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복종-16화 (16/23)

16. 인간증명 下

“여기가 우리의 새집인가요?”

“마음에 드느냐, 캐서린?”

“이렇게 예쁜 코티지는 처음 봐요. 마치 동화에서나 보던 집 같아!”

캐서린 잉게르만은 오뉴월의 햇살처럼 싱그러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출렁였고, 입을 열면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캐서린의 미모에 사내들은 찬사를, 여인들은 동경을 보내곤 했다. 세속을 초월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캐서린에겐 홀아버지가 하나 있었다. 잉게르만은 작위는 없었으나 각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으로 부를 쌓은 대상(大商)이었다. 불혹의 나이에 불치병에 걸리게 된 잉게르만은 사업을 정리하고 딸아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왔다.

“미안하다, 캐서린. 모자란 아비를 보살피느라 너의 청춘을 낭비하게 되었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 저는 오히려 기뻐요. 늘 어딘가에 정착해 살고 싶었는데 아버지 덕에 그 꿈을 이룬 거예요.”

“너는 참 예쁜 말만 하는구나.”

캐서린은 외모뿐 아니라 마음씨도 고운 처녀였다. 잉게르만 또한 쌓아둔 재산을 고향의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사용했다. 부녀는 선량한 마음씨로 마을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 마을에 한 귀족 청년이 찾아왔다.

“제임스 그레제 백작입니다.”

건실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백작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펍에서 평민들과 어울리며 우정을 쌓았다. 호탕한 성격 덕에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시골 마을에서도 쉽게 섞여들었다.

잉게르만도 제임스를 마음에 들어 했다. 잉게르만은 자신의 고향을 살기 좋은 마을로 가꾸고자 했다. 잉게르만에겐 돈이 있었고 제임스에겐 그의 상상력을 실현해 줄 계획이 있었다. 그렇게 젊은 백작의 도움으로 마을에 새로운 수로가 생기고 편의 시설이 들어섰다.

“둘이 참 잘 어울려.”

“아주 선남선녀야.”

제임스와 캐서린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은,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봄이 오면 눈이 녹는 자연의 법칙과도 같았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왔을 때, 잉게르만의 병세가 악화됐다.

“캐, 캐서린. 쿨럭. 캐서린…….”

“아아, 아버지. 안 돼요. 돌아가시면 안 돼요.”

캐서린은 어린아이처럼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죽기 전에……, 네가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쿨럭, 보고 싶, 었는데……. 너만 두고 떠나는 것이, 나는 가장 두렵구나……. 여린 네가 혼자, 쿨럭, 어찌 살아갈 수, 있을지…….”

다행히 주치의의 기지로 잉게르만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한 아버지의 모습은 캐서린의 마음을 연약하게 만들었고 어떠한 결심을 서게 하는 계기가 됐다.

“캐서린, 나와 결혼해 주겠어?”

“하지만, 우리의 신분 차이를 생각하면…….”

“지금 나는 귀족이 아닌 너를 지켜주고 싶은 한 남자일 뿐이야. 캐서린, 너를 혼자 둘 수 없어. 내가 널 지키게 해 줘.”

“……제임스.”

캐서린은 청혼을 받아들였다.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제임스와 함께라면 잘 헤쳐나가리라 믿었다.

“자네에겐 명예가 있고, 내 아이에겐 부가 있네. 나는 무엇이 더 중요하다 우열을 가리려는 게 아니야.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게 되었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일시적으로 건강을 되찾은 잉게르만은 하나뿐인 딸아이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 줬다. 결혼식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석했고 이웃 마을에 소문이 날 만큼 호화스러웠다.

“잉게르만 경은 오후 5시 20분경 사망하셨습니다.”

석 달 뒤, 잉게르만은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 둘러싸여 어떠한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났다. 비록 손녀딸은 보여주지 못했으나, 눈을 감을 때 잉게르만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캐서린은 결심했다. 아버지를 위해서도 더욱더 행복해지리라.

“아버지, 이 아이의 이름은 레인디아예요. 꿈속에 순록이 나와서 지어준 이름이랍니다.”

캐서린은 매일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자신이 낳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여줬다. 어지간한 일로는 울지도 않고, 칭얼거리지도 않는, 아주 얌전하고 천사 같은 아이였다. 남편이 새 사업으로 부쩍 바빠져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아이와 함께라면 외롭지 않았다.

“캐서린, 슬슬 우리도 하녀를 들이는 게 좋겠어.”

“하녀를요? 지금껏 저 혼자서도 충분히 잘해 왔는걸요.”

“앞으로는 손님들이 많이 방문할 거야.”

“저로는 부족할까요?”

“내가 오해하게 했군. 내 말뜻은, 당신이 조금 더 편안히 지냈으면 한다는 거였어. 장인어른도 그러길 바라실 거야. 당신, 어릴 때부터 장인어른을 따라다니며 많이 고생했잖아? 무엇보다 우리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육아와 집안일을 병행하는 건 아무리 너라도 힘들어.”

