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복종-13화 (13/23)

13. 번식의 계절 下

‘눈부셔.’

아침 햇살이 커튼을 가르며 들어와 레인디아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 광채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일어났어, 디아?”

옆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인디아는 황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박박 훔쳐내고 고개를 들었다. 바지만 입은 에이든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울었네. 또 무서운 악몽이라도 꾼 거야?”

당신이, 당신이 제 악몽이에요. 에이든 헬렌베르크! 당신은 악몽 그 자체란 말이에요. 레인디아는 입 안의 연한 살점을 깨물었다. 밤새 신음해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설령 목소리가 나온다고 해도 에이든에게 화를 내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

그때, 에이든의 손이 그녀의 눈가에 내려앉았다. 굵은 엄지가 부드럽게 눈가를 어루만졌다. 이윽고 에이든의 표정도 괴롭게 일그러졌다. 마치 레인디아의 고통에 공감한단 듯이.

‘아니야. 착각이야.’

이 남자는, 감정이 없어. 아니, 있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 나와는 달라. 레인디아는 속으로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가 어젯밤 자신에게 저지른 짓을 떠올렸다.

“괜찮아, 디아. 내가 곁에 있잖아.”

나비의 날개처럼 부드러운 토닥임이 이어졌다.

“더 잘까? 아니면 정원이라도 걸을까? 햇볕을 쬐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못 걷겠으면 내가 안고 걸을게.”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가슴에 파묻힌 채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이대로 있고 싶어요.”

레인디아는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어 줘요. 제발. 더는 절 괴롭히지 말고요. 레인디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든은 지극정성으로 레인디아의 곁에 붙어 있었다.

* * *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느 때와 똑같은, 이제는 일상이 된 비일상이 이어졌다.

새하얀 천을 덮은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레인디아가 의자에 앉는 순간 배 속에 찬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레인디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에이든은 증명하겠다고 말했다.

그 증명의 시작은 레인디아의 자궁에 자신의 씨물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임신이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단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목소리가 그녀에게 속삭여왔다. 이 남자라면 어떤 여자라도 한 번에 임신시킬 거라고.

두려웠다. 만약, 정말로 임신을 하게 된다면…….

이곳을 떠나는 대로 아이를 지워야 했다. 아니, 아이를 지우기 위해 하루빨리 도망쳐야 했다. 아기집이 자리 잡기 전이라면 산파를 찾아가 유산하는 약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인디아는 밋밋한 배를 부여잡은 채 어떻게든 계획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때, 하녀가 레인디아의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저, 홍차는, 마시고 싶지 않아요.”

찻잔을 보던 에이든이 슥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눈과 시선이 교차했다. 레인디아는 뒤늦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너무 뜨거워서…….”

“아아, 그래.”

에이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녀를 대신해 찻잔을 옆으로 치웠다.

“배 속의 아이에게 홍차가 안 좋다는 얘기가 있으니까.”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마음을 간파한 듯 씩 미소 지었다.

레인디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틀림없이 지워야 하는 아이인데도, 그녀의 본능이 아이를 살리는 쪽을 택하고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저, 저는……!”

“당황할 거 없어, 디아. 하지만 솔직히 조금 놀랐어.”

에이든은 저벅저벅 레인디아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레인디아는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그와 시선이 엇비슷했다. 고요한 압박감에 레인디아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디아도 아이를 원하는 줄은.”

에이든은 살며시 레인디아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레인디아는 손끝부터 핏기가 싹 마르는 듯했다. 가슴이,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요. 조금 전만 해도 아이를, 없앨, 죽일, 끔찍한 생각을 했단 말이에요……!’

툭툭.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원하지, 않아요.”

레인디아는 빠끔 입을 열었다.

“에, 에이든 님. 저는, 여기, 여기 계속 있을게요. 원하시는 만큼, 질리실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아이는 안 돼요. 임신은, 흐윽, 하고 싶지 않아요…….”

한번 입이 열리자 간절한 부탁이 홍수처럼 쏟아져나왔다. 레인디아는 온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측은한 마음이 들 만큼, 그녀는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그 불안한 모습에 에이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쉬, 디아.”

에이든은 침착하게 레인디아의 눈물을 닦아줬다.

“내가 디아에게 질릴 리 없잖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에이든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약을 원해? 원한다면 만들어줄 수 있어.”

“아, 아이를……, 어, 없애는, 약, 말인, 가요?”

레인디아는 확실한 대답을 원했다. 다 같은 약이 아니었다. 그녀 몰래 음식에 수면제를 탄 것처럼, 아이를 없애는 약이 아닌 자궁이 튼튼해지는 약을 줄지도 몰랐으니까. 그러고도 남을 남자였다.

“그래. 재료는 있으니 당장 조제할 수 있지. 이래 봬도 의무병으로 자원했거든.”

살린 환자보다 죽인 적군이 더 많긴 하지만. 에이든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레인디아 또한 에이든이 꽤나 박식한 의학 지식을 보유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윽고 어디선가 구원의 종소리가 들렸다. 레인디아는 절박하게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저, 약을,”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에이든이 차갑게 레인디아의 말을 끊었다.

“내 애라서 지우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저 아이를 낳기 싫은 거야? 후자라면 존중할게. 임신은 디아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

레인디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에이든이 이토록 상식적인 말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속삭임은 예의 그 섬뜩한 집착,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다른 새끼 애를 배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안 돼.”

귓바퀴 안으로 서늘한 숨결이 흘러들어왔다.

“어느 쪽이야? 아이가 싫어? 아니면 내 애라서 싫어?”

드르륵!

의자가 뒤로 밀렸다. 레인디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에이든은 여전히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앉은 채 레인디아를 올려다봤다. 손만 뻗으면 당장 움켜잡을 수 있단 자신감이 가득했다. 동시에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살벌한 눈빛.

“저, 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에요.”

에이든은 인간의 언어를 처음 듣는 늑대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디아? 아이한테 물릴 예쁜 젖과 자궁이 있는 몸이잖아. 설마, 남장하고 지내서 여자란 사실을 깜박 잊은 건 아니지? 이제 남장도 안 하잖아.”

