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환영회
앞치마가 엉망이 된 하녀 하나가 메이드 룸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겨우 참고 있었다.
“세상에, 너 앞치마가 왜 그래?”
누군가 벌떡 일어나 물었다.
“얘 오늘 벨리타 아가씨의 시종을 들었거든.”
다른 하녀가 그녀를 대신해 대답해 줬다. 룸에서 쉬고 있던 하녀들은 입 모아 탄식했다.
“내, 내가, 일을 너무 못한, 흑, 다고…….”
“뭐어? 네가 일을 못하다니? 후작가에서 다섯 번째로 장기 근무한 게 너잖아! 주인님도 늘 칭찬하셨고!”
동료 하녀들이 불같이 성을 냈다.
그러나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벨리타는 주인 어르신의 귀빈이었다. 감히 평민인 저희들이 가타부타할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 나눈 대화도 오직 메이드 룸 안에서 끝나야 했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무엇이든 쌓이면 흘러넘치는 법.
“정말 못 참겠어! 내가 총대 메고 주인님께 사실을 고하겠어!”
가장 정의감 넘치는 하녀가 소리쳤다.
“그만둬, 증거도 없잖아?”
안경을 쓴 하녀가 대꾸했다.
“즈, 증거가 왜 없니? 얘 앞치마를 봐. 홍차로 얼룩덜룩……. 화상이라도 입었으면 어찌할 뻔했냐고!”
“이번에도 또 실수인 척 엎질렀겠지.”
하녀는 ‘또’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실었다.
“막말로, 사실대로 고한다고 쳐. 고 여우 같은 년이 울먹이기 시작하면 마음 여리신 주인님이 호통 한 번 제대로 치실까? 아무리 주인 어르신의 인품이 훌륭하셔도 결국 외로움을 타는 중년일 뿐이야. 벨리타는 그 외로움을 채워주는 존재고. 그러니 모든 게 우리한테 불리하게 작용하겠지.”
안경을 쓴 하녀의 말에 모두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다. 벨리타에게 호되게 당한 하녀는 오히려 제 잘못인 것처럼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 나는 괜찮아. 하지만……, 우리 아가씨들이 너무 그립다. 하나같이 좋은 분들이셨는데.”
출가외인이 된 아가씨들을 떠올리자 하녀는 결국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나머지 하녀들이 그녀를 빙 둘러싸고 위로해 줬다.
“요즘 지그문 후작이 가게를 자주 드나드네요?”
“오늘도 벨리타 영애에게 줄 선물을 잔뜩 사가셨대요.”
지그문 후작은 벨리타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는 사실상 노스빌리움의 통치자나 다름없는 후작이었다. 그의 권세를 등에 업은 벨리타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길거리에서 만난 신사들은 벨리타를 보자마자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기 바빴고, 숙녀들도 수도에서 왔다는 영애와 친분을 쌓고 싶은지 멀찍이서 눈길을 보내곤 했다. 외부인을 배척하는 보수적인 귀족조차 지그문 후작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 예를 다해 벨리타를 대했다.
그러니 벨리타의 콧대는 나날이 높아졌다.
귀족들 앞에서 그녀는 세상에 둘도 없는 공주님이었고, 저택 안 사용인들에겐 지독한 폭군이었다. 물론 영리하게도 백작가에 있을 때처럼 대놓고 사용인을 괴롭히지 않았다. 괴롭혀도 찍소리도 못 할 것 같은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채 함부로 대했다. 덕분에 후작가의 하녀들만 죽어나는 중이었다.
“어때, 앤? 이 목걸이가 나을까?”
“네, 아가씨. 드레스와 잘 어울려요. 거기다 후작 부인이 쓰셨다는 목걸이기도 하고요.”
앤이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하자 벨리타가 팍 인상을 찡그렸다.
“뭐? 남이 썼던 걸 추천해 주는 거야, 지금?”
벨리타는 앤에게 목걸이를 집어 던졌다. 앤은 귀한 목걸이에 흠집이라도 날까 봐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저, 저, 그럼 볼레어 경께서 선물로 사주신 목걸이는 어떠세요?”
볼레어와 처음 산책을 하러 나간 날이었다.
볼레어는 그날을 기념하자며 벨리타에게 백화점에서 목걸이를 사줬다. 수도에선 중류층이나 가는 곳이 백화점이었다. 그래서 저를 백화점에 데려간단 소리를 듣고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북부에서 백화점은 진짜 상류층만 이용할 수 있는 장소였고 벨리타는 씀씀이를 아끼지 않는 볼레어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싫어.”
“네? 어, 어째서요, 아가씨?”
“선물 받은 걸 무도회에서 착용하다니 너무 노골적이잖아? 촌스럽다고, 앤. 만약 그날 더 멋진 신사가 나타나면 어쩔 건데?”
“하하. 그렇긴 하죠.”
“아휴, 너 같은 거한테 조언을 받으려 한 내가 멍청이지. 그나마 레인디아는 빈말은 안 했는데.”
“저는 한 번도 빈말하지 않았어요, 아가씨……!”
“그래? 그럼 멍청해서 생각 없이 막 던지는 건가?”
벨리타는 당장 꺼지라며 빽 소리쳤다.