“……네. 하지만 저택이라고 해도 작은 코티지에 불과한걸요. 많은 하녀는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우선 한 명만 채용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부족하다면 차차 늘려가는 거죠.”

“그래, 좋은 생각이야! 다음 외출 때 신문에 구인 광고를 싣도록 할게.”

그렇게 한 여인이 백작가에 도착했다. 면접은 캐서린의 역할이었으나, 그녀가 레인디아를 돌보다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제임스가 합격 통보를 한 상황이었다.

“캐서린, 인사해. 오늘부터 널 도울 하녀야.”

“만나서 반갑습니다, 부인.”

아이를 돌보느라 수척해진 캐서린과 달리 눈앞의 여자는 생기가 넘쳤다. 특히나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캐서린은 포대기에 쌓인 레인디아를 안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내심,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캐서린?”

“아. 저는 캐서린이에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제임스의 부름에 캐서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까이 붙어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흘렀으나 그저 착각일 뿐이라 생각했다. 캐서린은 속으로 휘휘 고개를 저으며 불길한 감정을 떨쳐냈다.

“그 아이 벌써 말을 해요.”

“그래, 그래.”

“이러다가 전부 기억하겠다고요. 정말로 부인이랑 같이 내보내는 거 맞죠? 아후, 나도 양심이 있지. 날 기억할 애를 어떻게 쫓아내느냔 말이에요!”

“어허. 자꾸 그렇게 투정 부릴래? 어련히 내가 알아서 할까.”

“아이, 몰라요!”

“하여간, 몸만 컸지 속은 아이라니까. 이래서 당신이 좋아. 질리지를 않아.”

“그거 칭찬이에요?”

“당연히 칭찬이지. 캐서린처럼 고분고분한 여자는 재미없어.”

제임스는 툴툴대는 하녀의 허리를 붙잡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기 시작했다. 하녀는 야릇한 신음을 내며 제임스의 사타구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하아. 제임스, 빨리 넣어줘요. 벌써 속이 흠뻑 젖었어.”

“보채지 말래도.”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일까.

행복했던 결혼 생활은 하루아침 파국으로 치달았다. 캐서린은 집무실에서 하나로 겹쳐지는 두 사람을 보다 침실로 도망쳤다.

“사랑한다, 레인디아. 엄마는 너뿐이야.”

캐서린은 실성한 듯이 중얼거렸다. 아이의 뺨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어느새 하녀가 열 명으로 늘었다. 캐서린은 부엌에서 쫓겨나 육아에만 전념했다. 그녀에겐 레인디아가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잠깐 한눈을 팔면 다른 하녀들이 레인디아를 보살피고 있었다.

“내, 내가 할게요!”

“어머, 백작 부인.”

“레인디아를 돌보는 건 제가 할게요. 괜찮으니, 아이는 신경 쓰지 마세요.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하녀들은 자식에게 집착하는 캐서린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보통 귀부인들은 육아도 하녀에게 떠넘기는 것이 당연했는데, 캐서린은 유난스럽게 레인디아를 품에 싸고돌았다.

‘아무도 모르겠지.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던 남편이 하녀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과 아이를 내쫓을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한시라도 아이를 품에서 떨어트릴 수 없었다.

“부인께서 도통 침실에서 나오질 않으시네.”

“산후 우울증 같은 걸까?”

바깥에서 숙덕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캐서린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일에만 집중했다.

“우으으.”

“응? 왜 그러니, 아가? 한 번도 칭얼대지 않던 애가.”

“우으, 우으응.”

늘 천사같이 색색거리던 레인디아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그제야 캐서린은 자신의 젖이 말랐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 하는 거야? 나는 대체…….

“으, 흐윽. 흑.”

아이의 보드라운 뺨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캐서린은 아이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엉엉 울었다. 몸이, 마음이, 영혼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형체 없이 무너진 것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끝도 없이. 끝을 모르고.

캐서린이 꿈꾸던 아름다운 가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흙탕을 벗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가여운 여인만이 남았을 뿐. 그리고 아직 그녀의 보살핌이 필요한 작은 아이와. 캐서린은 다시금 다짐했다. 이 아이만큼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아가? 내 아기! 내 아기!”

눈을 떴을 때, 품 안에 있어야 할 레인디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캐서린은 울부짖으며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단단히 화가 난 제임스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캐서린, 레인디아를 굶겼다는 게 사실이야?”

“……뭐라고요? 내가 그럴 리 없잖아요.”

“하녀들이 네가 젖이 안 나온단 사실을 알려줬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우리 아이를 죽일 셈이었어?”

“아, 아니야. 아니에요! 이번만 잠깐 안 나온 것뿐이라고요! 만져봐요. 지금은 다시 나올 거예요!”

캐서린은 제임스의 팔을 붙잡아 제 가슴에 얹었다. 제임스는 인상을 구기며 팔을 쳐냈다. 한때는 제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던 손이 이제는 닿기도 싫단 듯이 멀어졌다. 캐서린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녀들이 보고 있어, 처신 잘해.”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하녀들이 보는 앞에서 자식을 빼앗아가는 건가요? 레인디아는 어디 있어요! 내 아기 어딨느냐고!”