에이든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며 피식 웃었다. 레인디아는 두 팔로 배를 꼭 움켜쥔 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시잖아요. 저는, 천한 사생아예요. 에이든 님의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낳은 아이는, 반드시 불행해질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나는 숙명론은 안 믿어.”

에이든이 슥 몸을 일으켰다. 발기하는 좆처럼 거대하게 펼쳐진 체구가 레인디아의 여체를 압도했다. 폭설이 내리는 것처럼 공기가 서늘해졌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디아와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단 사실을 내가 증명할게. 이 아이는 그 시작이 될 거야. 디아는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서, 마지막엔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회상하며 눈을 감게 될 거야.”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턱을 잡아 올렸다.

“디아,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제국에서 나만큼 아내에게 지원해 줄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아. 나는 디아가 원하는 모든 걸 구해 줄 수 있어. 이곳에서 지내면서 불편했던 적이 있어?”

“……어, 없어요. 하지만.”

“하녀의 수준에서 만날 수 있는 놈은 잘해 봐야 젠트리(중간 계급의 상부층) 정도일까? 아아, 디아는 사랑스러우니 귀부인 자리를 노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출신 탓에 젊은 귀족은 힘들 거야. 그렇다면 아내와 사별한 중년의 귀족이 되겠지. 그다음은 정부 정도일까? 하지만 디아처럼 성실한 하녀가 그 집안에서 본처의 핍박을 견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최악의 경우 불륜을 저질렀다며 돌팔매질을 당하겠지.”

에이든은 쥐고 있던 턱을 살며시 놓아줬다. 그리고 레인디아의 가냘픈 어깨에 양손을 얹은 채 몸을 숙였다. 그의 가라앉은 숨결이 레인디아의 피부에 닿았다. 레인디아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내가 아닌 다른 놈과의 결혼은 새로운 노예 계약에 불과해. 그러니 디아, 그런 구질구질한 삶을 사느니 내 애를 배고 나와 결혼하는 쪽이 합리적인 선택이야.”

“하, 합리적인, 선택이라니, 이건…… 그저 범죄잖아요.”

“아. 내가 디아를 이곳에 감금한 거 말이야?”

에이든은 싱긋 웃었다.

“알아. 그래서?”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단 얼굴로 되물었다.

“타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는 건 결국 방임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 자신의 의지로 지옥 불에 걸어가는 자를 내버려 두는 것은 존중인가? 아니, 그건 방임이야. 무책임하지. 통제할 수 있는 건 통제해야 해. 디아는 눈앞에서 어린아이가 난로에 손을 넣으려 한다면 내버려 둘 수 있어?”

“저, 저는, 아이가 아니잖아요……!”

“쉬.”

에이든은 손가락으로 레인디아의 입술을 눌렀다.

“디아의 영혼은 순수해. 갓 태어난 아이나 다름없어. 그리고 바깥세상은 활활 타오르는 난롯불과 비슷하지. 디아, 나는 진심이야. 디아가 나를 떠나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불 보듯 뻔해. 그러니 보낼 수 없는 거야. 나는 널 보호하는 거야.”

에이든의 시선은 집착을 넘어선 광기로 얼룩져 있었다.

“그만두세요. 저는, 당신의 보호 따위 필요 없어요. 저는 죄인이란 말이에요……!”

“속죄니, 원죄니, 그딴 개소리는 다음 생에서나 해.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나와 함께하겠지만.”

붉은 눈이 아름답게 휘었다.

“네가 나에게 온 거야. 그러니 넌 내 거야.”

내가 당신에게 온 거라니…….

“디아도 디아의 배 속에 있는 나의 아이도.”

배 속에 있는 아이. 레인디아는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로 에이든의 씨앗이 제 육신을 양분 삼아 배 속에 자리 잡은 듯했다. 그리고 에이든. 이 남자를 마주하고 있자면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거대한 벽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무력감이 레인디아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어렴풋이 에이든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곳을 나가면 더한 지옥이 그녀를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것.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떠나야 하는 거다. 진흙탕이든, 지옥 불이든, 그곳이 죄의 아이가 있어야 할 곳이 틀림없으니까. 설령 자신이 믿는 속죄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여전히 살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에 행복함을 깨닫는 삶이 아니라, 떳떳하게 눈을 감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이 지독한 낙인을 벗어나…….

* * *

에이든을 설득하는 것은 좌절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에이든이 두 번 다시 레인디아의 다리를 파고들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기쁘지 않았다. 그가 관계를 갖지 않는 이유는 임신했을지도 모를 모체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으니까. 임신 여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임신을 기정사실처럼 여기고 있었다.

‘……생리도 하지 않고 있어. 원래 주기가 불규칙적이긴 했지만.’

레인디아는 두려웠다. 자신은 성(姓)도 없는 백작가의 하녀였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는 헬렌베르크의 핏줄을 이어받은 황족이었다. 하필이면 황태자의 사망으로 현재 계승 서열이 가장 높은 황족이기도 했다. 만약, 에이든이 황태자로 책봉되기라도 한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황가에서 하녀의 피가 섞인 아이를 환영할 리 없다. 아이가 생긴다면 분명 저와 함께 버려지겠지.

‘그리고 내 죄를 물려받을 거야.’

에이든의 앞에서 수치를 잊고 두 다리를 활짝 벌려 빠끔대는 음부를 보여주고, 개처럼 납작 엎드려 발기한 좆을 자궁 가득 품어주는 일은 참을 수 있었다. 그것이 신이 내린 형벌이라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만큼은 자신과 똑같이 아버지에게 버려지는 고통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물려받길 바라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까지 낙인을 찍히게 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에이든을 벗어나 아이를 지우는 것.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도망친다고 해도, 그를 벗어난다고 해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레인디아는 꾹 눈을 감았다.

이미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문제를 넘어선 상태였다. 그저 아이를 위한 제일 나은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레인디아는 배 안에 칼을 품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혹여 아이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배는 언제부터 부푸는 걸까. 아직은, 겉으로만 보면 전혀 모르겠는데.’

