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번식의 계절 上
“오늘도 이게 다야?”
“네, 아가씨.”
“퍽퍽한 빵에 고기, 수프가 전부라고? 디저트는?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은?”
챙!
침실로 도착한 식사를 본 벨리타는 나이프를 집어 던졌다. 앤은 잽싸게 나이프 주워들어 냅킨으로 닦았다. 본래 지그문 후작은 매일 벨리타에게 용돈을 줬었는데, 환영회 이후로 용돈은 끊긴 지 오래였다. 거기다 벨리타는 침실 밖으론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내가 죄인이야? 왜 멀쩡한 정찬장을 놔두고 방에 박혀서 식사를 해야 하느냐고!”
“후작님의 화가 풀리기 전까진…….”
앤은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며 살살 벨리타를 어르고 달랬다.
“내가 뭘 잘못했단 건데?! 망할 것아!”
벨리타가 빽 소리치다 돌연 눈물을 터트렸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에 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드디어 실성했나? 또 어찌나 처량하게 우는지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으, 흐윽. 흐어어엉!”
그 순간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벨리타.”
지그문 후작이었다. 복도를 걷다 그녀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그만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럼 그렇지.’
앤은 벨리타의 소름 끼치는 명연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일 있느냐?”
지그문 후작이 심약해진 얼굴로 물었다. 벨리타는 훌쩍훌쩍 눈물을 닦으며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녀는 파들파들 어깨를 떨고 있었다.
“흐윽, 저, 저한테 돈 한 푼 쓰기가 그렇게 아까우셨나요?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요.”
지그문 후작은 테이블 위에 차려진 식사를 보고 푹 한숨을 쉬었다. 검소하긴 했으나 질 좋은 재료로 만든 요리들이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사람이 못 먹을 음식을 손님에게 대접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반성하는 모습이라도 보이길 바랐건만.’
“나는 이미 너희 모녀에게 신뢰를 잃었다.”
지그문 후작이 체념한 말투로 말했다.
벨리타는 지그문 후작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착한 아이가 될게요. 제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아버지를 잃고, 황후 마마께 미움을 사고, 그런데 우리 가족을 괴롭히던 사생아와 이곳에서까지 함께 지내야 한단 생각에…….”
“그건 이번 일과는 상관없는 문제다.”
지그문 후작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하, 한 번만 제게 기회를 주세요.”
그 자존심 높은 벨리타가 어찌나 서럽게 빌던지, 이를 지켜보던 후작가의 하녀들조차 마음이 약해졌다. 지그문 후작은 고민에 잠겼다.
“정말로 네가 반성하고 있다면, 우리 북부인들에게 다시 신뢰를 얻고 싶다면 말이다. 당분간 데본 부인의 집에서 머무는 건 어떻겠느냐?”
“……뭐라고요?”
“아픈 아들과 단둘이 살아가는 노부인이다. 아들의 부인이 도망을 가는 바람에 모자 둘이 생활하고 있지.”
“그, 그럴 수가. 설마……, 싫어요.”
노모와 아픈 아들이라면 지난 환영회 때 아내를 돈으로 산 그 모자가 아니던가? 심지어 아내도 도망쳤다고 들었다. 그런 괴팍한 노친네 밑에서 살라고? 벨리타의 오만한 자존심에 흠집이 났다.
“어떻게 저를 이 추운 날……!”
“너를 길바닥에 내쫓겠단 게 아니잖느냐. 그레제 백작 부인에겐 며칠째 답장이 없고, 마침 데본 부인도 널 돌봐주겠다 응하셨다.”
“저 없이 그런 대화를 나눴다고요?”
“벨리타, 아직도 네가 후작가의 귀빈처럼 느껴지느냐? 그렇다면 큰 착각이다. 그리고 물건은 그만 집어 던지면 좋겠구나.”
지그문 후작은 테이블 위의 나이프를 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그렇게 벨리타는 후작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 * *
“하아. 허억. 헉.”
앤은 혼자서 가방 두 개를 들고 언덕을 걸었다. 반쯤 실성한 얼굴의 벨리타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데본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
“아가씨, 여기예요.”
“이게…… 사람 사는 집 맞아?”
벨리타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택이라는 말이 무색한 회색 벽돌로 쌓아 만든 코티지(시골 풍의 작은 집)였다. 귀족의 요양 별장이라면 모를까 주거 공간으론 보이지 않았다. 잡초가 무성한 앞마당에 들어서기 무섭게 닭똥 냄새가 진동했다.
“우윽.”
벨리타는 대놓고 헛구역질을 했다.
데본 가(家)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자작 가문이었다. 자식들이 전부 전염병으로 죽고 노모에겐 모자란 막내아들만 남아 있었다. 며느리는 도망친 지 오래였고.
“실례합니다, 데본 부인.”
벨리타를 대신해 앤이 집주인을 불렀다.
“왔구나.”
낡은 문이 끽끽 비명을 지르며 아가리를 벌렸다. 그 안에서 노모와 아들이 나왔다. 고약한 심성이 노부인의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에 잔뜩 껴 있었다. 아들 쪽은 허우대는 멀쩡했지만, 눈은 멍청하게 풀려 있었고 입 주변엔 부스럼이 붙어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입술 아래로 뚝뚝 침이 흘렀다.
“헤헤. 색시다. 색시.”
“꺄악! 누가 당신 아내란 거야? 이 손 치우지 못해?!”
벨리타는 소리를 지르며 멍청한 아들의 손을 찰싹 내리쳤다.
“으어엉! 내 소온……!”
“이이, 악독한 것, 우리 귀한 아들한테 무슨 짓이냐?”
노모가 지팡이로 벨리타의 몸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벨리타는 어안이 벙벙했다. 태어나 처음 당해 본 손찌검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분노가 들끓었다.
