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복종-14화 (14/23)

14. 사냥철

“그게…….”

어안이 벙벙했다. 레인디아는 말끝을 흐리다 꾹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큼 얇은 입술이 붉게 달아올랐다. 늘 순종적으로 처져 있던 눈썹이 일그러졌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품을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에이든도 그녀를 따라 상체를 들었다. 다만 그의 움직임에는 레인디아와 다른 여유가 묻어났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요?”

레인디아는 포효하듯 되물었다. 가녀린 목선이 달달 떨렸다. 가슴에 돌이 얹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마치 누군가 심장을 쥐어 비트는 듯했다.

“그레제 백작은 초혼이 아니야. 비릴리안을 만나기 전 가정이 있었고, 아내와 사별한 후 재혼을 했지.”

“……사별이요?”

“그래. 사별한 첫 번째 부인이 바로 디아의 친모라는군.”

에이든은 살며시 레인디아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다른 손으로 레인디아의 손등을 토닥였다.

“디아,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그, 그럴 리 없어요. 제 어머니는…….”

레인디아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옛날에, 아주 지독한 여자가 있었단다.’

‘인과응보라는 거지. 결국, 사창가에서 몸을 팔다 병으로 죽었다나?’

레인디아는 꾹 입을 닫고 고개를 저었다.

죽었어. 나의 어머니 되는 여자는, 사창가에서 몸을 팔다 병으로 죽어버렸어. 그렇게 믿어왔다. 때때로 꿈속에 나타나는 여인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난로 앞의 흔들의자. 아이를 감싼 새하얀 포대기. 굽이치는 찬란한 금발. 아이의 가슴을 다독이던 따뜻한 손길. 저를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

그런데 그 꿈이, 환상이, 그 모든 게, 사실은…….

“꿈이 아니었다고요……?”

레인디아는 흠뻑 젖은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제가 알던 진실이 전부, 거짓이었단 건가요?”

“그래. 디아는 사생아가 아닌 전처의……,”

“아니에요. 또 저를 속이려는 거죠? 당신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에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을 리 없잖아요……!”

레인디아는 더욱 빨리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을 보는 눈빛엔 강한 불신이 서려 있었다. 잠시나마 이 남자의 품을 따뜻하다 여겼던 과거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무엇을 기대한 걸까. 아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에겐.

“별수 없네.”

에이든은 푹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 소리에 레인디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다시 강압적으로 나올까? 그러나 자신은 이미 감금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에이든의 다음 타깃은,

“그, 그분들은 내버려 두세요……!”

“디아,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백작가는 몰락하게 돼 있어.”

에이든은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잘생긴 미간을 구기며 무언가를 고민했다. 그럴수록 레인디아는 애가 탔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백작가의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빚이, 있다고는 들었어요.”

“그래. 그 빚을 감당하기 위해 최근 백작 부인이 죽은 백작의 물건을 경매에 내놓은 거야.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나는 백작가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저 디아와 관련된 자들이니 보고를 받았을 뿐이야.”

그럴 수가. 레인디아는 스르륵 고개를 숙였다. 더는 떳떳하게 에이든을 노려볼 수 없었다.

“경매장에서 팔린 물건 일부가 모조품이더군.”

레인디아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사들인 작품도 전부 가짜였어. 최근 수도에선 모조품의 불법 거래를 특별 단속하고 있어. 결론적으로, 백작 부인의 재판은 불가피해.”

“그런, 일이…….”

“그렇게 모조품을 입수한 경로에 대해 조사에 들어가던 중, 죽은 백작의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거야.”

에이든은 살며시 디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디아, 맹세컨대 백작의 과거는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야. 나는 디아의 출신이 어떻든 신경 안 써. 하지만 그 과거가 디아를 괴롭게 한다면,”

에이든은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저를 감금한 남자인데도,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애틋한 감정이 일렁였다.

“나는 그 족쇄를 풀어주고 싶을 뿐이야.”

새로운 족쇄를 채울 수 있도록.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가녀린 발목을 보며 생각했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재판에서 디아의 과거를 밝혀내고 백작 부인에게 정당한 벌을 내리고 싶어.”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요?”

에이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아니, 모르겠어요……. 저는 어릴 적 기억이 없는걸요. 마치 칼로 도려낸 것처럼…… 기억나지 않아요. 가장 첫 기억은, 짐칸에 갇혀서 사창가에 팔려 간 거예요. 소, 손등에 엑스 자 모양의 흉터가 있는 무서운 남자에게 붙잡혀서요.”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인디아가 어릴 적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면 증인으로 세우는 것은 힘들다. 즉, 그가 확보한 증인과 백작 부인의 자백만으로 유죄를 이끌어야 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에이든은 레인디아가 폭풍의 중심에 서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손등에 엑스 자 모양의 흉터가 있는 남자란 말이지. 에이든은 그 사실을 머릿속에 기재했다.

“……그러니까, 설령 에이든 님의 말씀이 다 사실이라 해도, 제가 첫 번째 부인의 자식일 리는 없단 거예요.”

레인디아는 무척 당황한 듯이 횡설수설했다.

“당시 백작 부부의 결혼을 주관한 교구 성직자의 증언에 따르면 딸이 하나 있었다고 했어. 외관도 나이도 디아와 정확히 일치해.”

“왜, 왜 그럼, 백작 부인이 제게 그런 짓을……!”

“그것을 재판에서 밝혀낼 거야.”

레인디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떤 인간이 그토록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악의를 품으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확실히 이전보다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이든이 보여준 혹시 모를 일말의 가능성을 믿게 된다.