레인디아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에게 기묘한 애정이 싹텄다. 아이를 미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미 엎어진 물이었고, 배 속의 아이는 알게 모르게 자라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앉으면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들렸는데,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누군가의 소리도 들릴 것이란 점이, 겉으로 볼 땐 혼자인 것 같아도 사실은 둘이란 게 너무나 신기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찌르르 떨렸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자신의 안에 또 하나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치 더러운 육신이 이 작은 생명으로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정원에 가자, 디아.”

“…….”

에이든은 기분 전환을 하자며 레인디아에게 외출복을 입혀줬다. 레인디아는 마치 인형처럼 서서 멍하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정말로 임신을 한 게 맞는 건지, 레인디아는 종종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정원으로 나오자 따사로운 일광이 내리쬈다.

“햇빛이 강하진 않지?”

에이든은 커다란 몸으로 레인디아에게 그늘을 만들어줬다.

“너는 괜찮을까?”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밋밋한 배를 향해서도 물었다. 레인디아는 당황해서 한 손으로 배를 감쌌다. 설마 에이든 같은 남자가 배 속의 아이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의외로 잘 어울렸다. 레인디아는 어린 자식을 돌보는 에이든의 모습을 떠올리다 휘휘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은, 그녀가 오랫동안 이상적이라 여기던 가족 그 자체였다.

“셋이 산책하는 건 처음이네.”

“……셋이요?”

“그래. 우리 아이까지 말이야.”

에이든의 말에 레인디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셋이란 숫자에 슬며시 옆을 보던 시선이 다시 밑으로 향했다. 아직은 밋밋하기만 한 배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생명.

이 남자와, 자신의 아이.

이제 에이든은 자신을 감금한 남자일 뿐 아니라, 배 속에 웅크린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에이든은 착실하게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자주 나오자. 산책은 중요해.”

“……네.”

레인디아는 그의 굵직한 오른팔에 손을 얹은 채 기대어 걸었다. 며칠째 눈이 내리지 않아 푸른 잔디가 기분 좋게 발에 챘다.

“새집을 찾아볼 생각이야.”

“?”

“이곳은 아이를 기르기엔 적당하지 않은 듯해서. 우리 아이는 따뜻한 곳에서 키우고 싶거든.”

“…….”

레인디아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이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정작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자신과 달리, 에이든은 벌써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그저 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진짜 실행에 옮길 남자였다.

‘정말로 아이를 원하는 걸까?’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은 그녀의 삶에 존재하지 않는 일이나 마찬가지였고, 설령 임신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이토록 기뻐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임신한다면 그건 반드시 강제적으로 일어난 일일 테고,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는 관계가 끝난 직후 저를 떠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강제적인 임신은 맞지만…….’

그날 자신을 범한 남자가 오늘은 전혀 다른 색채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랬다. 에이든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의 두 눈엔 꿈이 있었다. 미래를 향한 꿈이. 가정을 원하는 남자의 모습은 이토록 눈이 부시구나. 레인디아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택 근처에 호수가 있으면 좋겠어.”

호수가 있는 저택. 정말로 근사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키울 땐 위험할 텐데.

“하지만 아이가 빠질 수도 있으니 얕은 개울가 정도가 좋겠지.”

아니나 다를까 에이든이 다른 계획을 덧붙였다.

레인디아의 침묵에도 에이든은 개의치 않았다. 조잘조잘 떠들던 에이든은 슥 멈춰서 레인디아를 내려다봤다. 침묵이 길어지자 레인디아가 슥 고개를 들었다.

“디아.”

“!”

그 순간 에이든이 그녀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에이든은 말없이 후후 웃었다. 무척 기쁜 얼굴이었다.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레인디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기까지 했다.

‘이상해. 이런 건…….’

정말로 서로 사랑하는 부부 같았다. 레인디아는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새 두 사람은 산책로의 끝에 다다랐다.

“실례.”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살며시 안아 들었다. 돌아갈 때는 안아서 데려갈 심상인 듯했다.

“오늘 많이 걸어서 피곤하지? 돌아가면 다리를 주물러 줄게.”

“……아뇨, 괜찮아요.”

“내가 해 주고 싶어.”

“……그러세요.”

에이든의 고집을 꺾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어느 쪽으로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됐다.

“고마워, 허락해 줘서.”

허락이라. 정말로 내가 허락해서 가능한 것일까? 그저 에이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갈 뿐인데. 그런데도 에이든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첨벙, 첨벙.

마치 개울가에 온 것처럼 청명한 물소리가 들렸다.

“아프면 말해 줘, 디아.”

에이든은 물수건을 짜서 레인디아의 다리를 감쌌다. 에이든은 이상한 남자였다. 자신의 권력으로 레인디아를 굴복시키는 동시에 그녀의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마다치 않았다. 레인디아의 발바닥을 주무르고 발가락 사이사이를 닦아준 뒤 발등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에이든의 우아한 외모 때문일까, 발을 닦아주는 행위가 마치 신을 섬기는 성직자의 형상처럼 보였다.

“여기 괜찮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

“읏. 네…….”

“후후. 다행이야.”

레인디아가 임신을 하자 에이든은 섬뜩할 만큼 헌신적으로 변했다. 온종일 레인디아의 곁에 붙어 기꺼이 수발을 들어줬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 같았다. 집착을 넘어선 헌신, 헌신을 넘어선 숭배였다. 레인디아는 소름이 끼치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장 두려운 건,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는 자신이었다.

‘벌인지도 몰라. 어쩌면 이곳이 새로운 지옥인 걸까?’

여생을 그레제 백작가에 남아 죄를 뉘우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새로운 가족이니, 사랑하는 반려니, 그런 과분한 것들. 저에겐 가당치도 않았다. 그런데 그것들을 주겠다는 남자가 나타났다.

에이든 헬렌베르크.

스스로 구원자를 자처하는 악의 화신.

그가 이제는 자신을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 *

에이든의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레인디아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딱 한 번, 정원에서 에이든과 서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아마도 에이든의 부하인 듯했다. 꽤 오래전에 저택을 떠난 것 같았는데, 무슨 일로 다시 돌아온 것일까?

