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황가의 역사
“…….”
“…….”
레인디아는 다인용 소파에 앉아 편지를 읽었다. 맞은편에 앉은 에이든은 조용히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평소처럼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눈빛에 석연찮음이 묻어났다. 레인디아는 쭈뼛대며 편지 내용을 다시 읽는 척했다.
황후 카타리나에게서 온 초대장이었다.
다정한 안부 인사와 함께 황태자파 문제가 일단락되었으니 오찬을 드는 게 어떻겠냐는 심상한 내용이 이어졌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저만 초대하셨어요.”
“그렇겠지. 나는 환자니 말이야.”
에이든은 예상했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가 슥 일어나 레인디아가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상처가 벌어질까 봐 옆에 앉길 바랐으나 다행히 그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에이든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몸을 숙이며 물었다.
“갈 거야?”
“황후 마마의 초대를 거절할 수는,”
“나만 두고 갈 거야, 디아?”
에이든이 질문을 바꿔 물었다.
“……네.”
에이든 님도 함께 가요, 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에이든은 적잖이 당황했다.
“미안. 못 들었어.”
“오찬식은 저 혼자 다녀올게요.”
레인디아가 또박또박 힘을 줘 말하자 에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웃으며 에이든의 무릎을 문질렀다.
“도망가려는 게 아니에요. 에이든 님은 환자잖아요.”
“알아. 나는 디아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몸인걸.”
에이든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지 그 여자……, 백모님과 단둘이 무슨 얘기를 할까 걱정되어서.”
“아마 이번 일에 관한 얘기를 해 주시겠죠. 그리고 에이든 님의 안부를 물으실 테고요. 어쩌면 살몬 호수에 관해 얘기할지도 모르겠어요.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레인디아는 적잖이 당황한 마음을 숨기며 대답했다. 사실, 카타리나를 만나서 에이든의 과거에 관해 물어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에이든은 얘기해 줄 것 같지 않으니까.
“그래. 백모님과 디아는 통하는 구석이 많았지. 아주 질투가 나서 미칠 만큼.”
“…….”
“하지만 디아가 국가의 지존을 독대할 만큼 담력이 큰 줄은 몰랐는데.”
“…….”
“그렇게 가고 싶어? 나만 두고 가버릴 정도로?”
“……그럼,”
그렇다면 당신이 직접 얘기해 줘요. 당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이 무언가에 콱 가로막혀 흘러내렸다.
“그럼?”
“그, 그럼, 어떻게 제가 감히 황후 마마의 초대를 거부할 수 있겠나요……?”
레인디아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사실은 황후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는 마음보다도 에이든의 과거를 알고픈 마음이 컸다. 동시에 두려웠다. 그의 어린 시절이 밝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런 과거를 들려달라 하는 건 다친 에이든에게 못 할 짓이었다. 하지만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과거를 짊어지고 싶었다.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과거를 전부 품어준 것처럼.
나도…….
이 남자를 이해하고 싶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쩌면, 에이든이 눈을 뜬 건 신이 준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다시 원점이네.”
에이든은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결국, 디아는 백모님과 즐거운 오찬 시간을 갖고 싶다는 거지. 나만 버려두고.”
“하지만 다시 돌아올 거예요.”
레인디아가 아이를 어르듯 차분히 덧붙였다.
“손가락 걸고 약속할까요?”
“……아이 취급하는 거야?”
“전에 에이든 님도 이러셨잖아요.”
레인디아가 새침하게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에이든은 마지못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대신 나도 부탁이 있어.”
“그게 뭔데요?”
레인디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에이든이 수프를 떠주며 소리를 냈다. 레인디아가 살며시 입을 벌리자 혓바닥 안으로 수프가 흘렀다. 뜨겁지 않게 후후 불어 적당한 온도였다. 에이든은 고기도 잘게 썰어서 먹여주며 행복한 얼굴로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다 먹으면 옷도 갈아입혀 줄게.”
레인디아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오물오물 음식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에이든이 먹여주는 대로 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입혀주는 내내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입술이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다행이에요. 손에 후유증은 안 남은 것 같아서.”
“어서 건강해지고 싶어. 예전처럼 디아를 번쩍 안아 들 수 있게.”
레인디아의 귀에 귀걸이를 걸어주며 에이든이 말했다. 레인디아는 다정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 다 했다.”
“감사해요, 에이든 님.”
“천만에. 디아를 보살피는 건 나의 기쁨이기도 해.”
거울에 비친 레인디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한 모습이었다. 도저히 지난밤 상처 입은 남자를 위로해 주기 위해 좆을 쓰다듬어주고, 난로 앞에 드러누워 활짝 다리를 벌린 채 신음을 흘리던 여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 * *
덜컹. 덜커덩.
레인디아를 태운 흰색 마차가 장미가 만개한 정원을 지나 오찬장에 도착했다. 카타리나는 군주라기보다는 친근한 귀부인의 면모를 하고 레인디아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오찬에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마마.”
레인디아의 깍듯한 인사에 카타리나는 다가와 팔짱을 끼는 것으로 화답했다. 레인디아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곧 그녀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에이든은 괜찮나?”
“네. 이젠 직접 먹고 걸을 만큼 회복되셨어요.”
레인디아의 대답에 카타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몹시 미안한 얼굴로 덧붙였다.
“내가 가면 괜히 더 신경이 쓰일까 봐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네. 자네에게 내 일을 전부 맡긴 것 같아 미안하군.”