“부, 부인! 부인! 죄송해요. 아가씨께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세요!”
보다 못한 앤이 노모를 진정시켰다. 뭐? 제정신이 아니야? 미친 게 누군데? 벨리타는 그런 앤을 쏘아봤다. 벨리타의 사나운 눈빛에 앤은 별수 있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백작가의 여식이라고 콧대 세울 생각 마라.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지금 너희 가문의 상황이 어떤지쯤은 알고 있어! 마구간에서 재우기 전에 고분고분 지내는 게 좋을 게다.”
노모는 휙 등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식모로 왔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시, 식모? 나는 벨리타예요. 벨리타 그레제라고! 백작가의 영애가 왜 자작가의 식모살이를……!”
“그럼 맨입으로 받아줄 줄 알았어?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닭장 관리를 해라. 오전에 시장으로 나가 달걀을 팔고, 밀가루를 구해 오거라. 그게 너희가 할 일이다. 일급은 1데르크를 지급하마.”
1데르크라니. 하녀의 하루 평균 일당이 5데르크였다.
“어, 어머니는요? 우리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당신들 다 가만 안 둘 거야! 북부인들은 다 제정신이 아닌가 보지?”
노모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네가 연락을 해 봐야지. 편지 정도는 부쳐주마.”
“이, 일단 오늘은 쉬어요, 아가씨. 계속 걸으셨잖아요.”
보다 못한 앤이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했다.
두 사람은 당분간 지낼 침실로 들어왔다.
“양초가, 양초가 어디 있담? 아. 찾았다.”
먼지가 가득 낀 방은 조명이 없어 캄캄했다. 앤은 반 토막만 남은 양초에 불을 켜서 방 안을 밝혔다. 천장엔 거미줄이 가득 쳐 있었고, 바닥엔 밀짚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작은 침대가 하나, 그리고 다 망가진 매트가 구석에 깔려 있었다.
앤은 그것을 보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침대는 아가씨께서 쓰세요. 저는 바닥에서 잘게요.”
그녀의 큰 선심에도 불구하고 벨리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게 현실일 리 없어……!’
으으으윽! 아아악!
벨리타는 낡은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비명을 질렀다.
* * *
한편.
그레제 백작가의 타운 하우스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백작 부인, 이 태피스트리도 경매장에 내놓을까요?”
“그래. 내가 말했잖니. 전부 내놓으라고.”
“하, 하지만 이건 지난겨울 선물 받은 태피…….”
“아아악! 제발 나 좀 내버려 둘 수 없니?”
백작 부인이 발작하며 소리치자 하녀는 태피스트리를 들고 후다닥 도망쳤다. 타운 하우스의 1층은 경매장에 보낼 물건으로 가득해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치 이곳에 처음 이사 온 날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이 물건들이 전부 집을 떠날 거란 사실이었다.
“하아.”
비릴리안은 털썩 소파에 앉았다. 주름 한 점 없던 그녀의 얼굴은 요 며칠 사이 폭삭 늙어 있었다.
“어머. 내 얼굴 좀 봐. 요즘 관리를 못 받았더니…….”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추던 비릴리안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도 오늘 경매만 잘 끝난다면, 몇 달 치 생활비는 마련할 수 있어. 1년 뒤엔 영지 상황도 나아질 거고, 산출량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면 빚도 모두 탕감하게 될 거야.’
비릴리안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남편이 죽기 전 수집품을 남겨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레제 백작은 세계 각지를 오가며 고가의 예술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젊을 땐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었지. 비릴리안의 눈동자가 추억에 잠겼다.
“죽어서도 우리 모녀를 도와주는 건가요, 당신. 후후.”
쭉 살아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역시 집안에는 기댈 수 있는 남자가 있어야 했다. 비릴리안은 이번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수도를 떠날 생각이었다. 자신은 아직 아름다우니 재혼이 어렵진 않을 것이다.
시골에서 요양 중인 돈 많고 늙은 귀족이라면 금상첨화다. 수도의 화려한 생활에 미련이 많이 남았으나, 저를 비웃는 귀족들과 부대껴 지내느니 촌마을에서 여왕 노릇을 하는 편이 성미에 맞으리라.
‘오물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줄 알아?’
비릴리안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나저나 우리 딸은 잘 지내고 있을까? 날 닮았으니 걱정은 없지만. 그곳에서 괜찮은 신랑감 하나만 구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백작가의 타운 하우스가 경매 준비로 정신이 없을 무렵.
“그레제 백작가에 도착한 편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한 낯선 사내가 집배원에게 말을 걸었다.
“마침 잘되었군요. 저는 백작가의 사용인입니다. 제가 마님께 직접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경매에 내보낼 물품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집배원은 아무런 의심 없이 편지를 건네줬다. 벨리타가 보낸 편지였다. 집배원이 사라지자 낯선 사내는 성냥을 꺼내 편지를 불태웠다. 불에 탄 편지가 쓰레기처럼 나뒹굴다 바람에 바스러졌다.
* * *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레인디아는 햇빛이 잘 드는 1층 거실에서 에이든과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사실 즐긴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딸기잼이 발린 달콤한 스콘이 접시 가득 쌓여 있었지만 레인디아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는 건 에이든뿐이었다.
“경매에서 사들인 물건들이 도착한 모양이야.”
달그락.
에이든은 마시던 홍차를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레인디아는 슥 창밖을 바라봤다. 저택에 고가의 회화 몇 점이 도착했다. 사용인들이 마차 안에서 새하얀 천에 싸인 그림을 꺼내 나르는 중이었다.
“확인하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겠어?”