“사생아란 누명이 벗겨진다면 디아는 자유야.”

레인디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저를, 놓아주시겠다고요?”

“그래. 디아가 백작가의 사생아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나로선 너를 데리고 있을 명분이 사라지는 거지.”

에이든은 덧붙였다.

“물론, 디아가 원한다면 내 곁에 있어도 좋아. 나는 디아가 자의로 내 곁에 남아주면 좋겠어. 우리 아이와 함께. 다만.”

다만?

“나와 하이락으로 가야 해.”

“그, 그럼…… 지금 아가씨는 어디 계신 건가요? 아직 후작저에 있는 건가요? 아니면, 함께 하이락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벨리타는 다른 귀부인의 집에 의탁하고 있어. 후작도 이번 일로 꽤나 난처해져서 더는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할 수 없는 상황이야.”

“……아가씨를 만나볼 순 없을까요?”

레인디아가 살그머니 묻는 말에 에이든은 단호히 대답했다.

“그건 곤란해.”

“어째서죠?”

“디아를 현혹할 만큼 악랄한 계집이니까.”

“하, 하지만, 아가씨는 어려서 제 과거를 몰랐을 거예요.”

에이든은 코웃음을 삼키며 다정히 레인디아의 어깨를 다독였다.

“디아, 걱정할 대상을 잘못 골랐어. 지금 디아의 입장을 잊은 건 아니겠지?”

“제 입장이요……?”

“디아는 지금 한 아이의 어머니야.”

레인디아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지. 디아가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사생아의 자식이란 낙인이 찍힐 수도,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어.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지, 디아?”

아이의 행복. 레인디아의 삶에 ‘아이’와 ‘행복’이란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관계였다. 그래서 더욱 붙잡고 싶었다. 어떻게든 이어붙이고 싶었다. 아이를, 제 배 속의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레인디아는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분고분 대답하는 모습에 에이든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저는, 아이만큼은…….”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레인디아의 이마 위로 에이든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벨리타에게 편지 한 통 정도는 쓰게 해 줄게.”

“……가, 감사해요, 에이든 님.”

레인디아는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감사할 거 없어, 디아. 그 편지는 전달되지 않을 테니까.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진심을 사뿐히 지르밟으며 또다시 그녀에게 다정한 키스를 해 주었다.

그날.

에이든은 연구실로 들어와 보관 중이던 손수건을 꺼냈다. 레인디아의 피가 묻은 손수건이었다. 또 옆에는 레인디아가 모아둔 리빌리언이 쌓여 있었다.

‘이 꽃으로 만든 망각제를 먹은 적이 있다면 디아의 피는 이 시약에 반응하겠지.’

에이든은 리빌리언과 화학 재료를 섞어 시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레인디아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담갔다. 예상대로 투명했던 시약이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디아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었다. 그렇다는 건, 어린 나이에 망각제를 먹고 사창가에 버려졌단 뜻이겠군.’

에이든은 그 결과를 편지에 동봉해 황궁으로 보냈다. 깨끗하게 도려진 레인디아의 머릿속과 달리, 에이든은 그녀의 과거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레인디아조차 모르는 진실을 향해서.

* * *

철퍽!

달걀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엉망으로 으깨졌다. 벨리타는 드레스 자락에 튄 달걀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악! 안 해! 안 해!”

벨리타는 버럭 소리치다 옆에서 달걀을 줍는 앤을 향해 말했다.

“가서 내 옷 좀 가져와.”

“전부 빨아서 아가씨의 드레스는 지금 있고 계신 게 전부잖아요. 설마 후작가에 가서 가져오란 말씀은 아니시죠?”

“그럼 지금 나보고 이 더러운 걸 입고 생활하라고?”

또 억지를 부리는구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었다. 앤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바로 했다.

“야,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하아.”

앤은 들으란 듯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벨리타의 눈에 살심이 튀었다. 그 살벌한 눈빛에 주춤할 뻔했으나 앤은 상황이 크게 변했음을 알았다.

“아가씨, 정신 좀 차리세요. 아직도 공주님 대접을 받고 싶으세요? 이제 우리 둘뿐이에요. 그 노망난 할망구 심기를 거스르면 길바닥에 쫓겨나는 거라고요. 그냥 가만히 계세요. 아까운 달걀 좀 그만 으깨시고요. 이거 다 우리 일급에서 제하는 거 모르세요?”

“천한 년이……!”

벨리타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앤은 겁먹기는커녕 답답하단 듯이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정말, 제가 어쩌자고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 건지. 아무 연고도 없는 곳까지 와서.”

“거지 고아 년 주워다 하녀로 고용해 줬더니 감사해하진 못하고 주인 앞에서 한숨을 푹푹 쉬어? 내가 네년 버릇을 고쳐주지!”

벨리타가 달려들어 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악! 아악! 아파요!”

앤은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다 실수로 달걀이 담긴 바구니를 걷어차고 말았다. 바구니에서 떨어진 달걀 절반은 깨지고 나머지는 저 멀리 굴러갔다.

“에구머니! 저걸 어째!”

앤이 발을 동동 구르거나 말거나 벨리타는 앤의 머리를 우악스레 흔들기 바빴다. 결국 앤이 참지 못하고 벨리타를 힘껏 밀쳤다.

“아야!”

벨리타는 달걀 위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달걀이 으깨져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는 감각이 끔찍했다.

“너, 이이이이……!”

“하아. 하아.”

앤은 숨을 헐떡이다 두 팔을 번갈아 두드리며 먼지를 털었다. 그러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댔다.