“산첼로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레인디아라고 해요.”

산첼로는 레인디아와 인사를 나누고 에이든과 함께 집무실로 사라졌다. 레인디아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교구 성직자는 마침 동부 재건 문제로 수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에이든 님께는 개인적으로 진 빚이 있다며 기꺼이 재판장에서 증언을 해 주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또한, 당시 마을에 거주했던 다른 증인들도 확보해두었습니다.”

전쟁을 종식한 에이든은 동부의 영웅이었다. 그런 동부 교구의 성직자로선 그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으리라.

“이건 교구 성직자가 적은 편지입니다.”

“요구 사항이 적혀 있나? 전부 들어주도록 해.”

“예? 아, 아니요. 감사의 마음을 적은…….”

“아아.”

에이든은 작게 탄식했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내가 그딴 걸 읽을 것 같나?”

“……제, 제가 따로 보관해두겠습니다.”

산첼로는 황급히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교구 성직자가 쓴 편지를 버리는 게 불경한 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는 에이든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그,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실 예정이신지요?”

“짝짓기 철이야.”

에이든이 심드렁히 대답하자, 산첼로의 얼굴이 뒤늦게 화르륵 붉어졌다. 그는 멀대처럼 긴 몸을 가누지 못하며 쿨럭쿨럭 헛기침해댔다. 누가 동정 아니랄까 봐. 정작 에이든 본인도 레인디아가 처음이었던 주제에 속으로 산첼로를 비웃었다.

“오래 있진 않을 거야. 아이를 키우기엔 적합하지 않으니.”

“예에? 설마, 그분과 아, 아이를 가지신 겁니까?”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시선을 내리깐 에이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산첼로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단 듯이 도록도록 눈을 굴렸다. 이윽고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키우기에…… 하이락만 한 곳이 없지요. 제국의 수도라 치안도 안전하고, 아내와 아이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장소 아니겠습니까?”

“나는 어린 시절을 하이락에서 보냈어. 그곳에서 계절마다 살해 예고장을 받고, 정말로 독극물을 먹은 날도 있었지.”

에이든이 화학과 약학에 상당한 지식을 보유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엔 음식을 먹기 전에 늘 독이 있는지 확인했다. 뭐, 나중엔 죽을 생각으로 그냥 먹으려 한 적도 있지만. 그 무렵엔 황후가 산첼로를 붙여놔서 그가 대신 독극물 여부를 확인했다.

“그 무렵 황궁 안이 위험했던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황권이 교체되지 않았습니까? 황후 마마께선 누구보다 에이든 님의 안전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산첼로의 말대로였다. 오늘날 황궁 안에 에이든을 죽이려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나 강한 존재로 커버렸고, 현재 황좌에 앉은 카타리나 황후 또한 그의 백모로서 애정 어린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모로 현 상황은 에이든의 어린 시절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싫다고 한다면? 너는 즉시 황궁에 편지를 보내겠군?”

“아, 아닙니다! 에이든 님께서 그분의 존재를 감추고 싶으시다면 저는 이 한 몸 바쳐서 입을 꾹 다물,”

“너는 처음부터 내 부하가 아니라 황후의 개였지. 그사이 주인을 바꾼 건가? 아무에게나 배를 뒤집어 까는 건 잡종이나 할 짓이야.”

에이든이 피식 웃자 산첼로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확실히 저는 고아 시절 황후 마마께 거두어져 큰 은혜를 입었고 그분의 부탁으로 에이든 님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감히 말씀 올리자면, 황후 마마께선 진심으로 에이든 님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걱정이라. 세간에서 나와 백모를 두고 뭐라 하는지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가?”

산첼로의 몸이 들썩였다.

“내가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너의 그 자랑스러운 주인이 더욱 곤란해질 텐데도?”

“더, 더러운 소문일 뿐입니다! 두 분이 그런 관계가 아니란 것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산첼로는 완강히 부인했다.

“그래. 카타리나 황후가 자신의 전 약혼자이자 시숙(媤叔)인 페레디온의 아들에게 음심을 품고 유혹한다는 소문은,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인간이라면 헛소리로 치부하겠지.”

황후 카타리나와 에이든의 아버지인 페레디온.

두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약혼 관계로 묶여 있었다. 선황후인 칼라마리와 베르첸 가문 사이의 약속이었다. 칼라마리는 베르첸 가문에서 태어난 여식을 자신의 큰아들과 결혼시켜 황후 자리를 물려주겠노라 약조했다. 그러나 훗날 페레디온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카타리나는 2황자 베넨돌과 식을 올리게 됐다.

결과적으로 황위에 오른 것은 베넨돌이었다. 페레디온은 선황후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당한 것도 모자라 북부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바로 에이든이 있는 이곳에.

에이든은 아버지가 살아생전 지내던 저택을 바라보다 시선을 바로 했다.

“저, 전부 친황태자파가 퍼트린 비열한 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첼로가 말한 친황태자파는 베넨돌과 칼라마리의 아들인 제레미의 추종자를 일컬었다. 제레미는 살아생전 에이든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대립했다.

“그리고 아직 그 친황태자의 잔당이 황궁에 남아 있지. 내가 황궁 밖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면 그런 소문은 언젠가 사라질 테고.”

“……설마, 그런 이유에서?”

산첼로는 황급히 저택을 바라봤다.

“저, 정말로 어린 시절 에이든 님을 구해 준 여자가 맞습니까?”

“그렇다고 했을 텐데.”

에이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산첼로가 이런 질문을 한 의도를 파악했다.

“친애하는 백모님이 걱정되어서 북부에 틀어박혀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하는 게 아니야.”

“예? 그렇다면 왜…….”

“나는 여기서 죽으려고 했어.”

“?!”

“전쟁이 끝난 뒤엔 살아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거든.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건, 달리 말하면 죽어도 상관없단 뜻이었으니까.”

산첼로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방정맞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금세 침착해질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이든의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바로 그는 정말 삶에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총을 머리에 쏴서 자살하려고 한 적도 있었고.