“오늘 저녁엔 내가 제일 예뻐 보여야 한다고.”
벨리타는 코르셋을 한껏 잡아당겨 오목해진 허리에 손을 얹고 이리저리 몸을 돌렸다.
“여자들은 초대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길바닥에서 본 영애들은 하나같이 촌스러워서 안심이지만.”
벨리타는 흐흥 코웃음 쳤다.
‘가만, 지난번 볼레어 경이 말해 준 귀빈도 참석한다 했었지!’
벨리타는 짝 손바닥을 쳤다. 지그문 후작은 ‘그분’이 환영회에 도착하기 전까진 정체를 밝힐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벨리타가 울먹이자 결국 훤칠한 미남이란 사실을 귀띔해 줬다. 벨리타에겐 그것만으로 큰 수확이었다.
* * *
벨리타의 환영회 장소는 후작저의 수정궁이라 불리는 별채였다. 수백이 넘는 사용인과 정원사, 조경사들이 달라붙어 수정궁을 호화롭게 장식했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벨리타.”
지그문 후작은 마치 부인이 살아 있던 당시가 떠올라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살아생전 수정궁에서 자선 파티를 자주 개최했기 때문이다. 벨리타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추억에 잠긴 후작의 고릿적 시절 이야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서 근사한 신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파티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환영회가 막을 올렸다.
“반가워요, 벨리타 그레제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벨리타 영애.”
바깥에서 눈인사하던 귀족들은 오늘에서야 정식으로 벨리타와 인사를 나누었다. 벨리타를 환영하러 온 손님들로 대기실은 금세 만원이 됐다. 마지막에 도착한 건 후작 다음으로 작위가 높은 귀족 부부였다. 그러나 벨리타가 기다리는 신사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분은 왜 안 오시는 거죠?”
벨리타는 울먹이며 후작을 올려다봤다.
“북부 사람들이 전부 벨리타를 환영하는 건 아닌 모양이에요.”
벨리타가 아이처럼 자신을 이름으로 지칭하며 푹 고개를 숙이자 지그문 후작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가, 섭섭해 말거라. 또 엄밀히 따지면 그분은 북부 귀족이 아니시란다. 그러니 네 말대로 모든 북부 귀족이 널 환영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그러나 벨리타는 자신이 가진 99개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남이 가진 유일한 1개를 빼앗아 와 100개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다른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들어가자꾸나.”
대기실에서 가볍게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은 짝지어 무도회장으로 걸어갔다. 긴 복도를 지나 짝이 하나씩 들어올 때마다 집사장이 그들을 소개했다.
“작센 자작 부부입니다.”
“볼레어 경입니다.”
“산사룰루 영애입니다.”
이윽고 환영회의 주인공인 벨리타가 등장했다.
“하이락에서 오신 벨리타 그레제 백작 영애십니다.”
모두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으나, 무도회장에선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감탄했다.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울까요.”
“지그문 후작이 요즘 행복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소.”
다들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벨리타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볼레어는 처음 보는 목걸이를 하고 온 벨리타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으나, 벨리타가 저를 향해 활짝 웃어주자 섭섭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어휴. 저 여우 같은 년.”
“오늘도 후작 부인의 목걸이와 볼레어 경이 준 선물은 안 하겠다고 한바탕 지랄을 했다면서?”
진상을 아는 하녀들만이 박수 소리 아래로 투덜댔다.
“아하하하.”
“오호호호.”
연주자들은 아름다운 선율로 방문객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무도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흥겨워졌다. 기다리던 손님이 오지 않아 부루퉁해져서 드레스 아래로 앤의 발을 밟으며 짜증을 부리던 벨리타도 어느새 귀족들과 어울려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귀족은 귀족이구나.’
앤은 짓이겨진 제 신발을 보며 생각했다.
아랫것들에겐 이렇게 대하면서도 같은 귀족 앞에선 저토록 사랑스럽게 웃는 모순이란. 아니, 벨리타의 입장에선 모순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라 인정한 자에겐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됨이란 상대방의 직위와 부에서 나왔다.
“어머, 저분은.”
“북부에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그때, 입구 쪽이 웅성거렸다.
“오셨군요.”
“응? 왜 그러세요, 볼레어 경?”
볼레어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벨리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연주자들이 음악을 멈추자, 집사장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지각자를 소개했다.
“에이든 헬렌베르크 장군이십니다.”
“에이든 헬렌베르크?!”
벨리타가 빽 소리쳤다. 그녀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감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에이든에게서 벨리타에게 집중됐다. 에이든조차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몰라요.”
벨리타는 부끄러운 듯 볼레어의 가슴팍에 얼굴을 숨겼다. 볼레어는 하하 웃으며 벨리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어느새 에이든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에이든은 북부인인 볼레어보다 키가 컸다. 키뿐 아니라 옆통도 두툼했다. 얼음 조각처럼 서늘한 인상과 대비되는 야성적인 몸매의 조합에 모든 여자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든 헬렌베르크라고 하네.”
“처, 처음 뵙겠어요. 저는 벨리타 그레제예요. 아니, 사실은…… 한 번 볼 기회가 있었지만요.”
“한 번?”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승전식에 갔었거든요! 오직 에이든 님을 보기 위해서요. 안 오셔서 조금 속상했답니다.”
