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복종-18화 (18/23)

18. 해방의 대가

황궁을 나올 때까지 레인디아를 막는 이는 없었다.

어느새 레인디아는 무수한 인파에 뒤섞여 소광장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곁을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반면, 오직 레인디아만이 광장의 분수대를 빙글빙글 걷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레인디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쉬운 거였어.’

어째서일까. 마침내 에이든의 손에서 벗어났음에도 해방감이 아닌 허무함이 그녀를 감싸는 까닭은. 그때 레인디아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사람과 가볍게 어깨가 부딪혔다. 상대방은 레인디아를 위아래로 훑더니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앗. 실례했습니다, 아가씨.”

“……저, 저야말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앞을 제대로 못 봤어요.”

문득, 레인디아는 자신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디자인은 간소했으나 황궁에서 입는 옷이니만큼 값비싼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였다. 확실히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어.’

이윽고 레인디아는 수중에 한 푼도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팔찌와 귀걸이를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황궁의 물건인데…… 팔아도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황궁 안 물건은 바깥으로 반출하면 안 된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선물 받은 것이니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책잡힐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황궁에서 나왔습니다만, 레인디아 영애십니까?”

“……헉!”

황궁이란 단어에 레인디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녀를 찾아온 관료는 에이든의 부하가 아니었다. 그는 황후의 명으로 위로금 지급을 위해 레인디아를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에이든의 입김이 닿지 않았을까?

“우선 간단히 설명해드리자면-.”

레인디아의 걱정과 달리 관료는 자신이 맡은 직무를 수행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 사무적인 태도에 뒤늦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비로소 악몽과도 같은 환상을 빠져나와 현실에 첫발을 내디딘 실감이 났다.

“서류에 사인만 해 주시면 중앙은행에서 곧바로 현금화가 가능합니다. 물론 하이락이 아닌 다른 은행에서도 처리가…….”

마침내 관료의 말이 전부 끝나자 레인디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실례만 안 된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예? 아아, 네. 물론입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요.”

관료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디아는 관료를 데리고 가까운 양장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성복을 구매해 갈아입은 뒤, 드레스와 장신구를 모두 벗어 관료에게 건넸다.

“이 물건들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가져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위로금 지급과 관련해서 더 궁금하신 사항은 없으신지요?”

“네. 전부 이해했어요.”

“그럼 여기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네.”

레인디아는 건네받은 문서에 또박또박 제 이름을 적어넣었다.

서명하는 내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뒤에 붙은 0을 세다 현기증이 일어 포기하고 말았다. 혈혈단신으로 세상 밖에 첫발을 디딘 여자에게 돈만큼 든든한 아군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금액은 든든함보다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앞으론 좋은 일만 있으셨으면 합니다.”

“……네. 좋은 말씀 감사해요.”

레인디아는 돌아가는 관료의 뒤를 멍하니 바라봤다. 인파 속으로 관료가 사라지자 레인디아도 몸을 돌렸다. 그녀는 겨우 다음 목적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방이 전부 나가서 곤란하게 됐수다.”

“괜찮습니다. 옆에 다른 여관도 있으니…….”

“가봤자 헛걸음이외다.”

“네?”

“거, 지금 그 비릴리안인지 뭔지 하는 미친 여자가 교수대에 서 있지 않소? 그걸 보려고 관광객이 아주 벌떼처럼 모여들어서 이 근방 여관은 다 똑같아. 가봤자 대기표도 못 받을 거요.”

“그, 그런가요?”

레인디아가 찾은 곳은 치안이 안전한 여관촌이었다. 8년 전 성축일에 백작 부부가 머물던 여관도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하필 비릴리안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여관이 꽉 차 비어 있는 방이 없었다. 그녀가 교수대에서 내려갈 때까지 이런 상황은 계속 이어질 게 뻔했다.

“아가씨, 하이락 사람인가?”

“네……? 아. 다른 곳에서 태어났지만, 오랫동안 이곳에서 지냈어요.”

“으음. 하던 일을 그만뒀나 보지? 하녀였수?”

여관 주인은 레인디아를 보더니 그녀의 예전 직업을 쉽게 유추했다. 하이락에서 혼자서 돌아다니는 그녀 또래의 여자들은 대부분 하녀로 봉사했기 때문이다. 차림새나 행동거지가 경박하지 않은 것, 또 치안이 안전한 곳을 찾은 것으로 보아 밤일을 하는 여자 같지도 않았다.

“사고를 쳐서 쫓겨난 건 아니지?”

“……네. 저택의, 사정이 안 좋아져서……. 지금은 돌아갈 곳이 없네요.”

레인디아는 씁쓸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은 계속됐다. 이윽고 여관 주인이 결단을 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숙도 괜찮나? 숙모님이 하숙집을 운영하시네만. 조금 연로하시긴 한데, 수프 맛이 아주 일품이야. 우리 집안에서 내려오는 특제 소스를 쓰거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머물 것 같진 않아서…….”

“일단 가서 사정을 얘기하면 며칠 정도는 방을 내어주실 거네. 안 그래도 내가 보낼 편지가 있었는데……. 자, 이걸 들고 가보게나.”

여관 주인은 대뜸 종이를 뜯어 무언가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랍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함께 건넸다.

“연로하신 숙모님을 챙겨드리고 있는데 요즘 손님이 몰려서 통 찾아가질 못했거든. 아가씨는 한눈에 보기에도 좋은 사람 같으니 소개해 주는 거야.”

“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인디아는 머뭇거리다 여관 주인이 건넨 종이를 받았다. 거기엔 하숙집 주소와 숙모님께 전하는 짧은 안부 인사가 적혀 있었다. 여관 주인이 사람 좋게 미소 지었다. 레인디아도 어색하지만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는 그 종이를 곱게 접어 품에 넣고 여관을 나왔다.

“실례합니다.”

레인디아는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쯤 하숙집에 도착했다.

세월에 퇴색된 베이지색 벽돌 위에 붉은 지붕이 얹어진 아담한 건물이었다. 그녀의 부름에 곧 집주인이 문을 열어줬다. 레인디아는 여관 주인에게 받은 편지를 건네주며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레인디아라고? 나는 매니라고 한단다. 편하게 부르려무나.”

