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야윈 짐승은 굴로 돌아가니
“……에이든 님.”
레인디아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 붉은 입술 사이로 제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밀어내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레인디아의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피가 흐르진 않는지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득한 시선을 느낀 레인디아가 살며시 대답했다.
“다친 곳은 없어요.”
그보다 어째서 저와 거리를 벌리는 건지 묻고 싶었다.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그를 힘껏 끌어안고 싶은 건 자신뿐일까? 고작 한 걸음 남짓한 거리였는데도 에이든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말에 안심했는지 샅샅이 훑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치 죄인처럼 푹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그늘이 져서 그의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에이든은 마른 입술을 잘근대는 불안한 행동만 반복했다.
“에이든 님!”
그때 뒤에서 북부 경비대가 우르르 몰려왔다. 볼레어도 있었다. 볼레어는 도망치던 벨리타를 구속한 채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무사하단 걸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벨리타가 버둥대자 에이든이 휙 고개를 돌렸다. 살의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자 벨리타는 꾹 입을 다물었다. 에이든의 두꺼운 목엔 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이를 드러낸 짐승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에이든은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충동을 참고 있었다. 레인디아 역시 그가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분노를 억누르고 있음을 알아챘다.
“……죄인은 감옥으로 이송해라.”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목을 긁는 듯한 에이든의 목소리는 수십 일 만에 처음으로 입을 뗀 사람처럼 쉬어 있었다. 볼레어는 레인디아와 에이든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벨리타의 손목을 구속한 뒤 부하들과 숲을 벗어났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
에이든이 팔을 들자 레인디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에 에이든은 움직임을 멈추더니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멀어졌다. 에이든은 어렵게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벨리타를 볼 때와 달리 그의 표정은 몹시 유순했다. 목에 불거진 핏줄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더, 다가가지 않을게.”
에이든은 푹 고개를 숙였다. 수그러든 얼굴 밑으로 목소리가 바스러졌다. 에이든은 다시 팔을 들더니 다급하게 재킷 안을 뒤적였다. 그가 꺼낸 것은 오래된 책 한 권이었다. 레인디아가 성전처럼 모시던, 그녀의 삶이자 종교이자 맹목적인 믿음의 형체.
“……이걸 주러 온 거야.”
본인이 느끼기에도 형편없는 변명이라 생각한 건지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었다.
그는 공손히 책을 내민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머리가 바람에 갈라지며 수척해진 얼굴이 드러났다. 야윈 뺨과 검게 그을린 눈 밑, 이빨로 쉴 새 없이 깨물어 겨우 혈기가 도는 입술. 피부는 그 어느 때보다 창백했다. 그는 당장 바스러질 것처럼 메마른 동시에 물에 빠진 사람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대신 처분하면 안 될 것 같았어.”
에이든은 목이 막혔는지 꾹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물기 어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나는, 내가 디아의 삶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고 자만했어.”
“에이든 님.”
레인디아는 천천히 에이든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에이든의 손에 들린 책을 건네받자 그의 무릎이 바닥으로 털썩 무너졌다. 레인디아는 당황해서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네 말이 맞아. 나는 괴물이야.”
에이든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다른 손은 바닥을 긁고 있었다. 무척 괴로운 듯이, 손톱을 세워 마른 땅을 벅벅 긁어댔다. 이토록 불안정해 보이는 에이든의 모습은 낯설었다. 본인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나는, 타인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아. 아니, 이해할 수 없어. 나한테 감정은 그런 거야. 하지만 디아가 나를 떠난 뒤엔, 슬퍼. 너무 슬퍼.”
얼굴을 감싼 손바닥이 피부를 짓이기듯 흘러내렸다. 이윽고 자국이 날 만큼 세게 목을 긁으며 내려간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했다. 에이든은 마치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저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볼품없이 어깨를 떨며,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눈물을 흘리는 법을 알려달라 애원하는 시선에 레인디아의 마음 역시 무너졌다.
“내가 한 짓은 평생 용서받지 못하겠지. 그래도 나는 디아가 없으면 살 수 없어. 곁에만 있게 해 줘. 다른,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려도 괜찮아. 디아.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 평생 디아를 주인으로 모실게. 그래, 나를 종처럼 부리는 거야. 그럼 용서가 될까? 디아. 나는 그저, 네 삶의 일부가 되고 싶어. 종이라도 좋아. 무엇이든 좋으니…….”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향해 팔을 뻗다가 황급히 거둬들이며 쥐락펴락했다.
레인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에이든 님, 그만하세요!”
“죽지 마. 죽지 마, 디아. 제발 살아줘, 디아…….”
에이든은 그날의 공포가 떠오르는지 몸을 움츠렸다. 거스를 수 없는 절대자에게 복종하듯이 그의 고개가 끝을 모르고 고꾸라졌다. 레인디아는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에이든의 이마가 바닥에 닿기 직전에 가까스로 막았다.
“죽지 않아요. 죽지 않을게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협박에 에이든이 이토록 망가질 줄은 몰랐다. 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레인디아는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에이든의 뺨을 힘껏 잡아 쥐었다. 직접 만져보니, 보는 것보다 훨씬 야위어 있음을 깨달았다.
“저를 봐주세요, 에이든 님. 네?”
에이든은 레인디아가 팔을 드는 대로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쫓아와서.”
“아니에요. 에이든 님이 절 찾으러 와주신 덕분에, 저는……, 이번에도 살 수 있었잖아요.”
그렇죠? 레인디아가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나 이로는 부족했는지 에이든은 자꾸만 시선을 회피했다. 그의 호흡 역시 점점 거칠어졌다. 레인디아는 다친 짐승을 구호하듯 그의 몸을 감싸 품에 안았다. 에이든은 거대한 체구를 한껏 구긴 채 레인디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천천히 숨을 쉬는 거예요.”