벨리타는 주먹으로 입술을 가린 채 우물우물 대답했다.
“속상했던 건 그대뿐만 아니었을 테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네?”
“아니면, 나보고 승전식에 불참한 일에 죄책감이라도 느끼라고 한 말인가?”
“그,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벨리타가 당황했다. 에이든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을 족족 빗나갔다.
“영웅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진심이었단 뜻 아닐까요?”
지켜보던 볼레어가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에이든은 슥 벨리타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예상대로 볼레어가 선물해 줬다는 목걸이가 아니었다. 에이든은 피식 웃었다.
“볼레어 경에게 환영 선물을 받았다 들었는데?”
“네? 아, 그 목걸이요?”
이 남자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벨리타는 크게 당황했다.
“왜 착용하지 않았지? 북부에서 처음 받은 선물 아니었나? 그런 특별한 목걸이를 오늘 같은 날 보관하다니 이해가 안 가서.”
“그, 그게. 저는, 볼레어 경이 부담스러워하실까 봐.”
“글쎄, 과연 부담스러웠을까? 신사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숙녀의 역할이라 생각하는데. 센스가 부족하군.”
에이든은 볼레어를 슥 바라봤다. 볼레어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넉살 좋게 웃으며 둘을 중재했다.
“하하.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 목걸이가 드레스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걸요. 벨리타 영애가 모든 걸 고려해 최선의 선택을 했다 믿습니다. 숙녀의 선택에 사내인 제가 끼어들어선 안 되지요. 모두 각자의 역할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볼레어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나는 내 여자한텐 무엇이든 내가 고른 걸 입힐 거야. 물론 그녀의 선택도 존중해. 다만 내가 사준 것 중에서 골라야 한다는 전제가 붙을 뿐.”
에이든의 당당한 대답에 볼레어는 주눅이 들었다. 에이든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피식 웃었다.
“미안하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제삼자가 가타부타할 일은 아니지. 다만, 그날 자네가 무척 들떠 보여서 속이 상했어.”
에이든은 볼레어의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볼레어는 그날의 설레던 감정이 떠올라 더욱 비참해졌다. 하지만 신사로서 숙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예.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벨리타 양.”
볼레어가 물에 젖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벨리타를 바라봤다. 벨리타는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긴커녕 오히려 목걸이를 사준 그를 원망했다. 어서 이 거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 장군 아니십니까!”
“지그문 후작. 오랜만이네.”
다행히 잠시 자리를 비운 지그문 후작이 도착해 살벌한 분위기가 막을 내렸다.
무도회의 마지막 곡이 끝났다.
에이든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삐딱하게 서서 포도주만 홀짝일 뿐 누구에게도 춤을 신청하지 않았다. 사실 오늘 같은 파티에선 최소한 한 명의 여인에게 춤 신청을 해야 했다. 바로 환영회의 주인공인 벨리타였다. 하지만 황족인 에이든은 귀족의 예법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한번 말을 걸어볼까?”
“그만둬. 괜히 눈 밖에 날라. 그냥 바라만 보라고. 조각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보기만 해도 눈이 멀 것 같아.”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에이든의 모습은 무리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우두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미모는 인간의 힘으론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황홀경을 선사했다. 에이든의 피부는 마치 예배당에 걸린 종교화 속 천사처럼 티 한 점 없이 매끄러웠다.
모두가 그를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만약 에이든이 고결한 황족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수많은 사람이 그를 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에이든은 제게 다가오는 손목을 전부 꺾어 비틀어버렸겠지만.
벨리타 역시 파트너를 바꿔 빙글빙글 춤추는 내내 에이든의 눈치를 살폈다.
처음엔 제멋대로인 행동에 화가 났다가도, 그가 황족이란 사실을 떠올리자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노스빌리움에 도착한 이후 저에게 호의적인 신사들만 보아 와서 질린 참이었으니까.
‘우리 둘 다 하이락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으니 금세 친해질 거야. 다른 북부인들은 끼어들 수 없는 공통점이기도 하지.’
분명 그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그 후 벨리타는 에이든 쪽으로 몸이 돌아갈 때마다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랫동안 갈고닦아 남자라면 보는 순간 안달이 날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그러나 에이든은 그녀에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내내 시큰둥한 표정으로 수정궁의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인디아가 있는 방향이었다.
‘도망가면 안 되는데.’
에이든은 손목을 돌려 와인 잔을 굴렸다. 붉은 포도주가 출렁거렸다.
‘기다려줄 거지, 디아? 착하게 기다려야 해.’
에이든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키스를 하듯 와인 잔에 입을 맞췄다. 입 안에서 레인디아의 가늘고 달콤한 혀가 비벼지는 듯했다.
* * *
무도회가 끝난 뒤엔 장소를 나누어 만찬을 즐겼다. 만찬장에 모두 모이기엔 참가자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제1 만찬장에는 당연하게도 주인공인 벨리타와 엄선된 손님들이 참석했다. 황족인 에이든은 지그문 후작의 바로 옆자리였다. 모두 서열에 따라 착석하자 지그문 후작이 잔을 들고 일어섰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에이든 헬렌베르크 장군께 첫 잔을 바치는 바요. 동의하는 북부인은 함께 잔을 들어주시게.”
