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1)
째깍째깍
어느 사무실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사각 벽시계.
무음시계가 아닌 듯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아니다. 초침소리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는가.
그저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눈길. 초침이 움직일 때 마다 꼬리를 무는 그 눈길이 머리를 때려서 요란하게 들리는 거다.
땡. 초침이 12시를 가리키고, 시침이 5시를 가리키는 순간, 머릿속에서 절로 종이 울렸다. 드디어 때가 됐다. 퇴근시간이다.
드르륵. 의자를 긁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사내는 벌떡 일어났다.
“오늘도 끝! 퇴근하자!”
어째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걸까?
사내의 말에 행정병들은 부리나케 정리를 끝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십쇼.”
“수고하셨습니다. 중대장님”
“오냐. 청소 그까짓 거 대충 해라. 어차피 내일 아침에 또 할 건데 뭐.”
“예”
“옙.”
역시나 이 말 또한 하루 이틀이 아닌 듯, 행정병들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다들 ‘과연... 말년 병장보다 무섭다는 말년 대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음...”
와자작. 다 마셔버린 맥주캔을 우기면서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서프로그램에 열심히 적은 내용을 보고 있자니 침음이 절로 나온다.
-전 검도국가대표.
-신훈대 생활체육학과 졸.
-특전사 대위 전역 예정.
-ARMA 어뎁트 자격증.
-조선무도연구협회 회장.
-칼리 한국연구회 부회장.
-크리브마가 지도자 자격증.
-기타 이런저런 무술 유단증.
“후...”
사내는 시원하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피식 웃었다. 아니. 이게 21세기 현대인의 이력이란 말인가? 칼에 미친놈도 아니고. 신음이 절로 나온다.
“흐음...”
담배 연기를 휘휘 저어가며 고민에 상념에 잠깐 빠져본다.
이제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차피 장기복무를 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특공무술이나 좀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특전사에 들어왔다. 특공무술이 짬뽕무술이긴 하지만 뭐 어떤가.
학창시절부터 별명은 칼잡이요, 실제로도 칼에 미쳐 살아 온 인생 아닌가? 겸사겸사 돈도 벌고, 복무도 하고, 특공무술 경험도 쌓고.
그 뿐일까? 성적이 좋으면 실전을 겪어본 외국 부대원과 교류할 기회가 생기는데, 그들의 농축된 경험을 놓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열심히 했다. 해외파병도 가려고 노력하고, 나름 표창과 상장도 빠짐없이 받고, 크리브마가를 제대로 배우고, 특공무술과 다른 단검류 무술을 조합하는 짓도 교관들이랑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절도 이내 끝. 애초에 단기로 들어온 친구가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공훈을 싹쓸이 하면 말이 나오기 마련이다.
어차피 군에서 나갈 사람이 뭐 하러 점수를 빼먹는가. 그 점수를 장기를 노리는 다른 이에게 주면, 고과점수가 1점이라도 더 올라가는 데 말이다.
해서 몇 년 지나기 무섭게, 위에서는 그를 후방의 독립부대 중대장으로 전출시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저기 편한 자리 있는데, 갈래?”라고 물어봤고, 그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짬밥이 몇 년인데 돌아가는 사정을 모를까. 배울 것도 다 배웠으니 뒤로 빠지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 전역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가서 뭘 할까?” 고민하며 이력서를 적어봤는데... 거 참.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
검도국가대표? 검도는 꼬꼬마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온 일이다.
왜냐고 묻지 마라. 그냥 그게 재밌었고, 나름 자질도 있고 운도 좋아서 국가대표까지 간 거니까. 딱히 국가대표가 목표는 아니었고 말이다.
국가대표에 못 뽑힌 이들이 보면 열을 내겠지만, 그게 뭐 그의 잘못인가? 아니꼬우면 이기든가.
대학은 검도특기생으로 들어간 거니까. 패스. 그렇다고 체육특기생이라고 얕보지 마라. 신성대면 그래도 인서울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학이고 수능등급도 높아야 갈 수 있는 곳이다.
‘ARMA 자격증... 이걸 써먹을 때나 있나?’
그는 그리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게 빽스패이스를 눌러 글자를 지웠다.