“아니에요. 마마께서도 사건을 처리하시느라 무척 바쁘셨다 들었어요.”
“걱정할 거 없네. 죄인들은 전부 처벌을 받았으니. 더는 황궁 안에서 에이든이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을 것이야.”
“황송합니다, 마마.”
레인디아는 진심을 다해 감사를 표했다.
“옳지. 식사를 들기 전에 잠깐 산책 좀 할까? 오늘은 일광이 참 눈이 부셔. 아침만 해도 물안개가 스산했는데 말이지. 이런 날은 그대와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싶네만.”
“영광입니다, 마마.”
그렇게 레인디아는 카타리나와 함께 장미 정원을 거닐었다. 하늘은 청명하고 장미의 색은 짙었다. 걸을 때마다 산뜻한 풀 냄새가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그대가 다시 돌아와 줘서 기쁘네. 비록, 에이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지만…….”
레인디아는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타리나는 저와 에이든 사이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지 못하네. 그대가 떠난 뒤로 에이든은 쭉 구동궁에 갇혀 있었어. 식음을 전폐하고, 찾아가는 사람도 전부 내쫓았지. 나는, 다시 그 아이가 예전처럼 망가질 줄 알고 두려웠네.”
“예전처럼요……?”
레인디아의 물음에 카타리나는 아차 싶었는지 꾹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현숙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불운한 황궁사를 그대까지 알게 할 수는 없지. 이곳엔 원하는 만큼 머물도록 하게나.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요구하고.”
가까이서 본 카타리나의 뺨은 무척 야위어 있었다. 지존의 자리에서 홀로 버텨온 여인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녹아든 얼굴이었다.
“마마.”
레인디아는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음?”
“……한 말씀 여쭙고 싶습니다만.”
“그래. 무엇이든지.”
“……에이든 님의 과거에 대해 듣고 싶어요.”
카타리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레인디아도 덩달아 멈춰서야 했다. 카타리나는 슥 팔짱을 풀더니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정말로 알고 싶은 겐가?”
카타리나가 뒤를 돌아봤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뻗친 콧날을 기점으로 쓸쓸한 그늘이 드리웠다. 황후의 눈빛엔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이 가득했다.
“네. 알고 싶어요. 아니, 알아야만 해요.”
레인디아는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대답했다.
“처음엔 에이든 님을 떠나려고 했어요. 그게 저희를 위한 가장 나은 선택이라 믿었어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에이든 님의 상처받은 표정을 볼 때면, 마치 제 고통인 듯 마음이 괴로워요.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분의 존재가 제 안에 남아 있어요.”
마치 지독한 운명 같았다.
“그 마음 나도 알 것 같네. 살다 보면 결코 잘라낼 수 없는 관계란 게 있는 법이지. 그런 것들이 있어. 인간의 의지론 거스를 수 없는, 마치 하늘이 점지한 것 같은 운명적인 관계들이.”
카타리나는 자신의 죽은 아들 제레미를 떠올렸다. 이윽고 확신을 굳힌 눈으로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지금의 그대라면 에이든의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카타리나는 레인디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녀는 조카의 과거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부탁드립니다.”
레인디아는 제 손을 붙잡은 카타리나의 손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는,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네. 황태자비 경연이 있던 해였지.”
* * *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당시 신성 솔레디온 제국에선 경연을 통해 황태자비를 간택했다. 후보로 나온 것은 킹메이커라 불리는 개국공신 글레디우스 가문과 신흥 세력으로 떠오른 뮬 가문이었다.
“칼라마리 글레디우스 영애에게 황손을 품을 영광이 있으리니.”
“반드시 황태자손을 회임해, 제국을 풍요와 번영의 길로 이끌겠습니다.”
경연의 승자는 글레디우스 가문이었다.
대대로 재상을 배출하고 고위 관직을 차지해 온 본가의 전폭적인 원조로 칼라마리는 황태자비의 자리를 거머쥐었고 훗날 황후가 됐다.
글레디우스의 핏줄답게 칼라마리는 정치에 야심이 깊었다. 남편에게 조언을 주는 식으로 국정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과시했다. 황제 역시 현숙한 아내의 조언을 전부 받아들였다. 그렇게 제국은 나날이 번영했다.
그러던 중 전쟁으로 황제가 서거했다.
다른 황후였다면 신하에게 휘둘리는 꼭두각시가 될 터였으나 칼라마리는 달랐다. 그녀는 본가의 힘을 빌려 자신의 측근들로 황궁 안을 가득 채워 정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황후가 대리 집권하는 새로운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칼라마리에겐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페레디온과 베넨돌.
장남 페레디온은 칼라마리의 모든 장점을 빚어 만든 자식이었다. 외관만으로 타인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출중한 미모와 훤칠한 키를 지녔으며, 내적으로도 강직한 성품과 곧은 신념을 갖고 있어 신하들의 존경을 샀다.
차남 베넨돌의 경우 감히 형과 비교하는 게 송구스러울 만큼 특징이 없는 동생이었다. 황가에서 이토록 평범한 자식이 나왔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그는 특출한 능력도 자질도 지니고 있지 않은 무색무취의 소년이었다.
칼라마리는 두 아들에게 어미로서의 애정이 아닌, 주인으로서의 소유욕을 갖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식을 자신이 만들어 낸 피조물이자 소유물로 여겼다.
특히나 페레디온은 너무나 완벽해서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는 예술품 같았다. 자신이 생애에 걸쳐 일군 모든 것을 물려주어도 아깝지 않은 존재. 소유물을 넘어, 페레디온은 바로 자신이었다.