“제가 왜 고아예요? 저를 레인디아 같은 년이랑 동급 취급하시는 건가요? 저는요, 집이 조금 가난할 뿐이지, 좋은 부모님 밑에서 순탄하게 잘만 자랐다고요!”

앤이 빽 소리쳤다. 벨리타는 앙칼지게 되받아쳤다.

“그럼 그 잘난 부모님께 데리러 와달라 하지 그러니? 없느니만 못한 거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게 말이 많아!”

“아가씨는 뭐 다른 줄 아세요? 그 대단하신 백작 부인은 어디서 뭘 하시는 건데요? 편지를 보낸 게 몇 주 전인데 연락 한 통 없잖아요!”

앤은 씩씩대다 살아남은 달걀을 줍기 시작했다.

“너는, 하이락에 돌아가기만 하면 모가지야!”

호언장담하는 벨리타를 보며 앤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봐도 백작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에이든이 심어둔 자가 벨리타의 편지를 태워 백작 부인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었다.

‘내가 미쳤다고 그 집에 다시 돌아갈 줄 알아?’

앤은 치를 떨었다.

처음에는 봉급이 줄어도 일시적일 뿐이겠지 생각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지 않나. 그러니 백작가 또한 그러리라 막연히 믿은 것이다. 요즘 수도에서 새 직장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고, 그나마 레인디아와 함께 일하면 그녀가 힘든 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버틸 만했다. 문제는 레인디아가 사라지고, 벨리타는 후작가에서 쫓겨나고, 백작 부인은 당최 무슨 일인지 감감무소식이란 것이었다.

더는 백작가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망할 년. 두고 보라지. 여길 떠날 돈만 모으면 백작가와 영영 인연을 끊을 거니까!’

하지만 하루에 고작 1데르크를 받아 모아서 어느 세월에 북부를 떠날 수 있을까. 그러던 중, 볼레어가 벨리타에게 선물해 준 목걸이가 생각났다.

‘잠깐만. 그걸 훔쳐서 판다면……!’

앤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날 밤.

창밖에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누워 자는 척을 하던 앤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이 끽끽 소음을 냈다.

“으음, 나는……, 벨리타야, 벨리타 그레제……, 라고…… 으으음.”

앤은 잠꼬대를 하는 벨리타 몰래 그녀의 짐을 뒤적였다. 과연, 어둠 속에서도 보석은 빛을 잃지 않고 반짝거렸다.

“찾았다……!”

앤은 황급히 목걸이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 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벨리타의 유일한 재산인 목걸이와 함께.

그날 이후 벨리타는 혼자서 달걀을 팔러 시장에 내려가야 했다. 첫날엔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달걀을 버려둔 채 돌아왔다.

“뭐? 거래를 못 하겠어?”

“나는 백작가의 영애예요! 귀족인 내가 왜 천한 장사치들과 직접 거래를 해야 하죠?”

“그래서 달걀을 버리고 왔단 말이냐? 이런 미친년을 봤나!”

“그 망할 도둑년을 잡아 오면 되잖아! 목걸이를 판 돈으로 생활비를 지불할 테니 날 좀 내버려 두란 말이야, 망할 할망구야!”

“네년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찰싹!

데본 부인은 역정을 내며 따귀를 올려붙였다. 벨리타는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더는 둘을 중재해 줄 사람이 없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아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어머, 저기 좀 봐요. 그레제 영애 아닌가요?”

“세상에. 데본 귀부인 밑에서 지낸다더니,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네요. 말해 주지 않았다면 몰라봤을 거예요.”

“머리는 왜 저렇게 잘랐대?”

산책을 나온 영애 두 명이 벨리타를 보며 숙덕였다. 결국 벨리타는 계란 값을 물어내기 위해 머리카락을 대신 잘라 팔아야 했다.

“뭐야? 당신들, 할 말 있으면 나한테 와서 해!”

벨리타가 버럭 소리쳤다. 영애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새침하게 등을 돌렸다. 무서워서 피했다기보단 상대할 가치가 없단 태도였다.

벨리타는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당장이라도 바구니에 담긴 달걀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 망할 할망구에게 매질을 당하겠지.

“으, 흐윽. 나는 벨리타야, 백작가의, 벨리타 그레제라고…….”

더는 당하고만 못 산다. 다시 어머니에게 연락해야만 했다. 아니, 어머니가 뭐라든 간에 수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타지에서 이런 취급을 당하느니 황후의 눈치를 받으며 수도에 꾸역꾸역 붙어 지내는 쪽이 백 배, 아니, 천 배는 나으리라.

“……볼레어 경.”

바로 그때, 저 멀리서 부하를 이끈 볼레어가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벨리타는 후다닥 그의 앞으로 달려가 팔짱을 꼈다.

“볼레어 경!”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러자 볼레어의 부하가 벨리타를 떼어냈다.

“악! 아파요! 놓으라고요!”

벨리타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이봐. 숙녀분이시지 않나. 조심히 다루도록.”

볼레어가 부하를 저지했다. 그는 눈앞의 추레한 여인이 벨리타라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레이디, 처음 보는 분 같은데 혹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저예요, 볼레어 경.”

“……이 목소리는.”

볼레어의 부드러운 눈매가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그러나 벨리타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에게 매달렸다.

“도움이 필요해요. 물건을 도둑맞았어요.”

“혹 제가 일전에 선물 드린 목걸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그걸 어떻게 아신 거죠?”

볼레어는 살며시 벨리타를 떨어트렸다. 그의 얼굴에 이전과 같은 다정한 미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처럼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다. 외려 모든 감정이 차단된 사무적인 얼굴로 벨리타를 내려다봤다.