‘그날 내가 몸을 날려 막지 않았더라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아무렇지 않게 제 머리에 총구를 겨누던 에이든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나는 이제 살고 싶어.”

“……에이든 님?”

“진심으로. 이토록 삶을 갈망하게 된 적은 태어나 처음이야.”

에이든은 살며시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에이든의 삶은 가혹했다. 세상이 그의 영혼을 망가뜨리기 위해 작정했다고밖에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불행한 삶이었다.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싶어 삶을 포기할 즘엔, 아주 잠깐 숨돌릴 틈을 주는 식으로 운명은 그를 계속 몰아세웠다.

그 영원할 것 같던 고통을 끝내준 존재가 레인디아였다.

“디아는 나의 삶이야. 그녀가 나의 죽어가는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었지. 나는 이제 그녀를 위해 살아. 그녀가 나로 인해 행복해지길 바라. 그럴 자격이 있단 걸 평생에 걸쳐 증명할 거야.”

“펴, 평생에 걸쳐서요……?”

“그래.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오나, 에이든 님은 고귀한 황족이십니다.”

“그 고귀한 황족의 역할은 전장에서 마쳤다고 생각하는데. 빈민들을 찾아가 내 살이라도 잘라 나눠 줬어야 했나?”

“그런 말이, 아니라……. 한 곳에만 머무르면 갑갑하시지 않을까요?”

“갑갑해?”

에이든은 고개를 갸웃했다.

“디아를 보살피는 것은, 나의 죽어가는 영혼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야. 숨을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너는 갑갑하다고 숨 쉬는 걸 그만둘 수 있어? 숨 쉬는 걸 그만두는 인간은 죽어. 디아를 떠나라는 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어.”

에이든은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지만, 그의 눈은 광신도 못지않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디아가 나를 찾아왔어. 단순히 닮은 꼴이 아니라, 그녀란 걸 알고 나서야 깨달았지.”

차분하던 목소리가 벅차올랐다. 에이든은 황홀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운명이라고.”

그의 말이 묵직하게 땅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니, 다른 건 어찌 돼도 상관없어.”

에이든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가 휙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산첼로는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황후에게 전해라.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황궁에 얼굴을 비치겠다고.”

“……무, 무엇을 말인지요?”

산첼로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레제 백작 부인의 재판을 원해.”

“……배, 백작 부인이요? 하오나, 황후 마마가 주관하는 재판이라면 제국의 최고명예재판입니다! 어지간한 일로는 불가능한,”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악마가 사악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 * *

에이든은 투명한 유리병 안에 담긴 액체를 스포이트에 담았다. 그리고 특수한 시약을 바른 종이를 꺼냈다. 스포이트의 끝에 맺힌 액체가 종이 위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30분이 지나도록 변화는 없었다.

‘변하지 않는군.’

에이든은 가죽 수첩을 펼쳐 오늘 결과를 적어넣었다.

수첩 안에는 수십 일간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질내에 사정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피임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처음 삽입을 한 때부터 쭉,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레인디아의 임신 여부를 기록해 왔다. 처음 데려왔을 때 그녀의 영양 상태로 보아 임신이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했었다. 월경 주기도 일정치 않은 듯했고.

‘지난 사정으로 착상되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앞으로 밤마다 매일 넣는 수밖에. 디아가 모르게.’

에이든은 탁 수첩을 접고 책상 위를 정리했다.

레인디아와 산첼로, 저택의 사용인, 심지어 집사장조차 모르는 이 방은 에이든이 실험실로 사용하는 장소였다. 위험한 화학 약품부터 구하기 힘든 약재까지 책장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대부분 부인병(婦人病)과 관련된 재료였다. 병약했던 어머니를 위해 그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마련해둔 것들인데, 그 아들 또한 유용하게 사용 중이었다.

“오래 걸리겠어.”

에이든은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큼 레인디아의 몸을 독점할 기간이 늘어났단 생각에 기뻤다. 물론, 당장은 그녀를 안을 마음이 없었다. 당분간 레인디아가 자신이 임신한 몸이라 믿게 만들어야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배 속의 아이는 레인디아에게 살아갈 희망이 돼 줄 테니.

자신이 레인디아로 인해 살아가는 것처럼.

* * *

에이든이 본관으로 돌아왔을 때, 레인디아는 화병에 담긴 꽃을 솎아내고 있었다. 그러며 한 손은 자연히 배 위에 얹어져 있었다. 최근 레인디아는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다. 물론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 점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봐, 디아. 너도 결국 나와의 아이를 원하는 거야.’

에이든은 씩 미소 지으며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 내가 깨닫게 해 줄 테니까. 디아가 얼마나 아이를 원하는 몸인지.’

에이든이 두 팔을 벌려 레인디아의 몸을 끌어안았다. 레인디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저를 등 뒤에서 끌어안은 게 에이든이란 사실을 깨닫고 체념한 얼굴로 시선을 떨궜다.

“이 꽃은 가시가 있어서 위험해.”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손에서 꽃을 빼앗아갔다.

“보자.”

그러며 레인디아의 뺨과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레인디아의 의심 어린 눈동자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흉은 지지 않았네.”

“……흉이라니요?”

“기억 안 나? 날 만나기 전에 뺨과 손에 상처가 났잖아.”

아. 레인디아는 작게 탄식했다. 숲에서 괴한 두 명을 만난 날, 바닥에 넘어져 뺨과 손등에 상처가 났었지. 눈을 뜨니 상처에 약제를 묻힌 거즈가 붙어 있었다.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손가락은?”

“네?”

“손수건에 묻은 피. 디아의 것이었잖아. 옷핀에 찔린 거지?”

“그건…….”

저택을 도망치던 날 온실에 남겨둔 피 묻은 손수건을 보고 알아챈 모양이었다.

“잘 때마다 약을 발라줬어.”

에이든이 그녀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리며 중얼거렸다. 레인디아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손가락이 찔렸단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잊고 지냈지?”

에이든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레인디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디아는 그럴 것 같았어. 몸이 부서져도 신경 쓰지 않잖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꾸만 자신을 학대하니까.”

“학대라니……, 그런 적 없어요.”