“목소리 낮추랬지. 레인디아는 안전한 곳에 있어. 검진을 받으러 보낸 참이야.”

“뭐라고요? 의사를 집으로 불러야지 왜 그 어린아이를 밖으로 보낸 거죠?”

“그가 왕진을 못 할 만큼 바쁜 이 마을 최고의 명의이기 때문이지! 알아들었으면 목소리 좀 낮춰!”

“아니야, 아니야. 나도 가겠어요. 당장 마차를, 악!”

“젠장. 당신은 미쳤어.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제임스는 마치 짐승을 제압하듯 제 아내를 둘러업었다. 아기! 내 아기! 캐서린은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하녀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숙덕댔다. 그들 사이에서 붉은 머리의 여인이 미소 지은 채 서 있었다.

다행히 레인디아는 검진을 마치고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캐서린은 레인디아에게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었다. 이제 제임스의 허락 없이는 레인디아를 안아보지도 못했다.

“할 말이 있어요.”

“레인디아를 보는 거라면 안 돼. 당신은 아직 안정이 필요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고.”

제임스는 집무실을 찾아온 아내를 앞에 두고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신문만 펄럭펄럭 넘겨댔다. 캐서린은 쿵 책상을 내리쳤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은 가슴에 사무친 응어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슨 짓이야? 미쳤어?”

“아뇨. 제정신이에요. 아주 멀쩡해요. 당신이 그 여자랑 언제 어디서 불륜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기억할 만큼……!”

“그 여자? 대체 누굴 말하는 거지?”

“누구겠어요! 당신이 처음 데려온 그 여자 말이에요!”

“하아.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제임스는 신문을 반으로 접어 책상에 내려놨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캐서린은 두 걸음 물러나 소리쳤다.

“내, 내가 세상 물정 모른다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 말아요……!”

캐서린은 어렵게 덧붙였다.

“이혼해요.”

“뭐?”

“법대로 하자고요. 지참금과 내 아버지의 재산, 전부 들고 떠날 거예요. 레인디아도 함께!”

“하.”

제임스는 기가 막힌단 듯이 코웃음 쳤다. 이윽고 서늘하게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법대로 하자고? 그래. 법대로 할까? 부자 아버지 밑에서 오냐오냐 자란 아가씨가 백작가에서 나고 자란 귀족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몰락 귀족도 귀족인가요?”

“……뭐?”

“사실 다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도 저도. 당신이 가문의 빚으로 영지를 잃고 작위만 겨우겨우 건져 떠도는 신세란 걸요. 하지만, 우리 부녀는 당신이 선한 사람이라 믿었어요. 그저 불운한 일을 겪은 것뿐이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하…….”

제임스가 푹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 손으로 연거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는 동안 캐서린은 전전긍긍하며 제임스를 바라봤다. 사실 이혼은 충동적으로 한 말에 불과했다. 진심으로 가정을 깨트릴 마음은 없었다. 레인디아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키울 수 없었으니까. 그저 이 모든 것은 제임스의 양심에 호소하기 위한 발악이었다.

“우리 어렵게 가지 말아요. 레인디아에겐 아버지가 필요해요. 나도 우리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아요. 당신, 영지를 찾으려면 돈이 더 필요한 거죠? 나도 도울게요. 우리 다시 같은 목표를 갖고,”

“입 닥쳐!”

“악!”

짜악! 우당탕!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캐서린의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슥 고개를 들자 제임스가 벨트를 풀고 있었다.

“천한 년이 어디서 감히 귀족을 가르치려 들어.”

“제, 제임스……!”

“이혼? 그래, 까짓거 해 주지. 법정은 무조건 당신 같은 여자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게 돼 있어. 왜냐고? 당신은 자식한테 빈 젖을 물려 영양실조에 걸리게 할 만큼 미친 여자니까!”

“그날 딱 하루였어요! 영양실조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다른 날은 멀쩡했다고요!”

“그 한 번의 실수로 너는 엄마 자격을 잃은 거야!”

“그러는 당신은 한 번도 육아를 거든 적 없, 꺅!”

제임스가 휘두른 벨트가 캐서린의 몸을 내리쳤다.

“그건 내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지! 애를 돌보는 건 네 일이야! 이게 다 네 탓이라고! 너 같은 미친 여자를 금치산자로 만드는 일이 어려울 것 같아?”

철썩! 철썩!

지독한 매질이 이어졌다. 캐서린이 정신을 차렸을 땐 해가 뜨고 있었다. 분명 대화를 나눌 땐 저녁 무렵이었는데…….

그 후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낮인지 밤인지, 봄인지 여름인지,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캐서린은 식음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레인디아. 레인디아……. 내 아기…….”

레인디아를 빼앗긴 캐서린은 미친 여자처럼 마을을 돌아다녔다. 아니, 실제로 그는 미친 여자였다. 결국, 비가 오는 날 강가를 따라 걷다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의 시체가 흘러내렸다. 잉게르만과 제임스가 만든 수로를 타고.

“물에 빠져 죽은 걸 저치가 찾아냈다더군.”

