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복종-3화 (3/23)

3. 그 남자, 에이든 헬렌베르크

포근한 빛이 레인디아의 몸을 감쌌다.

그녀가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굽이치는 금발이 뺨에 닿았다. 간지러워. 하지만 싫지는 않아. 레인디아는 멍하니 생각했다.

“어머나.”

꽃봉오리가 탁 피어나듯 싱그러운 탄성이 들렸다.

“일어났니, 아가?”

그 여자다.

이따금 꿈속에 나와 아이를 안은 채 난로 앞에 앉아 있던 금발의 여인. 레인디아는 살며시 팔을 들었다. 작은 손바닥에 번데기 같은 손가락 다섯 개가 오밀조밀 붙어 있었다. 뭐지? 이 작은 손은? 설마 내 손인가? 레인디아는 손을 몇 번 쥐락펴락한 끝에 깨달았다.

세상에. 나, 이 여자의 아이가 됐어.

눈처럼 새하얀 보자기가 레인디아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옳지, 옳지.”

여자는 우쭈쭈 어르는 소리를 내며 흔들의자를 기울였다.

여자가 레인디아의 손바닥 위에 검지를 올려놨다. 레인디아가 살그머니 손가락을 쥐자, 여자는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손가락이 신기해요?”

속살대는 목소리는 코끝이 시큰거릴 만큼 다정했다. 레인디아는 이 여자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이 따스한 공간에 남아 있고 싶었다.

이 여인의 아기가 되어서.

* * *

“엄마…….”

레인디아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하얀 커튼이 달린 캐노피 침대였다. 바닥에 쓸려 상처가 난 오른쪽 뺨과 손등엔 약재를 바른 거즈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 침대 옆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그녀의 잠꼬대를 지켜봤다. 레인디아를 기절시켜 데려온 남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맣게 물들인 사내.

그러나 머플러 밖으로 드러난 목덜미는 창백했고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도 핏기가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흘러나오는 차분한 숨소리만이 그가 살아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알려줬다.

에이든 헬렌베르크.

그는 황손이자 황제의 조카였다. 그리고 황제에겐 자식이 없었다.

즉, 에이든은 오늘날 계승 서열이 가장 높은 황족이었다.

“엄마아…….”

또 저 소리.

에이든이 스윽 의자에서 일어났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기에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젖혔다. 마디가 두꺼운 손가락이 짙은 흑발을 갈라 넘겼다. 제국에서 보기 힘든 흑발은 어미에게 물려받은 색이었다. 빛을 받으면 보랏빛으로 은은히 빛나 신비롭고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얇은 눈꺼풀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붉은 안광은 보는 이를 단숨에 압도시킬 만큼 강렬했다.

풀썩.

에이든이 침대에 걸터앉으니 매트가 흔들렸다. 반동으로 레인디아의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으음…….”

머리카락이 속눈썹에 달라붙어 불편했는지 감긴 눈이 움찔거렸다. 에이든은 슬그머니 팔을 들었다.

휙.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털어내자 장밋빛으로 물든 뺨이 드러났다. 에이든은 찬찬히 레인디아를 눈으로 훑었다. 전체적으로 가느다란 인상이었다.

턱선도, 목덜미도, 손목도.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다행히 파랗게 질려 있던 입술은 체온이 돌아와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솔직히 사내치곤 과하게 반반한 외모였다.

문득, 그 여자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 속에서 흐릿해지던 여인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닮았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에이든은 손을 거둬들였다. 다소 조급했던 탓일까, 거즈가 붙은 뺨에 손끝이 스쳤다.

“으읏.”

작은 통증이 일자 레인디아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얼마 안 가 머루처럼 까만 눈동자가 에이든을 향했다. 레인디아의 눈은 마치 숲속을 뛰어다니다 사냥꾼을 발견한 사슴의 눈동자 같았다.

“아……!”

레인디아는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불을 움켜쥐어 가슴을 가렸다. 여긴 어디지? 저 남자는 누구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그저 본능적으로 뒤로 도망쳤다.

“윽!”

그러나 침대 헤드에 등이 막혀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저게 도망간 거라니. 팔만 뻗으면 잡힐 거리였다.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던 에이든은 어디 시범을 보여주겠단 듯, 레인디아를 향해 팔을 뻗었다.

“도망은 다 갔어?”

“흣!”

커다란 손이 저를 향해 뻗쳐오자 레인디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벌벌 떠는 모습에 에이든은 인상을 구겼다. 그는 허공에서 손을 쥐락펴락하다 팔을 거둬들였다. 누가 보면 목이라도 비틀어 죽이는 줄 알겠군. 죽일 생각은 없는데.

‘아직은.’

에이든은 천천히 침대에서 물러나더니 환기하듯 운을 뗐다.

“자면서 잠꼬대를 심하게 하던데.”

“……?”

레인디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멀찍이 떨어져 의자에 등을 기대앉는 에이든의 행동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또,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저를 구해 준 남자였다.

“당신은……, 어제 절 구해 준…….”

“감사의 인사는 됐어.”

에이든이 단칼에 레인디아의 말을 잘랐다.