레인디아는 고개를 돌려 에이든을 바라봤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의뭉스러운 미소. 또, 외면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짙은 애정이 녹아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한다. 레인디아는 고개를 숙여 그 무거운 감정을 회피했다. 그런데도 에이든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무슨 연유에선지 최근 에이든은 바빠 보였다.
밤마다 조용히 침실을 떠날 때도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레인디아를 꼭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지만. 또 하루에 서너 번은 갖던 잠자리 횟수도 부쩍 줄어들었다. 최근 이틀간은 제 몸에 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들을 제외하면 전과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다정했다.
‘……변한 것은 사실이야.’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었다. 지금 따라가면 알 수 있을까?
‘잠깐. 내가 왜, 궁금해하는 거지?’
레인디아는 살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한편으론 당연한 의구심이었다. 어쩌면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생긴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처절한 좌절감은 맛본 그녀는, 이번에도 에이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건 아닌지 두려워졌다.
“……같이, 갈래요.”
순순히 에이든을 따라 몸을 일으킨 것은, 아직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에이든의 작은 변화가 신경 쓰였기 때문일까.
대답할 수 없는 의문들이 잇달아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아틀리에였다.
실로 오랜만에 방문한 아틀리에는 이전보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다른 장소 같았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던 대리석 바닥은 천장의 샹들리에가 비칠 만큼 반들거렸다. 그리고 완성된 초상화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전부, 내 얼굴이잖아.’
자신의 얼굴로 둘러싸인 공간에 서 있으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저 초상 속 여인들이 자신을 대신해 주면 좋을 텐데. 그림을 잡아당기면 바깥으로 빠져나올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졌다. 반면, 살아 있는 레인디아의 눈은 꺼져버린 촛불 같은 공허함으로 가득했다.
“디아가 온실에서 브로치를 만드는 동안, 나도 아틀리에에서 초상화를 완성했어. 마음에 들어?”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허리에 살며시 팔을 감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레인디아는 그의 단단한 몸에 뺨을 기댄 채 섰다. 그녀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에이든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하이락에서 그림 몇 점을 사들였어. 마침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경매에 올라왔다기에.”
그래서 이따금 자리를 비웠던 것이구나.
의문은 해소되었으나 어딘가 알게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사이 사용인들은 포장을 풀고 이젤 위에 오늘 도착한 그림을 설치했다. 레인디아는 그림을 보고 나서야 그 불안한 감정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건.”
“디아도 아는 작품이야?”
작가는 모른다. 하지만 눈에 익은 화풍이었다. 완벽하게 기억하진 못해도, 틀림없이, 분명 그레제 백작가의 저택에 걸려 있던 그림이었다. 특히 중앙에 있는 그림은 직접 청소한 적이 있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온몸에 핏기가 싹 가시는 듯했다. 레인디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이, 그림이, 왜. 잠깐만요. 경매……, 라고요?”
레인디아는 더듬더듬 물었다.
“아아. 생각해 보니, 그레제 백작가에서 내놓은 물건이었어.”
에이든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새침을 떨었다. 레인디아는 그를 밀치며 뒷걸음질 쳤다.
“무,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레인디아는 경악하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은 뒷짐을 진 채 그림을 응시하다 휙 몸을 틀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레인디아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에이든의 구두 굽이 표면을 박찰 때면 대지가 진동하는 듯 골이 울렸다. 레인디아는 매스꺼운 배를 부여잡았다. 에이든이 그녀의 턱을 잡아 들었다.
“디아는 쭉 백작가를 그리워했잖아. 마침 그곳에서 물건을 내놓았다기에 그림 몇 점 사 왔을 뿐이야. 조금이라도 이곳 생활이 편안하길 바랐어. 그게 잘못인가?”
“억지로 빼앗은 게 아니라요?”
“합법적으로 구매한 거야. 못 믿겠다면 증명서를 보여줄,”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분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에이든이 집사장을 부르려 손짓하는데, 레인디아가 그의 팔을 꽉 붙잡고 소리쳤다. 에이든은 그녀를 빤히 보다가 바깥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아틀리에 안에 있던 사용인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화실 안에는 에이든과 레인디아뿐이었다. 그리고, 레인디아의 초상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묘한 한기에 레인디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이든이었다.
“디아, 누가 들으면 내가 백작가에 해코지라도 한 줄 알겠어.”
에이든은 푸스스 웃으며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다.
“그, 그럴 거잖아요. 그러실 거잖아요……!”
레인디아가 절망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다소 격한 질문에 에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레인디아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역시, 이 남자는 자신을 감금한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거다. 레인디아는 한 걸음 물러나 젖은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어떻게 해야 에이든의 미친 집착을 멈출 수가 있을까.
레인디아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저는 사생아예요.”
레인디아에게 팔을 뻗던 에이든이 우뚝 멈췄다.
“에, 에이든 님은. 당신은, 가짜일 뿐 아니라, 더러운, 사생아를, 죄의 아이를…… 곁에 두시는 거라고요. 다, 단순히, 평범한 하녀가 아니라, 저는……!”
헉, 헉. 조금 언성을 높였을 뿐인데 열감기에 걸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슴은 미친 듯이 뜀박질했다.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들이 용솟음쳤다. 레인디아는 다른 사람에 비해 고통을 견디는 역치가 높았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작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차분히, 순종적으로, 에이든의 집착을 버텨왔다. 그것이 타고난 성품 때문인지,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였다.
이미 모든 것이 포화 상태였다. 한계까지 차오른 것은, 결국 넘쳐흐른다. 그렇게 형체가 무너지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흐으, 으, 하아, 하.”
레인디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헐떡였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었다. 얇은 입술은 물기에 젖어 파들파들 떨렸다. 어쩜 저리도 처연한 모습인가. 가냘픈 여체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에이든은 이대로 그녀를 붙잡아서 으스러지게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다음엔 입술이 닿는 모든 곳에 입맞춤을 퍼부어주고 싶었다.