“동의해요!”
벨리타는 제일 먼저 잔을 따라 들었다. 동의합니다. 동의하오. 동의해요. 다른 귀족들도 우르르 잔을 들어 올렸다. 벨리타는 이번에도 맞은편에 앉은 에이든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으나 에이든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
벨리타는 어른스럽게 자신을 타이르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두 번째 잔의 영광은 벨리타에게 돌아갔고, 마지막 잔의 영광은 파티를 주최한 지그문 후작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연달아 축하주를 마신 귀족들은 긴장이 풀어져 더욱 즐거운 기분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어머나. 그게 정말인가요? 좀 더 얘기해 주세요.”
“호호호, 그래서 말이죠. 그 노부인이 멍청한 아들을 장가보내려고 시골에서 몰락한 가문의 영애를 데려왔는데, 그 영애가 닭 두 마리를 들고 도망쳤다지 뭐예요? 그래서 북부경비대가 노부인의 재산을 찾으려고 숲을 반나절 넘게 뒤져서 겨우 달걀 하나를 찾았대요! 도망치다가 닭이 알을 낳은 거지! 그건 차마 들고 갈 수 없었는지.”
“그때는 참, 저도 곤란했습니다. 도망친 신부는 됐으니 닭 두 마리라도 찾아달라고 성원이셔서…….”
볼레어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벨리타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북부 환영회의 제1 만찬장의 주요 참석자는 사회 고위층 인사들이다. 그들은 북부의 명예와 부, 그리고 외부인은 모르는 비밀을 거머쥔 자들이었다. 때문에 파티의 주인공은 이 자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신이 아는 외부의 정보와 북부의 정보를 교환해 훗날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벨리타는 북부 사교계의 가십에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이락에서 살 적에도 정치, 경제, 외교는 관심 밖이었다. 그녀는 조금이나마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화제보다 하룻밤이면 휘발될 말초적인 유희에 집중했다.
[명하신 백작가의 사생아에 대한 정보는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현재 그레제 백작가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영지산출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어 현재 영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고, 수도의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사용인의 봉급을 감봉했다 합니다.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는 즉시 파발을 보내겠습니다. -산첼로 드림]
에이든은 이미 산첼로를 통해 백작가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오늘 아침 일찍 저택을 떠난 것도 레인디아가 모르게 벨리타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가 무색할 만큼 벨리타는 머리 빈 계집이었다. 그녀를 처리하는 데 거창한 계획이 필요할 것도 없었다. 고작 저런 걸 처리하기 위해 레인디아를 홀로 두고 왔단 사실에 노기가 치밀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목적은 달성해야겠지.
에이든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이어지는 멍청한 대화에 몸을 맡겼다.
“수도 생활도 궁금해요. 수도에서는 아스파라거스를 나이프로 썰어 먹는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놀랍게도 사실이에요.”
“세상에. 너무 불편하지 않나? 하지만 그게 수도의 문화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죠.”
“북부는 이렇게 손으로 집어 먹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잘못 썰면 여기저기 튕겨 나가서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서요.”
벨리타는 아스파라거스를 잡아 오도독 씹어먹었다.
“호호호. 벨리타 양의 나이프 질은 흠잡을 구석이 없는걸요? 귀부인인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랍니다.”
“다 어머니의 가르침 덕이에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거든요. 어머니도 저를 끔찍이 사랑하시고요.”
벨리타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 존경하는 어머니가 재정난에 허덕인단 사실을 알면서도 저런 영양가 없는 대화에만 열을 올리는 건가?’
이제 벨리타를 무대에서 끌어내릴 시간이었다.
에이든은 마시던 와인 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놨다.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에이든 쪽으로 향했다. 에이든은 실수인 척 어깨를 으쓱였다. 이윽고 자연스럽게 손가락 두 개로 미간을 문질렀다.
“이런. 너무 많이 마셨나 보군.”
“대화에 참여 안 하셔서 그런 건 아닐까요? 혹시 이 자리가 불편하신 건 아니죠? 자꾸 마음이 쓰여요.”
벨리타가 걱정 가득 한 얼굴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녀의 섬세한 배려에 다른 귀족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묻고 싶은 게 있었네만.”
“어머나, 그게 뭔데요?”
“이런 걸 물어도 될지. 혹 그대가 곤란해할까 조심하게 되는군. 무도회장에서도 내가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나. 오랫동안 전장에서 지내다 보니 사람들과 교류하는 게 어색해서.”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마음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쪽이 맞았으나. 에이든은 가식적인 표정을 띤 채 쓸쓸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순간 에이든은 고독한 세월과 홀로 싸워온 전쟁 영웅의 표본 그 자체였다. 여인들의 가슴엔 동정심이 피어났고, 사내들도 존경 어린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에요. 전부 오해였잖아요~ 저는 벌써 잊었답니다?”
벨리타가 애교를 떨었다.
“이러니 더더욱 궁금합니다, 장군님.”
“오늘 듣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사흘은 잠들지 못하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려 부추기기 시작하자 에이든은 얄궂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닭 얘기를 듣고 있으니 생각났네. 다름이 아니라 내가 다친 짐승을 한 마리 보호하고 있거든.”