“앤이란 하녀가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며 말하길, 백작가의 상황이 걱정되어 여행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이라 했다더군요. 주인 아가씨의 허락을 받았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그, 그럴 리가. 나는 허락한 적 없어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 들었습니다만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요.”

“뭐라고요? 지금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건가요? 앤은, 그 망할 기지배는 사기꾼이에요! 도둑년이라고요!”

“진정하십시오, 벨리타 영애.”

“그 미친 할망구는 어떻고요? 날 종처럼 부린다고요!”

“저택에서 재워주는 대가로 그 정도 노동은 당연히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 저택? 그런 다 무너져가는 집을 저택이라 부를 수 있나요? 거지도 그런 집에선 안 살 거예요!”

벨리타는 엉엉 울며 볼레어의 가슴을 잡고 흔들었다.

“당신은 경비대장이잖아요. 당장 그 도둑년을 잡고 미친 할망구를 감옥에 가두란 말이에요! 봐요, 계란 좀 떨어트렸다고 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어요!”

볼레어는 단호하게 벨리타의 팔을 붙잡고 그녀를 떨어트렸다.

“영애, 나의 직무는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 지켜달란 거잖아요!”

“도난 건에 대해선 저희 쪽에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백성을 감옥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데본 부인은 곤란한 영애께 손을 내밀어준 은인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 집안에 얹혀사는 식객입니다. 머리카락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만.”

볼레어는 어른스럽게 벨리타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벨리타를 길길이 날뛰게 했다.

“데본가에서 도망친 여자도 놓쳤는데 하녀라고 잡을 것 같아요? 벌써 노스랜드를 벗어났겠어! 당장 잡으러 가지 않고 뭐 하냐고요! 정말이지, 이곳은 최악이야! 이렇게 역겨운 도시에 버려졌단 게 믿기지 않아요!”

볼레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성에겐 늘 다정한 그였기에, 이런 미세한 변화가 더욱 크게 와닿았다. 도리어 부하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영애, 진정하시죠…….”

보다 못한 부하 중 하나가 벨리타를 말리려는데, 볼레어가 한쪽 팔로 그를 제지했다.

“우리는 외부인인 당신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북부를 모욕하는 겁니까?”

“모욕이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볼레어 경이야말로 어쩜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죠? 날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이 꼴이 될 때까지 방치한 이유가 뭐냐고요!”

벨리타는 정말로 상처받았단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을 탓하는 여자의 앞에서 어떤 남자가 흔들리지 않을까. 특히나 볼레어는 어릴 적부터 신사도를 몸에 익혀왔던지라 더욱 괴로웠다. 벨리타는 간사하게 그 틈을 파고 들었다.

“적어도, 예전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당신의 안에 살아 있다면요, 불을 다시 지펴달라고 바라는 게 아니에요. 절 고향에 돌려보내 주세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흐윽, 엄마를 보고 싶어요…….”

볼레어가 주춤하자 부하들이 그래선 안 된다는 듯 모진 시선을 보냈다. 몇몇은 미친 여자처럼 오락가락하는 벨리타의 감정을 따라가기 벅차 듣기만 해도 진이 빠진다는 듯 땀을 닦아냈다. 고민하던 볼레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잔인한 사람!”

“여기 있는 게 당신에게 더 좋은 선택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보고에 의하면 백작가는 현재 모든 재산을 압류당했다고 합니다. 황궁에서 백작 부인의 공판이 있을 거란,”

“재산 압류? 공판……? 그게 대체……!”

“그러니 하이락으로 돌아간다 해도 영애가 머물 곳은 없습니다. 저택 또한 압류됐을 테니까요. 적어도 이곳에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직 영애의 소환장이 발부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백작 부인 단독으로 재판을 진행할 모양입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준 거죠?!”

“공문이 오기 전까지 외부로 발설하지 말란 명이 있었습니다. 벨리타 영애의 말처럼 우리의 옛정을 기억하기에 저도 징계를 무릅쓰고 전달해드린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다고요! 이 거짓말쟁이!”

벨리타는 미친 사람처럼 악을 쓰며 볼레어를 붙잡았다. 부하들이 다가와 그녀를 떨어트렸다. 벨리타의 다듬어지지 않은 손톱에 볼레어의 가슴에 붙은 대장 표식이 파밧 뜯겨 나갔다.

“큭.”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그나저나 이 영애, 제정신이 아닙니다. 차라리 감옥에 가두는 편이…….”

“됐네.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게. 진정하는 대로 데본 부인의 저택에 돌려보내도록.”

볼레어는 뜯어진 가슴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벨리타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덧붙였다.

“넘어가는 건 이번 한 번뿐입니다. 또다시 이런 무례를 저질렀다간 공무집행 방해로 감옥에 넣을 겁니다.”

“으으으……!”

벨리타는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재산을 압류당하고 어머니는 황궁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꿈이야. 꿈이야아…….”

벨리타는 도살장의 무녀리처럼 경비대원의 팔에 질질 끌려 마차에 실렸다. 그녀가 흘린 눈물이 바닥에 가느다란 길을 만들었다.

* * *

레인디아는 내일 하이락으로 돌아간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사생아가 아닌 백작가의 영애였단 사실이.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잃어버린 십 년 남짓의 기억과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 돌아가셨는지, 아직 밝혀야 할 것이 잔뜩 남아 있었다. 여전히 레인디아는 그 거대한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디아는 지금 한 아이의 어머니야.’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약해지면 안 된다. 무너져선 안 됐다. 어떤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건 간에, 너만은,

“너만은 행복했으면 좋겠어…….”

레인디아는 배를 붙잡고 중얼거렸다.