“자살이었겠지?”

“미친 아내를 데리고 있느라 백작도 고생이 많았겠어요.”

“아이가 어리다 들었는데.”

“어쩌다 저렇게 된 걸까요?”

캐서린의 사망으로 법적인 혼인 관계는 말소되었다. 그렇게 아내를 잃은 그레제 백작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떠날 때 붉은 머리의 하녀가 동행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마을 사람들은 금세 새로운 소식에 흥미를 보였고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잊혀졌다.

* * *

“…….”

“…….”

엄숙함을 넘어 참담한 분위기가 재판장을 짓눌렀다. 레인디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부들부들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랐다. 제 어머니에게 이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졌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디아.”

에이든은 두 팔로 레인디아를 감싸 안았다. 레인디아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들썩였다. 보다 못한 에이든이 안아 들려 하자, 레인디아가 그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팔을 잡은 손마저 눈에 띄게 떨리는데도 레인디아는 꿋꿋했다.

“여, 여기, 있을 거예요.”

“디아, 무리할 거 없어. 이미 결과는,”

“아, 아니요. 있어야 해요. 제가 들어야 해요.”

어머니의 삶이니까.

레인디아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에이든을 올려다봤다. 에이든은 손수건을 꺼내 레인디아의 눈을 꼼꼼히 닦아줬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할 수 있게 천천히 등을 다독여줬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품에 기댄 채 재판장을 바라봤다.

“이 증언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레제 백작을 유혹한 하녀는 당신이란 뜻이로군? 묻겠네. 백작 부인은 정말로 사고사였나?”

“맹세컨대, 백작 부인을 죽인 건 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지요. 네, 제가 죽였습니다. 전부 시인합니다.”

비릴리안은 격렬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 백작 부인의 자식은 어찌한 게지?”

“마을을 떠난 직후 고아원에 보냈습니다. 아니, 수도원……이었던 것 같아요. 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었습니다.”

비릴리안은 옛 기억을 더듬으며 겨우겨우 대답했다. 카타리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해가 가질 않는군. 그렇다면 어째서 다시 그 아이를 데려온 것인가?”

군중들의 시선이 비릴리안에게 몰렸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레인디아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그대로 잊고 지냈더라면, 적어도 이런 결말을 맞이하진 않았을 텐데.

“그이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여자를 그리워했어요. 캐서린을요.”

비릴리안의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완전히 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 남자는, 완전히 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 자리는, 놀랍게도 여전히 죽은 캐서린이 차지하고 있었다. 한창 벨리타가 사랑스러운 애교로 집안의 천사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을 때, 그레제 백작은 과거의 기억으로 도피하기 시작했다.

‘엄마, 레인디아가 누구야?’

‘……뭐?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니, 벨리타?’

‘몰라. 아빠가 저번에도 나보고 레인디아라 불렀어. 그리고 술만 먹으면 그 아이를 찾아. 또 캐서린? 이라는 이름도 부르던데?’

벨리타가 그런 말을 했을 땐 억장이 무너졌다. 비릴리안은 바로 잡고 싶었다. 달리 말하자면, 캐서린의 삶과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꿔치기하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걸 빼앗고 싶었다. 비릴리안이 생각하기에 캐서린이 가진 건 원래 자신이 누려야 할 것이었다.

그 오만한 욕망과 추악한 질투심으로 그녀는 인간이길 포기했다.

“나와 재혼한 것을 후회한다고, 그때 그런 짓을 했으면 안 됐다고, 매일, 매일……. 미칠 거 같았어요……!”

비릴리안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그래서 데려왔어요. 하지만 과거를 사실대로 말해 줄 수는 없었어요. 그 아이의 친모가 남긴 재산권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남편을 괴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으니까요.”

“그래서 아무 죄 없는 아이를 종으로 부렸단 말인가?”

흐흐흐. 비릴리안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몸을 젖혀가며 깔깔대던 그녀가 돌연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요? 나한테 남은 건, 흐윽, 아무것도 없어요. 결국 남편은 죄책감에 시달리다 병이 깊어져,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나는 재산도, 명예도, 집도, 모든 게…….”

군중은 싸늘한 시선으로 비릴리안을 바라봤다. 그녀를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중얼거리던 비릴리안의 머릿속에 에이든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네 자식을 살리고 싶다면 말이다. 내일 손이 발이 되도록 디아에게 빌도록 해. 그게 내가 원하는 그림이니까.’

비릴리안은 주위를 둘러봤다.

“레인디아! 여기 있니? 있다면 내 얘기를 들어다오! 너에게는 입이 열 개,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네가 원한다면 평생 감옥에서 썩어 문드러져도 좋아! 나는 그런 짓을 당해도 싼 죄인이니까! 너희 모녀에게 몹쓸 짓을 했어. 부러웠어. 내가 갖지 못한 모든 걸 가진 너의 엄마가……! 그녀의 자리를 빼앗고 싶었어. 그래서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야……!”

“정숙!”

카타리나가 호통치듯 소리치자 비릴리안은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근위병 둘이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똑바로 서라.”