“잊지 말거라. 내가 죽더라도 아들인 네가 어미의 삶을 이어가는 게다. 너는 장차 이 대제국의 주인이 될 몸이다. 페레디온, 너는 누구보다 완벽한 존재야. 내가 낳은 자식이니 말이다.”
“예, 어머니.”
페레디온의 운명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져 있었다.
황태자비 경연 당시 글레디우스 가문과 동맹을 맺은 가문이 있었다. 바로 그 베르첸 가문의 여식과 훗날 태어날 황태자를 혼인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다.
“오늘은 카타리나를 만나고 오려무나. 네가 아무리 황태자라 해도 약혼녀를 일주일 이상 보지 않는 것은 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 어머니.”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약혼.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미래. 페레디온은 황태자의 책무를 한 번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불만을 품은 적도 없었다.
“이 아이는 제 절친한 지기예요.”
“실비아 치프먼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약혼녀가 실비아라는 소녀를 소개해 주기 전까진.
실비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페레디온은 인간의 심장을 갖게 된 나무 인형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뉴월의 바람이 이다지도 달콤했단 말인가? 태어나 처음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페레디온이 그날 널 찾아가지 않았단 말이냐?”
“……네. 마마.”
“그럼 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단 게지?”
“무언가, 착오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리 없다. 틀림없이 마차를 타고 나갔다는 보고를 받았어. 그래. 그년이로구나. 그 실비아인지 뭔지 하는.”
“아, 아닐 거예요. 실비아는 그날 다른 곳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페레디온과 실비아의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졌다. 칼라마리는 귀신같이 그 이변을 감지했다. 카타리나는 어떻게든 둘을 변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어찌 그리 잘 아는 것이지?”
“그, 그것은…….”
“후. 아가. 카타리나.”
칼라마리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카타리나를 다독였다.
“나는 너를 딸처럼 아꼈다. 너의 이름을 내게서 따와 지어줄 만큼 말이다.”
“저도, 마마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옳지. 너는 다른 영애들과 달라. 기품이 있고 총명하기 그지없어. 내 아들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짝이란 말이다. 너희는 더없이 완벽한 부부가 될 거야.”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
칼라마리의 눈이 번뜩였다. 그 절대적인 시선 앞에 카타리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페레디온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건 카타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 없는 부부 관계가 어떻게 완벽할 수 있을까. 물론 황제 부부는 일반적인 부부와는 달랐다. 사랑이 없어도 제국을 통치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페레디온도 카타리나도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었으니.
특히나 카타리나는 칼라마리처럼 이성으로 움직이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판단했다. 금지된 사랑에 빠져 눈이 먼 페레디온과 결혼한다면 결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고, 제국의 장래는 더없이 어두워지리라.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선 페레디온이나 자신보다도 절친한 지기인 실비아의 삶이 더욱 걱정되었다. 실비아는 저와 달리 여리고 세심한 영혼을 지닌 아이였다. 카타리나는 친구의 그러한 부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돈이나 권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카타리나가 무엇보다 가치 있다 여기는 것이 바로 영혼의 순수함이었다.
마치 실비아 같은.
“그 천한 것의 편을 들어줄 필요 없다.”
“시, 실비아도 엄연한 귀족 영애입니다, 마마.”
“하! 한 세대만 지나면 무너질 가문도 꼴에 귀족이라고. 카타리나, 정녕 모르는 것이냐? 치프먼 가문은 뮬 가문의 방계 친척이란 말이다. 나와 수십 년 전 황태자비 자리를 두고 경쟁한 바로 그 뮬 가의!”
글레디우스 가문의 잔인함은 경연이 끝난 뒤 진가를 발휘했다. 그들은 뮬 가문을 공직에서 배제하고, 영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서서히 몰락시켰다. 그 영향은 뮬 가문의 친인척을 비롯해 방계 가문에까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치프먼 가문도 그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칼라마리의 눈에 치프먼 가문은 척결해 마땅한 철천지원수의 집안이었다. 그런 원수 가문의 계집이 자기 아들을 유혹한다는 생각이 들자, 칼라마리는 그녀를 이 자리에 오르게 한 냉철한 이성마저 잃고 말았다.
“나는 페레디온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요즘은 실망만 시키는구나. 옛말에 자식이라는 건 늘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단 말이 있었지.”
“……마마?”
“하지만 나는 평범한 부모가 아니다. 나는, 짐은, 이 나라의 지존이자 국모인 칼라마리 글레디우스란 말이다.”
칼라마리는 자신의 처녀 적 성을 입에 담았다. 카타리나는 너무나 두려웠다. 앞으로 일어날 최악의 상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야?”
“……흐윽, 미, 미안해. 카타리나. 나는, 나는.”
“정말로 전하의, 페레디온의 아이를 가졌다고?”
“미안,”
“사과하지 마!”
카타리나는 실비아를 꽉 끌어안았다. 몸 안에서 실비아의 울음소리가 뭉개졌다. 평소보다 뜨거워진 숨결도. 아아. 정말로 아이를 품고 있구나. 그의 아이를…….
실비아를 원망할 수 없었다. 애초에 카타리나는 페레디온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으니까. 다만, 행복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사랑에 빠진 실비아의 모습은 너무나 어여뻐 보였다.
혈연마저도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황궁 안에서, 귀족 사회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페레디온과 실비아의 눈동자에는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광채. 그 빛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잘못이야. 나는, 실비아, 네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황후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주거나, 혐의를 대신 변호해 주곤 했다. 그 크고 작은 거짓말이 눈처럼 불어나 기어코 실비아의 유약한 몸을 짓누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친구의 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어쩌면, 좋지……?”