에이든이 충동을 실행에 옮기려 할 때였다.
“이제 만족하시나요?”
레인디아는 깊은 원망을 담아 되물었다. 눈을 마주치면 남자는 어떤 표정으로 저를 바라볼까? 틀림없이 경멸하는 듯이 바라보겠지. 그녀는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그래. 디아가 사생아라고?”
경멸? 아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에이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한 웃음은, 마치 천사의 형상을 본뜬 듯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의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에 레인디아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역광이 짙어지는 만큼 에이든의 앞모습이 어두워졌다. 그런데도 찢어질 듯 올라간 저 입술과 가늘게 휜 눈꼬리만은 또렷이 보였다. 오랜 세월 숨겨온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발가벗겨졌는데, 손가락질을 하거나 경멸하기는커녕 미친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대체…….’
레인디아는 현기증이 일었다. 바닥이 흔들리는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에이든은 한쪽 팔로 무너지는 레인디아의 몸을 가뿐히 감싸 안았다.
“조심해야지, 디아.”
“……하아, 하.”
결국, 이 남자의 앞에서 스스로 과거를 폭로했다.
내밀한 비밀까지 낱낱이 발가벗겨졌지만, 수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이로 인해 떨어질 그레제 백작가의 평판이었다. 무엇보다 그레제 모녀가 걱정됐다. 이 악의 화신과도 같은 남자의 검은 마수가 그들에게 뻗쳤을까 두려웠다. 어째서? 어째서지? 잘못한 것은 나인데, 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사실은, 알고 있었죠?”
하지만 가장 끔찍한 사실은, 에이든이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단 사실이었다. 그의 태도가 말해 주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레인디아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자꾸만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에이든은 그런 레인디아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그래.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디아의 과거를 억지로 캐낸 건 미안해. 하지만 직접 말해 주길 바라서 기다렸어. 그리고, 정말 기뻐.”
에이든은 레인디아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레인디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비밀은 나와 디아만 아는 거지? 우린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된 거네. 있잖아, 디아. 나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하나,”
“됐어요!”
레인디아는 온 힘을 다해 에이든을 밀쳐냈다.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니. 그런 낭만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자신과 이 남자는. 그래, 차라리 포식자와 피식자란 말이 더 잘 어울렸다. 레인디아는 덜덜 떨리는 두 팔로 제 여린 육신을 꽉 끌어안았다. 팔에 젖가슴이 짓눌려 숨이 막힐 만큼 힘껏.
“더,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비밀 같은 거,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할 리 없잖아요!”
“흥분했구나. 괜찮아. 몸이 진정되는 약이라도 지어줄까? 검증된 약이기 때문에 후유증은 없어.”
에이든은 무릎을 굽혀 앉은 채 차분히 대답했다.
“싫다고 했잖아요!”
약, 그놈의 약! 레인디아는 절규했다.
“디아가 이 정도로 화내는 모습은 처음 봐.”
에이든은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렸다. 이윽고 구겨진 미간이 펴지더니, 그의 얼굴엔 더 없는 황홀감이 번졌다. 에이든의 목소리는 너무나 들떠 있었다.
“디아는 화를 내는 모습도 아름답구나.”
레인디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에이든은 기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텅 빈 껍데기처럼 얌전하던 레인디아가 다시 활력을 찾은 거라 믿는 얼굴이었다.
활력이 돌아온 건 맞았다. 에이든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했기에. 레인디아는 에이든을 원망했다. 그런데, 에이든은 그녀의 증오마저 황홀하게 받아들였다. 저에게 향하는 것이라면 증오든, 원망이든, 상관없단 듯이.
“역시 디아가 이렇게 나를 똑바로 바라봐 줄 때가 가장 기쁜 것 같아.”
아아. 디아. 나의 디아. 활어처럼 펄떡이는 널 원해. 살아서 비명을 지르는, 그렇게 나에게만 복종하는. 너의 모든 희로애락이 오직 내게만 향하길 원하는 거야, 나는.
그 새빨간 두 눈이 레인디아의 몸을 휘감았다.
원망이 절망으로 변질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절망은 무력감을 동반했다.
“당신은, 미쳤어요.”
“새삼스럽게.”
에이든은 구겨진 옷을 털어내며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독실한 신자처럼 무릎을 꿇은 채 접혀 있던 육신이 끝을 모르고 늘어났다. 오늘따라 그의 거대한 체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마치 이 넓은 아틀리에를 가득 채울 것처럼.
“디아가 과거를 고백한 이상 우리의 관계는 절대 돌이킬 수 없어.”
“당신이 유도한 거였잖아요……!”
힘껏 소리치던 레인디아는 이윽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왜, 제 처지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건가요. 저는…….”
어깨 위로 남자의 거대한 두 손이 내려앉았다.
“그래, 이해해. 그래서 디아의 잘못된 신념을 바로잡아주려는 거야. 제국에서 연좌제는 폐지된 지 오래야. 그건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아직 구시대의 잔재가 우리의 양심에 남아 있기에, 죄가 대물림된다는 믿음이 이어질 뿐이고.”
레인디아의 귓가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쩌적, 쩌적.
영혼이 조각나는 소리였다.
에이든의 한마디 한마디가 레인디아의 가슴에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그는 레인디아가 살아온 삶을 정면에서 부정한다. 깊게 뿌리내린 신념이 얄팍한 무언가에 지나지 않음을 까발린다. 레인디아는 사창가에 팔려 올 무렵으로 돌아간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감히 빌었다. 인간의 노력으론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절대 악을 향해.
납작 엎드렸다.