“자기 팔을 긋는 것만이 자해는 아니야.”

레인디아가 당황해서 반박하자 에이든은 코웃음 쳤다. 그 싸늘한 비웃음 앞에서 레인디아는 할 말이 없어졌다.

“억지로 임신시키면 조금은 자신의 몸을 챙길 줄 알았는데.”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 조심하고 있어요.”

“그래? 없애고 싶은 것 아니었어?”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말에 레인디아는 울컥했다. 그녀는 몸을 비틀며 에이든의 품을 빠져나갔다. 에이든은 순순히 레인디아를 내버려 뒀다.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거죠? 지난번만 해도……, 이사를 가겠다고 얘기하시더니, 이제 아이가 귀찮아진 건가요?”

레인디아는 처음부터 이런 경우를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이 세상에 끝까지 가정을,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그런데도 가슴에 비수가 꽂힌 것처럼 욱신거렸다. 내심, 그는 다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고개를 들자 에이든이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디아의 솔직한 생각을 원해. 그 아이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저는…….”

“지난번에 분명히 아이를 죽이는 약을 달라고 내게 부탁했잖아.”

“주, 죽이는……!”

레인디아는 황급히 배를 감싸 안았다.

“죽인다니, 그런 표현은 싫어요…….”

“틀린 말은 아니야. 아직은 생명이라 부르기조차 무색하지. 굳이 더 가까운 표현을 빌리자면, 자궁에 자리 잡은 불순물을 청소하는 것이려나.”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밋밋한 배를 바라봤다.

“그러니 디아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어.”

네가 내 아이를 죽이는 짓에 엄청난 가책을 느끼길 바라.

“나는 디아의 선택을 존중해.”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에게 집착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는 지경까지 몰아붙여서,

“어떻게 할래?”

그런 너를,

전부 내 것으로 만들 거야.

“……저는.”

레인디아는 덜덜 떨며 시선을 떨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모성이 싹튼 것일까.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못한 생명을 향한 동정심일까.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모르겠어. 어쩌고 싶은지. 아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레인디아는 꾹 눈을 감았다. 속눈썹을 적신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사, 살리고 싶어요…….”

그것이 레인디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이 아이만큼은, 흐윽, 해,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레인디아는 조금 더 용기를 담아 덧붙였다.

나는 이토록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아아, 이 아이만큼은.

“저, 저는, 불행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이 아이는 안 돼요. 아무런 죄가 없잖아요.”

레인디아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마치 에이든이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이라도 된 것처럼. 에이든은 그런 레인디아를 꼭 안아줬다. 제게 매달리는 모습에 온몸이 전율했다. 이대로 살이 녹아 영원히 한 덩어리가 되고 싶었다.

“그래, 디아. 그렇게 될 거야.”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육체를 천천히 내리훑었다.

“기뻐. 디아가 아이를 지키겠다고 말해 줘서.”

“흐윽…….”

“나도 최선을 다해 우리 아이를 지킬게.”

첫눈이 쌓인 들판을 맨 처음 밟고 싶은 것처럼, 자국을 남기고 싶은 보드랍고 새하얀 살결. 덫에 걸린 암사슴을 닮은 애처로운 검은 눈동자. 가느다란 뼈대와 달리 살이 푸짐하게 들어찬 젖가슴과 두 손에 잡히는 잘록한 허리. 또 빨아당길 때마다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는 어여쁜 입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성찬이었다.

그래, 전부 내 것이다.

에이든의 곰 같은 손바닥이 레인디아의 엉덩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읏. 아, 안 돼요.”

“응? 뭐가?”

에이든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아이가…….”

“끝까지 안 해. 그저 디아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을 뿐이야. 한동안 못 해서 많이 쌓였거든.”

에이든의 손가락이 레인디아의 엉덩이골을 파고들었다. 하필 얇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어 음부까지 손이 쑥 밀려 들어갔다. 레인디아는 힉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모르겠네. 디아가 빼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더해졌다. 배가 눌리는 감각에 레인디아는 파드득 몸을 떨며 에이든을 밀쳤다.

“해, 해드릴게요.”

“뭘?”

에이든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무, 무엇이든요.”

레인디아는 무척 자신 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함이 느껴졌다.

* * *

“하아. 이거, 전부터 해 보고 싶었어.”

레인디아는 침대 밖으로 머리를 내민 채 드러누워 입을 벌렸다. 에이든은 한쪽 손으론 레인디아의 목을 받치고 그녀의 입 안에 살며시 귀두를 담갔다.

“옳지. 겁먹을 거 없어. 천천히 넣을게. 불편하진 않고?”

말할 수 없던 레인디아는 살짝 귀두를 핥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귀두에 선액이 묻어 있어 입 안 가득 비릿한 맛이 번졌다. 이윽고 혓바닥이 눌리며 입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귀두가 득득 혀과 입천장을 긁고 들어왔다. 예민한 점막이 자극을 받자 레인디아는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비비 꼬았다.

“우, 우응. 윽…….”

젖가슴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에이든 역시 선단에서 올라오는 미적지근한 온도에 허리를 떨었다. 뜨끈한 혓바닥이 귀두를 기분 좋게 감싸왔다. 에이든은 그 상태로 천천히 허릿짓을 했다.

푹, 푸욱, 푹푹.

에이든은 느릿하게 레인디아의 입동굴을 벌리는 것에 집중했다. 레인디아가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누워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쑤실수록 탄력을 받은 목구멍이 조금씩 벌어져 페니스가 식도까지 들어찼다. 머리를 뒤로 젖힌 자세라 고개를 숙일 때보다 페니스가 깊숙이 침투해 목 안을 긁었다.

“우으윽…….”

레인디아의 메마른 속눈썹에 촉촉하게 눈물이 맺혔다. 배 안에서 올라온 헛구역질은 식도를 막은 귀두에 부딪혀 도로 내려갔다. 정자가 튼실하게 들어찬 고환이 레인디아의 얼굴을 마구 치댔다. 레인디아는 더는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어 질끈 감아버렸다.

“내가 넣는 만큼, 디아의 목이 볼록 솟아서, 후, 얼마나 들어갔는지 확실히 눈에 보여.”