레인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슴이 답답해 문지르는 척 붕대를 확인했다. 다행히 붕대는 멀쩡했다. 그대로 슬며시 주변을 둘러봤다. 어딘진 몰라도 마차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인 건 확실했다.

천장에는 불이 붙지 않았음에도 화려하게 반짝이는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호두나무 원목으로 만든 값비싼 가구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또 그녀는 사방에 정교하게 조각된 기둥이 달린 캐노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 정도 크기라면 주인의 침실일까?’

손님용 방으론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레인디아는 눈앞의 남자가 제게 침대를 양보했을지도 모른단 결론에 도달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너, 사람 말을 집중해서 안 듣는구나? 감사의 인사는 됐다잖아.”

에이든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레인디아는 흡, 입을 다물었다.

삐딱한 미소와 결을 함께하는 삐딱한 말투였다. 남자는 무언가를 집요하게 추궁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인디아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그때였다.

“먹어.”

“……네?”

“배고파서 기절하면 곤란해. 아직 물을 게 남았거든.”

에이든은 탁자 위에 올려둔 그릇을 들어 레인디아에게 건넸다. 그릇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레인디아는 슬쩍 안을 봤다. 숭덩숭덩 썬 고기가 들어 있는 스튜였다. 스튜라기보단 개밥에 가까운 생김새였지만. 게다가 스푼도 포크도 없었다. 심지어 그릇은 이가 나간 상태였다. 남자는 마치 들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처럼 행동했다.

“독은 없어.”

에이든은 고개를 까딱였다.

레인디아는 마지못해 그릇을 받아들었다. 사실 아까부터 그녀의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법 오랫동안 의식을 잃은 듯했다. 또 한참 숲을 뛰어다녀 체력이 바닥이었다.

“으음, 음…….”

레인디아는 그릇 안을 보다가 결심한 듯 꿀꺽꿀꺽 스튜를 삼켰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얇은 목을 주시했다.

사내치곤 가느다랗고 매끄러웠다. 에이든의 경우 복숭아씨를 삼킨 것처럼 큼지막한 목울대가 머플러에 가려져 있었다. 반면 눈앞의 녀석은 고깃덩이를 삼킬 때조차 목선이 매끈했다. 에이든은 손가락으로 톡톡 뺨을 두드리며 레인디아를 관찰했다. 레인디아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바빠 점점 가늘어지는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

‘맛, 없어.’

레인디아는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겨우 참았다.

탁한 국물은 전혀 간이 되어 있지 않았고 야채는 설익었다. 다행히 고기는 한 번 구운 걸 넣었는지 피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고기와 야채, 국물이 전부 따로 놀았다. 극지대에서 오로지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식량 같았다.

“콜록, 콜록……!”

스튜를 꾸역꾸역 삼키던 레인디아는 그만 사레가 들려 심하게 몸을 들썩였다.

“추워?”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네. 레인디아를 뚫어지게 보던 에이든이 훌쩍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난로 앞으로 다가가 선반에 올려져 있던 성냥갑을 들었다. 성냥 하나를 꺼내 갑에 탁탁 두드리자 치익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불붙은 성냥이 휙 난로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연기가 먼지를 잡아먹으며 번지기 시작했다.

레인디아는 스튜를 먹는 척 남자를 바라봤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레들린 기침과 감기에 걸린 기침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텐데, 저 남자는 단순히 기침하니 몸이 추운 것이다, 라고 생각해 행동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사람과 생활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타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어쨌거나 평이한 성격이 아님은 확실했다.

“자, 불도 피워줬어.”

에이든이 빙그르 몸을 돌리자 레인디아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벅거리는 군화 소리가 가까워졌다.

“배도 채웠고.”

에이든이 살짝 몸을 숙여 레인디아의 손에서 빈 그릇을 가져갔다. 그는 그릇을 등 뒤로 던져버렸다. 팅, 팅. 팅그르르르. 저 멀리 날아간 그릇이 핑그르르 돌다가 착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카펫……, 청소하기 힘들 텐데.’

레인디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카펫으로 옮겨갔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다친 곳은?”

“……네?”

그제야 레인디아는 시선을 바로하며 살그머니 뺨을 만졌다. 뺨에 거즈가 붙어 있었다. 자는 동안 누군가 제 상처를 치료해 준 게 틀림없었다. 저 남자일까? 아니면, 주치의인지도 몰랐다.

“……그게, 잊고 있었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

“그만.”

레인디아는 버릇처럼 숙이던 고개를 멈칫했다.

남자를 원망할 순 없었다. 어쨌든 그는 생명의 은인이었고 저는 멋대로 기절해서 신세를 지고 있는 식객이었다.

‘내가 하필 정신을 잃어서 집까지 데려와 주신 거겠지.’

레인디아는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절하면 곤란하다는 에이든의 말을 제멋대로 오해한 레인디아는 에이든이 자신을 납치한 장본인임을 깨닫지 못했다.

“저, 혹시……, 의사가 저를 치료해 준 건가요?”

레인디아는 속내를 숨기며 물었다.

혹여 의사가 제 몸 상태를 확인하다 여자란 사실이 발각됐을지도 몰랐으니까. 레인디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려 애썼다.

