, 미치겠네. 뭐 하는 곳이야?”

자연환경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연우가 머리를 짚었다. 두뇌가 탁하다. 여러 감정이 마구 몰려들었다.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나, 오만. 자신의 생존을 건드리는 모든 것을 향한 분노. 햄버거 먹고 싶다는 식탐. 아무것도 안 하고 보호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나태. 사고 안 겪고 잘 사는 사람을 향한 질투 등등.

일곱 개의 죄악이 활화산처럼 들끓는다. 평범한 사람이 이 영역에 발을 들인다면, 죄악의 노예가 되어 지옥의 주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연우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어. 이런 감정은 생존에 도움이 안 돼. 감정 컷.’

생각을 몇 번 돌리니, 감정이 밀려났다.

이연우가 맑아진 눈으로 저 멀리 있는 악마자치구를 보았다.

검은색의 성채 같은 곳.

높은 벽 너머로는 삐죽 솟은 기기묘묘한 건물 지붕들이 보이고, 박쥐나 악마 따위가 낄낄 웃으며 허공을 날아다닌다.

“역시 여기가 최고야!”

악마 몇이 외치는 모양을 본 이연우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어쨌든 방문객이다. 갑자기 주사위로 난입하면 습격으로 볼지도 모른다.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지켜야 했다.

‘영역이 이 꼴인 걸 보면 조금 위험한 사람 같으니까, 더 조심해야지.’

이연우가 황야를 걸었다. 가뭄으로 말라비틀어진 잡초의 시체가 무성한 황야.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가 악악 고함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분노와 애원이 섞인 목소리.

“이 메뚜기 자식들아! 너희는 내 권속이야! 좀, 제발, 말을 들어!”

어딘가 곤충의 인상이 풍기는, 농부 차림의 남자가 주변에 널린 메뚜기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사각사각-

메뚜기들은 서로의 몸을 갉아먹기도 하고,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고, 교미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늘어져서 자기도 했다.

농부 차림의 남자, 해충의 악마 아바돈이 쾅쾅 발을 굴렀다.

“충해의 재앙이 왜 이러고 있어! 빨리 정신 차려! …돌겠네.”

이연우는 그런 악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대충 길 안내를 부탁해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침 아바돈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멍청한 메뚜기. 살던 곳에서 왜 빠져나와서…. 어휴. 숭배자한테 부탁해야겠다.”

“6레벨 숭배자 찾아가십니까?”

“그 친구한테 부탁해야 빨리 처리되지. …악! 너, 너, 너, 뭐야!”

어느 순간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이연우가 아바돈의 바로 옆에 서 있다.

아바돈은 뒤로 콰당 넘어져,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이연우를 올려봤다. 눈동자에 혼란이 스쳤다.

이연우가 은은히 흩뿌리는 가능성.

“혼란의 악마는, 네가 아닌데. 아니, 악마도 아닌데? 너 뭐야?”

“6레벨 이연우입니다. 숭배자랑 중요하게 나눌 이야기가 찾아왔습니다. 길 좀 안내해주시죠.”

이연우가 사무적으로 말을 늘어놓자, 아바돈은 머리를 긁적였다. 앞머리가 곤충의 더듬이처럼 흔들린다.

“그래? 숭배자 찾아오는 손님은 오랜만인데. 따라와.”

 아바돈은 별 경계 없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걸었기에, 악마자치구의 성채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남았다. 이연우는 따라 걸으며 호기심을 담아 질문했다.

“그 악마숭배자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뭐 하는 사람입니까?”

단편적인 소식만 몇 개 들었을 뿐, 무슨 이상개체인지도 잘 모른다. 이런 영역을 형성한 걸 보면 상당한 수준 같기는 한데.

아바돈은 손에 쥔 메뚜기를 마구 흔들다가, 생각 없이 말했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자. 여기 영역 다 그 친구가 만들었어. 악마들 지구에서 잘 쉬라고.”

“…이 영역을 전부요?”

이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는 얼음 지옥이고, 어디는 지옥 불이 타오르고, 어딘가는 일곱 개의 죄악이고.

다 악마가 도와서 만든 줄 알았는데.

아바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은 악마는 기근이나 재앙 쪽 영역 왔다 갔다 하고, 칠죄종은 방금 그 황야에서 살고, 전쟁이나 역병도 어울리는 악마들 살고.”

“….”

이연우가 침묵했다.

그리고, 뒤늦게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다양한 영역이 문제가 아니다.

회사의 위협 앞에서 곤두섰던 생존본능이 꺼졌다. 아마 이 영역에 진입한 뒤의 일 같다. 분명 위험한 환경에 놓여 있는데, 생존본능은 일상처럼 잠을 자고 있다.

‘뭐지? 왜 생존 본능이 꺼졌지?’

손가락이 달달 떨린다. 식은땀이 끈적하게 맺힌다. 생존본능이 꺼지자, 끔찍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가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 그. 여기 안 위험합니까?”

“위험하지. 지옥인데. 그래도 걱정은 안 해도 돼. 평범한 사람들이 와도 안 죽어.”

아바돈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에 힘을 줬다. 잡혀 있던 메뚜기가 으직 으스러졌다.

이연우가 메뚜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치명상을 입은 메뚜기가 죽지 않았다. 다리를 버둥거렸고, 몇 분 뒤에 천천히 회복했다.

아바돈이 편하게 말했다.

“죽음은 탈출이고, 축복이지. 지옥에는 그런 거 없어.”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 생존이 보장된 영역. 생존본능이 잠들었다.

“아.”

이연우는 예민한 감각이 둔해지고, 사고의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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