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
허공이 살벌하게 뒤틀린다. 살의가 현실로 구현되었다.
“회장의 뇌신경이 끊어질 가능성. 척추가 골절될 가능성, 피가 물로 변할 가능성, 폐가 산소를 거부할 가능성, 생체전기가 번개가 될 가능성.”
이연우의 읊조림에 주사위가 신나서 몸을 던졌다. 위이잉, 회전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세게 구르며, 짧은 시간에 결과를 냈다.
꽝과 실패와 성공이 뒤섞인 결과. 몇 가닥의 실타래가 가능성을 구현하며 회장을 덮친다.
회장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방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뱉었다.
- 이연우를 죽여주십시오.
방어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황금빛이 물결이 되어 회장의 정수리부터 흘러내렸다. 회장이 평소 황금을 바쳐가며 준비한 보험과 방어가 바로바로 그를 되돌렸다.
또한 회장의 공격은,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회장의 시선이 황금만능주의로 돌아갔다.
- 죽이기에는 부족하다고? 지금 얼마나 많은 황금을 바쳤는데….
이건 뭔가 이상하다. 주사위로 막은 것도 아니고, 부활한 것도 아니고, 황금이 부족하다고?
“난 안 죽습니다.”
이연우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주사위를 굴렸다.
자신은 아직 전능하지 못하다. 그저 절대성을 지녔을 뿐이다. 반드시 살아남는다는 절대적인 법칙.
회장은 그제야 깨달았다. 어마어마한 황금이 있어도 간섭하지 못하는 것. 숭배자의 지옥, 협회장의 아름다움, 황금만능주의의 거래. 그가 말했다.
- 주사위가 아니라 생존이었습니까?
“예. 그러니 의미 없는 싸움은 그만하고 협력해주십시오.”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날 전투라면, 최후의 승자는 죽지 않는 자 아니겠나. 이연우는 자신이 있었다.
회장은 피식 웃었다. 경계심이 한층 내려갔다.
- 참 쓸모없는 걸로 6레벨에 올랐군요. 6레벨은 원래 안 죽습니다.
협회장은 죽으면 세상이 되살린다. 지옥에는 죽음이 없고, 자신은 황금이 마르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 차라리 주사위였으면 위협적이었을 텐데.
“글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 판단에 이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생존본능으로 6레벨에 오른 덕에 자신은 자신으로 남았다.
예술가 협회장은 아름다움에 집착하여 작품을 수집하는 병에 걸렸고, 숭배자는 자신을 지옥에 가두었다. 누구보다 인간을 좋아하지만, 인간을 해치는 지옥을 만드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그의 지옥이다.
“난 당신처럼 손익에 집착하지는 않거든. 나는 여전히 나야.”
그 말이 회장의 정신을 긁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좁아졌다.
그도 이미 자신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많이 다름을 안다. 가끔 과거를 떠올릴 때면 낯선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 오염되더라도 황금만능주의를 쓰고, 클럽의 회장이 되었다면 충분히 이득이죠. 인간성을 잃더라도 말입니다.
그러고는 곧장 이연우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 그리고 당신이 진짜 오염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처음부터 이상개체였다는 소리입니다. 차라리 내가 더 인간답군요.
“난 인간자격증 있으니까 인간인데.”
방금 심장이 한 번 멈추면서 내구도가 떨어지긴 했어도, 아직은 인간이다.
- 진짜 인간은 그런 자격증 필요 없, 아니. 싸우는 중에 뭘 하는 건지.
잠깐 이연우의 말에 휘말렸던 회장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건 손해였다. 시간도, 황금도 의미없이 소모됐다.
그들이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대충 상대를 파악했으니, 이번에는 방향을 바꿨다. 죽지 않는 6레벨의 싸움.
- 공간 격리. 이차원 추방. 주사위 봉인. 정신 지배.
“봉인 저항. 그냥 저항. 설득. 회장을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 황금만능주의 강탈.”
회장은 이연우를 잠시나마 무력화하기 위해, 이연우는 회장을 치우고 황금만능주의를 이용하기 위해.
세상이 뒤틀리고 흔들린다.
공간이 네모난 상자처럼 닫히고, 이연우가 이차원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가 하면, 검은 실타래가 봉인을 걷어내고, 실패하고 성공하여 뻗어나간 가능성은 빌딩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이연우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밀리는데.’
전시 태세에 들어간 클럽은 충분한 황금을 바탕으로 모든 간섭을 떨쳐냈다. 반대로 이연우의 생존본능은 둔했고, 주사위는 무작위의 결과를 내놓아 출력이 떨어졌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오히려 세계 개변 장치만 완전히 망가뜨린 꼴이다.
이연우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황금빛의 파도를 견디기가 힘들다. 어찌어찌 치명적인 간섭은 저항하고 있지만, 조금씩 기세를 잃었다.
- 방어하기 바쁘군요. 내가 당신을 어쩔 수는 없지만, 당신도 날 어쩔 수는 없어요. 이만 돌아가세요. 원래 세상 같은 건 포기하고.
거기에 회장이 넌지시 제안을 던졌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지금 세상에서도 그는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정신 지배나 주사위 봉인 같은 위험을 무릅쓰며 굳이 이전 세상을 되돌릴 이유는 없다.
생각이 스친다.