비릴리안은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바로 세웠다.

“아직 혼전 재산권 계약의 불이행에 대한 판결이 남아 있네. 증언에 따르면 백작 부인은 혼전 재산권 계약서를 작성한 모양이로군.”

카타리나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필립 성직자. 그레제 백작과 캐서린 잉게르만 영애의 혼전 재산권 계약서에 대한 증언을 부탁해도 되겠는가?”

당시 결혼 주례를 맡은 교구 성직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성직자의 얼굴을 본 비릴리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성직자 또한 주름살에 파묻힌 푸른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경건한 눈빛이 비릴리안의 죽어버린 양심에 미약한 불꽃을 지폈다. 이윽고 성직자가 고개를 바로 했다. 비릴리안은 정말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예. 4년 전쟁으로 인해 교구에서 보관 중이던 결혼 증명서는 불에 타 없어졌으나, 다행히 동부에서 혼전 재산권 계약서는 따로 중앙 금고에 보관을 해두기 때문에 소실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금고에서 보관하던 혼전 계약서입니다.”

“신성 솔레디온 제국의 율법에 따라 교구 성직자의 증언은 사실 여부를 가리지 않고 효력을 발휘할 것이네.”

한층 엄숙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혼전 재산권 계약서.

제국에서 귀족 부부는 결혼하기 전 혼전 계약서를 작성했다. 주로 아내 측에서 계약서를 요구했는데, 남편의 재혼으로 본처의 재산이 후처의 자식에게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저것까지 찾아낼 줄이야.’

비릴리안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혼전 계약서가 동부의 중앙 금고에 남아 있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내버려 둔 이유는, 애초에 그것을 찾을 인간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던 까닭이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캐서린은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천애고아였다. 또한, 캐서린은 홀몸으로 그들과 맞설 수 없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그녀의 혼전 계약서가 법정에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캐서린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레인디아의 삶을 위해서.

“이 계약서에 따르면, 캐서린 잉게르만이 결혼 당시 지참금으로 가져간 금액이 25,000데르크라 명시되어 있군.”

오늘날 화폐 가치를 반영해 환산하면 2배가 넘었다. 당시에도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그레제 가문은 파산 상태이기 때문에 비릴리안은 레인디아에게 캐서린의 재산을 돌려줄 수 없었다.

“상기했다시피 그레제 백작가는 파산했네. 그러나 이러한 폐단이 짐의 나라에서 일어났단 사실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는바, 피해자에게 백성을 위해 마련된 구호자금에서 위로금을 수여하겠노라.”

서기관이 재빨리 황후의 말을 받아적었다. 방청객들도 황후의 판결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게 재판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로써 비릴리안 그레제의 모든 죄가 밝혀졌다.”

카타리나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비릴리안 그레제를 벌함으로써 오랜 세월 죽어 있던 제국의 도덕과 정조 관념을 바로잡을 것이네. 돌아오는 수요일, 비릴리안 그레제를 보름간 단두대에 세워 만천하에 그녀의 악랄한 심성과 죄를 낱낱이 폭로할 것이니.”

오늘날 제국에서 단두대는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죄인이 나온 것은 200년 전. 오늘날엔 죄인이 단두대에 올라 정해진 기간 물과 소금만 먹으며 민중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교수대 형이 끝나는 즉시 죄인을 로짓섬으로 호송하여 노역에 처할 것을 명한다.”

로짓섬은 여성 죄수가 가는 최악의 유배지였다. 식인 상어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산물을 캐다 폐에 물이 차서 죽거나, 교도관에게 맞아 죽거나, 상어한테 몸을 뜯겨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반병신이 돼서 굶어 죽기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그곳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수들의 평균 수명은 10년이 채 안 됐다. 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것이다.

“으으, 아아아…….”

비릴리안은 괴이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러다 벌떡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레인디아! 내가 잘못했다! 부디 용서해다오! 벨리타, 그 아이는 너의 하나뿐인 동생이지 않니! 제발! 아아, 그 아이를! 그 아이는 죄가 없어!”

“똑바로 서. 다시 지하 감옥으로 이송될 거다.”

근위대 두 명이 비릴리안의 양옆에 서서 그녀를 붙잡았다. 레인디아는 무력하게 끌려가는 비릴리안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 * *

오전에 시작된 재판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밖으로 나오자 청명한 햇살이 레인디아의 머리 위로 내리쬈다. 에이든은 커다란 몸으로 그녀에게 그늘을 만들어줬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빛을 향해 걸어갔다. 빛이 보고 싶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눈 부신 빛이.

휘이이.

바람이 불었다. 나부끼는 금발이 마치 깃털처럼 흩날렸다. 레인디아가 이대로 사라질 것 같아 에이든은 다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레인디아는 천천히 에이든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얄팍한 초상화와 달리 양감을 지닌 존재가 말했다.

“백작 부인을 만나고 싶어요.”

에이든이 되묻기 전에 레인디아가 차분히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사람을 용서하진 않을 거예요. 단지, 마지막으로 직접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좋아. 다만 지하 감옥은 디아가 서 있기엔 더러워. 죄인을 지상에 있는 감옥으로 옮기라 일러둘게.”