실비아가 울먹이며 물었다.
카타리나의 이성은 한 가지 답을 말하고 있었다.
아이를 죽여.
네 친구를 살리고 싶다면, 아이를 죽여!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페레디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
“그분은…… 모르셔.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
“그래. 잘했어.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
“응. 고마워, 카타리나. 그리고, 미안해.”
“친구끼린 미안해하는 거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카타리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겁에 질려 엉엉 울었다. 스무 살 처녀가 일곱 살 난 아이처럼 우는 모습에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지만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서 내일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어느 날, 황후가 카타리나를 불렀다.
“카타리나. 나는 너를 참 아꼈다. 내 이름을 본 따 직접 이름을 지어줄 만큼.”
또, 또 그 소리.
이러는 동안에도 배 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겠지. 어서,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데…….
“너의 자궁은 말이다, 나처럼 황손을 품기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자궁이란다.”
칼라마리가 카타리나의 배에 손을 얹었다. 카타리나는 그만 꼿꼿이 굳고 말았다.
“그것은 주제를 몰라.”
“……마, 마마.”
“천것이 황손의 씨를 몸에 품는 게 가당키나 하느냔 말이다.”
“마마, 마마……!”
“한때는 내 남편감을 넘보더니 이제는 내 아들을 넘봐?”
“마마아…….”
카타리나는 간절히 칼라마리를 부르며 흐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황후의 입에서 이어질 말이 너무나 명확했던 까닭에.
“너도 답을 알고 있겠지.”
탁.
카타리나의 앞에 작은 약병 하나가 놓였다. 아이를 유산시키는 약이었다.
“내 한심한 아들놈과 달리 사리 분별을 할 만큼 영특한 아이니.”
칼라마리는 슥 몸을 일으켰다.
“잊지 말거라. 나를, 우리 글레디우스 가문을 척진 자들이 어떠한 말로를 맞이했는지 말이다. 역사가 증명하지 않느냐?”
칼라마리의 눈이 야릇하게 휘었다.
“황실 회의가 있어 이만 가보마.”
칼라마리가 사라진 빈방엔 카타리나와 약병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칼라마리 글레디우스.
철의 여인이자 제국의 대모, 자비로운 군주.
이 황궁 안에서,
누구도 그녀를 거스를 수 없었다.
누구도.
카타리나는 테이블을 더듬거리며 약병을 손에 쥐었다.
“어머니,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입니까?”
“황태자 전하, 고정하십시오!”
“누가! 대체 누가! 실비아에게 약을 먹인 거야!”
짐승처럼 절규하는 페레디온.
“어떤 짐승만도 못한 자식이!”
드높은 황좌에 앉아 고요히 바라보는 칼라마리.
“뭐라 대답 좀 하시란 말입니다!”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이 모든 비극의 중심에 선 한 여인. 카타리나는 제 손바닥을 바라봤다.
나는, 살인자다.
평생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진 것이다.
지옥에나 떨어져버려라, 이 괴물!
부들부들 떨리는 손바닥 위로 눈물이 쏟아졌다.
“황태자를 놓아주지 못할까?”
그때, 칼라마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페레디온을 붙잡고 있던 신하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카타리나도 황급히 두 손을 바로 했다.
“하, 하오나, 마마……!”
“훗날 이 나라의 지존이 될 존재를 짐승 다루듯 붙들고 있어서 되겠느냐? 황족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칼라마리가 앞에 서자 길길이 날뛰던 페레디온도 차분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비정한 어미가 아들의 뺨에 손을 얹었다.
“진정하거라, 아가.”
“치우십시오!”
탁!
페레디온이 칼라마리의 손을 쳐냈다. 칼라마리는 빨개진 손끝을 보다 픽 싱거운 웃음을 뱉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다만, 그 아이가 너의 애를 밴 모양이로구나?”
“예. 실비아는 제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짐승만도 못한 자가,”
“감히 허락도 없이 황족의 씨를 받고 황손을 잃기까지 하다니, 그 죄질이 더없이 악랄하구나.”
“어머니! 실비아를 임신시킨 건 접니다! 아이는 여자 혼자 만든단 말입니까?”
“거기다 황위를 이을 황태자의 눈마저 멀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악독한 계집이 아닐 수 없어.”
칼라마리는 페레디온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츠츠 혀를 찼다.
“더는 그 계집의 만용을 눈감아줄 수가 없구나.”
“저야말로 더는 이렇게 못 삽니다!”
페레디온은 가슴에 달고 있던 브로치를 잡아 뜯어 내팽개쳤다. 칼라마리의 눈이 꿈틀했다.
“감히 황족의 증표를…….”
“떠날 겁니다. 더는 이 지옥 같은 황궁에 내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책임한 것! 네가 보살펴야 할 백성들은,”
“자식조차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당신에게 들을 말은 없어!”
페레디온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신하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숨어서 지켜보던 카타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페레디온의 간곡한 외침이 칼라마리의 죽어버린 모성에 닿지 않을까. 모두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렇담 떠나거라.”
“마마!”
“이 자리에서 페레디온 헬렌베르크를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한다.”
“마마!”
“무엇들 하느냐. 이 방종을 일삼는 무엄한 것을 내쫓지 않고!”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칼라마리는 그날 공식적인 문서로 페레디온의 폐위 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다.