“반갑습니다, 매니 부인. 환영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그래. 날이 추우니 얼른 들어오려무나.”

매니는 홀로 지내는 노부인으로 말투가 나긋나긋하고 사소한 행동에서 배려가 묻어났다. 그녀는 레인디아가 몸을 녹일 수 있게 난로의 따뜻한 자리를 양보해 줬다. 레인디아는 매니 부인이 준 차를 마시며 조카의 편지를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편지를 전해 줘서 고맙구나. 그나저나 방을 못 구했다고? 나도 젊은 시절에 머물 곳을 찾지 못해 위험했던 적이 있었단다. 특히나 요즘처럼 외지인 방문이 잦은 때엔 처녀 혼자 지내기 더 위험하지, 암.”

매니 부인은 레인디아의 사정을 딱하게 여겼다. 하숙집의 경우 계약일을 6개월에서 1년 사이로 잡는 게 통상적이었으나, 매니 부인은 레인디아에 한해 단기 숙박을 받겠다고 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혹 다른 세입자가 나타나면…….”

“건물이 나처럼 늙었다 보니 벌써 석 달째 방이 비어 있단다.”

노부인이 다정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 미소에 레인디아는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찌르. 찌르르르. 찌르르.

건물 주변에 녹음이 우거진 공원이 있었다. 그래서 밤에도 시골처럼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레인디아는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벌레 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벽에 등을 맞대고 누웠다.

‘머물 곳을 찾아서 다행이야.’

여관이 아닌 하숙집을 찾은 것도 다행이었다.

하이락에 있는 여관의 수만 해도 하루 안에 다 돌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거기에 하숙집까지 더하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만약 에이든이 저를 찾는다면 필시 시간이 걸리리라. 오히려 수도를 떠나는 것보다 이 안에 머무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인파 속에 휩쓸려 거리를 돌아다닐 때, 레인디아는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세계를 구성하는 작은 톱니바퀴가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무리에 섞여 있으면 포식자의 눈을 피할 수 있을 듯했다. 무엇보다, 하이락은 레인디아가 오랫동안 지내던 장소였다. 노스랜드에 있을 때와 달리 익숙한 거리의 풍경에 심리적으로 안정이 됐다.

우선 피로를 푸는 거야. 몸이 피곤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레인디아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창밖에서 들어온 달빛이 방 안의 가구를 하얗게 물들였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방은 곳곳에 먼지가 얕게 쌓여 있었다.

‘내일은 방을 정리하자.’

레인디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홀로 선 첫날 밤이 지나갔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졌다.

레인디아는 곧장 방 청소를 시작했다. 방에 있는 가구가 얼마 되지 않아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하기에도 이른 시간이라, 매니 부인이 잠드는 동안 복도를 쓸고 닦았다.

“에구머니, 얘야. 그럴 필요 없단다.”

“혹시 시끄러워서 깨신 건가요? 죄송해요…….”

“나는 늘 이 시간에 일어난단다.”

매니 부인은 다정히 웃으며 레인디아의 손에서 걸레를 빼앗아갔다.

“고운 손 망가질라.”

“하지만……, 저도 보답을 해드리고 싶어서.”

레인디아가 우물쭈물하자 매니 부인이 그녀를 데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목가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부엌은 다양한 향신료가 담긴 유리병이 조르륵 진열되어 있었다. 벽에도 말린 약초나 풀잎이 다발로 걸려 있었다. 레인디아는 그곳에서 부인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걸 거들었다.

“나는 늘 누군가를 보살피는 걸 좋아했지. 특히나 내가 해 준 요리를 먹고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단다.”

야채를 다듬은 후에는 할 일이 없어서 부인의 종달새 같은 목소리를 듣는 게 전부였지만.

“남편이 떠난 뒤엔 요리 솜씨를 뽐낼 기회가 없어서 우울했단다.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하숙집을 하게 된 거란다.”

“그러셨군요.”

“네가 도와주니 빨리 끝나는구나. 이제 가서 먹자꾸나. 테이블은 거실에 있단다.”

매니 부인은 그릇에 수프를 옮겨 담았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이 둥근 테이블을 비췄다. 레인디아는 식기류를 꺼내 테이블에 차곡차곡 내려놨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아 기도를 올리고 식사를 시작했다.

‘맛있어.’

과연, 여관 주인의 말처럼 매니 부인의 수프는 일품이었다. 만든이의 정성이 식도를 부드럽게 쓸고 내려와 배 속을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레인디아는 밋밋한 제 배를 바라봤다. 만약, 아이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이 수프를 맛있게 먹어줬겠지.

아이를 잃은 상실감이 레인디아의 안에서 되살아났다.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입맛이 없니, 아가?”

“아. 아니에요. 정말 맛있어요, 부인.”

매니 부인이 슬그머니 묻는 말에 레인디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다소 과해 보일 만큼 열심히 수프를 퍼먹었다. 내심, 매니 부인의 정성 어린 식사를 즐기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오후엔 무엇을 할 계획이니?”

식사가 끝나자, 매니 부인이 홍차를 우리며 물었다. 레인디아는 찻잔을 멍하니 보다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아래에서 그녀의 손가락이 분주히 뒤엉켰다.

“……계획은 없어요. 한동안, 마음을 좀 추스르고 싶어요. 아. 직업은 없지만 하숙비는 밀리지 않고 드릴 수 있어요. 돈은……, 부족하지 않거든요.”

“호호호. 그런 걱정은 안 한단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지만, 너는 참 착하고 성실해 보이거든. 틀림없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게야.”

레인디아는 매니 부인을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준 그녀의 상냥함에 영혼이 위로받는 듯했다. 그럼에도 왜일까,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기분이 드는 까닭은. 누군가 자꾸만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오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몸이 근질거렸다. 결국, 레인디아는 이 집을 처음 봤을 때부터 거슬리던 것들을 고치기 시작했다.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던 매니 부인이 뒤늦게 그것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레인디아! 거긴 너무 높지 않니? 사다리는 어디서 난 거니?”