“에, 에이든 님의 말씀이 다 맞아요. 제가, 저 혼자 속죄에 집착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두 분은 건들지 마세요. 백작가는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제발, 부탁드려요…….”
“디아, 믿어줘.”
에이든의 두 팔이 뱀처럼 레인디아의 몸을 감쌌다. 그녀의 육신을 가둔 두 팔은 흥분감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나는 그레제 백작가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직은.
그 속삭임을 끝으로 레인디아는 의식을 잃었다.
* * *
‘설마 거기서 기절할 줄은.’
레인디아는 어느 때보다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잠들어 있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모양이지. 에이든은 캐노피 침대를 커튼으로 빙 두른 뒤 밖으로 나왔다. 집사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아틀리에로 향했다.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스트레스가 컸나 봐.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 내 앞에서 과거를 인정했으니 그다음은 더 쉬울 거야.”
“수도에서 학자를 데려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가씨의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자들을 추려서 말입니다.”
“아니?”
에이든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야 하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딱히 레인디아의 영혼이 건강해지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럼 무엇을…….”
집사장이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에이든은 우뚝 멈춰 섰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에이든은 자문(自問)했다.
내가 디아에게 원하는 것. 처음에는 그저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게 그 내밀한 살가죽을 빨아들이고, 자국을 남기고, 안으로 파고드는 육체적 행위 또한 기뻤다.
하지만 가장 원하는 게 있다면.
“나에게 매달리길 원해. 몸도 마음도 내게 종속돼서,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한다면 최고지.”
등줄기가 오싹거렸다. 그것을 상상하자 아득한 황홀감이 육신을 휘감았다. 전장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쾌감에 숨이 가빠졌다. 에이든은 천천히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망가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야. 디아가 한동안 말수가 적어졌을 땐 마음이 아프더라고. 역시 알 수가 없네. 사랑이란 건. 너무 어려워.”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지도 않아.
에이든은 천진하게 후후 웃으며 떨리는 가슴을 문질렀다.
“감정을 마쳤습니다, 에이든 님.”
“그래.”
이윽고 아틀리에의 문이 열렸을 때, 감정사들이 에이든에게 보고서를 건넸다. 에이든은 보고서를 속독한 뒤 앞주머니에서 모노클을 꺼내 착용했다. 그리고 그림을 한 점 한 점 찬찬히 확인했다.
“음. 확실해.”
“예. 모두 모조품입니다.”
“작가 본인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그림을 베꼈어. 또 화풍은 다르지만 한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완성한 모양이야. 작업장은, 바닷가인가?”
“예? 그런 것까지 알아내신 겁니까?”
“사용된 물감과 붓질의 흐름. 그리고 물감의 변색이 동일하게 이루어졌고, 캔버스의 빛바랜 정도를 보면 알 수 있지. 미세하지만 불순물도 섞여 있는데 해변의 모래야.”
에이든은 모서리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수도에 익명으로 제보하도록 해. 그레제 백작가에서 수십 점의 모조품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이것만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보고에 따르면 그레제 백작도 꽤 허영심이 강했던 모양이더군. 타운 하우스를 장식한 예술품은 대부분 복제품이었을 거야. 아마 부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이를 경매에 부쳤겠지.”
아마 그레제 백작은 모조품을 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타운 하우스를 찾아온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사들였을 뿐. 수도에서 이런 경우는 더러 있었다. 사실 제국법상 모조품을 구매한 것엔 처벌이 따르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팔았을 때. 모조품이란 사실을 알든 모르든 간에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된다.
“에이든 님, 지금 막 도착한 산첼로 경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오늘은 선물이 많이 도착하는군. 마치 생일 같은걸.”
에이든은 무감이 중얼거리며 편지를 건네받았다. 사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생일을 축하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매해 그가 있던 구동궁(舊東宮)에 선물이 도착했다.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협박 편지와 피가 묻은 단도라든가 하는 것들이.
“발신지가 동부인가?”
동부는 현재 4년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 레인디아의 과거에 대한 실마리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읽어내려간 편지는 황무지에서 건져 올린 값비싼 광물과도 같았다.
“아아.”
작은 탄식이 터졌다. 에이든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기쁨에 전율했다. 그의 유려한 입매가 사악하게 말려 올라갔다. 두꺼운 살가죽 안에서 웃음소리가 바스러졌다.
“하하.”
팔을 바로 하고도 웃음이 실실 흘렀다.
“희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레제 백작이 재혼했다는군. 첫 번째 아내의 본가가 동부에 있었던 모양이야.”
“그렇다는 건……! 하지만 전쟁으로 교구에서 보관 중인 결혼 증명서는 모두 불타 없어지지 않았을까요?”
“뭐, 증서야 위조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되도록 합법적으로 처리하고 싶어.”
조금 전 저를 탓했던 레인디아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위조한다면 멍청한 그레제 백작과 달리 완벽하게 해낼 자신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양심의 문제였다.
양심? 나에게 그런 것이 있던가? 에이든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윽고 자신의 기묘한 변화를 납득했다.
‘나도 너에게 영향을 받은 모양이야, 디아.’
사랑한다면 닮는다더니. 지금은 에이든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지만. 그는 언젠가 레인디아가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증서는 전부 불타 없어져도 사람은 남아 있겠지.”
“그렇군요. 아마 백성들은 대부분 피난을 하였을 테니. 교구 성직자의 증언이라면 충분할 겁니다. 공신력도 있고 말입니다.”
에이든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운이 좋다면 혼전 계약서를 찾아낼 수도 있었다. 혼전 계약서의 경우 중앙 금고에 따로 보관을 해뒀기 때문이다.
“산첼로 경이 얼마나 빨리 증인을 확보하느냐가 관건이겠군요.”
“믿어. 황후가 붙여둔 개니까.”