“네. 감사해요.”

레인디아는 씁쓸히 미소 지었다.

‘왜 다시 나를?’

난데없이 지상으로 옮겨진 비릴리안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전부 그 남자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대체 왜?

그때, 문이 열리고 레인디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캐, 캐서린?”

비릴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황급히 묶인 손으로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캐서린을 닮은 그녀의 딸이었다. 레인디아는 정말로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누가 그녀를 하녀라 생각할까. 눈앞의 레인디아는 귀족 못지않은, 아니, 귀족 이상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반면 비릴리안은 귀부인에게 구걸하는 거지의 몰골이었다.

쇠창살 안은 유난히 어두웠다. 비릴리안과 레인디아는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흑과 백으로 갈라져 서 있었다. 그 선명한 대비에 비릴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그 여자를 빼닮았어.’

캐서린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지만,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함이 늘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하녀로 이집 저집 전전하던 비릴리안은 그런 캐서린이 무척 부러웠다. 부러움은 열등감으로 탈바꿈했고, 열등감은 곧 증오를 불러왔다.

그러다 우연히, 아니, 다분히 저열한 의도를 갖고 백작저에 하녀로 근무하게 됐다. 아이를 낳은 캐서린은 다소 수척해져 있었다. 그리고 무료한 일상에 질린 제임스는 새로운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비릴리안은 생각했다. 저 여자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빼앗은 것은 모두 불타 없어졌다. 비릴리안에게 남은 것은 벨리타뿐이었다.

“백작 부인. 아니, 비릴리안.”

레인디아는 쇠창살을 앞에 두고 그녀의 앞에 섰다.

“당신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니 비릴리안이라 부를게요.”

“……그, 그래. 그러려무나.”

비릴리안은 벨리타를 떠올리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비릴리안. 당신이 제 불행한 삶에 종지부를 찍어줬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낙인을 찍은 거였죠.”

레인디아는 옛 기억을 곱씹으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사창가에 팔려 온 어린 시절의 자신. 매질하던 마담. 그런 저를 사창가에서 꺼내준 여인. 하지만 그녀는 구원자의 탈을 쓴 악마였다. 자신과 어머니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괴물.

그러나 너무 오랜 세월 분노하는 법을 잊은 탓일까, 레인디아는 비릴리안에게 화낼 기력조차 없었다. 기실, 레인디아의 삶에 축적된 응어리는 소리를 지른다고, 악을 쓴다고 해소될 것이 아니었다. 참 이상하게도 분노해 마땅한 순간 레인디아의 마음은 겨울밤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그저 끝났구나, 하는 막연함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어요.”

“묻고 싶은 것……?”

비릴리안은 힐끗 레인디아의 뒤를 바라봤다. 그녀의 뒤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가 서 있었다. 그 남자였다.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왜, 저에게 그런 짓을 한 건가요?”

“그건…….”

비릴리안은 에이든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레인디아가 절박하게 배를 감싸고 되물었다.

“저는 벨리타보다 훨씬 어린 시절부터 사창가에서 일했어요.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당신이 그 어린아이에게 왜 자신의 죄를 덮어씌운 건지.”

“……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어……!”

비릴리안 역시 벅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아가기 위해……, 그런 짓을 했다는 건가요? 그렇군요. 아니에요, 포기할게요. 저는 아마 평생에 걸쳐 당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레인디아는 처연히 시선을 늘어트렸다. 눈앞의 여자와 자신은 전혀 다른 종이었다.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당신을 향한 분노 때문에 멈춰 있지도 않을 거고요.”

“레, 레인디아. 나는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벨리타는? 벨리타는 너의 동생이야. 네 유일한 가족이잖니?”

“네. 당신의 말이 맞아요. 벨리타는 제 동생이죠. 하지만 유일한 가족은 아니에요.”

“……뭐? 설마.”

설마설마했지만, 역시. 비릴리안은 에이든과 레인디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하하. 저 요망한 것이 황족을 구워삶았구나. 제 어미를 닮은 얼굴을 앞세워서! 망측한 것! 비릴리안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아직도 저를 원망하고 계시는군요.”

“헉,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겠니……!”

비릴리안이 납작 엎드렸다. 레인디아는 푹 한숨을 쉬었다. 그런 끔찍한 짓을 한 여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악행이 폭로된 것만으로도, 레인디아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무엇보다 이제는 마음껏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더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벨리타를 돌볼 생각은 없어요. 저는 이제 마땅한 직업도 없고, 위로금이 나오긴 했지만, 그 아이를 위해 쓰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도 그래선 안 되고요.”

불확실한 미래를 얘기하는 레인디아의 모습에 에이든은 마음이 다소 삐딱해졌다. 마땅한 직업이 없는 게 무슨 상관이란 거지. 그녀의 옆에 부와 명예, 모든 걸 갖춘 남자가 있는데. 조만간 재산 전부를 레인디아와 아이의 앞으로 돌리는 양도 증명서라도 작성해야 하나, 에이든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저,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무슨 말을……?”