어째서일까. 태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작디작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손안에 잡히는 듯한 양감이 느껴졌다. 훗날 이 아이가 태어난다면 마음껏 사랑해 주고, 지켜주고, 예뻐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받지 못한 모든 걸 주고 싶었다. 자식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몹쓸 어미라 손가락질받아도 좋았다.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줄게.”

이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레인디아는 벨리타에게 차분히 편지를 써 내려갔다. 편지에는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레인디아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윽고 레인디아는 밀랍으로 봉한 편지 봉투를 든 채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에이든과 산첼로가 마주보고 서 있었다. 산첼로는 레인디아를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레인디아도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아가씨께 보내는 편지예요.”

“그래. 더 부탁할 것은?”

레인디아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이미 당신은 충분히 많은 것을 해 주셨어요. 이 말은 뒤로 삼켰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에게 받은 편지를 산첼로에게 건넸다.

“이 편지를 그녀에게 전해.”

“예, 에이든 님.”

“아. 그리고 지난번 명한 일 말인데.”

에이든이 퍼뜩 떠오른 듯 말했다. 산첼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든이 따로 명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에이든이 자연스럽게 산첼로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에이든은 커다란 덩치로 산첼로를 가리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편지, 태워.”

“……?!”

“두 번 말 안 해.”

산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예. 그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고맙군.”

산첼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레인디아가 의아한 표정을 보내자 에이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경매에서 산 모조품은 소각장에서 처리하라 했어.”

“아.”

“모조품을 소지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

레인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어깨를 어루만졌다.

“홑몸도 아닌 디아를 데리고 먼 길을 가는 것이 탐탁지 않아. 하지만 걱정 마.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로 데려갈 테니까.”

“괜찮아요.”

레인디아는 목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그 힘찬 대답에 에이든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더 험한 길도 잘만 다녔는걸요.”

레인디아는 마치 먼 옛일을 회상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네. 하지만 이번엔 맨몸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레인디아는 살며시 에이든의 손끝을 붙잡았다.

“에이든 님도 함께 가주시는 거잖아요?”

에이든은 입 안의 연한 살점을 깨물었다. 당장 한쪽 팔로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을 쓸어내고 그 위에 레인디아를 올려 다리를 벌리고 싶었다. 그리고 제 페니스 모양을 따라 벌어지는 사랑스러운 속살에 귀두를 푹 찔러 박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런 짓을 한다면 너는 뭐라고 말할까?

‘안 돼요. 아이가……!’

배 속의 아이가 위태롭다며 저를 밀어내겠지.

임신은 레인디아의 연약한 마음에 불을 지피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아직은 그녀가 임신한 몸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선 안 됐다. 그녀의 마음이 흔들릴 테니까. 백작 부인과 벨리타의 소식을 알게 되면 둘의 존재는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레인디아가 그녀들을 용서할지도 모를 일이다. 워낙 여린 심성을 지니고 있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에이든은 그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었다.

진정한 본심은 레인디아를 임신시켜 구속하는 것이었다. 지금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아이를 임신했다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나의 아이를. 아아,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억만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온몸이 찌릿찌릿 전율했다.

‘걱정할 거 없어, 디아. 하이락에 가서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땐 진짜로 임신시켜 줄 테니까. 몇 번이고.’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손에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그러곤 그녀의 가는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에이든의 입술이 레인디아의 이마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레인디아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입술을 떨어트린 에이든은 생각난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디아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

“……네?”

에이든은 책상으로 걸어가더니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루약을 담을 때 쓰는 종이였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앞에 서서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는 새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자궁을 튼튼하게 해 주는 약이야.”

“자궁을요……?”

“그래. 우리 아이를 지켜줄 약이기도 해.”

에이든은 싱긋 미소 지었다.

하루빨리 레인디아를 임신시키기 위해선 약의 도움이 절실했다. 음식에 몰래 넣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원할 때 보란 듯이 먹이고 싶었다.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특히나 중요했다.

무엇보다, 네가 원했으면 좋겠어.

나와의 아이를.

“황궁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조제법이야. 원한다면 매일 만들어줄게.”

자궁을 튼튼하게 해 주는 약. 그것을 보는 레인디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모성은 더없이 간절히 이 약을 원하고 있었다.

“예전에 억지로 약을 먹인 일은 반성하고 있어.”

어느새 레인디아의 손바닥엔 약이 담긴 종이가 들려 있었다. 레인디아는 자신의 손안에 놓인 약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주저할 거 없이 한입에 가루약을 털어 넣었다.

“으읍.”

입 안 가득 씁쓸한 맛이 번졌다. 열심히 혀를 굴려 타액으로 녹인 그것을 꿀꺽 집어삼켰다.

에이든은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먹잇감 앞에서 숨죽인 맹수처럼. 그렇게 먹잇감이 허점을 드러냈을 때, 에이든은 전에 없을 만큼 다정한 손길로 레인디아의 뺨을 감싸 쥐었다. 발톱을 숨긴 짐승은 순한 양의 모습을 하고 여인에게 다가왔다.

“써요.”

레인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든은 그런 레인디아를 퍽 귀엽게 바라봤다.

“그래? 다음번엔 입가심할 초콜릿을 준비할게.”

“그, 그 정돈 아니에요. 괜찮아요.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라고…… 어디선가 들었어요.”

레인디아는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키스로 대신할까?”

“……네? 하압.”

입술이 포개지고 에이든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씁쓸한 약 맛은 타액에 녹아 농밀하게 변했다. 입 안에서 과즙이 샘솟는 것 같았다.