그런데, 에이든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다가,

“하!”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서 웃었다. 짧고, 차갑고, 경멸이 가득한 웃음소리였다. 그 짧은 웃음은 마치 내가 너 같은 걸 걱정해서 의사를 불렀겠느냐 되묻는 듯했다.

레인디아의 시선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맞아. 나 같은 게 뭐라고. 주인을 따라다니며 모시는 종자 따위에게. 심지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주인에게 버려지기까지 했다. 레인디아는 애꿎은 손톱 끝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아가씨는 무사히 도착하셨을까? 안전한 곳에 계시겠지?’

레인디아의 눈빛이 음울하게 변했다.

“그딴 표정 짓지 마.”

“……네?”

에이든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안 드는 눈빛이었다. 도무지 그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앞에선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죄인은 맞지. 레인디아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거슬려.’

에이든은 시종일관 눈치를 살피는 레인디아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그레제 백작가의 종자라기에 기껏 살려서 데려왔더니…….’

제 눈치를 보지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짜증이 났겠지만. 어쨌거나 에이든은 눈앞에 앉은 녀석의 모든 게 거슬렸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라든가, 울먹이는 눈망울이라든가, 또 기절시켜서 데려올 땐 계집이란 착각이 들 정도로 가벼웠던 게 생각나 그 부분도 거슬렸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 여자를 닮은 게 거슬려.’

에이든은 손끝으로 무릎을 탁탁 두드렸다. 조금 더 고민하던 그는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처 치료는 내가 했어. 이곳엔 너와 나뿐이야. 의사도 다른 사용인도 없지.”

저 남자와 자신뿐이라고?

침실 크기로 보아선 대저택인 듯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가구들 위에 뽀얀 먼지가 얇게 깔려 있었다. 문득, 레인디아는 방치된 오두막이 떠올랐다.

“무단점거는 아니니 안심해.”

남자가 허를 찔렀다.

어떻게 내가 하는 생각을 알아낸 거지. 표정에서 너무 티가 났을까?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한쪽 뺨을 문질렀다. 백작가의 하녀로 근무하며 얼굴에서 감정을 지우는 일은 익숙했다. 유일하게 자신 있는 일이기도 했다.

“독심술도 못 하니 안심하고.”

“!”

레인디아가 휙 고개를 들었다. 토끼가 쫑긋 귀를 세우는 듯한 모양새였다. 에이든은 싱겁게 웃었다. 그러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

에이든은 깍지를 낀 채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도 그의 몸은 더욱 거대해 보였다.

“그러니 제대로 대답해 줘야겠어. 네가 은혜를 아는 인간이라면. 난 지금 굉장히 과분하게 널 보살펴주고 있거든. 대답을 듣기 위해서 말이지.”

“무슨 대답을…, 말인가요?”

“그레제 백작가의 종자라고?”

레인디아의 어깨가 적잖이 들썩였다.

이미 자신을 그레제 백작가의 종자라 소개했기 때문에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다음에 이어질 질문이었다. 이 남자는 백작가와 어떤 관계인 걸까? 악연은 아니겠지? 부디 아니길 바랐다.

“네, 저는 그레제 백작가의 종자입니다.”

레인디아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을 대비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은 전혀 생뚱맞은 것이었다.

“너, 나 못 알아보겠어?”

“네?”

에이든이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 손으로 매트를 꾹 짚은 채 레인디아에게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 얼굴.”

“……?”

“자세히 봐봐.”

에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양한 각도로 얼굴을 보여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저, 자꾸 움직이시면…….”

“아, 그래. 일단 정면에서.”

에이든이 정면에 얼굴을 고정했다. 커다란 몸을 굽혀 친절히 레인디아와 눈높이를 맞혀주기까지 했다.

레인디아가 남자의 얼굴을 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범죄자라 해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였고, 그런 식의 살인에 익숙한 사내 같았다. 거기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이러다 덥석 제 목덜미를 잡고 윽박지르는 건 아닐까 겁이 났다.

“…….”

“…….”

뜻밖에도 에이든은 유순한 양처럼 레인디아를 기다렸다.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에이든의 눈은 시원하게 트여 있었고 콧날은 조각상처럼 날렵했다. 짙은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눈썹도 굵고 진했다. 턱선은 무척이나 다부졌다. 체구도 6.2피트(약 188cm)는 되어 보여서 제국에서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남성상에 한없이 가까운 이미지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리 공예품처럼 섬세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사내였다. 살짝 아래로 처진 눈꺼풀을 따라 촘촘하게 박힌 속눈썹이라든가,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선은 여인 못지않게 유려했다. 그리고 저를 응시하는 붉은 눈이 때때로 아이처럼 반짝일 땐, 왠지 모르게 이 남자를 꼭 안아주고 싶은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관찰하던 레인디아는 그가 무척이나 미남이란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또 그렇게 자각함과 동시에 계속 바라보기가 힘들어졌다. 레인디아는 황급히 고개를 떨궜다. 자꾸만 입 안이 말라서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혓바닥을 문댔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역시 모르겠어요. 이곳은 처음인지라 노스랜드의 귀족분들은 알지 못해요…….”