“앞집에서 잠시 빌려왔어요.”

레인디아는 건물 외벽에 달린 조명을 갈고 있었다.

“연료가 떨어진 것 같아서 채워놨어요. 이젠 밤에도 밝을 거예요.”

“정말 고맙구나. 조카가 오면 부탁하려 했는데.”

레인디아가 사다리 아래로 내려오자 매니 부인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뺨에 묻은 먼지를 닦아줬다.

“저, 부인만 괜찮으시다면 마당을 정돈해도 될까요?”

“일거리가 필요해서 그런 거니?”

“아뇨. 보수는 괜찮아요. 그저……, 아무것도 안 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뭐라도 하고 싶어요.”

매니 부인은 거듭 만류했지만, 레인디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매니 부인이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하는 동안, 레인디아는 건물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매니 부인의 눈에 비친 레인디아는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 같았다. 매니 부인의 아버지는 퇴역군인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엔 전쟁터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된 노동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는 대신 말이다. 주위에선 그런 아버지를 성실하다 추켜세웠으나, 매니 부인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서서히 죽어가는 가여운 영혼에 불과했다.

“저, 부인.”

“그래. 마당 정리는 다 한 거니?”

“네. 그리고 내일 날이 밝으면 간판을 새로 달까 해요.”

“그런 것까지?”

“전에 일하던 곳에선 더 험한 일도 했는걸요.”

레인디아가 눈치를 보는 아이처럼 도록도록 눈을 굴리다 덧붙였다.

“……혹시, 또 도움이 필요하신 일은 없으세요?”

매니 부인은 착잡한 눈으로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그럼 나와 간식이나 먹을까? 마침 선물로 받은 쿠키가 있단다.”

레인디아는 따뜻한 차와 쿠키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그녀가 쿠키를 오독오독 씹고 있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발목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레인디아는 후후 웃으며 손에 묻은 쿠키 가루를 털어냈다. 그리고 고양이를 쓰다듬어주려고 살며시 손을 뻗었다.

“냐앙-!”

그러자 고양이가 새침하게 이를 드러내더니 휙 몸을 돌렸다. 다행히 화가 난 건 아닌지 기다란 꼬리로 레인디아의 발목을 쓸며 멀어졌다. 레인디아는 무안해진 손을 쥐락펴락하다 몸을 바로 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잡힐 줄 알았는데 잡히지 않는 것.

자신을 비웃으며 허무하게 손 틈새로 빠져나가고야 마는 것.

바로 저 고양이처럼.

레인디아는 그것을 행복이라 불렀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오늘도 교수대에 선 악랄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하숙집 주변의 녹음은 짙고 푸르렀으며, 밤마다 기꺼운 풀벌레 소리가 자장가를 대신해 주었다.

그리고 에이든.

에이든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가 보냈다고 의심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 모든 일이 꿈인 것처럼, 레인디아의 삶은 잔잔하기만 했다. 앞으로도 이러한 일상이 지속될 거란 믿음이 관성처럼 굳어졌으나, 레인디아는 한시도 몸을 가만두지 못했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떠오를 것 같으니까.

남은 세월 동안 잊어야 하는 존재가, 자꾸만 수면 위로 올라올 것 같았으니까.

“후우. 후.”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레인디아는 숨이 찰 때까지 물걸레질하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이 새것처럼 반들반들 빛났다. 레인디아는 털썩 주저앉아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하녀를 들이지 않고 집안일을 해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동안 우울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저를 삼켜버리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우울의 늪에 한 번 함몰된 인간은 쉬이 빠져나올 수 없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정신없이 할 일을 찾는 인간이라.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존재인가.

“매니 부…….”

버릇처럼 할 일을 받으러 거실에 온 레인디아는 매니 부인 대신 그녀가 남기고 간 쪽지를 발견했다. 오늘은 지인과 약속이 있어 혼자서 식사를 하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레인디아는 부엌에 남아 있는 재료들을 손질해 이른 저녁을 차렸다.

달그락. 달그락.

레인디아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음식을 자르며 무성의한 소리를 냈다.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한 행위의 끝에는 짙은 고독만이 남았다.

그날 저녁, 매니 부인과 레인디아는 난롯불을 쬐며 각자 무언가를 만들었다. 매니 부인은 뜨개질하고 있었고, 레인디아는 부인이 모은 자질구레한 부자재로 브로치를 만들었다.

“세상에, 저것들로 만든 거라고? 실력이 좋구나.”

레인디아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직접 하지 그러니? 어울릴 것 같은데.”

레인디아는 자신 없는 얼굴로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처음으로 나를 위해 만들어본 식사.

처음으로 나를 위해 만들어본 브로치.

그런데도 기쁘지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어서…….

아니. 아니야. 이제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아.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늘 누군가를 보살피는 걸 좋아했지. 특히나 내가 해 준 요리를 먹고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단다.’

문득, 매니 부인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마침내 오랜 두려움을 마주할 순간이 도래했다. 레인디아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여전히 그녀의 영혼이 과거에 붙잡혀 있던 까닭이다. 에이든과 함께했던 순간에.

“……저도, 그랬어요.”

레인디아 또한 누군가를 위해 살고 싶었다. 에이든이 저로 인해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면, 그녀의 안에서 애틋한 감정이 피어오르곤 했다.

“레인디아?”

“……제가, 언젠가 다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요?”

레인디아는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은 버릇처럼 자신의 배를 감싸고 있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녀의 오랜 고독이 아이의 형상을 하고 잉태된 장소였다. 배 속의 아이는 레인디아의 꿈이자 바람이자 고독이었고,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매니 부인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추하듯이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세상에, 아가.”

이윽고, 매니 부인은 레인디아가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매니 부인은 한걸음에 달려가 레인디아를 끌어안아 줬다.

“끔찍한 일을 겪은 모양이구나.”

“제가, 이 모든 고통을 잊고, 언젠가, 다시……,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요?”

레인디아는 노부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렸다.

“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매니 부인은 말없이 레인디아를 다독여줬다.