에이든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토독토독 두드렸다.
“그리고 그 가여운 짐승이 그레제 백작가 소유인 걸 알게 됐지.”
“예? 하지만 말이라면 그날 전부 데려왔습니다만. 남아 있던 가축이 있던 겁니까?”
볼레어가 대신 물었다. 에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말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야. 더 특별하지.”
“어머, 저 그런 귀한 애완동물은 데려온 적이 없는데.”
벨리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애완동물이라!”
에이든은 쾅 테이블을 치며 웃었다. 기다란 테이블이 가장자리까지 흔들려 끄트머리에 앉은 신사는 재빨리 와인 잔을 붙잡았다.
“하긴, 애완동물이라면 애타게 찾기라도 했겠지.”
벨리타는 취기가 돌아 에이든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앤은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에이든이 그런 앤을 향해 물었다.
“거기 너. 백작가의 하녀인가?”
“예? 저, 저, 저, 저요?!”
앤이 화들짝 놀라자 벨리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 앤. 왜 그리 긴장하고 그러니?”
“그그그, 그야, 그야…….”
아무리 봐도 그 짐승은 레인디아를 말하는 거일 테니까. 대체 어디 있나 했더니 에이든의 보호를 받고 있던 건가? 설마,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전부 고자질한 건 아니겠지? 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했다. 당장 갈빗대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너 꼭 술이라도 마신 거 같다? 설마 몰래 몇 잔 마셨니? 그런 거라면 난 괜찮으니 일찍 가서 쉬렴.”
벨리타는 인자한 목소리로 말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빛은 내일이 되면 넌 죽었어, 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 저, 저, 자리를, 지킬게요!”
술에 취한 벨리타가 황족에게 헛소리라도 했다간……! 다 끝장이었다. 앤은 꿀꺽 침을 삼켰다.
“레인디아.”
그 순간, 벨리타는 제 귀를 의심했다. 왜 레인디아의 이름이 에이든의 입에서 나오는 건지 얼떨떨했다. 몸을 바로 하자 에이든의 붉은 눈동자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인디아라는 이름의 종자를 보호하고 있다.”
“……네?”
“아니, 남장한 하녀인가?”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남장한 하녀라니. 이토록 흥미로운 소재가 있을까? 귀족들은 흥미진진한 눈빛을 반짝이며 에이든과 벨리타를 번갈아 바라봤다.
“자, 잠시만요. 그 말씀은 하녀를 숲에 버려두고 왔단 겁니까? 하지만 저희는 또 다른 하녀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볼레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의 표정엔 혼자 남았을 하녀를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히 지금은 장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나, 만약 장군이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볼레어는 상식적으로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윽고 다른 귀족들도 그와 비슷한 사고의 흐름을 겪고 믿기지 않는단 눈빛으로 벨리타를 바라봤다.
“왜 그녀를 혼자 두고 온 건지 알고 싶네. 몸이 아파서 제대로 대답도 못 하는 상황이다 보니, 당사자에게 물을 기회만 기다렸거든.”
“그 하녀, 레인디아 양은 괜찮은 겁니까? 혹 늑대의 공격이라도 받은 건가요? 대답도 못 하는 상황이라니 무척 걱정됩니다.”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볼레어가 다급하게 물었다. 반면 벨리타는 레인디아의 소식을 알게 되어 기뻐하거나 미안해하긴커녕 변명을 더듬거리기 바빴다.
“그게, 저는……, 경황이 없고, 또, 그게…….”
보다 못한 앤이 끼어들었다.
“아가씨께서 그때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셨어요! 그래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신 거죠. 저도 못 알아보셨는걸요? 볼레어 경이 나타났을 때야 겨우 정신이 돌아온 거였고요.”
“자네는?”
에이든이 화살을 돌렸다.
“그, 그게.”
앤은 푹 고개를 숙였다.
“제, 제 잘못이에요. 구조됐다는 안도감에 깜빡 잊고 말았어요. 하, 하지만 저희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레인디아 그것……, 아니, 그 아이가 자기는 남장을 해서 괜찮다고 떠난 거예요! 저희는 정말……, 위험하니까 다 같이 있자고 했는데도…….”
“후작저에 도착한 이후에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는 게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그때, 벨리타가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아아! 아파. 머리, 흐윽, 너무 아파요……!”
“아가씨!”
앤은 황급히 벨리타에게 달려갔다.
‘밤마다 발작했다고 해. 어서.’
벨리타는 테이블 아래에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앤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는, 죄책감에 밤마다 레인디아의 이름을 부르며 발작하셨어요……! 그런데 눈을 뜨면 그 아이의 존재를 까맣게 잊으셨죠. 저는, 아가씨를 자극할까 봐 그 아이를 언급하지 못했어요.”
“흐윽. 미, 미안해. 미안해애, 레인디아…….”
벨리타는 몸부림치며 흐느꼈다. 귀부인 몇몇이 두 손으로 입을 감싼 채 숨을 들이켰고, 신사들도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이들은 사건의 정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설마, 저 천사 같은 영애가 하녀를 늑대 숲에 버려두고 떠났을 줄이야…….