“그래.”

에이든은 순순히 물러났다.

몸을 물린 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작가의 영애와 이곳에 온 건가? 딸 하나, 맞지?”

이제야 올 것이 왔다. 레인디아는 주먹을 꽉 다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되물었다.

“그레제 백작가에 원한이 있으신 분인가요?”

“뭐?”

듣는 사람을 절로 위축되게 만드는 날카로운 말투였다. 그러나 레인디아 역시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받아쳤다.

“그, 그렇다면, 아가씨에 대해선 알려드릴 수 없어요.”

에이든이 코웃음 쳤다. 싱거운 웃음소리였으나 제법 화가 난 건지 그의 이마와 목덜미에 핏발이 툭툭 불거졌다. 분위기로 압도된다는 게 무엇인지 이 남자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때,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원한이 있었다면 마차가 멈췄을 때 죽여버렸겠지. 아니면 네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보내서 그 집안 인간들을 평생 불면증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어. 그러길 바라는 건가?”

거대한 그림자가 레인디아의 여체에 스며들었다.

“흣……!”

에이든은 팔을 뻗어 레인디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힘이 실려 있진 않았다. 그저 손끝을 목덜미에 살짝 얹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목이 꽉 졸리는 것처럼 숨이 찼다.

“마지막 질문이야. 나, 인내심이 그렇게 길지 않거든. 그러니 제대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에이든은 엄지로 레인디아의 목을 살살 쓰다듬었다.

전에 없을 만큼 나긋나긋한 음성은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 같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면 목선을 따라 부유하는 엄지가 송곳으로 변해 살가죽을 꿰뚫을 것 같았다. 이 남자는 반드시 그럴 거라고, 레인디아의 본능이 속삭였다.

“그레제 백작에게 다른 딸이 있었나? 날 보고 대답해.”

“없어요.”

레인디아는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백작님의 딸은 벨리타 아가씨 한 분뿐이십니다.”

레인디아의 두 눈은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예상 밖의 당당한 태도였다. 에이든은 겉으론 티를 내지 않았으나 속으로 잠시 동요했다.

‘그렇단 말이지…….’

에이든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 여자를 찾아낼 단서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실패인가. 아니,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슬슬 수프에 넣은 약효가 돌 때였다.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 심호흡을 하다 느릿하게 눈을 떴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레인디아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깨어난 사람처럼 개운해 보였다. 그러나 더욱 깊은 안쪽에서 숨겨지지 않는 슬픔이 묻어났다.

“좋아.”

남자는 믿는단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목덜미에 붙어 있던 손가락이 하나둘 떨어졌다. 에이든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레인디아는 멀어지는 에이든의 등에 대고 다급하게 물었다.

“저, 날이 밝는 대로 돌아가도 될까요? 계속 신세 지는 것도 죄송해서…….”

“좀 더 쉬지그래?”

에이든은 침대 기둥에 손을 얹고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씩 입꼬리를 올렸다. 얄궂으면서도 어쩐지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인간의 웃음을 흉내 내는 듯한 기묘한 감각.

“그리고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붉은 눈동자가 레인디아의 몸을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시선이 닿은 곳이 움찔움찔 떨렸다. 레인디아는 올가미에라도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폭풍전야의 고요.

“너, 내가 기절시킨 거야.”

그 고요한 침묵 위로 소리 없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 * *

휘오오오.

창밖에서 눈보라가 요동쳤다.

“으음…….”

그 소리에 레인디아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은 울렁거렸다. 레인디아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비척대는 걸음으로 창가에 섰다. 세찬 바람이 창틀을 흔들었다. 침실은 고층에 있는 듯했다. 바람이 굉장해 창문으로 도망치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낮인가? 아니면 밤? 저녁?’

눈보라 탓에 낮과 밤을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침실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괘종시계는 시계추가 고장이 나서 움직이지 않았다. 고쳐볼까 했으나 수북이 쌓인 먼지를 보고 일찌감치 포기했다.

레인디아는 창틀에 올려둔 손을 떨어트리며 뒤로 물러났다.

‘너, 내가 기절시킨 거야.’

남자는 이 한마디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 레인디아는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여전히 의식이 몽롱했다. 수면제를 먹고 일어난 사람처럼.

이번에도 그가 기절시킨 것일까?

레인디아는 슥 몸을 돌려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봤다.

‘문을 열고 도망칠 순 없을까?’

그러나 감히 열어볼 엄두가 안 났다. 문밖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까. 예기치 못한 위험이 들이닥치는 일은 익숙했다. 그러나 제 발로 위험을 향해 달려가는 성미는 아니었다. 동시에, 만약 문이 잠겨 있단 사실을 알면 크게 절망할 것 같았다.

‘대체 왜 날…….’

레인디아는 침대 아래에 앉아 버릇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바람에 덜컹대는 창문과 굳게 닫힌 문을 번갈아 보며 남자가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적막이 내려앉은 방 안엔 창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와 그녀의 숨소리만이 전부였다.