레인디아는 후후, 숨소리를 내며 에이든의 등을 다독여줬다. 에이든이 과호흡에 괴로워하던 자신을 진정시켜주던 기억을 떠올려 어색하게 따라 했다. 거친 숨소리가 차츰 진정됐다. 이윽고 떨림이 잦아들었을 때, 에이든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곳은 위험해, 디아. 하이락으로 돌아와 줘. 나 때문에 디아가 도망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두 번 다시 원하지 않아.”
도대체 헤어진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레인디아는 불안하게 떨리는 에이든의 손을 잡아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벨리타는 북부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북부의 법은 엄격했다. 따라서 벨리타는 이복자매를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려 한 죄로 극형에 처할 것이다. 그리고 레인디아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에이든이었다. 그녀는 저와 같은 마차를 타길 거부하는 에이든을 설득해 겨우 동승했다.
“…….”
“…….”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맞은편에 앉은 에이든은 푹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레인디아는 만지작거리던 책을 옆으로 치운 뒤 고개를 들었다. 에이든은 어두운 그림자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이대로 그림자와 하나가 되어 사라질 것처럼.
“에이든 님.”
“……응.”
레인디아가 부르자 에이든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한껏 고분고분해진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착잡해졌다. 레인디아는 머뭇거리다 그의 옆에 앉았다. 에이든은 몸을 움찔 떨다가 그림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는 한껏 예민해진 짐승처럼 레인디아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숲에서 내가 한 얘기는 잊어.”
“네?”
“……나는, 디아를 하이락에 바래다준 뒤 떠날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랫동안 고민하고, 깨달았어. 난, 디아의 삶에 아무 쓸모 없는 존재야. 나는 널 불행하게만 만들 거야. 오늘 죽을 뻔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내 잘못이지. 내가 원인을 제공한 거야. 내가 디아를 쫓아내서, 쫓아가서, 그래서…….”
“아니에요! 절 구해 준 건 에이든 님이잖아요.”
레인디아는 자꾸만 자신을 탓하는 에이든 때문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에이든은 도리어 그것이 저를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인디아는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며 더욱 부드러운 말투로 그를 다독였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말하지 못했어요. 고마워요. 저를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절대 에이든 님의 탓이 아니에요.”
레인디아는 살며시 에이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저 일어난 일인,”
에이든의 옷소매가 스르륵 밑으로 흘러내리자 레인디아는 할 말을 잃었다. 기억보다 야윈 손목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상이 가득했다. 마치 잘못 쓴 문장을 지우려고 펜촉으로 휘갈긴 자국처럼, 가늘고 붉고 선명한 흉터가…….
“이, 이게, 이 상처는 뭔가요?”
소매 밖으로 드러난 상처는 더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에이든 님, 대답 좀 해 보세요. 왜 이런 흉터가 있는 거죠?”
에이든의 침묵에 레인디아가 다그치듯 되물었다. 에이든은 다른 손으로 살그머니 손목의 상처를 감쌌다. 그의 거대한 몸이 초라하게 구겨졌다.
“……화내지 마, 디아.”
“화, 화내는 게 아니에요. 저는, 걱정이 되어서…….”
“……내가 걱정돼?”
에이든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한편으론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관심을 끌어 기뻐하는 어리숙함도 묻어났다. 레인디아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에이든을 탓할 마음은 이어지는 그의 말에 완전히 사그라졌다.
“족쇄를 채운 거야.”
“……?”
“가만히 있으면 디아를 쫓아갈 것 같았어. 다시 널 붙잡아와서, 상처를 줄 것 같았어.”
“…….”
“하지만, 그럼 안 되는 거잖아.”
에이든은 손톱을 세워 자상을 긁기 시작했다. 마치 더러운 껍질을 벗겨내려는 듯, 그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레인디아는 놀라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목숨은 하나니까. 죽은 건, 돌아오지 않아.”
“……에이든 님.”
“나는, 디아의 시체를 원하는 게 아니야. 그 여자의……, 누군가의 대신이라 생각한 적도 없어. 나한테는 디아가 유일해. 그래서 소중했던 거야. 하지만 나는, 디아에게 유일한 무언가가 아니겠지. 그저 너의 수많은 불행 중 하나에 불과했고,”
자신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고, 짙은 그림자에 은닉한 눈동자가 겁에 질려 속삭였다.
“내가 미워, 디아?”
“……저는,”
“난 내가 미워.”
“에이든 님.”
“한 번도 나 같은 걸 좋아해 본 적이 없었어.”
에이든은 머뭇거리다 레인디아의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그의 차게 식은 온기가 스며들었다. 아교를 바른 것처럼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떨어트릴 수 없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레인디아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헤어지면 당신은 죽게 될까요?’
자신을 쫓을까 봐 몸에 상처를 내서 필사적으로 막았을 에이든을 떠올리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은 얼마나 가여운가. 자신의 전부를 내어줄 유일한 존재가 필요한, 거스를 수 없는 신앙이 있어야만,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고단한 영혼들.
레인디아는 부서지는 조각들을 주워 모으듯, 무너지는 에이든의 몸을 끌어안았다.
“…….”
“…….”
하이락으로 향하는 마차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레인디아에겐 예전처럼 모든 걸 바쳐 지키고픈 아이가 없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런 존재, 삶의 목적이자 살아갈 희망이 되어준 아이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제 가냘픈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한 남자가 있었다. 에이든은 꼭 분리 불안이 있는 아이 같다가도, 레인디아가 선뜻 손을 내밀면 겁에 질린 짐승처럼 몸을 움츠리기 바빴다.
저 멀리 하이락의 성벽이 보였다.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에이든을 밀어내야 할지, 그를 더욱 힘껏 끌어안아 줘야 할지.
끼이익.
성문 앞에서 마차가 멈추었다. 잠든 줄 알았던 에이든이 슥 몸을 일으켰다. 그는 먼저 문을 열고 나가 레인디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줄게.”
“감사해요, 에이든 님.”