“아아, 후작님! 레인디아를 찾아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벨리타는 급기야 후작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얘야, 진정하려무나. 다행히 그 아이는 장군께서 보호하고 있다지 않니? 괜찮다. 괜찮아.”
“흐어어엉.”
벨리타는 지그문 후작의 가슴에 기대 흐느끼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에이든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그문 후작은 슥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원망은 묻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이 가득했다.
에이든은 단호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늘 환영 파티는 이쯤에서 끝내야 할 듯하네만.”
“……예,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에이든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지그문 후작을 비롯해 다른 이들의 마음에 어떤 확신을 주었다. 벨리타가 악의를 갖고 하녀를 숲에 버려둔 것이 틀림없노라.
그렇다면 왜?
안타깝게도 그 질문에 답을 해 줄 이는 없었다.
* * *
지그문 후작은 기절한 벨리타를 대신해 손님들을 배웅했다. 그의 연로한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오히려 당장 기절해도 이상치 않은 건 지그문 후작이었다. 그는 십 년은 족히 늙은 기분이었다.
“에이든 님, 주인 어르신께서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 청하셨습니다.”
“그러지.”
에이든은 집사장을 따라 본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주인님, 장군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게.”
마호가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그문 후작이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지그문 후작이 몸을 돌렸다. 그는 책상에 둔 양주를 들어 올렸다.
“한잔 드시겠습니까?”
“괜찮네. 조금 전에 많이 마셔서.”
“그럼 저 혼자 마셔도 괜찮으실지요.”
에이든이 고개를 까딱였다. 후작은 잔이 넘치게 양주를 콸콸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목과 배 속이 타는 듯이 화끈거렸다. 후작이 입술을 훔치고 사과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내일 사람을 보내 그 하녀를 데려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갖기로 했어.”
“……예?”
“돌봐주는 동안 정이 들었네. 어차피 돌려보내도 괴롭힐 게 눈에 빤하고.”
“그,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자네가 그럴 거란 게 아니야. 자네라면 틀림없이 친딸처럼 다정히 보살펴주겠지.”
에이든이 벨리타를 과보호해 온 후작의 행동을 비꼬듯 말했다.
“꽤나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한 모양이야. 그래서인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순종적이더군. 사실 내가 발견하기 전에 도적들에게 겁간당할 뻔했네. 그런 상황에서도 체념한 듯 저항 한 번 안 하더군.”
“그럴 수가…….”
“다행히 내가 발견해 화를 면할 수 있었지.”
지그문 후작은 책상 위로 털썩 무너졌다. 마치 제 딸에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얼굴도 모르는 하녀를 향해 가여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 아이는 괜찮은 겁니까?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 그건 벨리타를 떠보기 위한 거짓말이었어.”
“……!”
“자네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나? 오히려 생판 남인 볼레어 경이 그 얘기를 듣고 더욱 걱정했지. 반면 벨리타는 변명하기 바빴고 말이야.”
에이든은 지그문 후작의 무너진 어깨너머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레인디아에겐 지금이 최선이야. 상식적으로 백작가의 하녀보단 황족의 하녀가 낫잖아?”
“그 아이를 고용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뭐, 고용보단 사육일까? 맛있는 걸 먹여주고 좋은 옷을 입혀줬더니 때깔이 고와졌어. 확실히 본판이 사랑스러워서 그런지.”
에이든이 빙그레 웃었다. 지그문 후작은 그가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하녀를 벨리타와 함께 두어선 안 된단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조금 전에 하지 못한 얘기가 하나 더 있네. 이건 자네의 명예를 위해 함구했던 것이기도 해.”
“……그건 무엇입니까? 아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그문 백작은 아예 병째로 양주를 들이켰다. 그는 손등으로 입을 훔쳐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수도에서 벨리타가 백모님의 노여움을 샀네.”
“백모님이라면……, 황후마마 말입니까?”
대체, 얼마나 더 놀라운 소식이 남아 있는 것일까? 지그문 후작은 이제 두렵기까지 했다.
“자세한 정황은 모르나 큰 결례를 저질렀다더군. 뭐, 사교계의 일이야 여자들 문제니 우리가 가타부타할 이유는 없지.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벨리타의 인품을 재고하는 데 꽤 그럴싸한 뒷받침이 되어주지 않겠나?”
“……그 아이의 인품이라니. 아직 아이 아닙니까? 고작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자식들을 시집보내고 외로워하는 제게 찾아와준 천사 같은 아이입니다. 분명 무슨 오해가…….”
지그문 후작은 머리론 모든 상황을 이해했지만, 가슴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좋네. 그럼 어머니의 문제로 가볼까? 그레제 백작 부인의 문제라면 성인이니 동정심 없이 판단할 수 있겠지?”
에이든은 지그문 후작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쐐기를 박았다.
“현재 백작가의 재정난은 심각한 상황이네. 지난 가뭄으로 대다수의 영지에서 적자가 난 사실은 알고 있겠지? 백작령도 마찬가지네. 그러나 백작 부인은 수도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영지를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어.”
죽은 친구 얘기가 나오자 지그문 후작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백작의 실제 됨됨이나 평판이 어떻든 간에 지그문 후작에겐 몇 안 되는 외지인 친구라 더욱 특별한 존재였다. 어쩌면 벨리타가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성격은 아비에게 물려받은 기술인지도 몰랐다.