독방에 갇힌 죄수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다. 1초가 1분 같고 10분이 1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레인디아는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두려운 상황이 오면 최대한 몸을 작게 구기곤 했다. 이런다고 타인의 눈에 안 보일 리 없는데도. 보잘것없는 두 팔로 어깨를 감싸 몸을 보호하는 행동이 무의미하단 것쯤은 잘 알지만, 뜨거운 물건을 만지면 손을 떼는 것처럼 일종의 반사 작용이었다. 쭈그려 앉은 몸 안에서 콩콩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타인의 다정함, 온기, 그런 것들은 제게 사치였다.

아니, 감히 바라선 안 되는 것이었으니…….

이렇게라도 스스로 다독이는 수밖에.

철그럭. 덜컹.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에서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디아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역시 잠겨 있었구나. 문을 열어보지 않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와선 달라질 것도 없었다. 레인디아는 곧게 뻗어 있던 발가락까지 안쪽으로 오므렸다.

“왜 바닥에 앉아 있지?”

남자였다. 그는 순수한 의문을 품고 물었다.

레인디아는 입술을 빠끔 열었다가 대답이 길어질 것 같아 꾹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도 대답을 원하고 한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에이든은 개의치 않았다.

“왜 장작을 더 넣지 않았어?”

“……네?”

“추워했잖아.”

에이든은 식어가는 난로를 보더니 옆에 쌓아둔 장작을 박살 내 집어넣었다. 죽어가던 불씨가 장작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며 활활 불타올랐다. 레인디아는 그 불꽃을 보다 물었다.

“……왜 저를 또 기절시킨 건가요?”

“응? 아아.”

에이든은 작게 탄식했다.

“독이 없다고 했지 수면제를 안 넣었다 한 적은 없었어.”

“……그럴 수가.”

“어쨌든 난 거짓말은 안 했어.”

에이든은 뻔뻔한 낯짝을 하고 저벅저벅 레인디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슥 몸을 숙였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질문에 레인디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난롯불을 꺼버릴 수 있을 만큼 냉랭했다.

여자란 걸 눈치챈 것일까? 아니면 떠보는 걸까?

한편으론 남자에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중요한 건 레인디아였다. 남장은 이 상황에서 그녀를 지켜줄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낯선 남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여자란 걸 밝혀 좋을 게 없었다. 겁탈당할 뻔한 자신을 구해 줬지만, 이 사람 또한 결국 낯선 남자이지 않은가.

“……없어요. 저를 기절까지 시켜서 데려오신 건 안타깝지만, 정말로 더는 해드릴 말이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저를 보내주길 바랐다.

레인디아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에이든을 바라봤다.

“보내줘도 너는 못 나가.”

“어, 어째서요?”

레인디아가 당황해서 묻자 에이든이 창가를 턱짓했다.

“봐. 눈 때문에 길이 전부 막혔어. 나 또한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지. 말했잖아. 우리 둘뿐이라고.”

아. 레인디아는 작게 탄식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세찬 눈보라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분간도 안 갈 정도였으니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이 남자는 이런 곳에서 혼자 지내는 것일까? 사용인도 없이 말이다.

“……왜 이런 곳에 혼자 머무시는 거죠?”

남자는 살그머니 시선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다시 눈을 굴려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계획이 있어서 잠시 머물고 있어.”

계획이라면……. 사냥철. 그래, 사냥철이다. 남자는 사냥을 위해 별장에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제야 조금씩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귀족들은 헌팅 시즌이 오면 타지에 소유한 사냥터를 방문하곤 했다. 그레제 백작도 그러했으니까.

마침, 지금이 딱 사냥철이었다.

레인디아는 이 대화를 이어 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고립된 장소에 단둘이 있어도 믿을 만한 자인지, 안전한 사람인지, 확신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사교 시즌엔 수도로 가시겠네요?”

그녀가 퍽 친밀한 어조로 물었다.

“떠보는 건가?”

그러나 돌아오는 질문에 턱 말문이 막혔다. 남자는 기침 소리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이런 방면으론 짐승처럼 알아채는 재주가 있었다.

“재밌네.”

남자는 전혀 재미 있지 않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딴 곳에 갈 거 같아?”

이어지는 목소리엔 노골적인 경멸이 가득했다.

어쩌면 이 남자는 벨리타처럼 수도에 악연이 있을지도 모른단 예감이 들었다. 레인디아의 본능이 다가올 위험을 경고했다. 그리고 레인디아는 그런 불안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최악의 상황은 아닐 거라고, 감히 희망을 품은 것이다.

“실례지만, 그렇다면 혹시…… 군인이신가요?”

레인디아가 힐끗 남자의 부츠를 바라봤다.

“부츠가 군화처럼 생겨서…….”

“눈썰미가 좋네. 맞아.”

에이든은 한쪽 발을 살짝 흔들었다.

구식 군화였다. 오늘날 제국군은 이것과 다른 디자인의 신식 군화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레인디아 같은 일반인의 눈엔 다 같은 군화로 보였다. 제국군이란 사실에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안심했다.

레인디아의 표정을 보던 에이든은 삐딱하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탈영병이지만.”

레인디아의 얼굴에서 금세 핏기가 가셨다.