‘포기할까?’
이연우가 걸음을 멈췄다. 포기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회장도 공격을 멈추고, 이연우의 판단을 기다렸다.
- 회사가 무너지면 우리들의 세상이 옵니다. 죽지 않는 6레벨끼리 싸우겠습니까? 당신은 그저 편안하게 살면 됩니다. 사람들도 변함 없이 살아갈 거고요.
“…아니야.”
이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주사위가 선명하게 비치고, 둔한 생존본능이 은은히 감돌고 있었으나, 이연우의 생각이 가장 강렬하게 빛났다.
“내가 착각했어. 원래 세상이 살기 좋아서 돌아가고 싶다고. 그게 아니야.”
생존은 이유가 될 수 없다. 생존본능으로 6레벨에 오른 이상 어떤 세상에서 살든 죽지 않는다.
그가 원래 세상을 원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여기는 내 세상이 아니야. 나는 내 세상을, 내가 살아왔던 세상을 원해.”
이상한 장치가 간섭하지 않은, 오직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남아 있는 세상. 그가 겪은 경험과 만난 사람. 그 과거 또한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자신을 조작하는 간섭에 저항하듯 자신의 과거를 바꾼 개변도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한다.
회장이 한숨을 쉬었다.
- 글쎄. 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는데. 시간 낭비, 황금 낭비. 제발 낭비 좀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능력은 없지. 하지만 잠재력은 있어.”
이연우가 웃으며 에코백에서 권총을 꺼냈다. 클럽의 사제 권총이다. 그 권총을 자기 머리에 겨누었다.
떠올리는 것은 미래의 자신.
이상기후로 멸망한 세상을 살아가며 이상기후의 해결책을 홀로 고민하던 자신. 방주를 찾아 헤매던 자신.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이상기후를 없던 일로 만들 능력이 있던 자신.
인류의 멸망과 정을 붙인 사람들의 죽음마저 자신의 과거로 받아들인 그가 이해가 갔다.
이연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필요한 건 미래의 나 수준으로 강한 힘.’
공시생 생활만 4년을 하고, 현장에서 살기에 급급했던 자신이 무슨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를 다루겠나. 손만 대면 망가뜨리겠지.
오직 전능의 힘만이 해결책이었으며.
그 힘을 얻는 방법 또한 이미 알았다.
‘생존본능. 전쟁과 멸망을 없던 일로 만들자.’
이연우가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에 붉은 꽃이 피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인간자격증이 벚꽃처럼 흩날린다.
***
- …자살? 진짜 정신에 문제가 있습니까?
뒤로 쓰러진 이연우를 보며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잘된 일이다. 분명 부활하겠지만, 그거야 봉인하면 될 일이다.
스물스물 이연우의 몸 위로 실타래가 뻗어 나왔다. 볼 것도 없이 부활 판정이었다.
회장이 대충 손을 저었다.
- 봉인해주십시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회장이 멈칫,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알 수 없는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오른다. 아니, 세상조차 불안하게 흔들렸다. 황금만능주의의 영역과 세상의 경계가 뭉개지고, 섞이고,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한다.
생존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살아가는 미래를 만들었다.
주사위의 부활 판정.
대성공!
검은 실타래가 수술하듯 이연우의 상처를 봉합했다. 파괴된 신체 부위를 가능성과 확률의 실타래로 대체하였으며, 이연우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코와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쓴 듯, 삐죽삐죽 솟아난 실타래가 일렁였다. 이연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소를 띤 입가만이 인간의 얼굴로 존재했다.
더듬더듬 얼굴을 매만진 이연우가 크게 웃었다.
“진작에 이럴걸.”
확률적인 가능성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손만 뻗으면 닿았다. 이연우가 가볍게 손을 휘적이면, 손아귀에 실타래가 잡혔다.
무너지던 영역이 복구되었다. 그런 가능성을 잡아서 구현했다.
“일단 인간자격증부터. 아. 필요 없네.”
백 개의 인간자격증을 생성하려던 이연우가 툭, 실타래를 밀어내었다.
스스로 인간을 포기해서 그럴까. 이연우의 생존은 인류의 생존으로 나아갔으며, 그 생존본능이 주사위의 침식을 적절하게 견제했다.
주사위가 폭주하면 인류가 망한다고, 자아를 지키고 있다. 거기에 주사위가 그의 몸이 되어버려, 원래 자기 감정 다루듯 조절할 수 있었고.
그쯤에서 이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회장은 검은 실타래로 만들어진 가면 같은 눈가를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주사위 6레벨?
“예. 그렇게 됐습니다. 이제 당신이 협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다. 이연우가 오므린 손을 허공에 휘저어 확률의 실타래를 건져냈다.
세계 개변 장치가 복구될 가능성이 아니다. 개변을 취소할 가능성이다.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가능성이다.
- 멈추십시오!
황금빛이 몰려온다. 이연우의 행동을 취소하기 위한 권능이다. 이연우는 느긋하게 반대쪽 손을 쥐었다.
“10초 동안 모든 간섭을 막아낼 가능성.”
전쟁으로 멸망이 닥쳐온 세상. 생존본능이 힘을 더했다. 황금빛이 벽에 부딪혀 멈췄다. 그 10초면 충분했다.
이연우가 주먹을 쥐었다.
세계가 다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