“나 대신 실비아를 돌봐줘서 고마워, 카타리나. 네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텐데. 우리 둘 사이에 껴서, 너까지 고생한 것 잘 알아. 정말이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하이락을 떠나기 전 페레디온의 얼굴은 더없이 차분했다. 칼라마리의 앞에서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이 카타리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제는 이 남자가 실비아의 곁을 지킬 유일한 존재였으니.
“……실비아는 저의 유일한 친구였어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단 뜻이에요. 가식적인 영애들과 달리, 진정으로 타인을 위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그런 고운 심성을 가진 아이였죠.”
페레디온이 손수건을 건네자 카타리나는 황급히 제 손으로 눈물을 훔쳐 닦았다.
“마마께서는 전하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황궁으로 돌아올 거라 단언하고 계세요. 온실 속 화초로 자란 당신이 북부의 척박한 기후에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믿으시는 거겠죠.”
“다시 이곳에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죠!”
카타리나가 버럭 소리쳤다.
“절대 돌아와선 안 돼요. 당신의 어머니가 살아 있는 한, 이곳은 실비아에게 있어 더없이 끔찍한 공간임이 틀림없으니까요.”
“……카타리나.”
“우리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결코 원하는 대로 모든 걸 쟁취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제 당신은 다르잖아요.”
카타리나는 다급하게 페레디온의 손을 붙잡았다.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내가 죽인 아이의 몫까지.
제발.
“실비아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절대,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말아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실비아의 건강이 회복되면 새 아이를 갖고……, 어떻게든……, 이곳에 남은 모든 이들을 대신해 행복하게 살아줘요.”
카타리나는 결심했다. 이곳에서 몸이 활활 불타는 괴로움에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죽어갈 사람은 저 하나면 족하다고.
“설령 죽더라도 거기서 죽어요! 알겠나요? 이제 가세요!”
“……약속할게. 반드시 실비아를 행복하게 해 줄거야. 그리고 너의 행복도 빌어.”
그렇게 페레디온은 심약해진 실비아를 데리고 북부로 향했다. 두려운 어머니의 그림자를 피해.
카타리나는 베넨돌과 결혼식을 올렸다.
계승법대로라면 베넨돌이 황태자로 책봉되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황태자 자리는 공석이었다. 칼라마리는 후계자에 대해 어떠한 공표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제국을 다스렸다.
젊은 세 사람의 영혼이 마모되는 동안, 백성의 삶은 더없이 윤택해졌다. 칼라마리가 가문의 폭군인 것과 별개로 백성에겐 더없이 자비롭고 훌륭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설령 훗날 진실이 밝혀진다 한들, 누가 칼라마리를 손가락질하겠는가? 책무를 져버린 것은 페레디온이었고, 주제도 모르고 황손을 회임한 것은 실비아였으며, 이들의 금지된 사랑을 방관하고 응원한 것이 카타리나였던 것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형님네 부부가 자식을 낳았다는군. 그 아이가 오늘 황궁에 도착할 거라 들었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베넨돌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강제로 조카를 데려왔단 말이야.”
“아이를 빼앗아왔다고요? 그 젖먹이를?”
불현듯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였다.
바깥으로 뛰쳐나간 카타리나가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제레미의 침실이었다.
“제레미는 어디 있지?”
“마마……!”
“제레미는 어디 있느냐 묻지 않았나!”
“화, 황후 마마께서……. 금일부터 본궁에서 직접 기르시겠다 명하셨습니다.”
“하, 하지만…….”
카타리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제레미는……, 내, 내 자식이란 말이네. 내가, 배 속에 열 달간 품고 낳은……!”
카타리나는 배를 움켜쥐며 끅끅 눈물을 삼켰다.
이제야 칼라마리가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페레디온 부부의 자식에 이어 제레미까지 본궁으로 데려간 까닭도. 철의 여인은 자식에 이어 손주들의 운명마저도 통제하길 원했던 것이다.
‘다시 이곳에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페레디온은 그 말을 지키지 않았다.
“어미에게서 갓 태어난 자식을 빼앗아가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그저 숨 가쁘게 말을 달려온 것인지, 황궁에 도착한 페레디온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누가 그를 과거의 황태자라 여기겠는가. 두 눈은 핏줄이 터져 시뻘겠고, 늘 단정하던 얼굴은 수염이 덥수룩했다.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눈을 뜨면 전혀 다른 남자가 황후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실비아는, 그녀는, 에이든에게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어머니이……!”
털썩.
페레디온의 육중한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얼마 전, 황후가 북부로 군사를 보내 그 작은 핏덩이를 천으로 감싸 황궁으로 데려왔다. 또다시 아이를 빼앗긴 실비아는 혼절하고 말았다. 페레디온은 그녀를 남겨두고 오직 아이를 찾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칼라마리 글레디우스의 영역으로.
“황손은 대대로 황궁에서 길러졌다.”
“저는 더 이상 황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너의 아들은 다르지.”
“……그게, 대체.”
“네가 못다 한 황태자의 책무는 너의 아들이 대신할 것이다.”
“……아, 하하하하! 하하하하!”
페레디온이 미친 사람처럼 낄낄대기 시작했다.
“당신이 인간이야?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이냐고. 인간이길 포기했어. 너는 인간이 아니야! 이 괴물아!”
“너야말로 사람인지 묻고 싶구나. 어미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난 건 너다! 나는, 그날 아끼는 아들을 잃었다.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페레디온을!”