에이든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는 순간까지 레인디아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마차 밖으로 나오자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황금처럼 찬란한 빛이었다. 영혼의 상처로 스며들 듯한, 눈이 부신 광채…….
턱.
바로 그때, 에이든이 반대쪽 손으로 마차를 짚었다. 그대로 겹쳐진 손을 털어내더니 레인디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에, 에이든 님……?”
어째서 길을 터주지 않는 것일까. 레인디아는 옆으로 비켜서지 않고 저를 막아서는 거대한 육신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익숙한 두려움이 그녀를 감쌌다. 몸이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몸을 마차 안으로 민 것이다.
다시 그의 광적인 집착이 눈을 뜬 것일까.
“안으로, 들어가.”
하지만 에이든의 목소리는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힘이 없었다.
“컥!”
그 순간, 레인디아의 가슴 위로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에이든의 거대한 몸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피에 젖은 몸 위로 에이든의 뺨이 뭉개졌다. 레인디아는 덜덜 떨며 그를 감싸 안았다.
“아, 아아. 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에, 에이든 님? 에이든 님……!”
레인디아는 에이든을 흔들었지만 그의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레인디아는 재빨리 그의 몸을 훑었다. 이윽고 에이든의 허리에 박힌 화살대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쏜 화살이 에이든의 허리를 관통한 것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을 발견한 경비대가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레인디아에겐 수십 일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가슴에 에이든의 피가 스며들었다. 그의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시체는 무거워진다던 속설이 떠올라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 아아. 에이든 님. 제발, 제발 대답해 줘요, 제발……!”
“괜찮으십니까?”
경비대가 레인디아의 품에서 에이든을 떨어트렸다. 레인디아가 다시 그를 향해 팔을 뻗었지만 그녀를 막는 경비대에 의해 저지됐다.
* * *
“에이든 님을 기습한 건 황태자파의 소행으로 추정됩니다. 황후 마마께서 강제 소집령을 내리셔서 조사에 착수했고…….”
레인디아는 차분히 산첼로의 설명을 듣고 있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이제 막 말을 알아듣는 아이처럼 단편적인 단어만이 귀에 들어왔다. 기습, 황태자파, 황명……. 레인디아는 겨우 알아들은 단어를 나열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사실, 레인디아 아가씨께서 떠나신 후 협박 편지가 도착하곤 했습니다.”
“……협박 편지요?”
“예. 아무래도 황태자파 입장에선 에이든 님이 눈엣가시일 테니까요. 혹여 황궁 의회에 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그저 견제에서 끝날 줄만 알았습니다만.”
레인디아는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에이든이 저를 데려다주지 않았더라면.
만약, 에이든이 제게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만약이 레인디아의 목을 옥좼다.
그랬다면, 화살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에, 에이든 님은, 괜찮은 건가요? 죽을 리 없어요. 그렇죠? 그분은……, 저, 전장에서 4년이나 계셨고, 그렇게 강하고, 민중의 영웅이잖아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런 일은……!”
레인디아는 기어코 눈물을 터트렸다.
죽은 것은 되돌릴 수 없다던 에이든의 말이 떠올랐다. 품 안에서 사그라지던 숨결과 바위처럼 제 몸을 짓누르던 죽음의 무게가 마치 지금 일어나는 일인 듯 선명했다.
“황궁의 명의들이 수술을 집도하고 있습니다. 무사하실 겁니다.”
산첼로는 침착하게 레인디아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레인디아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결국 당신도 죽음 앞에선 그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던 거야.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힘은 강한 자의 목숨마저 앗아가는 것이다.
에이든의 몸이 회복되는 동안, 레인디아는 황궁의 별채에서 머무르게 됐다.
수술이 끝난 뒤에도 레인디아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저 막연히 기다려야 했다. 카타리나 역시 이번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그녀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첫 황족 시해 사건이었다. 비록 미수에 그쳤으나.
“레인디아 아가씨.”
이따금 산첼로가 찾아와 사건의 경과를 알려줬다.
마침내, 황태자파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그들이 지장을 찍은 맹세문이 발견된 것이다. 그렇게 에이든을 피살하려 한 황태자파 일당은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재판장에 섰다. 돌아오는 금요일 그들 역시 단두대에 설 것이란 설명이 이어졌다. 민중의 영웅을 죽이려 한 극악무도한 이들의 이야기가 호사가들에 의해 전역으로 퍼질 것이다.
“어,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아직도 볼 수 없는 건가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셔서…….”
산첼로는 안타깝게 말끝을 흐렸다.
“그, 그래도 살아계신 거죠? 얼굴이라도 보게 해 주세요. 그저 멀리서라도 상관없어요.”
레인디아의 간절한 애원에 산첼로는 두 손을 들었다.
레인디아를 태운 마차는 황궁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발길이 끊겨 길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으스스한 숲이 마차를 둘러쌌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감옥처럼 생긴 별궁이었다.
“……에이든 님이 이곳에 계신다고요?”
“어린 시절 에이든 님께서 기거하셨던 구동궁입니다.”
산첼로는 레인디아의 마음을 이해한단 듯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마치 감옥과도 같은 건물에 들어서자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복도가 그들을 반겨주었다. 정말로 사람이 사는 궁인 것일까 싶을 정도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산첼로가 문을 열어주며 옆으로 비켜섰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에 턱 숨이 막혔다. 유리창을 투과한 어스름한 빛을 따라 고개를 들자 새하얀 침대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레인디아는 산첼로를 한 번 본 뒤 천천히 에이든에게 다가갔다.
“에이든 님.”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에이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몇 번이고 상상하려 했으나 괴로운 마음이 들어 실패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에이든은 마치 잠든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레인디아는 훌쩍이며 조용히 눈물을 훔쳐냈다.
“어, 얼마나 더 여기 있을 수 있나요?”
“더 머무셔도 괜찮습니다. 원하신다면 이곳에서 지내실 방을 준비해두겠습니다.”