또다시 잔뜩 고민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눈빛.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 레인디아가 겁에 질리는 만큼 에이든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째서일까?

저토록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면의 어두운 가학심이 눈을 떴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아니, ‘그’겠지. 이 녀석은 남자니까. 그 새삼스러운 진실을 다시 상기한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울컥 욕지기가 스몄다.

눈앞에 처음으로 그 여자를 닮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남자라니.

에이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남자, 일까?

애초에 이 녀석이 하는 말은 어디부터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르겠다. 저 머루 같은 눈동자 안쪽에 비밀을 잔뜩 묻어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눈알을 파낼 수도 없고.

‘백작님의 딸은 벨리타 아가씨 한 분뿐이십니다.’

처음으로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할 땐 눈빛이며 목소리의 울림부터가 달랐다. 그 대답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녀석은 천의 얼굴을 가진 거짓말쟁이일 테지.

전장에서의 성격대로라면 지금 당장 대가리를 바닥에 처박아 이빨 몇 개를 부러뜨린 다음 난로로 끌고 갔을 것이다. 그러곤 불에 얼굴을 지지기 전에 사실만을 말하라며 서늘히 읊조렸겠지. 아니면 긴 시간에 걸쳐 고문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슬리면서도 또 한편으론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침대에서 덜덜 몸을 떨어대는 모습이 가여워 눈보라 치는 들판으로 나가 짐승을 잡아 왔다. 그것으로 손수 음식을 만들어 먹였다. 또 기침 소리에 괜히 신경이 쓰여 불을 피워주기까지 했다.

괴롭히는 재미는 있지만 죽이고 싶진 않았다.

역시, 그 여자를 닮아서겠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이런 생김새이지 않을까. 그러나 남자란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살해 욕구가 울컥울컥 샘솟았다.

갖지 못할 것은 철저히 부숴버리는 쪽이 성미에 맞았다. 누구도 차지하지 못하게.

그 순간 에이든은 오른쪽 발목이 저릿했다. 단검을 숨긴 자리였다. 빼내기 좋은 위치에 자리한 단검과, 찌르기 좋게 생긴 새하얀 목덜미.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에이든의 눈에는 레인디아의 하얀 목이 또 다른 검집으로 보였다. 옮겨 꽂는다면 붉은 피가 분수처럼 콸콸 흘러넘치겠지. 이 녀석의 체격을 미루어 봤을 때 5초도 넘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질 것이다. 거의 즉사나 다름없었다.

“4년 전쟁에서 탈영하신 건가요?”

레인디아의 질문에 에이든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발목에 감추어둔 단검의 존재를 잊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무감하게 레인디아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래, 4년 전쟁에서.”

4년 전쟁.

5년 전, 샤이룬 왕국이 신성 솔레디온 제국의 동쪽 땅을 침략하며 시작된 전쟁이었다. 황제 베넨돌은 적의 군사력을 얕잡아보고 소군을 파병했다. 샤이룬 군의 화력은 제국의 예상을 크게 상회했다. 그 결과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수많은 제국군이 목숨을 잃었다. 황태자 제레미마저 전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사인은 실종사(失踪死)였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던 것이다. 베넨돌은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지병이 악화되어 병상에 누웠고, 그의 아내 카타리나 황후가 섭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4년째 되던 해.

기세 좋게 진군하던 샤이룬 왕국은 동부 최전선인 팔라크리갈 전투에서 대패(大敗)했다. 방어전을 진두지휘한 것은 황제의 조카, 에이든 헬렌베르크였다. 전장을 누비는 에이든의 모습은 지옥 불을 뚫고 나온 악귀처럼 묘사되곤 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적을 도륙했고, 잔혹한 고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나 에이든은 포획한 적군을 고문하는 데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게 이중 첩자를 만들어 내 마침내 샤이룬 왕국을 내부에서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다. 샤이룬 왕국은 국왕이 물러남과 동시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어느 날이었다.

에이든의 활약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그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전투가 있던 동부는 황폐해졌으나 수도 하이락을 비롯한 나머지 영토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최전선에서 목숨을 다해 싸워준 군인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들 덕에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 밤마다 편안히 잠들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눈앞에 4년 전쟁의 탈영병이라 말하는 사내가 있었다. 레인디아는 감히 그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 수 없었다.

“……자진 입대한 용기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반면, 저는 당시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걸요. 겁쟁이처럼요.”

레인디아는 우물쭈물 말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빤히 바라봤다. 겁쟁이라. 저런 가는 손목으론 목검도 제대로 못 휘두르겠지. 그리고 작은 손바닥. 뭘 제대로 쥘 수나 있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그러나 목소리에서 어렴풋이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저를 떠보는 것도 호의적인 가면을 쓰고 친밀감을 쌓으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에이든의 생애에는 이토록 조건 없는 이해와 관용을 보여준 사람이 딱 한 명 존재했다.

그 여자도 그랬다.

어린 저를 감싸 안은 채 어둠 속을 달리던 여자.

그때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면, 훗날 그 여자가 날 찾아왔을까? 어른들의 말처럼 두려움이 만들어 낸 환상 속의 존재로 치부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왠지 그 여자를 닮은 이 녀석에겐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고 싶었다.