칼라마리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감히 나를 손가락질해?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친히 네 아들을 황궁에서 길러주겠다고 데리고 온 것인데! 너는 파문당했을지언정, 네 자식만큼은 황손으로, 황태자로 키워주겠다는데!”
“으아아악!”
그 순간 페레디온이 검을 뽑아 칼라마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호위 기사들이 빠르게 그를 제압했다. 페레디온은 결국 한쪽 눈을 실명당한 채 북부로 송환됐다.
칼라마리는 제게 검을 겨누는 아들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만큼 냉정했다.
그녀는 말했다.
저것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에이든, 허리 장식은 그 방향으로 매는 게 아니다. 사내아이는 오른쪽으로 향해야 하거늘. 내가 계집아이를 데려온 모양이지?”
칼라마리의 싸늘한 시선에 에이든이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허리 장식을 고쳐맸다.
“크라바트도 비뚤어지지 않았느냐?”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던 카타리나가 살며시 거울을 꺼내 비춰줬다.
“자. 이걸 보고 바로 매렴, 에이든.”
“감사합니다. 백모님.”
크라바트를 바로 한 에이든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이의 둥근 머리에선 아직도 젖내가 솔솔 풍겼다. 그런 에이든은 태어나 어미의 젖 한 번 물어보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괴물은 사람 젖을 먹이는 게 아니라는 칼라마리의 명에 말과 젖소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 사람의 온기를 철저히 부정당한 채 자라온 까닭일까, 카타리나는 한 번도 에이든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푸하하! 완전 멍청해! 쟨 진짜 모자라! 맨날 할머니한테 혼나기나 하고!”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제레미가 두 발을 방정맞게 흔들어가며 에이든을 손가락질했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준비했단다. 많이 먹거라, 제레미.”
“네, 할머니! 할머니가 최고예요!”
제레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게걸스럽게 음식을 밀어 넣었다. 어찌나 더럽게 먹던지 제레미가 썬 음식이 에이든의 접시에 튈 정도였다. 에이든은 접시에 나이프 닿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식사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카타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제레미를 타일렀다.
“제레미. 조금만 조용히 먹을 순,”
“시끄러워! 내가 어떻게 먹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그게 지금 널 낳아준 어머니에게 할 소리냐?”
보다 못한 베넨돌이 엄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내버려 두거라. 아직 아이지 않니? 원래 사내아이들은 짓궂은 법이야. 너희가 유독 별났지. 별나게 어른스럽고, 별나게 조용했어. 죽은 네 형과 너 말이다.”
“…….”
황궁에서 에이든의 아버지는 죽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어릴 적부터 별나게 조용했던 베넨돌은 자식을 가진 오늘날에도 어머니의 앞에선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베넨돌은 비굴한 얼굴로 카타리나를 바라봤다. 카타리나는 씁쓸히 웃으며 식탁 아래로 베넨돌의 손을 다독여줬다. 처음부터 남편에게 엄격한 아버지상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다.
“하지만 기특하게도 길러준 어미는 알아보지 않느냐, 그렇지 제레미?”
“네! 저는 할머니가 더 어머니 같아요!”
카타리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카타리나의 가슴 한편엔 과거 자신이 죽여버린 아이의 존재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 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젠장, 어머니는 제정신이 아니야.”
“진정해요.”
“정말로 미치셨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형님께 자식을 빼앗아와 황태자로 책봉한 것도 모자라 제레미까지 저렇게 망쳐놓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
기실 에이든의 황태자 책봉도 공표되지 않아 황궁 밖 백성들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황궁 안에서는 칼라마리의 눈치를 보느라 모두 쉬쉬하기 바빴다.
“……별수 있나요.”
카타리나의 힘 없는 대답에 베넨돌은 꾹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처참한 마음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에이든, 그 어린 것이 가장 가엽지.”
형님의 어린 시절을 닮아서일까, 아니면 실비아의 외모를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카락 때문일까. 칼라마리는 제레미를 치켜세우며 에이든을 깎아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이든을 핍박하기 위해 제레미를 싸고돈다는 게 맞았다.
‘앞으론 그 아이 혼자 모든 걸 준비하도록 하게.’
칼라마리는 에이든이 말하고 걷기 시작하자 그를 양육하던 보모를 전부 불러들였다. 그 후론 식사를 가져다주는 시녀만이 구동궁을 출입했다. 그렇게 에이든은 다섯 살 무렵부터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해야 했다. 카타리나가 황후의 눈을 피해 보살펴주곤 했지만, 황후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에이든을 악랄하게 괴롭혔다.
겉으로는 화목하기 그지없는 황가의 이면엔 이토록 추악한 진실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민중 앞에 설 때면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어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어, 어머니. 에이든이 보이지 않아요. 틀림없이 구동궁에 있어야 할 아이가……. 연구소에도 가봤지만 도통 보았다는 사람이 없어요.”
“돌려 묻지 말아라.”
침대에 누운 칼라마리의 얼굴엔 검버섯이 가득 피어 있었다. 늘 총명하던 두 눈은 움푹 패어 그 안에 깊은 골짜기가 생겼다.
“……그 아이를, 어쩌신 건가요?”
“카타리나, 날 보거라. 나는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는 노인에 불과해. 이런 내가 무엇을 어찌하겠느냐?”
성축일을 얼마 안 남기고, 페레디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실비아는 에이든을 빼앗긴 지 얼마 안 돼 출산 후유증으로 명을 달리했다.
그렇게 아무 연고 없는 땅에서 페레디온은 고독하게 죽었다. 그리고 페레디온을 쫓아낸 것은, 다름 아닌 칼라마리였다.