아무리 멍청해 보여도 맡은 일엔 충실했다.
‘죽이지 않고 살려두길 잘했어. 언젠가 쓰임이 있을 거라 믿었지.’
에이든은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편지를 좍좍 찢었다. 준비해둔 계획이 착착 들어맞았다. 이제 에이든의 제보로 그레제 백작가에서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산첼로가 확보한 증인이 수도로 도착하겠지. 마지막으로, 오늘날 신성 솔레디온 제국의 최고 권위자인 황후가 주관하는 명예재판을 통해 그레제 백작 부인을 단두대에 세울 계획이었다.
‘이것을 위해서 지난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
이젠 레인디아를 마음껏 사랑해 줄 일만 남았다.
“이만 모두 나가보도록.”
에이든의 말에 집사장이 감정사들을 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초상화가 걸린 벽 쪽으로 걸어갔다.
“진짜 너는 아직 잠들어 있겠지?”
에이든은 초상을 보며 물었다. 초상화 속 레인디아는 따사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따뜻한 미소로 날 봐줄 날이 머지않았어.”
눈을 감은 에이든의 입가에 황홀한 미소가 번졌다.
* * *
‘어쩌면 우리 그이. 너 때문에 죽은 건지도 몰라.’
그레제 백작의 장례식을 마친 다음 날이었다.
그레제 백작은 언제부터인가 밤마다 악몽을 꾸고 깨어나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결국 낙마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죽음으로 백작가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비릴리안은 날마다 초췌해졌고, 벨리타 또한 아버지를 잃은 충격으로 하인들을 못살게 굴지 않았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남편의 죽음마저 레인디아를 탓했다.
‘역시 사창가에서 너를 데리고 나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자신을 갖고 놀던 악랄한 여자를 닮은 하녀가 눈앞을 돌아다니니 병이 깊어졌단 것이다. 물론 백작 또한 레인디아가 자신의 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생전 레인디아를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만큼 증오스러웠던 것이겠지.’
레인디아 또한 백작을 아버지라 여긴 적이 없었다.
어떻게 감히.
그래서 늘 백작의 눈을 피해 조용히 일해 왔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의 죽음에 어떻게든 관여하고 있었다. 백작이 죽고 백작가의 사정은 나날이 안 좋아졌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레인디아는 백작가의 불행이 마치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아 늘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이 지은 태초의 죄가 백작가에 불행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그러한 잘못된 믿음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만약, 이번에도 나 때문에 백작 부인과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나는…….’
이제는 더 짜낼 눈물도 없었다.
레인디아는 시큰거리는 눈을 감은 채 코를 훌쩍였다. 그때, 누군가 침대의 커튼을 걷어냈다. 그 남자였다. 너무나 증오스럽고 두려운 사내. 동시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탑과도 같은 남자였다.
“일어났어?”
다정한 음색에 애꿎은 고막을 벅벅 닦고 싶었다.
“아직 밤이야. 조금 더 자는 편이,”
“다, 당신이 곁에 있는데,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레인디아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요즘 통 잠을 못 잤지?”
에이든이 꿰뚫어 보듯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레인디아의 시선이 황망하게 흔들렸다.
최근 날마다 에이든이 밤중에 침대를 떠났던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잠이 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에이든이 두려워 늘 자는 척을 했었다. 그전에는 어땠더라? 정사가 끝나면 거의 기절하듯 아침까지 잠들었다. 그렇다는 건, 최근 불면증에 시달린 이유는…….
‘에이든이 날 안아주지 않아서?’
레인디아는 꾹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기본적 욕구인 숙면마저 이 남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얼굴, 이름, 숨기고 싶던 과거, 모든 걸 빼앗겼다. 나중엔 그가 대신 숨까지 쉬어주는 건 아닐까 오싹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너무 격하게 다룬 것 같아서 당분간 쉬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관계를 맺는 쪽이 디아의 숙면에 도움이 됐는지도 모르겠네.”
에이든은 중얼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싫어.”
레인디아는 뒤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침대 헤드에 등이 막히고 말았다.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뿐 같은 짓의 반복이다. 도망치는 자신과 쫓아오는 이 남자. 포식자와 피식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복종시키는 자와 복종하는 이. 애초부터 뒤집힐 수 없는 관계라는 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에이든이 살며시 이마를 맞대왔다.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건 슬퍼, 디아.”
“……흣.”
어째서인지 그는 곧장 입을 맞추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떨리는 시선을 굴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마치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오두막처럼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뒤집을 수 없는 관계인데, 주도권은 에이든에게 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이따금 그는 이토록 애처로운 눈빛으로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처럼.’
레인디아는 누군가 심장을 잡아 비트는 것 같았다.
“나는 디아가 계속 내 곁에 있길 바랐어. 삶을 포기하길 원한 게 아니야. 하지만 최근의 디아는 모든 게 질린단 듯이 반응하고, 오직 내 밑에 깔려야만 이 예쁜 목소리를 들려줬지.”
에이든은 살그머니 그녀의 목을 엄지로 문질렀다.
“내가 너무 강하게 의지를 꺾어서 영혼이 죽은 걸까 생각했어. 하지만 육체와 정신을 나누는 건 이분법적 사고일 뿐이야.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아니야. 둘 중 하나만 고장이 나도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일까? 레인디아는 긴장했다.
“결국, 몸이 이어진다는 건 언젠가 마음도 이어진다는 것.”
에이든의 두 눈이 시뻘겋게 번뜩였다.
“오늘부터 다시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거야.”
그의 손바닥이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었다.
“하나가 되자, 디아.”
두 마리에 이어 이제는 하나인가.
몸도, 마음도, 육신도, 영혼도, 모든 것을 제게 종속시키겠다는 듯이. 남자의 목소리는 송곳처럼 레인디아를 꿰뚫었다.