“설마, 내게 벨리타를 맡긴 것도…….”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백작 부인은 자네를 이용했단 뜻이지. 황후와의 마찰과 재정난에 대해 함구하고, 자네를 걱정하는 척 벨리타를 보낸 거야. 실상은 황후의 분노가 잠잠해질 때까지 딸을 도망 보낸 것뿐이지만. 겸사겸사 이곳에서 좋은 신랑감을 찾으면 금상첨화고. 자세히 알아보니 하녀 하나를 남장시킨 이유도 남성 사용인을 딸려 보낼 돈이 안 돼서라더군.”
“그럴 수가.”
“결국, 선한 사람들만 피해를 보게 된 거지. 자네와 현재 내가 보호하고 있는 하녀 같은.”
지그문 후작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타인을 향한 호의가 이런 식으로 되돌아와 저를 배신할 줄이야. 적어도 북부에서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북부의 결속력은 다른 지역과 남달랐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솔직하게 상황을 얘기해 줬다면 지그문 후작도 백작 모녀를 도왔을 것이다.
“더 할 얘기는 없으니 이만 가보겠네.”
“……예. 귀한 시간을 나누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그저 제삼자로서 상황을 전달하고, 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뿐이네. 선택은 그대의 몫이겠지.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게. 콩깍지가 벗겨지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법이거든.”
마지막까지 에이든은 뼈 있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집사장. 하녀를 불러주게.”
“예. 누구를 말입니까?”
“……아무나 추려서 두 명만 데려오게. 이유는 절대 말하지 말고.”
결국,
지그문 후작은 이 잔혹한 진실 게임에 주사위를 던졌다.
“부르셨습니까, 어르신.”
“그래. 편히들 있거라.”
곧 하녀 두 명이 도착했다. 친구의 앞치마가 더러워져 불같이 화를 내던 하녀와 안경을 쓴 하녀였다. 지그문 후작은 자연스레 술병으로 향하던 손을 바로 했다. 대신 그는 찬물을 벌컥 들이켰다.
“너희는 둘 다 내 밑에서 오랫동안 일한 아이들이구나.”
“예, 어르신의 은혜 덕에 과분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하. 혼내려 부른 게 아니다. 그저, 내가 너희를 각별하게 여기는 만큼, 너희도 내게 진실만을 말해 주길 바랄 뿐이다.”
지그문 후작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스쳤다.
“벨리타에 관한 일이다. 혹, 내게 숨기고 있는 일은 없느냐?”
하녀들은 눈치를 주고받았다. 오랜 침묵이 있었다.
“벨리타 아가씨께서 후작가의 하녀 중 조용한 아이들만 골라서 괴롭히고 계십니다.”
결국 안경을 쓴 하녀가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사실이냐? 언제부터?”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안경을 쓴 하녀가 고개를 숙였다. 다른 하녀도 열심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희는…… 주인 어르신을 곤란하게 만들까 봐 참고 있었어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돌아갈 손님이시니까요. 그냥 평소처럼 잘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 제 친구의 앞치마에 실수인 척 홍차를 쏟았어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도 악의와 실수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요. 그동안 모셔온 아가씨들도 이런 실수를 종종 하셨으니까요. 다만, 그때마다 진심으로 저희를 걱정하셨죠. 특히 막내 아가씨는 직접 얼음을 가져와 문질러주시기까지 하셨어요.”
지그문 후작은 오랜 과거를 회상했다.
“아. 그 일은 나도 기억나는구나. 데이지라는 하녀가 난롯불을 지피다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지.”
“예. 막내 아가씨가 감기에 걸리신 날이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막내 아가씨는 마치 본인 때문에 그런 줄 알고 미안해하셨죠.”
그것이 상식적인 행동이었다. 지그문 후작가의 막내 아가씨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주인이 지녀야 할 올바른 소양이기도 했다. 적어도 지그문 후작은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처음엔 낯선 곳에 오셔서 예민한 거라 생각도 해 보았지만…….”
“후우. 그렇구나. 알겠다. 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용기 있게 진실을 고백해 줘서 고맙다.”
후작은 결단을 내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멍청아! 왜 그동안 레인디아에 대해 아무런 말도 안 했어?”
“그, 그게…….”
했지만 귓등으로도 안 들은 건 벨리타였다. 그러나 앤은 그저 넙죽 엎드린 채 덜덜 떨어야 했다. 그녀에겐 울면서 찾아갈 지그문 후작 같은 주인 어르신이 없었다. 제 앞에서 버럭버럭 소리치는 인간이 그녀의 주인이었다.
“너 이 집 막내가 입던 옷이 뭔지 알지? 전에 들었다고 했잖아.”
“네, 네……. 그런데 막내 아가씨의 드레스는 왜요?”
“내일 해가 뜨는 대로 가져와. 그걸 입고 있게.”
앤은 겁에 질려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최소한 오늘 밤만은 누구도 벨리타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일 아침이 진짜 결전의 날이었다.
* * *
다음 날.
벨리타는 느지막이 일어나 앤이 가져온 막내 영애의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서 열심히 머리를 위로 빗어 부스스하게 만들었다. 또 난로의 숯을 눈 밑에 발라 눈그늘을 만들었다.