산첼로는 구동궁이 너무 오랫동안 버려진 장소라 레인디아를 모시지 못한 거라 덧붙였다. 그런 곳에 에이든을 홀로 둔 이유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이곳이 그가 제일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장소란 사실을 깨달았다.
“네. 부탁드려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후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침실을 방문해 그를 보살폈다.
그리고 매일같이 기도했다. 기도하는 내용은 날마다 달랐지만 마지막엔 늘 에이든이 눈을 뜨게 해달란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 그날도 레인디아는 젖은 수건으로 에이든의 몸을 닦아줬다.
인간의 형상을 한 악이라 생각했던 남자는, 무수한 상처를 짊어진 채 죽어가는 가여운 영혼에 불과했다. 레인디아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를 이해할 기회를 얻고 싶었다.
레인디아는 하늘을 보며 간절히 기도하다 고개를 숙여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의 홀쭉해진 뺨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것을 훔쳐내려는데 에이든이 빠끔 입을 열었다.
“울지 마, 디아.”
레인디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에, 에이든 님……!”
“이것만 대답해 줘.”
“네……?”
“디아는, 살아 있어?”
“네. 네. 살아 있어요. 전 무사해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손을 잡아 제 뺨 위에 얹었다.
“그럼 됐어.”
에이든은 미련이 없단 듯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레인디아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아아. 안 돼요. 다시 잠들지 말아요. 나만 두고 가지 마요.
“거, 거기 누구 없어요? 에이든 님이 눈을 떴어요. 정신이 돌아왔단 말이에요……!”
레인디아가 다급하게 소리치자, 복도 밖에서 대기하던 주치의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
* * *
의원이 물러가고 산첼로가 에이든의 앞에 섰다. 에이든은 그가 건넨 물로 목을 축이더니 큼큼, 헛기침하며 목울대를 매만졌다.
“보고해.”
“예. 황궁 안에 남아 있던 황태자파는 이번 일로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황태자파에게 살해 혐의를 씌우는 일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예전에 준비한 것들이었다. 시해 문서도 완벽하게 위조해두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진행했다면 실패할 일은 없었다. 에이든이 목숨을 걸고 이런 짓을 벌인 까닭은 하나였다.
“디아는 어디 있지?”
“구동궁에 계십니다. 울다가 지쳐 쓰려지셔서 침실로 옮긴,”
“기절했다고?”
에이든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황태자파 소탕에 실패했단 말을 들었어도 이 정도로 놀라진 않으리라. 에이든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기어코 그의 허리를 두른 새하얀 붕대에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왔다.
“사, 상처가 벌어지십니다!”
“디아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어.”
“지금 가면 더 오해를 사실 겁니다……!”
“닥쳐. 디아가 멀쩡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으니까.”
허리에 화살이 박힌 남자보다 울다 기절한 여자가 위독할까. 산첼로는 안절부절못하며 에이든의 뒤를 쫓아갔다.
“……확인하셨으면 어서 돌아가시는 게,”
“조용히 해.”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맥박과 안색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을 땐 붕대가 피로 질척댔다.
“봉합을 형편없이 해놨군.”
에이든은 쯧 혀를 찼다. 그 모습에 산첼로는 안정을 취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복잡한 마음을 갈무리하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레인디아 아가씨께서 지극정성으로 에이든 님을 간호해 주셨습니다.”
“디아가 기절할 때까지 네놈들은 뭘 한 거지? 디아가 종이라도 되는 줄 알아?”
도리어 에이든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 그게, 아가씨께서 직접 나서서.”
“디아가 직접?”
에이든의 표정이 유순해졌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소름 끼칠 정도로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디아가 직접 날 간호해 줬단 말이지. 누가 시킨 게 아니라…….”
그 가느다란 손으로 물수건을 짜내 제 몸을 닦아줬을 모습을 상상하니 몸이 전율했다.
“기억 못 하시는 겁니까?”
산첼로가 그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약을 먹은 동안엔 시체나 다름없어. 눈만 감고 있는 게 아니라고.”
에이든은 쯧 혀를 찼다. 허리에 화살을 맞은 정도로 의식 불명에 빠지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의 몸은 고작 그 정도 고통으론 꿈쩍도 안 할 만큼 빌어먹게 튼튼했던 까닭이다. 결국 에이든은 직접 조제한 약을 먹어야 했다. 타인에게 자주 사용했던 약이라 효력은 보장됐다. 되도록 본인에게 사용하고 싶지 않았으나 완벽하게 레인디아를 속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산첼로가 조심스레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셨어야 합니까?”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건가?”
“……그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나한테 양심이니 도덕이니 하는 걸 기대하지 마.”
에이든은 한 손으로 산첼로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오히려 너를 살려준 걸 감사히 여겨야지.”
“힉……!”
“내가 디아를 쫓겠다고 하이락을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것을, 너희는 감사해야 한다고.”
에이든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윽고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산첼로의 멱살을 놓아줬다.
에이든은 창백한 손을 쥐락펴락했다.
레인디아를 무력하게 떠나보낸 후로 에이든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손목을 그은 끝에 해답을 찾아냈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릴 해답이란 아주 단순했다.
다음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을 거는 한이 있어도.
“조금 망가져도 괜찮아.”
에이든은 손을 꽉 그러쥐었다.
“……에이든 님?”
“나를 봐. 엉망으로 망가졌지만 숨은 붙어 있지. 그래. 조금 망가진 정도론 죽지 않아. 오히려 망가지는 편이 낫지. 레인디아가 날 가엽게 여겨줄 테니까.”
레인디아가 없는 삶이라면 죽는 편이 났다. 하지만 반병신이 되는 한이 있어도 살아남는다면, 그렇게 레인디아를 붙잡을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었다. 레인디아가 자신의 죽어가는 육신에 숨을 불어 넣어줄 테니.