“아들이라니요, 자식이 아니라고 연을 끊은 건 어머니세요……!”
“아니. 아니다. 페레디온은 내가 낳은, 내 아들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식이었어. 그런 아이가 죽었으니, 아무리 나라 한들 억장이 무너진단 말이다.”
칼라마리는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하아. 카타리나,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죽음 앞에선 모든 게 허무해질 뿐이야. 나는 에이든에게 한 톨만큼의 분노도 남아 있지 않다. 한때는 실비아를 떠올리게 하는 그 모습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으나…….”
다 옛일이라고, 칼라마리는 기침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순진하게도 카타리나는 그녀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말았다. 군주의 위엄을 한 꺼풀 벗은 채 쓸쓸히 죽어가는 칼라마리는 자식을 잃은 어미가 지을 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카타리나였다. 카타리나의 마음은 이미 칼라마리를 용서하고 있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란 운명 앞에서 에이든을 향한 죄책감보다 칼라마리를 향한 존경심이 승리한 것이다.
“이제 내 바람은 하나뿐이다. 죽어서도 너희 부부를 굽어살피고 싶구나. 내 가족을 말이다.”
칼라마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역시 당신은 괴물이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어, 어머니께서 사주해서 에이든을 납치했단 말인가.”
칼라마리의 꺼져가는 생명이 희미해졌다 되살아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녀의 입에서 진실이 튀어나왔다. 카타리나는 칼라마리를 용서한 과거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당장 수도를 봉쇄해야 해요.”
“어머니께서, 그런 짓을…….”
“베넨돌! 당장 수도를 봉쇄하란 말이에요! 내 말 못 들었어요? 에이든을 찾아야 해! 그 아이를! 실비아의 아이야! 내 친구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이라고!”
결국, 성축일 기간 하이락에 봉쇄령이 떨어졌다.
칼라마리의 본가인 글레디우스 가문에서 압박을 해 왔지만 카타리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끝끝내 수도에서 에이든의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성축일이 끝나고 칼라마리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백성들은 칼라마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장례식이 끝난 뒤엔 베넨돌의 즉위식이 이어졌다. 카타리나는 마음 같아선 즉위식이 아니라, 칼라마리의 시신을 꺼내와 화형식을 행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녀의 옆에서 함께 불타는 거다.
죄인에게 걸맞은 결말이 아니던가.
“에, 에이든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모든 것이 불에 타 재만이 남았다고 생각한 땅에서도 새싹은 피어났다. 카타리나가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자, 꾀죄죄한 몰골의 에이든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순찰을 하던 근위대가 수도 밖을 배회하던 에이든을 기적처럼 발견해 데려온 것이다.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다니? 어디로 말이니?”
에이든은 대뜸 어딘가로 돌아가야 한다며 카타리나에게 매달렸다.
“나를 구해 준 여자가 있어요. 지금은 동굴에 누워 있어요. 어서 사람을 보내주세요.”
에이든의 얼굴엔 처음으로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름은?”
“이름은 몰라요. 하지만 백작가의 영애라 했어요.”
“가문의 성을 알고 있단 말이니?”
수십 일 만에 근위병에게 발견돼 황궁으로 돌아온 에이든이 하는 말은 가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납치된 저를 구해 준 것이 백작가의 영애란 것이다.
황급히 수소문해 봤으나 에이든이 말한 백작가에는 그러한 영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보다 한참 어린 딸만 하나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에이든이 말한 동굴에 사람을 보내봤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신 죽어가는 새끼 늑대 한 마리를 발견해 데려왔다. 에이든은 그 늑대를 알아본 것인지 덥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요. 이 늑대도 같이 있었어요. 그 여자가 얼어 죽지 않게 이 늑대를 덮어줬어요.”
괴한에게 납치되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응석 한 번 안 부려본 아이가 환영을 만들어 낸 것일까. 특히나 에이든은 공상과 거리가 먼 아이였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술술 지어내는 모습에 카타리나는 더욱 마음이 미어졌다.
“에이든, 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다.”
“그럴 리 없어요. 내게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에이든. 진정하렴. 그건 전부 환상일 뿐이야.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다 맹세하마. 그러니 너도 약속해 주겠니?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너 역시 그 일을 잊어야 해.”
카타리나는 단호히 에이든의 말을 잘랐다.
에이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 칼라마리가 황손의 살인을 사주했단 사실은 결코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이었다. 카타리나는 이것이 에이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당시 아이의 마음은 알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레 겁을 먹고 외면한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에이든의 상처받은 영혼을 외면하는 대신 황궁에 남은 칼라마리 지지자들을 남겨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칼라마리의 장막을 거두어내고 평화를 되찾으리라. 그것이 이번 생에 치러야 하는 업보라 생각했다.
* * *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네.”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카타리나의 얼굴은 물에 빠진 생쥐를 건져 올린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에이든의 형을, 아니, 누나였을지도 모를 아이를 죽여버렸어. 그 아이의 삶이 망가진 것에는 나의 책임도 커. 무엇보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 그 아이를 외면했지. 나는 황후로서 더 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렇게 에이든이 입었을 상처는 신경 쓰지 않은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레인디아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카타리나의 손을 다잡아줬다. 이 순간 카타리나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닌 타인의 온기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가장 힘든 순간, 레인디아가 자신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견뎌왔듯이. 배 속에 자리 잡았다 생각한 아이의 온기를 떠올리며 견뎠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오늘날 제국에서 글레디우스 가문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네. 그들이 지지하던 내 아들의 죽음 때문이지.”