“에이든.”

에이든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게 내 이름이다.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지만.”

그리고 너 역시 내가 애타게 찾던 그 여자는 아니겠지만.

에이든은 오랫동안 저를 억눌러온 인생의 짐 하나를 던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반대로 그 여자를 향한 그리움은 더욱 짙어졌다. 에이든의 살벌한 표정은 금세 차분한 빛으로 바뀌었다. 반면, 레인디아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이든. 에이든 헬렌베르크.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그는 탈영병이 아니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탈영병으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감히 그의 행동에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신성 솔레디온 제국의 영웅이 아니던가.

‘에이든 님이 수도로 귀환한다고? 눈이 멀 정도로 미남이라는데 꼭 봐야겠어!’

레인디아도 벨리타를 따라 승전식을 보러 간 기억이 있다.

그러나 행렬 어디에도 기다리던 영웅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에이든은 팔라크리갈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자신의 첩자가 왕국을 분열시킨 사실을 확인한 뒤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화, 황족을 몰라뵈어서, 저는……!”

레인디아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에 에이든은 인상을 구겼다. 짧은 시간 보아온 것 중 가장 놀란 표정, 아니, 송구스럽고 죄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는 모습이었다. 그 근원에는 깊은 두려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레인디아는 정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한 번도 팔라크리갈 전투의 영웅을 본 적이 없지만, 틀림없이 눈앞의 남자와 똑같이 생겼을 것이다. 제국에서 보기 힘든 흑발과 핏물에 담근 듯한 붉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는 하나뿐이다.

왜 이제야 알아챈 걸까. 한편으론 어쩔 수 없었다. 살면서 그런 대단한 남자를 만나는 게 쉽지도 않거니와, 이런 오지에 있으리라곤 누구도 예상 못 했겠지.

팔라크리갈 전투의 영웅. 황제의 조카. 에이든 헬렌베르크.

이 모든 게 뒤섞여 눈앞의 남자를 저 높은 곳까지 치켜세웠다. 황족의 한마디면 하인의 작은 실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주인의 평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벨리타가 황후의 눈 밖에 나서 북부로 도망쳐야 했듯이.

레인디아는 겁이 났다. 이번엔 어머니의 죄가 아닌, 자신이 지은 죄로 백작가의 명예가 실추될지도 몰랐다.

막아야 해. 그런 일만은…….

“말하지 말 걸 그랬군.”

에이든이 살며시 레인디아의 턱을 잡아 올렸다.

“난 네가 겁먹고 떠는 표정이 좋았던 거지 이렇게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을 원한 건 아니거든. 벙어리가 되면 곤란해.”

에이든의 엄지가 레인디아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입술이 살포시 벌어지며 오밀조밀 잇몸에 박혀 있는 새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그래도, 이젠 좀 순순히 말하려나? 제국인이라면 황족의 명령엔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지 않겠어?”

될 수 있으면 꺼내지 않으려 한 패였지만 결국 사용하고 말았다. 하여간 이 녀석을 잡아 온 후로는 마음에 안 드는 일투성이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말이다. 에이든은 엄지에 힘을 실어 아랫입술을 꾹 짓눌렀다. 얇아 보이는 입술은 막상 만져보니 두께 감이 생생했다. 좌우로 슥슥 문대자 불그스름하게 혈색이 돌았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입술 색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이 색을 캔버스에 고스란히 옮기고 싶었다. 물감의 색 배합을 생각하다 차라리 입술을 잡아 뜯어 흐른 피로 칠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피는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만다. 피는 인간의 몸에 흐르고 있을 때가 가장 역동적이며 아름다운 법이었다.

‘그나저나, 부드럽군.’

남자의 입술도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있나? 에이든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남자건 여자건 입술을 만져본 경험이 없었기에, 마땅한 비교군을 선정하는 것부터 난항을 겪고 있었다.

지금 당장 벗겨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정말로 남자라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지도 몰랐다. 아직은 죽여선 안 된다.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진. 에이든은 성별을 확인하는 행위는 유보하기로 했다. 대신 그보다 우선순위에 있는 질문을 던졌다.

“벨리타 그레제는 어떤 여자지?”

레인디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남자의 엄지가 제 입술을 꽉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 그제야 에이든이 사르르 웃으며 엄지를 떨어트렸다.

“자.”

레인디아는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언제 어디서든 당당한 분……,”

“피곤한 성격이로군. 난 나대는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

에이든은 다 듣기도 전에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 레인디아의 말을 잘랐다. 그의 도발에 레인디아는 울컥했다. 그러나 거세게 일던 감정은 그만큼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불꽃이 사그라든 자리엔 유순한 눈빛만이 남았다. 레인디아는 처연히 시선을 늘어뜨렸다.

“생김새는?”

“…….”

“알고 있지만, 혹시 몰라 확인하는 거야. 적발에 금안, 맞아?”

머뭇거리던 레인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닌가? 에이든은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레인디아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아예 몸을 일으켜 시선을 피해버렸다.