‘안 돼.’
거부할 새도 없이 레인디아는 그 거대한 파도에 잠식됐다.
끽-, 끽-!
캐노피 기둥까지 흔들릴 만큼 침대가 덜컥댔다. 에이든은 그 어느 때보다 격하게 레인디아의 밑을 파고들었다. 벌어진 보지 안이 얼얼했다. 쇳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 으응, 아……!”
“보여, 디아?”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뺨을 밑으로 잡아당겼다.
“내 자지가 디아의 안을 들락날락하고 있어.”
“으, 아아, 흐윽……!”
“하지만 아무리 격하게 흔들어도 귀두가 걸려서 빠지지 않아. 모든 것엔 형태에 따른 쓰임이 존재해. 내 몸은 디아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
에이든은 깊숙이 좆을 찔러 박았다. 도돌도돌한 내벽이 귀두 모양을 따라 짓이겨졌다. 에이든의 페니스는 남성성 그 자체였다. 여체를 함락시키고 길들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릎을 꿇은 채 손바닥을 비비는 것과 비슷했다. 암컷의 자궁이 달아올라 임신에 적합한 몸이 될 때까지 빌고 또 비는 것이다.
제발 나의 씨를 잉태해달라고.
“큭.”
사정감이 밀려오자 에이든은 페니스를 쑥 끄집어내 흔들었다. 레인디아는 몸을 돌려 엉금엉금 앞으로 도망쳤다. 실룩대는 엉덩이 위로 씨물이 걸쭉하게 쏟아졌다.
“흐으, 흐으윽.”
“도망가지 마, 디아. 이리 와.”
사정을 마친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레인디아는 풀썩 쓰러져 질질 끌려갔다. 이윽고 두툼한 귀두가 엉덩이골을 쓰다듬으며 내려가 질구에 푹 쑤셔박혔다.
“아아……!”
“어차피 디아는 내 손바닥 안이야. 알고 있잖아?”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등 뒤에 바짝 달라붙어 개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사정을 마치고도 그의 페니스는 죽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단히 솟아올랐다. 두 짝의 덜렁대는 고환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정액을 가득 품은 채 레인디아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내리쳤다.
“뒷모습도 사랑스러워.”
에이든은 슥 상체를 들었다. 그러곤 엉덩이를 바짝 세운 채 붉은 페니스를 삼킨 레인디아의 자태를 찬찬히 감상했다. 고혹적인 동시에 황홀한 뒤태였다. 한 줌도 되지 않는 가는 허리로 최선을 다해 제 좆을 품어준다. 잘록한 허리와 달리 넓은 골반은 그녀가 아이를 낳기 적합한 몸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 내밀한 공간. 페니스로 마구 찌르고 있는 안쪽은 고작 이틀 동안 관계를 안 맺었을 뿐인데 처녀 적으로 돌아간 듯했다. 눈물 대신 애액을 흘려대며 자지를 물고 빤다. 이렇게 꽉 깨물고 놔주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기특했다.
“으으응, 그만, 흐으, 그, 그만…….”
“정말로 그만하고 싶어? 왜 밑은 내 걸 꽉 물고 안 놔주는 거지? 보지가 좋다고 움찔거리는데.”
“아아, 아니에요, 틀, 려……, 흐읏!”
“질질 흘러. 안에 물이 가득 차서 내가 한 번 박아줄 때마다 찰박거리잖아. 들리지, 디아?”
에이든은 보란 듯이 좆을 쿵쿵 찍어댔다. 붉은 자지가 보지 속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사방으로 물이 튀고 찰박찰박 소리가 들렸다. 레인디아는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듯이 강제로 절정에 다다랐다.
“아아아!”
레인디아는 목을 꺾은 채 신음했다.
‘아니야. 이건, 내 몸이 아니야.’
마침내 레인디아는 자신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이성이 놓아버린 육신은 스펀지처럼 남자가 뿌리는 쾌감을 흡수했다.
“집중해야지, 디아.”
찰싹!
에이든은 발발거리는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그 고통마저 쾌감으로 변해 속살이 흠뻑 젖었다. 볼기짝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에이든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우악스레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속이 비칠 만큼 얇은 피부에 금세 손자국이 찍혔다.
“흐앗……!”
다시 찰싹!
그렇게 양쪽 엉덩이가 사과처럼 붉어질 때까지 엉덩이를 때렸다.
‘뜨거워. 배 안쪽. 기분 좋아. 좋은 곳, 계속 찔러줘서.’
레인디아의 수축하는 질 안으로 좆이 쑥쑥 들어와 속을 휘젓고 나갔다.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절정의 여운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저 납작 엎드린 채 암캐처럼 헐떡이는 게 전부였다. 수치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으으응, 흐읏…….”
“조금 전에 못 했던 얘기 말인데. 내 비밀을 한 가지 알려줄게.”
에이든이 몸을 더욱 가까이 치대오자, 좆이 더욱 깊이 들어왔다. 그가 품은 감정과 무게에 압사할 것 같았다.
“이 저택은 내가 태어난 곳이야.”
“으읏, 흐윽. 아, 아……!”
“전쟁이 끝난 뒤엔 모든 게 허무해졌어. 그래서, 예전부터 세워둔 계획을 실행하러 돌아왔지.”
레인디아의 머릿속은 쾌감으로 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신음을 흘리고 보지를 조이는 것 말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허덕이기 바빴다. 에이든은 그러거나 말거나 황홀한 목소리로 주절댔다.
“여기서 삶을 끝내려 했어.”
순간, 이어지는 속삭임에 레인디아는 정신이 또렷해졌다.
“5년 전엔 실패했거든.”