‘너를 안아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거야, 나는.’
에이든의 눈이 광기로 얼룩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 레인디아를 쫓아가려는 괴물을 칼로 찔러 길들인 끝에 기회는 찾아왔다. 거기에 벨리타가 끼어들어 상황은 더욱 극적으로 변했다.
“……비난해도 좋아.”
에이든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이야. 이렇게 해서 디아의 마음을 전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죽는시늉이라도 할 수 있어.”
“이, 이미 하셨잖습니까…….”
산첼로가 기가 막힌단 듯이 말끝을 흐렸다.
“그래. 이미 했지. 앞으로도 할 테고.”
에이든은 샐쭉 미소 지었다.
* * *
“에, 에이든 님.”
정신을 차린 레인디아는 에이든부터 찾았다. 그녀를 간호하던 시녀가 다정히 손을 잡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 님은 무사하세요. 지금 보러 가시겠어요?”
“네. 네……. 부탁드려요.”
레인디아는 시녀의 부축을 받아 복도를 걸었다. 닫힌 문 앞에서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시녀의 손을 놓았다. 혹여 에이든이 저를 걱정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레인디아는 볼을 문질러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은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디아.”
에이든은 침대에 앉아 레인디아를 반겨줬다. 여전히 수척했으나 멀쩡히 살아 숨 쉬는 모습에 레인디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살아 있어. 아아. 멀쩡히 살아계셔.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레인디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늘을 향해 감사했다. 그녀가 그대로 멈춰서 있자 에이든이 부서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계속 서 있어? 이리 와주면 안 될까? 나, 몸을 못 움직이겠어.”
레인디아는 재빨리 그의 곁에 가 앉았다.
“산첼로에게 상황 설명은 들었어. 협박 편지로 끝날 줄 알았는데 황태자파가 정말로 내 목숨을 노릴 줄이야. 미안해, 이런 위험한 곳으로 널 불러서.”
“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저 때문에 에이든 님이 위험에 처한 거잖아요.”
저를 위해 포악한 짐승이 기다리는 굴로 기어들어 온 꼴 아니던가.
“디아의 탓이 아니야.”
에이든은 한쪽 팔을 들어 레인디아를 감싸 안으려 했다.
“윽.”
“에이든 님……!”
이윽고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재빨리 팔을 내렸다.
“디아가,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지. 그 화살이 날 피해 너를 노렸다고 생각하면, 그랬다고 상상하면…….”
“지, 진정하세요. 아무 말도 마세요. 붕대를 갈아야겠어요.”
레인디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디아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이번이 처음도 아닌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에이든은 정말로 모르겠단 듯이 되물었다.
“에이든 님이 의식을 잃으셨을 때, 제가 쭉 붕대를 갈아드렸어요.”
“……계속 날 돌봐줬다고?”
“네.”
레인디아가 방긋 웃자 에이든은 고개를 떨궜다.
“최악이야.”
“……네?”
“디아에게 못 보일 꼴만 보였어. 나, 너무 초라하지 않아? 몸에서……, 피 냄새도 나는 것 같아.”
에이든이 낑낑대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이 정말로 초라해 보여서, 도리어 레인디아는 그를 힘껏 안아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다독여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아니요. 하나도 안 나요. 초라하긴요. 늘 근사하기만 하신걸요.”
“……정말?”
“네. 정말로요.”
“……그래 보인다니 다행인걸.”
에이든은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붕대를 가져올게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너른 등을 가볍게 쓸어주며 몸을 일으켰다. 에이든은 한껏 처진 표정을 바로 하고 매처럼 부릅뜬 눈으로 레인디아의 동향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가 물이 담긴 은대야와 붕대를 들고 다가올 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한 눈으로 시선을 떨궜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 하세요.”
“아.”
레인디아는 에이든에게 직접 죽을 먹여줬다.
에이든의 몸은 서서히 건강을 되찾았지만 손이 떨려서 스푼을 쥐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주치의의 말에 의하면 상처는 깊지 않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떨리는 손처럼 후유증이 남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에이든의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으나.
“커튼을 전부 칠까요? 방이 조금 어두운 것 같아요.”
얌전히 죽을 받아먹던 에이든이 머뭇거렸다.
“응. 그런데…….”
“혹시 싫으신가요? 그렇다면,”
“아니. 커튼을 쳐도 딱히 다를 건 없을 거야.”
레인디아는 머뭇거리다 촤라락 커튼을 걷었다. 그제야 에이든이 머뭇거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구동궁을 둘러싼 주변 경관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레인디아는 도망치듯 침대로 돌아왔다.
“……낫기 싫어.”
빈 수프 접시를 보던 에이든이 아이처럼 투덜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대로 영원히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좋겠어.”
에이든은 슬쩍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그럼 디아가 계속 내 곁에 있어 줄 테니까. 디아가 날 떠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레인디아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꾹 입을 다물었다.
“잠드는 게 두려워. 눈을 떴을 때 디아가 사라질까 봐.”
“……당분간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어서 나으세요.”
“정말? 당분간이 언제까진데?”
에이든이 다급하게 물었다.
“실을 풀기 전까지? 상처가 아물 때까지? 내가 멀쩡히 걷게 될 때야? 후유증이 없단 사실이 밝혀지면……, 그때 떠날 거야?”
레인디아는 빈 접시를 치우며 푹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한숨에 에이든은 조잘대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눈치를 보는 아이처럼 레인디아를 보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떨궜다.
“오늘은 같이 자요.”
레인디아의 말에 에이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에이든이 망가진 저를 챙겨주던 시절보다, 자신이 망가진 에이든을 챙겨줄 때가 더 마음이 무거웠다. 도저히 이런 에이든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물가에 아이를 내어둔 기분이었다.
“…….”
“…….”