노부인의 품은 너무도 다정해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과거는 레인디아의 것이다. 그 과거를 딛고 나아가야 하는 일 역시 레인디아의 몫이었다. 이곳에서 계속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상냥한 매니 부인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 했다. 동시에 떠나고 싶지 않았고,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유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레인디아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어쩌면,

족쇄가 필요했던 걸까.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돼……!’

레인디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어렴풋이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정이란 울타리가 주는 안락함. 타인과 선을 그은 채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모든 사람은 서로 이어져 있고, 이어져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다. 작은 톱니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 내듯이, 레인디아 역시 그 거대한 톱니바퀴에 몸을 싣고 싶었다.

지금 레인디아 자신이 매니 부인에게 위로받는 것처럼.

‘하지만 그 사람은……, 고독했어.’

오랜 세월 버려진 대저택에서 홀로 죽음을 기다리던 남자.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서, 아니, 마치 레인디아가 자신의 세계인 듯 살아가던 그 남자.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도 저처럼 방황하고 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리움이 왈칵 솟아올랐다.

‘안 돼.’

레인디아는 푸드득 몸을 떨며 매니 부인의 품을 벗어났다.

“……떠, 떠나야겠어요.”

“레인디아?”

“여기, 더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제가, 폐를 끼칠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니. 네가 오고 나는 오히려,”

“죄송해요, 부인. 하지만……, 생판 남인 제가, 부인께 의지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단다.”

하지만, 두 발로 서지 않으면…….

“아가. 그렇다면 부모님은 안 계신 거니? 오빠는? 언니는? 아니면 동생들도?”

가족. 다른 가족…….

“동생이 있지만……. 모르겠어요. 사이가 좋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를 자매라고 불러야 할지.”

“이 땅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단다.”

레인디아는 물기 어린 눈을 깜박이며 매니 부인을 바라봤다.

“혈연이라는 건 마치 하늘이 점지해 준 운명과도 같아.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건 혈연이란다. 날 보렴. 조카 덕에 너처럼 천사 같은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지 않니?”

매니 부인은 레인디아를 북돋아 주었다.

‘벨리타는 너의 동생이야. 네 유일한 가족이잖니?’

처절하게 울부짖던 비릴리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유일한 가족. 하늘이 점지해 준 운명. 혈연.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건 가족…….

벨리타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여전히 노스빌리움에 있을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말해 줘야 하지 않을까? 레인디아는 그게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에이든이 있는 하이락을 떠날 이유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벨리타 아가씨를 만나야겠어.’

다음 날.

“페인트칠까지 해 주다니.”

“저는 이제 이곳을 떠나니까요.”

레인디아는 몹시 미안한 눈으로 매니 부인을 바라봤다. 매니 부인의 표정도 함께 우울해지자, 레인디아는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건물이 오래되긴 했지만 그 부분이 멋스럽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외관을 조금만 다듬으면 집을 찾는 손님이 많아질 거예요.”

자신이 떠나더라도 다른 좋은 사람이 매니 부인과 함께해 주길 바랐다. 아마도 그 사람은 저와 달리 매니 부인의 수프를 진정으로 즐길 줄 알고, 때때로 우울한 상념에 젖어 매니 부인은 곤란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감사해요, 부인.”

레인디아는 매니 부인의 손을 다잡았다.

그저 모든 게 고마웠다.

* * *

그렇게 레인디아는 노스랜드로 향하는 역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하이락을 떠날 무렵엔 비릴리안 역시 교수대를 내려와 로짓섬으로 호송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그녀를 보러온 사람들도 돌아갈 테고, 하이락의 거리는 이전보다 한산해지겠지. 지금 떠나는 게 맞아. 더 오래 있었다면 에이든이 저를 찾아냈을 테니까. 한편으론 에이든이 저를 찾고 있을까, 벌써 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 잊는 거야.’

레인디아는 무릎에 가지런히 두 손을 포갠 채 마음을 갈무리했다.

역마차를 타고 이동하니 불필요한 시간을 끄는 일이 없어 노스빌리움이 코앞이었다.

창밖에서 들어온 바람에 레인디아의 찬란한 금발이 나부꼈다. 어깨에 닿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가슴 언저리까지 자랐다. 이제는 누구도 레인디아를 곱상한 사내로 보지 않았다. 또다시 노스랜드로 향하는 역마차 안에서 모녀가 레인디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젊은 어머니와 어린 소녀였다. 어머니는 딸아이에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줬다.

레인디아는 눈을 감고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의 이야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남장하고 법정에 서서 남편을 변호한 어느 현숙한 아내, 이국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장을 하고 공작의 몸종이 된 소녀, 추방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 남장을 하고 숲에 들어간 딸처럼 남장을 한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희곡을 아이들이 읽는 동화로 각색한 작품이었다.

“에이! 거짓말! 어떻게 남자라고 속을 수 있어? 다들 바보 아니야?”

허를 찌르는 아이의 투정에 레인디아는 후후 미소 짓다 황급히 표정을 바로 했다.

“이야기가 재미없니?”

“으음. 아니. 그래도 마지막엔 다들 행복해져서 좋아.”

소녀는 슬슬 졸음이 오는지 하품을 하더니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여인은 읽던 책을 가방 깊숙이 밀어 넣고 고개를 들었다. 레인디아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부드러운 눈인사를 건네며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머니는 딸아이를, 레인디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울창한 숲이 하얀 눈으로 물들어갔다. 코끝에 노을의 향이 스쳤다. 레인디아는 스르륵 눈을 감고 여인이 읽어준 이야기를 다시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어린 소녀의 말대로 주인공은 마지막에 반드시 행복해졌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법칙처럼 희곡에서 행복한 결말은 필연과도 같다.

아니, 행복한 결말로 끝났기에 희곡으로 분류되는 것일까?

레인디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인간의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면, 내 삶의 끝은 희극일까. 아니면 비극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가씨. 아가씨.”

어깨를 흔들며 깨우는 소리에 레인디아는 스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네?”

“도착했수다.”

“아. 감사합니다.”