5년 전이라니……. 에이든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5년 전이라면 미성년이었을 게 분명했다. 많아야 열여덟 정도였을까? 그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니. 레인디아가 그의 나이를 헤아리는데, 에이든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때 내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어.”
“하읏!”
철퍽, 다시 살이 부딪혔다.
“왜, 왜, 어째서, 그런……. 으응, 응!”
“이제야 관심을 주는구나.”
레인디아의 관심을 받으려면 자해라도 해야 하나? 에이든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을 머릿속에 적어두며 계속 허릿짓을 이어갔다.
“그런데 숲에서 디아를 만난 거야. 그제야, 깨달았어. 나도, 하아, 산란을 위해서, 이곳으로 이끌렸단 사실을. 그래, 바야흐로 번식의 계절인 거지.”
에이든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두 팔로 레인디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뚝 안에서 푸짐한 젖가슴이 엉망으로 뭉개졌다. 밑을 찔러오는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설마, 자궁 안에 사정하려는 것일까? 레인디아는 눈을 크게 떴다.
“우리는 짝이야. 운명의 짝.”
“아, 안 돼요, 으응, 안에, 안 돼……!”
“디아, 내가 널 구원해 줄게.”
“아, 아……! 그만, 싫어요!”
“나만이 너를 그 시궁창 같은 인생에서 건져 올릴 수 있어.”
“아으윽……!”
가라앉은 이성이 번뜩 눈을 떴다. 레인디아는 온몸으로 에이든을 거부했다. 그를 밀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비루한 몸뚱이는 벗어나려는 동시에 쾌감에 함락당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좆을 토해내야 하는데 오히려 이리저리 비틀며 사정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리 와.”
“아아!”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한쪽 다리를 잡아 그녀의 몸을 앞으로 돌렸다. 좆이 박힌 몸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다.
에이든은 한 손으로 레인디아의 엉덩이를 받친 채 몸을 일으켰다. 더러운 늪에서 죽어가는 새끼 사슴을 건져 올리듯이. 몸이 뒤로 넘어가려 하자 레인디아는 본능적으로 에이든의 목에 팔을 감았다.
푹, 푹푹! 푹!
에이든은 화답하듯이 마구 좆을 찔러댔다. 좆대를 타고 거품으로 변한 애액이 푹푹 떨어졌다. 레인디아는 다시 이성이 녹아내렸다. 그녀는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허덕였다. 에이든은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을 때까지 계속 페니스를 찔러댔다.
“아으, 아, 안 돼, 안 돼애……!”
바로 그때,
배 안 가득 뜨거운 물이 차올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레인디아의 자궁 안에 에이든의 씨가 뿌려진 것은.
‘거짓말. 거짓말이야.’
배 안이 따뜻해지는 순간 레인디아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에이든은 계속해서 사정했고, 사정하는 내내 허리를 흔들었다. 질내사정을 끝내고도 좆을 뽑지 않은 채 자세만 바꿔 정사를 지속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종국엔 횟수를 셀 수도 없었다. 좆을 찔러 박을 때마다 안에 찬 정액이 주륵주륵 흘러넘쳤다.
“어때, 디아. 너를 끔찍이 사랑하는 남자의 씨를 받은 기분이?”
“끄, 끄으…….”
“옳지. 이번엔 옆에서 쑤셔줄까? 깊이 들어가서, 꼭 임신할 수 있게.”
뚜껑처럼 보지를 막은 좆은 체위를 바꾸는 내내 빠지지 않았다. 에이든은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사정없이 레인디아의 자궁을 치댔다. 배 안에 들어찬 정액은 좆에 쿵쿵 찍혀 거품처럼 변했다. 바글바글해진 정액이 페니스에 묻어 나왔다. 레인디아는 미친 듯이 제 밑을 들락날락하는 육봉을 보다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아, 디아 보지. 하아. 좁아. 엄청 좁고, 따뜻해.”
에이든은 허리를 꾹 질러 박은 채 하체를 부르르 떨었다. 또다시 자궁 가득 정액이 콸콸 쏟아졌다.
“어, 어째서, 흐읏……!”
“언젠가 이 안에 쌀 거라고 말했잖아.”
“흐으, 흐으으…….”
에이든은 정액으로 볼록해진 레인디아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게 바로 오늘이야.”
“마, 말도 안 돼, 거짓말, 이에요. 이건…….”
에이든은 한 손으로 레인디아의 뽀얀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붉은 좆이 박힌 음부는 정액이 덕지덕지 붙어 너저분했다. 에이든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질 안에 사정했다.
“디아는 오늘 임신해버리는 편이 나아.”
“아으으…….”
뽁 소리를 내며 페니스가 빠져나갔다.
에이든이 마지막 사정을 마치고 좆을 뺐을 땐 마치 크림 파이를 으깬 것처럼 정액이 질질 셌다. 소음순은 잔뜩 부르터 있었다. 음부도 채찍에 맞은 듯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얼마나 싼 거지. 세 번, 네 번? 아니, 그것보다 더…….’
“디아. 디아, 날 봐.”
“흐윽…….”
에이든은 억지로 레인디아의 턱을 들어 눈을 맞췄다.
“내가 증명할게.”
그의 붉은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독특한 빛깔로 번뜩였다.
그 광기. 광기 어린 집착. 그리고 뒤틀린 믿음.
“죄를 지어서 불행한 거라고? 네가 사생아라서? 아니야, 틀려. 디아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내가 증명할 거야. 이건 그 시작일 뿐이야.”
에이든은 흘러내린 정액을 모아 레인디아의 안으로 쑥쑥 밀어 넣었다. 레인디아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악몽의 시작이에요…….”
“그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달콤한 악몽이라고 생각해.”
신이 너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면, 나는 기꺼이 악마라도 되어주지.
에이든은 기쁘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