레인디아는 턱을 괸 채 잠든 에이든을 바라봤다. 레인디아의 시선은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타고 올라가 도드라진 목젖과 단단한 턱을 훑고 야윈 뺨을 지났다. 풍성한 속눈썹이 곱게도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에이든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인지.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것처럼. 더없이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졌다.
레인디아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타들어 가는 난로 앞에 섰다. 레인디아의 손에는 피 묻은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한때는 삶의 전부이자 믿음이었고, 오늘날에는 에이든과 저를 이어준 매개체였다.
표면에 굳은 에이든의 피를 쓰다듬는 레인디아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곧 그녀는 결심한 듯 난로 안에 책을 던져 넣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게걸스럽게 책을 집어삼켰다. 레인디아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책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침내 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였어.’
한때는 저의 전부였던 것을 없애는 일은 허무할 만큼 쉬웠다.
“떠날 거야, 디아?”
그때 등 뒤에서 다가온 팔이 레인디아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 일어설 수 있는 건가요?”
“……응.”
“언제부터요?”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꼭 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손도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손도 괜찮은 건가요?”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진 지는 꽤 됐어.”
에이든이 잘못을 고백하는 아이처럼 말했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에이든을 다그치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품 안에서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봤다.
“가지 마, 디아.”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당신을 떠날 수 없어요.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고통이 내 안으로 스며드니까.
“나만 두고 가지 마.”
“떠나지 않을게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목에 팔을 걸쳤다. 그대로 그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혀끝으로 닫힌 입술을 두드리자 에이든이 빠끔 입을 벌렸다. 레인디아는 그의 고른 치열을 핥으며 혀를 밀어 넣었다. 그제야 에이든도 허우적거리며 레인디아에게 저를 비벼댔다. 레인디아의 몸의 윤곽을 기억하려는 듯 샅샅이 쓰다듬는 에이든의 손길이 조급해 보였다.
레인디아는 이 상처받은 남자에게 자꾸만 마음이 갔다.
“에이든 님…….”
혀뿌리의 감각이 마비되어 경계가 희미해질 무렵,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몸을 안아 들려 했다. 그러나 레인디아의 몸을 한 번 들어 올리지도 못한 채 털썩 주저앉았다. 붙었던 입술이 떨어지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레인디아도 황급히 그를 따라 몸을 숙였다.
“크윽…….”
“사, 상처가 아직도 아프신가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이 허리에 얹은 손을 조심스럽게 밑으로 내렸다. 다행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붕대는 깨끗했다. 하지만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에이든의 허리를 졸라매고 있었다.
“……최악이야.”
난로의 불빛이 방황하는 에이든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는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실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동정을 사기 위해 아픈 척을 했던 거라면 이번엔 진짜였다.
‘내가 디아를 안을 수 없다고?’
처음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한 순간, 에이든은 지독한 자기혐오에 휩쓸렸다. 제 꾀에 넘어간 꼴이 우스웠다. 암컷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수컷이라니. 수치심에 혀라도 깨물고픈 심정이었다. 에이든이 실성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종마도 못 돼. 완전히 쓸모없는 몸뚱이가 됐어.”
“그런 말 마세요.”
“위로해 줄 거 없어, 디아. 나는……. 변변한 남자 구실도 못 하고 있잖아.”
에이든은 금이 간 남성성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인디아는 어떻게든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의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싶었다.
“이, 이곳은 멀쩡하잖아요?”
“읏.”
레인디아는 슬며시 에이든의 다리 사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고간은 평소처럼 벌떡 솟아 있었다.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문지르자 더 커질 수 있다는 듯 무럭무럭 커졌다. 에이든은 그 모습에 오히려 수치심을 느끼며 레인디아를 저지하려 했다.
“디아, 그만…….”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레인디아가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어 페니스를 끄집어냈다. 끙끙대며 버티던 에이든은 마침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리의 상처는 금방 나을 거예요.”
레인디아가 페니스를 슥슥 흔들며 말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손에 제 모든 것을 맡긴 채 무력하게 헐떡였다. 레인디아는 다른 손을 에이든의 가슴에 얹었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켤 때마다 탄탄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읏, 디아. 하……. 큭.”
에이든은 질끈 눈을 감고 미간을 모았다. 난로의 불길에 물든 그의 얼굴이 관능적으로 꿈틀댔다. 잇새 밖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에 레인디아 역시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차분히 에이든의 좆을 흔드는 일에 집중했다.
“보세요. 벌써 이렇게 커졌는걸요?”
“그건, 하아……, 디아가 계속, 흔들어줘서, 아……!”
에이든이 휙 고개를 젖혔다. 그의 목울대가 쉴 새 없이 움틀 댔다. 자신이 만져주는 대로 나풀나풀 흔들리는 거대한 육신이 황홀했다. 마치 에이든을 손에 쥐고 흔드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붙잡은 건 팔뚝만 한 살덩이가 전부였음에도. 그리고 그 말좆처럼 거대한 살덩이는 흔들어줄 때마다 투명한 물을 질질 흘려대며 단단해졌다.
“하압.”
레인디아는 벌름대는 귀두를 입에 물었다. 에이든은 젖히고 있던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 제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레인디아를 떨어트리려 했다.
“큭. 디아, 입으로 빨지, 않아도, 아…….”
하지만 레인디아는 목 깊숙이 페니스를 물고 떨어지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보란 듯이 고개를 뒤로 젖혀 자신이 물고 있는 좆을 보여줬다. 그리고 보다 깊숙이 얼굴을 숙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입술이 음모에 파묻혔다. 그 거대한 좆을 목구멍 안쪽까지 품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머리를 감싼 채 허벅지를 달달 떨었다. 뿌리까지 감싸주는 미칠듯한 조임에 뇌가 녹는 기분이었다.
“더러워, 디아. 거긴, 윽……, 씻지 않아서…….”
레인디아는 만족할 때까지 목구멍으로 페니스를 잔뜩 조인 뒤에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하, 소리를 내며 질척한 타액으로 흠뻑 젖은 귀두를 토해냈다. 레인디아가 에이든의 몸을 조심스레 더듬으며 올려왔다.