태초의 여인을 유혹하듯, 남자는 뱀의 혀로 레인디아를 안심시켰다. 에이든과 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는 절대 제 여인을 다른 사내에게 양보하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 * *

신성 솔레디온 제국의 수도, 하이락.

지하 감옥의 공기는 습하기 그지없었고,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비릴리안은 넝마를 걸친 채 침대 대신 다 찢어진 천을 기워 만든 침낭 위에 앉아 있었다. 잠을 잘 땐 맨발 위로 쥐나 벌레가 기어가 깨기 일쑤였다. 결국, 그녀는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덜그럭.

쇠창살 밖에서 식사 시간을 알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윽고 횃불이 지하 감옥을 비추었다. 비릴리안은 바닥에 떨어진 나무 그릇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가 나가고 바닥에는 곰팡이가 가득 낀 낡은 그릇이었다.

“식사요.”

지하 감옥의 교도관이 큰 통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국자로 통 안을 휘휘 젓더니 바닥에 놓인 그릇 안에 가득 떨어트렸다. 철퍽! 무엇을 섞어 만들었는지 모를 죽이었다. 마치 사육하는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듯한 모습에 비릴리안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수도의 귀부인이었던 자신이 어쩌다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인지. 얼마 전 조사관들이 들이닥쳐 집 안 곳곳에 차압 딱지가 붙었고, 타운 하우스와 백작령은 그녀가 손 쓰기도 전에 경매로 넘어갔다.

경매. 그랬다.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경매에 부친 남편의 예술품이 알고 보니 전부 가품이었다. 진품을 완벽하게 모방한 특급 가품!

“감히 나한테 이런 모욕을 줘?”

죽은 남편을 향한 분노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원망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비릴리안은 자신의 무고를 주장했으나, 신성 솔레디온 제국의 법전에 적힌 대로라면 모든 상황은 그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고작 모조품을 판매한 정도로 지하 감옥에 갇힐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재산 일부를 압류하는 경벌로 끝날 것을 마치 중죄인을 다루듯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채 지하 감옥에 가두다니. 분명 알 수 없는 배후가 뒤에 있었다.

대체 누굴까? 이토록 자신의 몰락을 바라는 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비릴리안은 영악한 여인이어서, 자신보다 강한 사람은 되도록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

“자, 잠깐!”

비릴리안은 쇠창살을 붙잡고 간수에게 애원했다.

“딸아이에게 연락이라도 하게 해 줘.”

“또 그 소리인가? 내 권한 밖이오.”

“도, 돈이라면 딸아이를 시켜 구해 볼 테니,”

“재산을 전부 압수당한 귀부인이 말이 많군.”

간부는 비릴리안을 빤히 보다가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뭐, 다른 걸 준다면…….”

“크윽, 다, 당장 꺼지지 못해?!”

비릴리안은 그 역겨운 시선을 향해 그릇을 집어 던졌다. 그릇에 담겨 있던 돼지죽이 사방으로 튀었다.

“저 미친 여자가! 죽고 싶어?!”

간수는 발로 힘껏 쇠창살을 잡고 있던 비릴리안의 손을 짓이겼다. 비릴리안이 꽥 소리를 지르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재판이 있을 때까지 쫄쫄 굶게 해 주지!”

간부는 그녀에게 퉤 침을 뱉고 사라졌다.

다시, 지하 감옥에는 짙은 어둠이 내리깔렸다. 모멸감과 무력감이 비릴리안의 목을 졸랐다. 비릴리안은 처참한 몰골로 흐느꼈다. 시궁쥐와 벌레가 제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 * *

에이든과 레인디아를 태운 마차가 하이락에 도착했다. 산첼로와 집사장, 하녀 몇몇이 동행해 여행길이 전혀 고단하지 않았다. 벨리타를 모시고 노스랜드로 향하던 때와 확연히 대비되었다.

“하이락에 도착했습니다, 에이든 님.”

산첼로가 마차 밖에서 보고했다.

도시 안에서 흐르는 강줄기는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넘실거리고 어린아이들이 잔잔한 물살을 따라 달렸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엔 해맑은 미소가 가득했다.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 빨래를 널고 노동자들은 노동요를 부르며 짐을 날랐다. 고개를 들면 신의 은총과도 같은 일광이 하이락의 백성들을 따사롭게 감싸 안고 있었다.

‘평화롭구나.’

하이락은 레인디아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가지런히 늘어선 건물들, 백성의 얼굴엔 너 나 할 것 없이 생생한 활력이 넘친다. 4년간 이어진 전장의 상흔은 잊힌 지 오래였다. 신성 솔레디온 제국은 현명한 군주의 치세하에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오늘날 제국을 통치하는 것은 황후 카타리나였다.

그녀는 공신 가문인 베르첸 가(家)의 영애였다. 황제 베넨돌이 4년 전쟁에서 아들 제레미를 잃은 충격으로 병상에 누운 뒤, 그녀가 황권을 위임받아 황후를 중심으로 새로운 통치체제가 시작되었다.

물론 베넨돌 집권 당시에도 카타리나는 국정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과시했다. 사실상 제국이 이토록 빨리 전장의 상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던 데에는 그녀의 공이 컸다.

‘공명정대하고 훌륭한 분이셨어.’

레인디아 또한 카타리아 황후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황실 데뷔탕트에서 대면해 일면식밖에 없는 사이였으나, 그 짧은 대화를 통해서도 황후의 올곧은 신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내리는 판결이라면 어떤 결과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순히 황후가 지닌 권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실로 정의로운 사람임을 알고 있던 까닭이었다.

“에이든 장군님의 마차래요!”