“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몫까지 행복해질 거예요.”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만 돌아가요, 에이든 님.”

레인디아는 결심한 듯 몸을 돌렸다.

“할 말은 다 끝난 거야?”

“……네.”

에이든은 레인디아에게 팔을 내어줬다. 비릴리안은 쇠창살을 잡은 채 간절히 에이든을 바라봤다.

“야, 약속은……!”

내 딸의 목숨은 살려주겠단 약속을 지켜달라는 말을 하려는데, 에이든이 슥 고개를 돌리더니 검지로 제 입술을 가렸다. 비릴리안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에이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비릴리안은 안도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그래. 약속은 지킨다니까?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다만 너의 딸은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아갈 거야. 맹세하지.

“이제 뭐가 하고 싶어, 디아?”

밖으로 나온 에이든이 레인디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인디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

거창할 필요는 없겠지.

“……잠을, 자고 싶어요.”

평생에 걸쳐 자신을 억눌러온 낙인이 사라진 순간, 어째서인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잠을 자는 것이었다. 어디든 몸을 눕히고 푹 자고 싶었다. 에이든은 더 묻지 않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마치 포대기에 감싼 아이를 품에 안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래. 자러 가자.”

에이든의 입술이 레인디아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레인디아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따사로운 일광. 잔디를 지르밟는 발걸음 소리. 마차 안에서는 에이든의 잔잔한 심장 박동을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얼핏 정신이 돌아왔을 때, 레인디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고개를 들자 에이든이 그녀를 꼭 끌어안고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꿈일 것 같아 다시 눈을 감는 게 두려웠지만, 색색거리는 에이든의 숨소리가 현실임을 알려줬다.

‘이제 괜찮아.’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아가.’

내가, 우리가, 반드시 널 지켜줄 거야.

* * *

“호외요!”

재판이 끝나자 광장마다 판결문이 붙었다. 신문사에서 앞다투어 기사를 보도했다. 온 백성이 비릴리안 그레제의 악행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서 수요일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팔락. 팔락.

에이든은 침대에 기대 누워 주간 신문을 읽었다.

일면을 장식한 것은 재판장에 선 비릴리안의 사진이었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품에 안긴 채 함께 기사를 읽다 피로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작은 새 두 마리가 창가에 붙어 쫑쫑 돌아다녔다. 레인디아는 그 모습을 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모든 이가 자신이 겪지도 않은 일에 분노하고 있을 때, 정작 피해 당사자인 레인디아가 있는 곳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레인디아는 며칠간 내리 잠만 잤다. 마치 겨울잠에 빠진 짐승처럼. 먹고 자고 씻는 일의 반복이었다.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다. 꿈 없는 긴 잠은 레인디아의 마음에 평온을 불러왔고 육체적으론 깨어 있어도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함을 선사했다. 이곳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영역 같았다. 분명 비릴리안의 앞에서 계속 나아가겠다고 말했지만, 수렁에 빠져 정체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비릴리안이 단두대에 오른다고 해.”

에이든은 신문을 접어 옆으로 치웠다. 굵은 팔뚝이 레인디아의 여린 몸을 감싸 안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인디아의 의사를 존중해 준다는 듯. 글쎄, 레인디아는 여전히 직접 선택하는 것보다는 명령받는 일에 익숙했다.

하지만 계속 꿈속에 빠져 있을 순 없겠지.

아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그곳에 가봐도 될까요?”

“괜찮겠어, 디아?”

레인디아의 사진은 실리지 않았고 철저히 익명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그녀를 알아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든은 그녀가 걱정된단 듯이 물어왔다. 레인디아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봐야 해요.”

긴 동면을 끝내고 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 * *

“이봐. 밀치지 말라고.”

“여기선 얼굴이 잘 안 보여.”

“아직 단두대에 서질 않았으니 안 보이지. 좀 기다려봐.”

단두대가 위치한 광장에는 비릴리안에게 침을 뱉으러 온 백성으로 바글거렸다. 해가 중천에 뜨자 교도관이 비릴리안을 끌고 단두대에 올랐다. 그녀는 재판장에 섰을 때보다 추레한 몰골이었다. 죄인을 씻기는 물조차 아깝다는 듯이 쥐똥이 묻어 있던 머리카락은 전부 밀려 있었다. 덕분에 비릴리안의 얼굴은 가려진 곳 하나 없이 대중에게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단두대 앞에 똑바로 서!”

퍽!

교도관이 힘껏 비릴리안을 걷어찼다. 비릴리안은 비틀거리며 단두대 앞에 섰다. 우우우! 민중의 야유와 비난이 쏟아졌다.

“윽!”

철퍽!

누군가 비릴리안에게 달걀을 던졌다. 빡빡 밀린 머리를 타고 노른자가 주르륵 떨어졌다. 이윽고 다른 사람들도 가져온 돌멩이와 달걀을 던지기 시작했다. 교도관이 저지했으나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였다.

‘벨리타만 무사하면 돼.’