“더럽지 않아요.”
“아니야. 더러워.”
“에이든 님은 하나도 더럽지 않아요.”
레인디아는 자신의 젖가슴으로 에이든의 얼굴을 품어주며 팔을 내려 벌떡 솟아 있는 귀두를 감싸 쥐었다. 귀두를 부드럽게 쥐어 비틀자 에이든이 허리를 들썩이며 정액을 뿜어냈다.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레인디아의 가슴골 역시 에이든이 토해낸 숨으로 습해졌다.
“나도.”
사정을 마친 에이든이 다급하게 레인디아의 몸을 끌어안으며 애원했다.
“나도 디아에게 해 주고 싶어.”
“전 괜찮아요. 다음에 몸이 나으시거든,”
“안 돼. 해 줘야 해.”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몸을 안아 드는 대신 그녀의 몸을 눕혔다.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카펫이 이불을 대신해 주었다. 레인디아는 카펫의 오묘한 문양을 바라보다 에이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레인디아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내려간 에이든은 그녀의 치마 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으응……!”
입 안에서 뜨겁게 달군 혀가 클리토리스에 닿았다. 오랜만의 자극에 레인디아의 몸은 처녀 적처럼 들떴다. 에이든은 쫓기는 사람처럼 레인디아의 음부를 파고들었다. 게걸스레 물고 빠는 내내 반응을 살피려는 듯 손바닥을 그녀의 허벅지에 올려뒀다. 레인디아의 허벅지가 크게 들썩일 때면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빨아당겼다.
“아, 으응, 에이든, 님……. 핫!”
난로의 불씨가 밑으로 옮겨붙은 듯했다. 레인디아는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침내 그녀가 질구를 조이며 절정에 달했을 때, 에이든이 치맛자락 밖으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디아, 좋았어?”
“하아, 하……, 네. 좋았어요…….”
레인디아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나? 좆으로 박아주는 것보다 좋았어?”
에이든이 재차 물었다. 그는 확신이 필요하단 얼굴이었다. 레인디아는 고민했다. 페니스로 자궁을 찔러줄 때와는 결이 다른 쾌감이었다. 그래서 비교는 무의미했으나, 솔직히 말해서 레인디아는 비어 있는 질 안이 허전했다.
“역시 이 정도론 만족 못 하겠지?”
에이든이 울상이 되어 물었다. 그제야 레인디아는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 에이든의 뺨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요, 에이든 님.”
레인디아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에이든은 머뭇거리다 그녀의 젖은 구멍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자글대는 질 주름은 마치 그 몸의 주인처럼 부드럽게 에이든의 손가락을 감싸 안아줬다. 에이든은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질 안에 손가락을 치댔다.
“미안해, 디아. 이런 것밖에, 못 해 줘서.”
에이든이 팔을 흔들며 말했다. 레인디아는 혹여 에이든의 상처가 벌어질까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독여줬다.
“읏, 으응, 괜, 찮, 대도요. 아, 아아, 저, 거기, 으응……!”
“응? 여기? 여기가 좋아? 더 문질러줄까?”
어느새 레인디아의 밑은 손가락 세 개로 꽉 차 있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에게 이마를 맞댄 채 더욱 격렬히 밑을 쑤셔댔다. 마치 좆이 자궁을 퍽퍽 쳐올리는 듯했다.
“아아아!”
레인디아는 허리를 들어 올리며 발발 떨었다. 부드러운 카펫에서 그녀의 어깨가 우아하게 뒤틀렸다. 이윽고 농밀한 향을 뿜는 애액이 구멍 밖으로 찰찰 흘러나왔다. 애액에 젖은 드레스가 축 늘어졌다. 에이든은 힘을 실어 질을 쑤셔 박다 손가락을 끄집어냈다.
“하아, 하…….”
레인디아는 눈물로 흠뻑 젖은 눈을 감고 쾌감에 덜덜 몸을 떨어댔다. 그 모습에 에이든은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안아주세요, 에이든 님.”
“응.”
레인디아가 팔을 벌리자 에이든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 대화와 달리 에이든이 그녀의 품에 안긴 모양새였다. 레인디아는 부드럽게 에이든을 다독여주며 속삭였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저는 아침이 와도 에이든 님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정말?”
“네. 그러니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주무시는 거예요. 악몽 같은 거 꾸지 말고요.”
“……응.”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놀다 지친 아이들처럼 꼭 끌어안은 채, 서로의 온기를 이불 삼아 눈을 감았다.
* * *
“으음…….”
새벽 동보다 이르게 피어오른 물안개가 황궁을 자욱이 뒤덮었다. 평소보다 습한 공기가 폐부 가득 들어차는 감각에, 레인디아는 반짝 눈을 떴다. 사위는 사물의 윤곽을 잡아낼 만큼 어두웠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틀림없이 난로 앞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잠든 동안 에이든이 침대로 옮긴 것일까?
슥 뒤를 돌아보자 에이든이 그녀의 등 뒤에 꼭 달라붙어 잠들어 있었다. 침대 헤드 쪽에 베개가 잔뜩 쌓여 있는데도, 레인디아만 베개에 눕힌 채 자신은 시트에 뺨을 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상 편안한 표정을 하고 고롱고롱 잠을 잤다. 걱정되는 마음에 그의 허리를 살폈다. 다행히 붕대는 깨끗했다.
‘무거워.’
레인디아는 제 허리를 누르는 에이든의 팔을 들어 올릴지 말지 고민했다. 혹여 상처가 덧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때 잠든 에이든이 무의식중에 팔을 들더니 레인디아의 몸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그러곤 자물쇠를 걸듯 다시 허리에 팔을 감았다.
“에이든 님. 아픈 곳은 괜찮으세요?”
“응. 디아, 나도 사랑해.”