그때 에이든이 볼록 튀어나온 레인디아의 목을 쓰다듬었다.

“……!”

레인디아는 페니스를 목 안 가득 품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박감에 에이든이 미간을 찡그렸다. 점막이 빨판처럼 달라붙어 귀두와 좆대를 쪽쪽 물고 빨았다. 레인디아는 코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입술 위에 얹힌 고환이 호흡을 방해했다. 목이 뜨겁고, 숨은 막히고,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천천히 쑤셔줄게.”

에이든은 머리를 받치지 않은 손으로 레인디아의 젖꼭지를 비틀었다. 감겨 있던 레인디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유두를 비틀 때마다 목구멍이 한껏 페니스를 조여왔다. 에이든은 그 아찔한 자극을 즐기며 레인디아의 목 구석구석에 제 좆을 비벼댔다.

“읏, 하아. 디아……, 내 좆 잘라 먹으려고? 응?”

에이든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레인디아는 목부터 입까지 페니스가 꽉 들어차 있어 대답할 수 없었다. 조금 전처럼 혓바닥으로 좆을 핥아 대답하는 짓도 불가능했다. 혓바닥이 짓눌려 페니스에 달라붙은 혈관이 씰룩대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지경이었다. 식도까지 좆이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간 열심히 에이든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고 좆을 빨아 대서 저항감은 적었다.

‘안 돼. 목 안, 가득 차서……, 괴로운데 기분 좋아. 이상해.’

수컷의 향이 입 안을 가득 메우고, 손도 대지 않은 아랫도리가 화끈거렸다. 마치 온몸의 감각이 일자로 이어진 것처럼 에이든의 페니스가 목구멍을 쑤실 땐 질벽까지 닿는 기분이었다.

“우으윽. 응……!”

“이만큼 들어갔어. 딱, 내 목젖이 있는 자리만큼.”

에이든이 튀어나온 레인디아의 목을 톡톡 두드렸다.

디아의 안이라면 어디든 쑤셔 넣고 싶었다. 그렇게 진한 정액을 싸질러서 자신의 것이란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곳이 비록 음식이 들어가는 통로일지라도. 그녀가 음식을 씹어 넘길 때마다 자신의 페니스가 들락날락하던 감각을 떠올리며 밑이 젖길 바랐다.

“디아, 계속 다리를 움찔거리네? 설마 목이 쑤셔지면서 가버린 거야?”

“으윽, 읍, 으그윽……!”

레인디아는 발끝으로 시트를 휘저었다. 드레스 앞자락을 움켜쥔 손 아래에서 젖가슴이 뭉개졌다. 기도를 쑤셔대는 우악스러운 구강성교에 흥분하는 몸이라니. 에이든은 가슴이 들끓었다.

“안타까워. 디아가 임신한 몸만 아니라면, 지금쯤 보지 안을 얼얼해질 정도로 박아줬을 텐데, 응?”

푹. 푹. 푹!

에이든은 다소 거칠게 레인디아의 목구멍을 쑤셨다. 레인디아는 욱욱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착실하게 목구멍을 조여 그의 페니스를 감쌌다.

이윽고, 목 안에서 뜨거운 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액이 식도를 쓸며 흐르는 감각이 선연했다. 배 안이 정액으로 볼록해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후아……, 하아.”

에이든이 살며시 좆을 빼내자 레인디아는 크게 입을 벌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입천장에 묻은 정액이 목구멍 안 쪽으로 질질 흘렀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입술에 묻은 정액을 닦아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 앉은 레인디아의 몸이 자꾸만 고꾸라졌다. 에이든은 아예 그녀의 옆에 앉아 제 몸에 기대게 했다.

“디아도 같이 기분 좋아지자.”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 안 대여…….”

레인디아는 얼얼한 혀를 겨우 움직여 대답했다.

“쉬. 괜찮아. 안 넣을 거니까.”

“흐, 그래도, 안, 으음.”

에이든은 자신의 정액이 가득 담긴 레인디아의 입 속을 혀로 휘저었다. 자신의 정액을 먹는 취미는 없었지만 그녀의 입 안에 있던 맛과 향이 제게도 스며든다는 사실이 흥분됐다.

“이렇게 빨아주기만 할게.”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입술을 싹 핥아 올렸다. 이윽고 레인디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에이든의 커다란 몸이 드레스 안을 파고들었다.

* * *

마치 물꼬가 트인 듯했다.

그날 밤을 기점으로 에이든과 레인디아는 침대 위에서 밤마다 서로의 몸을 탐했다. 입술이 닿는 마디마디를 빨아당기고, 혀를 뒤섞고, 생식기를 문질렀다. 오직 삽입만 제외하고.

그런데도 오히려 삽입하지 않아 행위는 더욱 음란해졌다. 다음 날 눈을 뜨면 레인디아는 늘 온몸이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밤새 빨아 댄 음부는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유두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아이에게 젖을 먹일 몸이 될 테니 미리 젖길을 뚫어놔야지. 디아는 유두가 납작해서 아이가 젖을 빨기 힘들 거야. 그때마다 내가 젖을 대신 빨아줄 순 없으니까.”

“으읏, 하아…….”

“기분 좋지, 디아?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린다면 이것보다 더 기분이 좋을 거야. 얼른 아이를 낳고 싶지?”

“으, 으으응, 네……, 아, 아이, 낳고 싶어, 요……!”

쾌감에 이성이 녹아내린 레인디아가 할딱이며 대답했다.

“내가 열심히 빨아서 유두를 뾰족하게 만들어줄게.”

“으응, 네……!”

에이든은 집착적으로 레인디아의 젖을 빨아 댔다. 그때마다 레인디아는 커다란 짐승에게 모유를 주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문제는 그 짐승이 나오지도 않는 젖을 빨 때마다 발딱 선 좆을 제 몸에 비벼댄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아침이 오면 에이든은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레인디아의 다리 사이를 닦아줬다. 정액과 애액이 말라붙어 딱딱하게 굳은 음모는 물기를 머금어 다시 부드럽게 변했다.

“으음…….”