비릴리안은 공포감에 벌벌 떨면서도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그 아이만 무사하다면, 언젠가 자신의 복수를 해 줄 것이다. 그래. 틀림없이.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그녀는 실성하기 직전이었다.

“하녀로 근무하던 저택의 주인을 유혹했다죠?”

“본처와 자식을 쫓아내고 귀부인 행세를 했다지 뭐예요.”

산첼로는 군중 속에 자연스레 파묻혀 상황을 지켜봤다. 숙덕임과 야유, 비난과 힐난이 이어졌다. 문득, 에이든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야. 대중은 언제든 죄인에게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지. 특히나, 종전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요즘 같은 때에 마음껏 증오할 대상이 생긴다는 건……, 축제가 열리는 기분이려나?’

모든 게 에이든의 뜻대로 되고 있었다.

온 백성이 한마음 한뜻으로 비릴리안을 비난했다. 에이든을 척질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해 봤지만, 그의 적이 된다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이번 판결은 단순히 백성의 화풀이로만 끝난 건 아니었다. 순기능도 작용했다. 비릴리안을 단두대에 세움으로써 배우자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은 이러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을 경고처럼 보여준 것이다. 황후라는 가장 절대적인 권력자를 통해.

“우우우!”

야유가 거세졌다.

에이든과 레인디아는 멀리서 그 모든 걸 지켜봤다. 에이든이 딱 하나 불만스러웠던 것은, 하늘이 너무나 청명했다는 점이었다.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거나, 땡볕이 내리쬈다면 죄질에 어울리는 최후였을 텐데. 그러나 제 옆에 기대서 있는 레인디아를 보면 늘 오늘처럼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길 바랐다.

레인디아는 오늘도 역시 감정이 격하게 요동치지는 않았다. 이 일로 저와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저를 지키기 위해 처절히 몸부림치던 캐서린을. 마음껏 그리워했다. 마음껏 그리워하면서도 더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기뻤다. 얼마나 바라던 일인가.

동시에, 레인디아는 슬픈 감정에 함몰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배 속의 아이도 고스란히 받아먹을 테니까.

‘앞으로 나아가야 해.’

자신의 배 속에 웅크린 소중한 생명. 그리고 힘든 시간 곁을 지켜준 에이든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레인디아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디아, 그건.”

비릴리안에게 받은 책이었다. 레인디아는 책을 꼭 붙잡았다.

“이 책은 저의 삶이었어요. 신앙을 지닌 자들이 들고 다니는 성전처럼요. 제가 이 땅에서 살아 버티기 위한 믿음의 뿌리였어요.”

레인디아는 슥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바라봤다.

“돌아가면 이 책을 태우려고 해요. 그저 상징일 뿐이지만. 형체가 있는 걸 없애면, 조금은 후련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레인디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 디아.”

에이든은 다정히 레인디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레인디아는 눈을 감은 채 그의 손바닥에 뺨을 문질렀다.

“그리고 에이든 님. 당신만 괜찮다면,”

계속 당신의 곁에 남고 싶어요.

그렇게 말을 하려는데, 허벅지를 타고 무언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섬뜩한 감촉에 레인디아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툭.

레인디아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디아?”

의아함을 느낀 에이든이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가느다란 물줄기가 레인디아의 연약한 발목까지 이어졌다. 레인디아는 배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등골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올라왔다. 아랫배에서 알싸한 감각이 불처럼 번져갔다.

“아……, 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에이든이 빳빳이 굳었다.

“피. 피가. 피가…….”

레인디아의 치맛자락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핏물은 물에 떨어트린 물감처럼 서서히 번져갔다.

“에이든 님.”

레인디아는 바들바들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피, 피가, 피가……!”

레인디아는 꺽꺽 숨을 들이켰다. 목이, 가슴이, 배가, 미친 듯이 조여왔다. 피를 흘렸단 흥분감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몸을 움켜쥔 채 허덕였다.

“디아. 진정해.”

“아아! 우리 아이,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요? 안 돼. 안 돼요, 안 돼! 아아!”

레인디아가 절규했다.

팽팽하게 잡아당긴 실을 가위로 자르듯, 레인디아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녀의 눈이 흰자위를 보이며 뒤집혔다. 에이든은 몸을 숙여 그녀를 품에 안았다. 때마침 두 사람에게 돌아온 산첼로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달려왔다.

“에이든 님……!?”

에이든은 마치 죽은 구세주를 품에 안은 성모처럼 레인디아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선 슬픔도, 동요도, 일말의 다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이든 님! 이게 대체,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아가씨께서 피를 흘리고 계신 거죠?”

“황궁으로 돌아간다.”

에이든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 궁중 의원을……!”

“아니. 필요 없어.”

에이든은 기절한 레인디아를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그러곤 레인디아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디아는 멀쩡해. 조금 놀라 기절했을 뿐이야.”

“그, 그렇습니까……?”

산첼로는 뻣뻣하게 굳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레인디아가 떨어트린 책을 주워 에이든에게 건넸다. 책을 건네받은 에이든은 졸도한 레인디아를 안고 광장을 떠났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그러나 돌바닥에는 레인디아가 흘린 핏방울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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