“저 안에 에이든 님이 타고 계신다고?”

그때, 백성들이 마차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다행히 인파가 앞을 가로막지는 않아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황급히 커튼을 닫았다. 슥 옆을 보자 에이든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몹시 피로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레인디아는 아주 오래전 에이든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사교 시즌엔 수도로 가시겠네요?’

‘내가 그딴 곳에 갈 거 같아?’

에이든은 하이락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듯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레인디아는 그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과거엔 에이든이 풍기는 살벌한 위압감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은 에이든이 싸늘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게 두려워서 목이 막혔다. 그의 다정함을 알아버려서일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에이든은 다른 사람이라 여겨질 만큼 양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말이다. 물론 앞면도 뒷면도 모두 에이든의 본모습이었다. 단지 상대에 따라 앞면을 보일지 뒷면을 보일지 달라질 뿐.

“죄송해요, 에이든 님.”

감겨 있던 에이든의 눈꺼풀이 사르르 열렸다. 붉은 시선이 레인디아에게 향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디아?”

에이든이 상냥히 되물었다.

“감사해서요. 저 때문에 하이락에 오신 거잖아요. 오고 싶지 않으셨을 텐데.”

에이든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레인디아의 몸을 잡아당겼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품에 폭 안겼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머리카락에 코를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나는 디아가 가는 곳이 어디든 함께할 거야.”

예전이었다면 이런 집착이 소름이 끼쳤을 텐데 오늘은 에이든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도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무사할 것만 같았다. 자신도 배 속의 아이도.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품에 기댄 채 살며시 눈을 감았다.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덜커덩. 끼이익.

큰길을 가로지른 마차는 황궁에 당도했다. 정문이 열릴 땐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듯한 웅장함이 느껴졌다. 사계를 막론하고 푸릇한 잔디밭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싱그럽게 반짝였다.

금으로 도금된 기둥이 새하얀 대리석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은 지붕, 우아한 아치형 창문들. 궁전에 축적된 아득한 세월은 감히 모방할 수 없는 제국의 찬란한 역사 그 자체였다.

“아름다워라…….”

레인디아는 벅찬 가슴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황궁은 처음이지?”

에이든이 그녀를 빤히 보다 물었다. 레인디아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더니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아뇨,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에요. 아가씨가 황실 데뷔탕트에 초대받으셔서 함께 따라간 적이 있어요.”

“아아.”

에이든은 그제야 떠올랐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궁 안에 머무는 것은 처음일 거 아니야.”

“……네.”

“가장 좋은 방에 머물 거야. 최고의 귀빈을 모시는 곳이지.”

기대해도 좋아. 에이든이 살그머니 속삭였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곁에 서서 걸었다.

우아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바닥은 지면을 박찰 때마다 마치 악기처럼 청명한 소리를 뱉어냈다. 침실로 이어지는 긴 통로 위에는 아름다운 천장화가 그려져 있고, 벽면에는 금테 액자에 담긴 옛 성인들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마치 황립 미술관에 온 기분에 사로잡혀 도착한 방 역시 무척이나 호화스러웠다. 아니, 호화스럽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손이 닿기 힘든 구석까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테이블 위에는 정원에서 갓 따온 열매가 담겨 있었는데 어찌나 반질거리는지 장식품으로 보일 정도였다.

“디아.”

너무 한눈을 팔고 있던 것일까? 레인디아는 에이든이 뒤로 다가온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자 에이든이 인상을 찡그린 채 웃고 있었다. 어쩐지 괴로워하는 마음이 눈빛을 통해 느껴졌다.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레인디아가 입을 열려는데 에이든이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나는 이제 백모님을 뵈러 가야 해.”

에이든의 백모님이라면, 황후 카타리나를 말하는 것이다.

“저도 마마께 인사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레인디아가 살그머니 물었다. 에이든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공식 알현은 만찬회로 예정되어 있어.”

“……네, 그랬었죠.”

뒤늦게 깨달은 레인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만찬회에서 황후를 알현하고, 내일은 최고명예재판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에이든은 급박한 일정에 무척 미안해했지만, 레인디아는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이렇게 재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에이든 덕분이었으니까.

“지금 가는 것은 비공식 만남이야. 명색이 황후의 조카가 황궁에 도착하고도 공식 알현까지 인사하지 않고 황후를 기다리게 하는 건 예법에 어긋나서.”

에이든은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비공식적인 만남에서도 황궁 예절을 따른다는 게 우습지. 참 피곤한 삶이야.”

에이든이 자조했다.

이전의 에이든이 홀로 고고히 들판을 떠도는 짐승 같았다면, 눈앞의 그는 마치 날개가 꺾인 가여운 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하이락에 도착한 후부터 어쩐지 쭉 기운이 없어 보였다. 윤이 흐르던 검은 머리카락이 푸석해지고 눈 밑이 유난히 칙칙해 보인다면 착각일까? 천하의 에이든 헬렌베르크라 할지라도 따라야 하는 규율이 있다는 게 신기한 한편, 자유를 잃은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릿해졌다.

“걱정 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만찬회에서 디아를 에스코트해 줘야 하니까. 옳지, 내가 없는 동안 정원을 산책하는 건 어떨까? 이곳은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네, 그럴게요.”

레인디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의 말처럼 아이에게도 산모인 저에게도 햇볕을 쬐며 걷는 일은 중요했다. 에이든은 살며시 그녀의 뺨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 디아.”

에이든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레인디아의 몸에는 에이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레인디아는 이마를 슥 훔친 뒤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의 온기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졌다. 이윽고 천천히 손을 내려 배를 감쌌다.