“어때?”
“무척 수척해 보이세요.”
“그럼 됐어. 난 누워 있을 테니까 나가서 후작이 오면 말해 줘.”
“네, 아가씨.”
지그문 후작은 벨리타가 눈을 떴단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러나 막상 문 앞에 서니 결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 숨을 고르다 안으로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의 결단에 박차를 가한 건 벨리타 그 자체였다. 침대에 누워 있는 벨리타는 막내 아이가 즐겨 입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지그문 후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셨나요……. 옷을 갈아입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다시 눕고 말았어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벨리타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어째서……!”
지그문 후작의 얼굴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네가 그 아이의 옷을 입고 있는 게냐……?!”
“……네? 저,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따님분들이 남기고 간 옷이며 장신구는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고. 딸들도 그러길 바랄 거라고요…….”
“하필 오늘 말이더냐?”
“……흐윽!”
벨리타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지그문 후작의 앞에 겨우겨우 섰다.
“어제 일로, 저, 저를 탓하실까 봐 무서웠어요. 이러면……, 조금이라도 화를 덜 내실 거라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저는, 벨리타는, 후작님이 화를 내시니 어쩔 줄 모르겠어요. 흐윽, 너무 무서워요. 너무, 너무…….”
“또 기절할 게냐? 그렇다면 지금이 좋겠구나!”
지그문 후작이 버럭 소리쳤다.
“당장 기절하지 않으면 내가 정신을 잃을 지경이니 말이다! 세상에, 벨리타! 어떻게 그 아이를 숲에 두고 올 수가 있는 게냐! 나는 다른 무엇보다, 그게 가장 끔찍하고……, 네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벨리타는 부들부들 몸을 떨다 빽 소리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레인디아는 아버지의 사생아니까요!”
앤은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바깥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후작가의 하녀들도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이로써 판이 뒤집힐지도 모른단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생아라고?”
아니나 다를까 지그문 후작이 주춤했다.
“흐윽. 그래요! 걘 아버지의 사생아고, 그 애의 어머니란 여자가 얼마나 지독하게 우리 가족을 괴롭혔는지 아세요? 아이를 앞세워 돈을 뜯어내려 했다고요! 그런데 제가 레인디아를 좋아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저도,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후작님이 제 입장이었어도 레인디아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지그문 후작은 꾹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무언가 생각하던 그는 깊은 상실감을 맛본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둘도 없는 지기가 부인을 두고 바람을 피울 만큼 형편없는 사내였다니…….”
“저희 아빠가 무슨 잘못이에요? 아버지를 유혹한 그 미친 여자가 잘못이죠!”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다! 박수도 합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게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왜 저한테 화를 내세요?!”
“아아. 벨리타. 널 탓하는 게 아니다. 네 심정도 충분히 이해한다.”
지그문 후작은 연신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벨리타와 황후의 트러블, 백작가의 재정난, 믿었던 친구의 사생아, 이 모든 게 뒤죽박죽 뒤섞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후작은 어렵게 물었다.
“반성은 하는 게냐?”
“제가 무엇을요?”
벨리타가 표독스럽게 대꾸했다.
‘콩깍지가 벗겨지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법이거든.’
아아. 그 천사 같던 아이가 저토록 악독한 표정을 짓다니. 저를 향해 마구 발톱을 드러내는 모습에 지그문 후작은 크게 탄식했다. 친구의 사생아. 그리고 그 사생아를 증오하는 친구의 딸. 어찌 보면 제삼자인 자신이 건드려선 안 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때 등 뒤에서 후작가 하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단, 사용인의 안전은 오롯이 주인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벨리타 네가 후작가의 하녀들을 괴롭혔단 사실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누, 누가 그런 소리를 한 거죠……?”
벨리타는 깨갱 꼬리를 내렸다. 이윽고 예의 그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히끅히끅 우는 소리를 냈다.
“모, 모함이에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말아라.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네가 그럴수록 더욱 가증스러워 보일 뿐이다.”
“후작니임……!”
“그만! 너희 가문의 문제는 나도 관여하지 않으마. 모친에게 답신이 오는 대로 너의 다음 행선지를 알려주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상황을 보니 하이락에 돌아가긴 무리인 듯하니, 다른 거처를 구해 주겠단 뜻이다! 더는……, 너를 내 저택에 둘 수 없다.”
“어, 어떻게 저한테, 대체 왜요? 제가 가엽지도 않으세요?”
“너야말로 하녀들이 가엽지 않더냐!”
“귀족과 하녀가 어떻게 같단 건가요!”
벨리타는 절규했다.
지그문 후작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신이시여. 이게 악몽이라면 이제 깨어나고 싶습니다. 벨리타, 저 아이는 제게 악몽 그 자체입니다.’
지그문 후작은 비정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꿈이었던 작은 소녀는 벗어나고 싶은 악몽이 되었다. 어째서 저에게 이런 시련이 들이닥친 것일까. 만약 에이든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진실을 모른 채, 백작 모녀에게 이용당했을 거란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2권에서 계속>
- 공금 by Jira
절대복종 2권
- 공금 by Jira
지은이: 심약섬
펴낸이: 김기철
펴낸곳: 텐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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