레인디아는 가방을 챙겨 황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노스빌리움의 역 주변은 휑했다. 확실히 수도인 하이락에 비하면 한산한 분위기가 있었다. 공기 또한 유난히 차게 가라앉아 있어 더욱 헛헛한 느낌을 주었다. 레인디아는 겉옷을 여미며 주변을 살폈다.

참 신기하게도 벨리타와 노스랜드로 향했을 땐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었는데, 막상 여인 홀몸으로 여행길에 오른 지금은 위험한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레인디아의 앞길을 미리 닦아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늘 불행했으니 이런 때도 있는 거겠지.’

오히려 이것이 평범한 삶이라고, 레인디아는 이러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랬다. 자신은 더는 죄의 아이가 아니었다. 저를 벌줄 신도 존재하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새로운 삶을 당당히 누리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경비대원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사람을 찾고 있어요.”

가방 손잡이를 다잡는 레인디아의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 * *

노스빌리움의 광장.

“그 얘기 들었어요? 그레제 백작 모녀 말이에요. 글쎄, 본처를 쫓아낸 것도 모자라 그 자식을 종처럼 부렸대요.”

“그러고 보니 부인이 가품을 경매에서 팔아 구속됐다 하지 않았어요? 어찌 된 거죠?”

“로짓섬에서 노역 중이라 들었어요.”

“로짓섬이라니! 사형 선고나 다름없잖아요?”

“그런 셈이죠. 그나저나 그 딸은…….”

속닥대던 여인들이 벨리타를 지그시 바라봤다. 벨리타는 망토를 뒤집어쓴 채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그쪽한텐 안 판다고 했지!”

이미 북부에도 그레제 모녀의 만행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 후 벨리타는 문을 열기도 전에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 그러지 말고 하나만 팔아주세요. 오늘도 빈손으로 돌아가면 용서받지 못할 거예요!”

벨리타는 가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마음이 약해진 주인은 벨리타가 사려던 물건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 번만 내 가게를 찾아오면 죽을 줄 알아! 재수가 없으려니.”

카악, 퉤!

걸쭉하게 침을 뱉은 가게 주인은 돈도 받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벨리타는 물건에 묻은 침을 닦아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벨리타는 가슴에 사무치는 굴욕감을 이겨내려 했으나 이젠 한계였다. 유일한 희소식은 제 목걸이를 팔고 도망친 앤이 절도죄로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단 것뿐이었다. 그러나 목걸이를 판 돈을 전부 써버린 후라 벨리타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내가, 백작가의 영애였던 내가아, 어쩌다 이런 꼴이…….”

비료 냄새가 진동하는 집 앞에 도착하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벨리타는 훌쩍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물건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 있는 바구니를 본 데본 부인이 역정을 냈다.

“이것밖에 못 사 왔다고?”

“더, 더는 제게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흐윽,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벨리타는 노부인의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였다.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진 않았으니까.

“정말로……, 이런 곳에 집이 있단 걸까?”

레인디아는 헉헉대며 언덕을 올랐다.

벨리타는 후작가를 나와 데본 부인의 집에서 머문다고 했다. 그렇게 경비대원이 친절하게 그려준 지도를 따라 한참을 걸었지만 집이랄 게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두 번째 언덕에 올라섰을 때,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세상에.’

레인디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쓸모없는 것!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여길 떠나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보고 어딜 가란 거예요!”

“그건 네 사정이지! 내가 지그문 후작처럼 너그러운 사람으로 보이냐?”

“나는 고아예요! 이제 갈 곳이 없단 말이에요! 흐어어엉!”

무릎을 꿇고 싹싹 빌고 있는 꾀죄죄한 여인은 틀림없이 벨리타였다. 데본 부인이 벨리타의 따귀를 때리려고 높이 팔을 들었다.

“그, 그만두세요!”

레인디아는 부리나케 달려가 벨리타를 감싸 안았다. 벨리타는 얼떨떨해진 얼굴로 레인디아를 올려봤다.

“레, 레인디아……?”

“그쪽은 누구요?”

데본 부인이 표독스레 물었다. 레인디아는 주춤했으나 꼿꼿이 고개를 들었다.

“아, 아가씨의……, 아니, 벨리타의 언니예요.”

“……무어?”

데본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상황을 파악했는지 번쩍 든 손을 바로 했다. 그럼에도 레인디아는 벨리타를 일으켜 세우고 제 뒤로 숨겼다. 그녀는 구겨진 제 드레스를 탁탁 턴 뒤 바르게 섰다.

“그간 아가씨를 돌봐주셨다고 들었어요. 이젠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저년을 데려가겠다고?”

데본 부인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벨리타의 손목을 휙 낚아챘다. 오랫동안 쫄쫄 굶은 벨리타는 힘없이 노부인에게 끌려갔다.

“곤란하게 됐수, 아가씨.”

“네? 트, 틀림없이 조금 전에 쫓아내겠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와서 왜…….”

“마음이 바뀌었다 이 말이오.”

데본 부인이 크흠, 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제야 레인디아는 그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아주 오래전, 사창가에서 백작 부인에게 저를 넘기던 마담과 노부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가씨가 신세 진 답례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레인디아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부, 부족하진 않을 거예요.”

레인디아는 휙 수표 뭉치를 건넸다. 그것을 본 데본 부인의 입가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벨리타 역시 휘둥그레진 눈으로 수표와 레인디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중에 딴말해도 소용없수다.”

데본 부인은 냉큼 수표를 낚아채더니 엄지에 침을 묻혀 장수를 셌다.

“네. 제가 다시 찾아오는 일도 없을 거예요.”

레인디아는 목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그리고 벨리타에게 슬쩍 손을 내밀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데본 부인을 상대할 때와 달리 힘이 없었다. 오히려 잔뜩 위축된 말투였다.

“……가, 가요, 아가씨.”

혹 벨리타가 제 손을 내치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벨리타는 그렁그렁해진 눈물을 닦더니 덥석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마치 이 손을 놓치면 물에 빠져 죽기라도 할 것처럼. 눈물이 묻은 손바닥이 축축했다. 떨리는 손을 통해 벨리타의 두려움이 전해졌다.

‘가엽게도.’