에이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웅얼웅얼 대답했다. 제 할 말만 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다가도, 이게 그의 본심이란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릿했다. 어젯밤 그토록 애달프게 제게 매달리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아프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야. 그나저나, 어쩌지. 잠이 안 와.’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푸르스름한 것으로 보아 동이 트려면 한두 시간은 지나야 했다. 레인디아는 결심한 듯 팔을 들어 쿠션 하나를 끌어내렸다.
“에이든 님. 숨 막혀요.”
레인디아가 에이든의 어깨를 흔들며 아까보다 큰 소리로 속삭였다.
“으윽. 으…….”
괴로운 듯 끙끙대는 소리를 내자 에이든이 슬그머니 팔을 들어 올렸다. 레인디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옆으로 빙그르 몸을 굴렸다. 그러곤 에이든의 팔이 내려오기 전에 쿠션을 끼워 넣었다. 자신과 쿠션을 바꿔치기한 것이다.
“이리 와, 디아.”
에이든은 웅얼대며 쿠션을 품에 안았다. 쿠션이 레인디아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레인디아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에 열심히 제 뺨을 비벼댔다. 레인디아는 후후 웃었다. 이윽고 차분해진 눈으로 에이든을 응시했다.
에이든은 달라졌다.
예전이라면 이런 작은 틈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에이든은 저를 안아 들지도 못할 만큼 약해져 있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가 사라지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그녀가 조금만 시야를 벗어나면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 불안함이 보이기 시작하자, 레인디아까지 에이든을 내버려 두는 것이 불안해졌다. 이렇게 쿠션을 레인디아라 생각하고 곤히 잠든 것은, 레인디아가 떠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젯밤 난로에서 자신이 에이든을 받아준 것으로 말이다.
‘가여운 사람.’
레인디아는 발소리를 줄여 창가로 걸어갔다. 살며시 커튼을 걷자 울창이 우거진 숲 대신 앙상히 마른 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또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듯, 길가엔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었다.
에이든의 저택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다시 그 저택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황궁 안이었다. 세상의 온갖 부귀로 금칠을 해놓은 황궁 안에 이토록 삭막한 풍경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다지도 우울한 빛깔이라니. 누군가 특별한 의도를 갖고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삭막함이었다.
‘이곳은 대체…….’
뒷걸음치던 레인디아는 무언가에 퍽 등을 부딪쳤다. 흔들리던 몸이 바로 섰다. 슥 시선을 내리자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에, 에이든 님……! 몸은 괜찮으세요?”
레인디아는 버릇처럼 에이든의 허리를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에이든이 몸을 틀어 보여주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더 애가 탔다.
“저런 거로 속을 리 없잖아.”
에이든이 부루퉁한 얼굴로 레인디아가 바꿔치기한 베개를 턱짓했다. 그가 푹 고개를 숙이더니 레인디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디아의 몸이 훨씬 부드럽고 말랑거려.”
아이 같은 투정에 레인디아는 비로소 안심이 됐다. 그녀 또한 짓궂게 대답했다.
“잘만 주무시던걸요.”
“자는 척한 거야.”
에이든은 두 팔로 레인디아의 허리를 꽉 감쌌다. 이번엔 절대 안 놓친다는 듯이. 레인디아는 푸스스 웃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든 님.”
“응.”
“정말로 이런 곳에서 자라신 건가요?”
에이든도 레인디아를 따라서 창밖을 바라봤다. 이윽고 레인디아가 에이든의 품 안에서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마주 봤다. 단단한 상체 위로 섬섬옥수가 가지런히 내려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에이든이 완전히 잠에서 깬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제 와서 궁금해진 까닭은?”
“계속 에이든 님을 보살피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걸요.”
레인디아는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에이든은 손안에서 조막만 한 얼굴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어릴 적 지내던 곳이야. 동쪽에 있는 버려진 성이라 구동궁(舊東宮)이라 불리고 있지.”
“하지만, 에이든 님은 북부에서 태어났다고…….”
레인디아는 옛 대화를 끄집어내며 말끝을 흐렸다.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난 것은 북부지만, 그 즉시 황궁으로 보내졌어. 황손은 대대로 황궁 안에서 길러졌으니까.”
“그럼……, 에이든 님의 부모님께서는요?”
“그들은 북부에 남았어.”
마치 제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는 것처럼 태연한 태도에 레인디아는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무엇보다 이 장소. 이 삭막한 풍경은 아이가 자라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주변에 다른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에이든의 말로 유추해 보면 본궁에서 한참 떨어진, 거의 외진 곳에 유폐된 거나 다름없는 성이었다.
에이든은 이곳이 수백 년 전 미친 황녀를 가두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란 말을 덧붙이려다, 심각하게 어두워진 레인디아의 표정을 보고 그만뒀다.
“썩 좋은 장소는 아니지. 그래, 우리가 처음 머물던 곳으로 돌아갈까? 그러는 게 좋겠어. 황태자파도 전부 수용돼 있고. 더는 숨어지낼 필요가 없잖아.”
에이든이 선뜻 말했다. 그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레인디아는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디아?”
“에이든 님은, 이런 곳에서 홀로 자라신 건가요?”
에이든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꼭, 아이를 가둬둔 것 같잖아요.”
레인디아가 절박하게 덧붙이는 소리에 에이든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갇혀 있었단 표현도 틀리진 않아. 하지만, 풀어준다고 해도 당시의 나는 딱히 갈 만한 장소가 없었어. 그래서 불만은 없어.”
이런 성에 갇힌 어린 시절의 에이든을 떠올리자 레인디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겠지. 에이든이란 남자는 어린 시절이란 게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만큼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눈앞의 에이든은, 마치.
‘마치, 혼자 남길 두려워하는 아이 같아.’
지금이라면 늘 버겁던 에이든의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을 압도시키는 거대한 체구 아래엔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에이든 님.”
그때,
인기척과 함께 문 아래로 무언가 슥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