“산책을 하는 게 좋겠지? 응? 아가.”

레인디아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봤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무척이나 어색했다. 에이든은 퍽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는데, 자신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과 별개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무척 즐거웠다. 제 몸 안의 작디작은 생명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이.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라는 게.

* * *

“하아.”

알현실로 향하는 에이든은 손가락을 찔러넣어 머플러를 잡아당겼다.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가 흘러내리자 한 손으로 대강 쓸어넘겼다. 대리석을 박차는 발소리가 경박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알현실 앞에 섰을 때, 에이든은 더없이 불량한 차림새였다. 도저히 국가의 지존을 응대하는 이의 모습으론 보이지 않았다.

“황손, 에이든 헬렌베르크 장군이십니다.”

신하의 외침과 함께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고 들어온 일광이 눈부셨다. 그러나 에이든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황후의 앞에서 예의를 차려 고개를 조아리지도 않았다.

“에이든!”

오히려 황후인 카타리나가 황좌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황좌를 차지한 여인의 숙명과도 같은 기품은 에이든의 앞에서 홀연히 날아가 버렸다.

“정말로 에이든이니?”

“예. 제국에 저 같은 괴물이 둘씩이나 있진 않을 테니까요.”

“괴물이라니…….”

카타리나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만지면 깨질까, 불면 날아갈까 차마 조카를 건들지 못하는 두 손이 허공에서 쥐락펴락하다 마침내 깍지를 끼며 밑으로 향했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내게 재판을 부탁했을 땐 대체 무슨 일인가 하였단다.”

“사냥철이지 않습니까, 백모님.”

“사냥철?”

조카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카타리나는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 잡기엔 버거운 사냥감이었던지라. 백모님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아아.”

그제야 카타리나는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 너와의 동맹은 늘 환영이란다. 혈육만큼 든든한 아군은 없지 않니. 너도 그 사실을 아는 것 같아 더없이 기쁘구나.”

카타리나는 웃으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내게 기대거라. 너는 나의 하나뿐인 조카야. 아들이나 다름없지.”

전장에서 아들을 잃은 카타리나의 눈동자엔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예. 그렇겠지요.”

에이든의 빈정거리는 대답에도 카타리나는 현숙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옥상에 마련된 테라스로 나갔다. 황금빛을 흩뿌리며 저무는 노을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다지도 찬란한 노을을 보고 있노라면, 진정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 신이 아니고서야 이토록 아름다운 경치를 만드는 건 불가능할 테니.

‘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아.’

에이든은 저녁노을이 빚어낸 감상을 사뿐히 짓밟았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허상의 신 따위가 아니었다. 인간은 기도를 통해 두려움을 해소하지만 그것은 찰나일 뿐. 결국 신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사를 해결하는 것은 권력이다. 거스를 수 없는 절대권력.

에이든은 그 힘을 이용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재판은 네 뜻대로 끝날 게다. 그녀는 단두대에 서서 죗값을 치르게 되겠지. 그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재판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생각이니? 그러지 말고 이곳에 있자꾸나.”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갈 겁니다.”

에이든은 단호히 대답했다.

카타리나는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피해를 입었다는 여자 말이다.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니?”

에이든의 몸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마시지 않고 빙글빙글 돌리기만 하던 찻잔을 내려놨다.

“나를.”

첫마디를 내뱉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날, 모든 사람이 버린 나를, 구해 준 여자야.”

카타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레제 백작가라면…….

“당신조차 버린 나를.”

에이든은 카타리나를 노려봤다. 늘 무표정하던 얼굴이 흉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붉은 눈빛에는 버려지고 물에 젖은 짐승이나 지을 법한 애달픔이 묻어났다.

카타리나는 그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득한 죄의식이 그녀를 짓눌렀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죽인 에이든의 형제가 떠오른 것이다.

“미안하구나, 에이든.”

“…….”

“너에게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

“…….”

“설마, 그 여자가 정말로 존재할 거라곤……!”

카타리나는 몹시 죄스러워하며 말끝을 흐렸다. 8년여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은 에이든은 마음껏 그녀를 비웃었다.

“그렇겠지요. 나 같은 놈을 아무런 대가 없이 목숨을 바쳐 구해 줄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에이든,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하지만 그녀는 그랬어.”

에이든은 우악스레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치 멈춰버린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서 쥐어 비틀 듯이, 코트가 그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모든 걸 바쳐서 나를 구해 줬지. 처음으로 그녀의 품에서 내가 살아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깨달았어. 나는 그날 구원받았단 말입니다, 백모님.”

에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들이 환상이라 치부한 그 존재로부터.”

조카의 잔혹한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카타리나의 영혼을 꿰뚫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에이든이 퍼뜩 떠올랐단 듯이 말했다. 그가 슥 뒤를 돌아봤다. 한쪽으로 기운 붉은 눈동자는 맹수처럼 사납게 번뜩였다.

“내가 백모님을 황좌에서 끌어내릴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요. 나를 적으로 돌린다면 당신만 괴로워질 뿐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란 경고였다.

카타리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황후의 위엄을 잊은 채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를 적으로 돌릴 일은 없을 거다, 에이든. 나야말로 그날 너에게 구원받았으니 말이다.”

“당신을 위해서 한 짓은 아니었어.”

“……그래도 고마워.”

카타리나가 힘겹게 미소 지었다.

홀로 남은 카타리나는 식은 찻잔을 멍하니 보다 노을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날 황궁은 이 찻잔 속처럼 평화로웠으나,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절벽으로 추락하고 마는 생지옥이었다.

‘다시는 그런 끔찍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어.’

카타리나의 눈동자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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