레인디아는 거지꼴이 된 벨리타를 데리고 황급히 언덕을 내려왔다.

“하압. 합.”

벨리타는 양손에 포크를 들고 쉬지 않고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귀족 영애의 교양은 오랜 굶주림 앞에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여관 식당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비릴리안의 악행을 아는 손님들은 관심 없는 척 두 자매를 힐끗거렸다.

“천천히 드세요.”

레인디아는 씁쓸히 웃으며 비어 있는 물컵에 물을 따라줬다. 벨리타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 사레가 들렸는지 캑캑대며 가슴을 두드렸다.

“괜찮으세요?”

“흐, 흐윽…….”

벨리타가 푹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먹던 수프 접시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접시를 옆으로 치워줬다. 그때 벨리타가 레인디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 그대로……, 죽는 줄 알았어…….”

벨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레인디아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이 이토록 망가질 수가 있을까. 벨리타의 탐스러운 머리는 숭덩 잘려서 지푸라기처럼 뻗쳐 있었고,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던 뺨도 해골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목소리를 통해서만 겨우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벨리타가 맞다고.

“아가씨.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요?”

벨리타는 몇 번을 더 훌쩍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물론 이어지는 이야기는 현실에 기반했으나 다분히 벨리타의 입장만을 편향적으로 대변했다. 그리고 그것이 레인디아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자신은 매니 부인처럼 상냥한 노부인을 통해 위로받고 있을 때, 벨리타는 데본 부인의 집에서 종처럼 부려졌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 그렇게 앤이 내 전 재산을 들고 도망치고 나는 빈털터리가 된 거야. 경비대에선 목걸이를 찾아준다고 했지만, 외지인인 내 부탁을 들어줄 리 없지. 거기다 우리 집은 쫄딱 망했잖아. 그런 거지……?”

벨리타가 그렁대는 눈으로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레인디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급하게 덧붙였다.

“나, 나도 알아. 고작 가품을 판 거로 재산이 전부 몰수됐을 리 없단 거쯤은……! 버려진 신문에서 읽었어. 그리고 내가 지나갈 때마다 말해. 어머니가, 사실은 백작가의 하녀였고 또…….”

벨리타는 레인디아의 손을 놓더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레인디아는 크게 당황했다.

“레인디아……! 나, 나는 정말 몰랐어. 어머니가 그런 잔인한 짓을 한 줄, 꾸, 꿈에도 몰랐어어. 네가 사생아가 아니라, 본처의, 자식이었단 걸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못살게 굴지 않았을 거야. 나는. 나는…….”

벨리타는 서럽게 훌쩍였다.

“내가 미워, 레인디아?”

벨리타가 레인디아의 치맛자락을 꼭 쥔 채 물었다. 처참하게 망가진 벨리타의 모습에 레인디아는 속이 갑갑하고 목이 탔다. 그녀는 물을 마시는 대신 겨우 모은 삼켜 목을 축였다. 벌어진 입술을 통해 나오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아가씨.”

완전히 뒤바뀐 처지. 그럼에도 레인디아는 벨리타를 미워하지 않았다. 아니, 미워할 수 없었다. 레인디아의 눈에 비춘 벨리타는 모든 걸 빼앗겨 겁먹은 소녀에 불과했다. 그저, 레인디아는 이 모든 불행의 고리를 자신이 직접 끊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일어나세요.”

레인디아는 벨리타를 부축해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동생의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여줬다.

“자. 마저 드세요. 수프는 제 것과 바꿔요. 이게 더 따뜻하니까요.”

레인디아는 한 입도 먹지 않은 제 수프 접시를 벨리타에게 양보했다.

“……레인디아.”

용서하겠다는 한마디 말없이도 레인디아는 행동으로 벨리타의 모든 죄를 씻겨내 주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녀의 성스러운 행동에 경의를 표했다.

“이건, 네가 만든 거야?”

숙소로 돌아와 짐을 푸는데 벨리타가 레인디아가 만든 브로치에 관심을 보였다. 매니 부인의 집에서 만든 브로치였다. 레인디아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다. 꼭 백화점에서 파는 것 같아!”

“그, 그런가요? 감사해요.”

뜻밖의 칭찬에 레인디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모시던 아가씨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은 엄청났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일렁이는 마음을 재빨리 갈무리했다. 더 이상 벨리타는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영원히 벨리타와 함께할 생각은 없었으나, 당분간의 생활을 위해서도 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르는 건 역시…….’

레인디아가 혼자만의 고민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도 돼?”

“……네?”

“우리는 자매잖아. 내가 쭉 오해해서 너를 못살게 굴긴 했지만……. 저기, 그게 싫다면 나만 벨리타라고 불러도 돼. 아니, 제발 그래 줘. 응?”

당혹스러운 마음은 잠시뿐이었다. 오히려 먼저 첫 단추를 끼워준 벨리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물론이죠, 아가씨. 저를 언니라고 불러도 좋아요. 아, 아니. 벨리타.”

“응, 언니!”

벨리타는 활짝 미소 지었다. 꽃봉오리가 탁 피어오르는 듯한 미소에 오랜 앙금이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레인디아도 수수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브로치 정말로 예뻐. 언니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잖아. 나중에 브로치 장인이 돼서 백화점 같은 곳에 물건을 팔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참. 나는 백화점에 자주 가봐서 알아. 언니는 정말 대단해. 그리고, 이런 대단한 사람이 내 언니라서 기뻐!”

늘 멀리서만 구경하던 벨리타의 깜찍한 애교가 눈앞에서 펼쳐지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레인디아는 벨리타가 조잘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 * *

꿈에 에이든이 나왔다.

에이든은 아틀리에 중앙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벽면에는 그가 그린 레인디아의 초상화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레인디아 역시 벽에 걸린 액자 안에서 에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든은 손에는 리볼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는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실린더에 탄환을 넣기 시작했다. 레인디아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찰칵.

에이든이 손목을 흔들자 실린더가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여기서 죽으려고 했어.”

처음으로 에이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레인디아는 눈을 크게 떴다.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안 돼. 레인디아는 필사적으로 그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끝을 낼 때야.”