칼라마리가 서거하자 친황후파는 그녀가 아끼던 손주인 제레미에게 붙었다. 제레미는 제 이익만을 앞세우며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전쟁에서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글레디우스 가문의 철저한 꼭두각시로 이용당하고 있었을 테다. 나라 꼴도 말이 아니었겠지.
“그러나 아들이 죽고 나서도 그 지지자들이 기어코 일을 터트렸군. 그대에게도, 에이든에게도 면목이 없네.”
“산첼로 경이 말하길 그래도 이번 일로 황태자파를 일망타진했다 들었어요. 에이든 님도 무사하시니, 이런 말은 그렇지만 결과적으론 잘되었다고 생각해요.”
카타리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황후께선 죽어서도 우리를 굽어살피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지. 그 말은 헬렌베르크 황가에 내려진 저주와도 같아. 나는, 우리 부부는 제국에 드리운 그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네.”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날, 어미의 자아는 처절하게 울부짖었고 군주의 자아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 자위했다. 여전히 카타리나는 제레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론짓지 못했다. 그랬던 그녀에게 에이든이 손을 내밀어줬다.
구원의 손길을.
눈앞의 여인에겐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은 틀림없이 그날 구원을 받았다.
“에이든도 우리 부부를 묵묵히 도와줬지. 그리고 그 아이는, 내게 하나뿐인 것을 되찾아주었네.”
우중충하게 가라앉은 카타리나의 얼굴에 일순 황홀한 미소가 번졌다. 레인디아는 의아함을 느꼈다. 카타리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휘휘 고개를 저었다.
“……마마?”
“미안하네. 그래서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카타리나는 찬찬히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난 솜털 하나하나를 뜯어보듯이 진득한 시선이 이어졌다.
“그대는 실비아를 닮았어. 그래서 너무나 안심이 되었지. 에이든의 곁에 실비아 같은 여인이 서 있다는 게. 자네들처럼 순수한 영혼을 지닌 자들은 주위 사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지.”
어린 시절 카타리나는 정해진 운명과 귀족의 책무에 짓눌려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 그녀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준 것이 실비아였다. 저를 탓하지도 손가락질하지도 않고 오롯이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다정한 포용력에, 구원이란 이토록 가까이 존재할 수 있단 사실을 깨닫곤 했다.
“이 세상에는 그대 같은 사람이 필요해. 진정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지. 타인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이타심은 흉내 낸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네.”
카타리나는 붙잡은 레인디아의 손을 가슴 언저리까지 들어 올렸다.
“에이든도 그대에게 구원받은 기분이었겠지.”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것은 저예요. 에이든 님이 과거를 밝혀주셔서 자유의 몸이 되었는걸요?”
레인디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도 에이든을 살려주지 않았나?”
“……네?”
레인디아의 반응에 카타리나가 탄식했다. 설마, 에이든이 말해 주지 않은 것일까?
“그 백작가 말이네. 그레제 백작가의 영애라 했어. 틀림없이 그대겠지? 에이든을 안심시켜 주려고 한 말일 테고.”
레인디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입술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듯했다.
“설마, 성축일에 납치되었던 그 아이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잊고 말았다. 아니, 괴로운 기억이라 저 깊은 심연 아래 꼭꼭 숨겨두었다. 하지만, 품 안에 안겨 있던 아이를 떠올리면 언제고 애틋함이 올라왔다. 그 후로 소식이 닿을 길이 없어 그저 살아 있기만을 바랐다.
“그 아이가, 에이든 님이었군요.”
반가운 마음과 서글픈 마음이 파도처럼 스며들었다. 레인디아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자 카타리나는 살며시 손을 놓아주었다. 레인디아는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도, 돌아가야겠어요. 마마께서 오찬식에 초대해 주셨는데 크나큰 결례라는 것은 알지만…….”
“이해하네.”
카타리나의 입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실비아와 페레디온의 삶은 불행하게 막을 내렸지만, 에이든만큼은 황궁 밖에서 행복한 삶을 꾸리길 바라네. 자식이 반드시 부모의 길을 따라가는 건 아니야.”
카타리나는 칼라마리를 어머니처럼 여겼지만, 그녀와 다른 길을 걷겠다 다짐했다. 그러니 이 젊은 영혼들도 부모와는 다른 삶을 완성하리라.
“계승권 문제로 에이든이 곤란해질 일도 없을 거라 약속하지.”
“마마.”
“제국의 황후로서 그대들이 가시밭길을 가는 일만은 반드시 막아주겠네. 그러니, 에이든의 곁에 있어 주게.”
에이든에게 붙잡힌 이후 레인디아의 머릿속은 온통 그에 대한 것뿐이었다. 두려움, 분노, 슬픔, 무력감, 모든 감정의 근원은 에이든이었다.
이제는 에이든의 존재가 자신의 영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억지로 떼어내고 싶어도 꽉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에이든이 침체될 때, 자신도 함께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레인디아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시작된 인연 때문이었으리라.
“마마. 결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될까요?”
“그게 무엇이지?”
“에이든 님은 어떤 아이였나요?”
카타리나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착한 아이였어. 제레미가 그 아이의 것을 탐내도 기꺼이 양보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
카타리나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보면, 죄책감을 넘어 진심으로 에이든을 아끼는 마음이 전해졌다. 레인디아는 안심했다. 이 세상에 저 말고도 에이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비록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제외한 타인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겼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