레인디아는 위아래로 올라오는 자극에 눈을 떴다. 젖꼭지는 양쪽 다 반쯤 튀어나와 있었다. 이제는 손끝만 스쳐도 발딱 설 만큼 예민해졌다. 어젯밤에도 에이든의 굽이치는 복근에 질구를 비벼대서 내밀한 주름 사이사이에 열감이 남아 있었다.

레인디아는 살며시 음부를 매만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살이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질 안을 쑤시지 않았는데도 격렬한 행위에 거의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딱딱해.’

음모에 덩어리진 정액이 말라붙은 채 굳어 있었다. 손톱을 세워 긁어낼까 하다가 포기했다. 어차피 곧 에이든이 따뜻한 물로 닦아줄 테니까. 어느새 그녀의 몸은 에이든의 보살핌에 길들여져 있었다.

아직 피로가 남아 레인디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번쩍 눈을 떴다.

‘언제부터…….’

레인디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언제부터 이런 음란한 행위에 익숙해진 것일까.

에이든이 자궁 안에 씨물을 뿌린 후론, 어째서인지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 전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배 속의 아이가 에이든의 자식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이에게 아버지를 만들어주고 싶은 모성 때문에? 정답을 알 수 없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단순한 주종관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실로 그와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어났어?”

“흣.”

그때, 등 뒤에서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벼왔다. 뜨거운 혓바닥이 목을 죽죽 핥아 올렸다. 레인디아는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걸까?”

에이든의 손이 레인디아의 어깨를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응? 디아.”

그가 턱을 잡고 물어왔다. 선이 고운 남자의 입술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저를 보느라 내리깔린 속눈썹은 여인 못지않게 풍부하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 그 강렬한 색채는 언제나 아득한 깊이감을 선사했다. 바라보고 있으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눈이 떠졌어요.”

“그래?”

에이든은 다행이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굵은 엄지가 레인디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불면 날아갈까, 놓치면 깨져버릴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비틀린 감정일 터. 그런데도 형용할 수 없는 따스함이 묻어났다. 흑과 백이 공존하는 남자였고, 레인디아는 그런 존재에게 분명 이끌리고 있었다. 어째서 인간은 완전한 존재보다 불완전한 것에 끌리는 것일까. 안락한 공간이 아닌 불행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일까.

무수한 상념이 레인디아의 머릿속에서 번질 때였다.

“이리 와.”

에이든이 레인디아를 잡아 당겼다. 이미 철썩 붙어 있었음에도 에이든은 더 가까워지길 바랐다. 그의 견고한 가슴에 뺨이 뭉개졌다. 숨을 들이켜면 수컷의 체취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레인디아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에이든이 입을 맞춰왔다. 혓바닥이 서로를 할퀴듯이 비벼지며 입 안 가득 타액이 범람했다.

“으응, 으, 으음……!”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가며 저도 모르게 질구를 조이게 된다. 손도 대지 않은 젖꼭지도 부푸는 게 느껴졌다. 배 속의 아이가 걱정될 만큼 아랫배가 저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에이든의 암컷이 되는 감각에 취해버린다. 레인디아는 두려웠다. 이렇게 영영 그를 떠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아……!”

입술이 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레인디아는 물에 젖은 복숭아처럼 발그레 얼굴을 붉힌 채 숨을 할딱였다. 반면 에이든은 가슴이 좀 더 빨리 뛰는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비슷했다.

“아직도 돌아가고 싶어?”

“……저는.”

레인디아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돌아가야 해요.”

한참이나 주저하던 레인디아는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니까.’

레인디아가 생각했다.

에이든은 돌아가야 한다는 레인디아를 강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러나 예전만큼 강한 신념의 불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내면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애초에 그녀가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그저 관성에 불과했다. 어릴 적부터 백작가에 봉사하는 삶이 버릇처럼 굳어진 것이다.

“우리 아이를 품은 몸으로, 불지옥으로 걸어가겠다고?”

에이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레인디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레인디아의 무의식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영혼에 뿌리내린 신념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그러나 여태껏 그것을 흔들려는 사람은 그녀의 주위에 없었다. 오히려 그 뒤틀린 신념에 거름을 주는 더러운 벌레들만이 바글댔다.

벌레. 그래, 나는 그 해충들을 박멸하고 너에게 완벽한 토양과 환경을 조성해 줄 거야.

훗날, 너의 배 속에 우리의 진짜 과실이 무르익을 수 있도록.

에이든의 강렬한 집착과 광적인 욕망이 뒤섞인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번뜩였다. 그러나 가라앉은 속눈썹이 떠올랐을 때, 그 아래 깔린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에이든은 천천히 방아쇠에 손을 감았다.

레인디아를 수면 아래에서 건져 올릴 때였다.

진정으로 그녀를 해방해 줄 때가 도래한 것이다.

“디아, 얼마 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어.”

“……새로운 사실이라니.”

레인디아는 눈살을 찌푸리다 화들짝 놀라 물었다.

“또, 제 뒷조사를 하신 건가요?”

이미 자신의 과거와 백작가의 비밀은 에이든에 의해 낱낱이 까발려졌다. 유일하게 숨기고 있는 것은, 사창가에서 자랐던 과거뿐이었다.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사창가 출신의 고아를 하녀로 데리고 있단 사실이 알려지면 백작가의 평판에 좋을 게 없었다.

“우리의 아이를 위해서였어.”

“……!”

레인디아는 꾹 입을 다물었다. ‘우리’라는 표현보다 ‘아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가슴에 깊이 사무쳤다. 레인디아의 섬섬옥수 같은 손바닥이 버릇처럼 배를 감쌌다. 여전히 밋밋한 배에선 어떠한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안에서 태동하고 있을 아이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이를 인질로 삼다니 얼마나 비겁한 남자인가. 그러나 에이든의 계산은 유효했다.

“잘 들어, 디아.”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레인디아는 고개 들어 그의 눈을 바라봤다. 어쩐지, 전혀 예상 못 한 사실이 그의 입을 통해 나올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넌 백작가의 사생아가 아니야.”

고요한 총성이 육신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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