에이든이 총구를 머리에 겨누더니 자신을 둘러싼 초상화를 찬찬히 바라봤다. 이윽고 그의 붉은 시선은 레인디아가 갇혀 있는 액자 앞에 멈췄다. 그는 마치 레인디아를 향해 말하는 듯했다.

“디아, 인간은 죽어.”

그만. 안 돼…….

“죽은 건 되돌릴 수 없어.”

안 돼요, 안 돼요, 에이든!

타앙!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에이든의 몸이 무력하게 고꾸라졌다. 그의 머리를 관통하고 튄 피가 레인디아가 갇혀 있는 액자까지 튀었다. 옆으로 쓰러진 줄 알았던 에이든은 기이한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마치, 레인디아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처럼.

“아, 아니야. 아니야.”

레인디아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굳어 있던 몸이 움직였다. 잃어버린 목소리도 되찾았다. 어째서인지 손이 축축했다. 레인디아가 두 팔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손 위에서 펄떡이고 있었다. 성인 남자의 두 주먹을 합친 정도 되는 크기의 붉은 덩어리였다.

한번 팽창할 때마다 핏물이 팍팍 튀어 올랐다.

“……이게, 대체.”

레인디아가 창백하게 질린 고개를 들자,

“너에게 줄게.”

에이든이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액자 안으로 침범했다. 피 냄새가 훅 올라왔다.

“내 심장을, 너에게 줄게. 디아.”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손목을 움켜쥐며 속삭였다.

“흐윽……!”

레인디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몸살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어, 언니?”

“……아?”

저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레인디아는 슥 고개를 돌렸다. 벨리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악몽.”

레인디아는 멍하니 벨리타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꿈을, 꾼 것 같은데 막상 눈을 뜨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꺼림칙한 기분만이 남아 두통이 밀려왔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일어나신 건가요?”

레인디아가 젖은 눈을 훔치며 물었다. 벨리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냥. 나도 요즘은 잠이 잘 안 와.”

벨리타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레인디아는 동질감을 느끼며 벨리타의 손을 꼭 잡아줬다. 어떻게든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싶었다. 고민하던 끝에 어렵게 입을 뗐다.

“저, 벨리타.”

“응?”

“해가 뜨면 옷을 사러 가요.”

“……내 옷 말이야?”

“네. 평소에 입을 옷을 몇 벌 사드릴게요.”

벨리타가 입고 있던 옷은 워낙 망가지고 냄새가 나서 지금은 레인디아의 것을 빌려 입고 있었다. 하지만 체형도 다르고 키 차이도 나다 보니 계속 입고 지내기엔 불편할 것이다. 레인디아의 세심한 배려에 벨리타는 또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 아냐. 나가기 싫어.”

“어째서요?”

“다들 날 손가락질하니까. 나 때문에 언니까지 욕먹으면 어떡해?”

“……아가씨.”

레인디아는 버릇처럼 아가씨 소리를 하며 탄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미 벨리타에게 모든 정황을 들었음에도, 그녀가 겪었을 두려움과 고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때 벨리타가 체념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싸지. 내 어머니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까. 흐윽.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너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는걸…….”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셨잖아요.”

레인디아는 벨리타의 손을 다잡았다.

“그때 아가씨는 어린아이였어요. 틀림없이 혼란스러웠겠죠. 잘못을 저지른 건 어른들이에요. 평생 함께하기로 한 부부의 맹세를 어긴 건 우리의 아버지와 비릴리안이었는걸요.”

“그, 그래. 나는……, 엄마 대신 벌을 받는 거야. 내가 그런 여자의 딸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거고…….”

벨리타의 말에 레인디아는 울컥했다.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레인디아는 다정히 벨리타의 눈물을 닦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있잖아요, 아가씨……, 아니, 벨리타.”

“응……?”

“죄는 대물림되지 않아요. 제국에서 연좌제는 폐지된 지 오래예요. 단지, 구시대의 잔재가 우리의 양심에 남아 있어서 죄가 대물림된단 믿음이 이어질 뿐인 거죠.”

레인디아는 한마디 한마디 힘을 실어 말했다.

“저는 아주 오랫동안 저의 잘못도 아닌 일로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왔어요. 벨리타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삶은 짧잖아요.”

남은 삶은 좋아하는 일만 즐기며 살아도 모자란다던 에이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실, 벨리타에게 해 준 말은 전부 에이든에게 들은 말이었다. 에이든이 상처받은 자신을 위로해 주기 위해 해 주었던 말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레인디아의 안에서 되살아났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에이든은 알고 있었겠지.

필멸자가 반드시 도달하고야 마는 죽음이란 운명의 굴레를. 그토록 숱한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한 남자에게 레인디아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것이 통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에이든이 그토록 겁을 먹을 줄도 몰랐다.

더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이 순간, 비로소 벗어났다고 확신하게 된 오늘에서야, 당신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당신의 말 하나하나가, 귓가에 닿던 숨결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해.

어쩌다 나는 이토록 지독하게 당신과 얽혀버린 걸까.

“……고마워, 위로해 줘서.”

어느새 벨리타는 울음을 멈추고 배시시 미소 지었다. 레인디아 역시 씁쓸히 웃으며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실은, 저도 들은 말이에요.”

“누가? 누가 언니한테 그런 말을 해 준 거야?”

“……그건.”

“누군지 몰라도 고마운 사람이네.”

벨리타가 머뭇거리는 레인디아를 대신해 말했다.

‘고마운 사람.’

단순히 고맙다는 말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구원자이자 파괴자였으며, 그녀를 천국의 문으로 인도하는 천사의 역할을 수행하다 벼랑 끝까지 떨어트리는 악마로 변했다.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에이든의 앞에선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마치 눈먼 장님이 된 것처럼 모든 걸 의지하게 된다. 그곳이 불구덩이란 걸 알면서도 기꺼이 뛰어들게 한다.

‘그래서 위험한 거야.’

그래서, 내가 당신을 떠나야 했던 거야.

레인디아는 먹물처럼 번지는 그리움을 억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쑥스러워하는 벨리타가 있었다. 레인디아는 이 현실에 뿌리내려야 했다.