남자의 정체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존재였지만, 그가 에이든 헬렌베르크란 사실은 레인디아에게 큰 안도감을 선사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버려진 대저택에 탈영병과 단둘이 고립된 것보단,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송구스러운 황족과 있는 게 안전할 테니까.

어떻게든 노스빌리움에 돌아가야 한단 생각에 레인디아는 간절히 청했다.

“언제쯤 눈이 그칠까요? 아가씨가 너무 걱정되어서…….”

“계집같이 칭얼대지 마. 보채지 않아도 어련히 보내줄 테니.”

에이든이 무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든 역시 어차피 더 볼일은 없었다. 그 여자와 그레제 백작가가 결국 아무 연관 없단 사실을 확신한 마당에, 이 녀석을 붙잡고 있는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호기심마저 휘발되고 있었다. 정확히는 살해 욕구로 변질하고 있어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다.

“……그런, 그런 표현은 삼가시면 안 될까요…….”

그런데 대뜸, 온순한 초식동물인 줄 알았던 사슴이 뿔을 들이밀며 돌진했다. 에이든이 휙 고개를 돌려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뭐라고 했지?”

“……여, 여자 같다는 표현을 경멸적으로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는 거예요…….”

레인디아는 고개를 떨군 채 더듬더듬 말했다.

눈앞의 남자가 단순한 탈영병이 아닌 황족, 그것도 민중의 영웅이라 불리는 ‘에이든 헬렌베르크’라는 사실에서 온 안도감 탓이었다. 그 안도감이 불러온 용기, 아니, 만용이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불안감이었다. 여자란 사실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의 입에서 계집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문제는 이러한 부탁이 도리어 에이든의 관심을 끌고 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단 점이었다. 에이든의 붉은 눈이 레인디아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웃기는 녀석이었다. 황족이란 사실을 말하자 송구스러워 눈도 못 마주치고 저토록 움츠러든 주제에 할 말은 또박또박 다 한다? 그만 피식, 싱거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에이든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레인디아의 머리가 이리저리 굴렀다.

“아가씨한테 교육을 잘 받았나 봐?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움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애동 같은 거야? 귀부인 중에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을 돈으로 사서 희롱하는 일도 있다 들었거든.”

또다시 움찔.

“아무리 봐도 계집처럼 생겼고, 아. 방금 건 무시한 게 아니었어. 사전적 의미 그대로 여자처럼 보인단 뜻이야.”

에이든은 계속해서 레인디아를 도발했다. 이제 슬슬 한계에 달한 건지, 레인디아의 가냘픈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조금만 더 하면 너, 고개를 들까?

마치 어른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유치한 마음이 샘솟았다.

“힘도 약해. 겁은 또 어찌나 많은지. 아무리 봐도 장거리를 동행하기에 적당한 타입으론 안 보여서. 남자 실격이야. 그치?”

“윽……!”

기어코 레인디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이렇게 심한 말만 하는 걸까. 민중의 영웅이란 사내가. 머루처럼 검은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에이든의 말에 나약했던 순간순간이 되살아나 치가 떨렸다. 분하고, 서러워서.

하지만 그런데도…….

레인디아는 이 남자를 탓할 수 없었다.

“화났어?”

“……아, 아니에요. 화나지 않았어요.”

다시 유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떨구는 너.

역시 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좋아. 그냥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배 속에 시커먼 구렁이가 수십 마리 똬리를 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큰 놈이 작은 놈을 잡아먹고, 도륙에 도륙을 거듭하다 마지막에 남은 가장 큰 구렁이가 목구멍을 타고 나와 이 녀석을 덥석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네 탓이야.’

죽은 것처럼 텅 빈 눈 안에 무언가를 품고 있는, 네 검은 눈동자가 문제야. 중요한 순간에 푹 고개를 숙여서 보여주지 않는 너의 그 야박한 행동이 문제야.

도대체 뭘까. 저 녀석은 뭘 품고 있는 걸까?

그런데 막상 눈알을 뽑아 가르고 배를 쑤셔 파헤치면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도 아니고 말이지.

마침내,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계속 감금하기로 결심했다. 정확히는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지옥 길의 동무로 데려가겠단 표현은 거창했다. 다만,

‘이 녀석이 있다면 초상화를 완성할 수 있겠지. 모델로 세워 두다 죽여버려야겠어.’

오랫동안 완성하지 못한 그림에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결단이 서자 에이든은 어떻게 이 겁 많은 사슴을 도축장까지 유인할지를 고민했다. 무력을 쓰고 싶진 않았다. 모델이 망가지면 곤란했으니까. 하지만 다가가면 도망쳐.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도망쳐볼까?

“이만 가지.”

“……어, 어디를요?”

에이든이 무심히 일어나자 레인디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자신이 던진 포획 망에 냉큼 걸리는 저 순진한 사슴 한 마리.

에이든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 이곳은 어딘지도 모르는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세워진 대저택이다. 바깥에선 눈보라가 몰아치니, 누가 혼자 남고 싶겠는가. 적이라도 함께 동침하고 싶을 테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따라올래?”

태초의 여인을 유혹하던 사악한 뱀처럼 남자가 말했다.

그러나 뱀을 따라오는 것은 사내, 아니,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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