“있잖아, 언니. 옷도 좋지만 그 전에 언니랑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어디를요?”

“데본 부인의 집에선 먹을 걸 구하기 힘들어서 숲에서 버섯이나 약초를 캐 먹었거든. 그러다 발견한 곳이야. 나만의 비밀 장소인데, 언니랑도 공유하고 싶어.”

“비밀 장소……?”

* * *

날이 밝자 레인디아는 벨리타와 숲에 들어섰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변종 늑대가 나타날 수도 있어요.”

“여긴 안전해. 매일 다니던 길인걸!”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바닥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만든 길이 쭉 이어져 있었다. 벨리타는 덤불 사이에서 산딸기를 찾아 보여주기도 했다.

“이거 엄청 맛있어.”

벨리타는 시범을 보여주듯 산딸기를 날름 집어삼켰다. 레인디아도 머뭇거리다 하나를 집어 먹었다.

“정말 맛있네요.”

“후후. 그렇지? 앗, 저길 봐! 다람쥐다!”

“어머. 그러네요.”

벨리타가 내내 조잘대느라 레인디아는 길이 끊겼단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레인디아의 긴장이 풀릴 즘, 벨리타는 더 깊은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이것도 먹을 수 있는 버섯이야.”

벨리타는 버섯을 뽑아 보여줬다.

“물론, 이젠 먹을 필요 없지. 나한텐 언니가 있으니까.”

벨리타는 버섯을 휙 버리더니 레인디아에게 팔짱을 꼈다. 이런 숲에서 먹을 걸 구해 먹었을 벨리타를 떠올리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마을로 돌아가면 맛있는 걸 잔뜩 먹어요.”

“……응. 그래야지.”

벨리타의 걸음이 느릿해졌다.

“누가 알았겠어. 백작가의 영애가 이런 촌구석에 박혀서 산딸기나 주워 먹고 살 줄.”

“벨리타……?”

“정말로 미칠 거 같았어. 엄마는 감옥에 갇혔다고 하지, 저택과 영지는 전부 경매로 넘어갔다고 하지, 혹시나 나한테 빚이 넘어오는 건 아닐까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어.”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전부 잘 끝났으니까요.”

레인디아는 어른스럽게 벨리타를 다독여줬다.

“전부 잘 끝나?”

그때, 벨리타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여기야.”

“……네?”

“내 비밀 장소 말이야.”

“아.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요?”

레인디아는 휘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벨리타는 살그머니 팔짱을 풀고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레인디아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벨리타는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앗……!”

벨리타의 손에 밀린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중심을 잡기 위해 오른쪽 발을 내딛는 순간, 몸이 밑으로 주저앉았다. 정확히는 땅이 꺼졌다는 말이 맞았다.

푹!

다행히 레인디아는 두꺼운 밀짚 위로 떨어져 부상을 면했다. 짐승을 산 채로 잡기 위해 사냥꾼이 쳐둔 함정 같았다. 레인디아는 제 앞을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노란 밀짚을 보다 슥 고개를 들었다.

“베, 벨리타…….”

곧 어두운 그림자가 레인디아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너도 참 멍청하구나, 레인디아.”

벨리타는 구멍 안으로 앙증맞게 얼굴을 내밀며 레인디아를 비웃었다.

“네가 전 부인의 딸인 건 어릴 적부터 알았어.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네 말대로 내 잘못도 아닌 일에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해? 애초에 난 태어날 때부터 백작가의 딸이었어! 법적으로 내 태생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벨리타의 표정이 흉포하게 일그러졌다.

“가방 안에 든 수표는 내가 잘 쓸게. 날 원망하지는 마. 애초에 내가 아니었어도 그 돈을 훔칠 놈들은 여기 널렸으니까. 북부인은 다 쓰레기거든!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네년 때문이잖아! 그러니 그 돈은 내 거야!”

레인디아가 끼어들 새도 없었다. 벨리타는 속사포처럼 제 할 말만 던진 채 휙 몸을 일으켰다. 레인디아도 뒤늦게 일어나 팔을 뻗어봤지만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아.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사라진 줄 알았던 벨리타가 다시 쏙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는 찾는 사람들이 없어. 얼마 전에 변종 늑대에게 습격당한 사람이 있어서 발걸음이 뚝 끊겼거든. 그래도 운이 좋다면 누군가 널 구해 주겠지. 우리 엄마를 로짓섬에 보낸 거에 비하면, 나는 상냥한 편이니까 감사하라고!”

벨리타는 신경질적으로 발길질을 하고 휙 몸을 틀었다. 레인디아는 떨어지는 흙을 피하려고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벨리타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 이럴 수가…….”

레인디아는 충격으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굴 원망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운명을 탓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건 신이 내린 징벌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어리석은 선택이 불러온 결과일 뿐…….

“꺄아악!”

그때 멀리서 벨리타의 비명이 들렸다.

레인디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늑대, 일까?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레인디아는 한껏 몸을 웅크렸다. 더는 벨리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싫어. 죽고 싶지 않아.’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레인디아의 뺨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에이든 님.”

어째서, 이 순간 입 밖으로 그의 이름이 흘러나온 걸까. 왜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존재가 이 남자일까. 마치 벼랑 끝에 다다른 인간이 신에게 기도하듯, 레인디아의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 낸 형상은 다름 아닌 에이든이었다.

레인디아가 숨을 죽인 채 오들오들 떠는데, 다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풀썩.

그리고 구멍 안으로 나무 사다리가 내려왔다.

“……?”

레인디아는 그것을 힐끗 바라보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누, 누구신가요?”

용기를 내 물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적일까? 아니면, 이 덫을 만든 사냥꾼인지도 몰랐다. 어차피 이 안에 머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레인디아가 사다리를 반쯤 올라왔을 무렵, 바깥에 두꺼운 손이 쑥 들어와 레인디아의 팔목을 낚아챘다.

“앗.”

순식간에 레인디아의 몸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단단한 가슴에 뺨이 뭉개졌다. 레인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설마, 하는 의구심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확신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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