ARMA는 중세-르네상스 서양 검술을 연구하고 교습하는 단체다. 조금 과장해서 한줄요약 하면 옛날 중세,근세 기사들의 기술을 복원하는 거다. 어뎁트란 사범 밑의 단계랄까?
자 다음. 조선무도연구협회.
이름만 거창하게 협회지, 사실 등록도 안된 동아리다.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는 협회인데, 한국에 무예도보통지를 기반으로 조선시대 무술을 복원하는 협회가 얼마나 많은가. 그냥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대련 한판하고, 회식 한판 하는 거지.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는 다시금 빽스패이스를 눌러 글자를 지웠다.
사람은 자기 객관화를 잘해야 욕을 안 먹는다. 남들이 보면 돈도 안 되는 일에 뭐하나 싶을 거다.
이거... 벌써 이력의 반이 날아갔다.
칼리 한국연구회 학회원
칼리, 혹은 칼리 아르니스라고 부르는 필리핀 전통무술이다. 실전성이 매우 높아 여러 국가의 특수군이 배우기도 한 무술. 물론 이것도 크게 의미 없다.
이런 인지도 떨어지는 무술이 한국에서 제대로 교습체계가 잡혀있겠는가? 등록도 되지 않아, 이 또한 이력이라고 말하면 사기꾼 소리나 들을 거다.
하지만 실력은 진짜다. 그는 필리핀에 가서 직접 배우고 왔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꼬박꼬박 몇 년에 걸쳐서.
그러나... 드드드득. 역시나 빽스패이스다. 아니다. 길게 눌러 이력을 다 날려버렸다.
“흐흐. 이게 뭔 의미가 있냐.”
그는 피식 웃으며 새 맥주캔을 따서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렇다. 사실 그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동기들이 다 하니까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나?’ 확인할 겸, 따라해 본 거다.
왜냐고? 그는 금수저니까.
검도는 나름 자본금이 들어가는 운동 아닌가. 호구랑 죽도 등등 이것저것 살게 많다. 그것도 꼬박꼬박.
게다가 남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상한 무술을 배우겠다고 외국을 자주 다니고, 돈도 안 되는 무예도보통지를 붙잡고 시간 낭비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다 돈 걱정이 없어야 이런 짓도 하고 다닐 수 있는 거다. 금수저의 여흥이란 말씀!
전역하고 나선 가업을 전부 이어받으면 그만이다.
이미 가업의 일부를 이어받아서 자신만의 사업도 굴리고 있는 판국이니까.
“자. 장난은 이제 그만하고.”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냉큼 자세를 고쳐 잡고,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쓸데없는 짓으로 머리를 워밍업 시켰으니 이제 손가락을 놀릴 시간. 장난삼아 쓴 이력서는 이미 모니터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모니터엔 여러개의 창이 겹겹이 켜지기 시작했고, 키보드와 마우스는 더욱 불을 내기 시작했다.
‘옵션은 다 바꿔놨고, 버그도 해결했으니까 이제 실행해 볼까나?’
속으로 생각하기 무섭게 아이콘을 클릭.
두둥.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모니터가 어두워지면서 인트로가 나오기 시작했다.
미디블 워 : 동아시아Medieval war : east asia
나온 지 꽤됐음에도 아직도 명작소리를 듣는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뭐. 금수저 군바리의 취미생활에, 게임만큼 건전하고 좋은 게 뭐가 있는데? 밖을 나돌아 다니는 거? 그건 칼 들고 설치는 걸로 충분하다.
그는 오래전부터 미디블워 시리즈를 해왔고, 그것도 모드를 스스로 만들 정도로 하드코어한 유저다.
미디블워 시리즈는 각 문명에 속한 여러 종족이나 나라등이 등장해서 서로 땅따먹기를 하는 게임이다.
열심히 내정해서 테크트리를 올리고, 병력을 뽑아서 다른 도시를 점령. 더 많아진 도시에서 더 많은 병력을 뽑고, 이런저런 이벤트를 깨면서 군주와 장수의 레벨을 올린다.
테크트리에 따라 각기 다른 병종이 나오고, 종족이나 나라마다 특수병종도 있다. 전투 시에는 직접 병력을 조종하고 장수를 조종해 무쌍을 찍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 유명한 문명, 삼국지, 심시티, 토탈워 등을 혼합한 게임이랄까?
다만 난이도가 높아서 대중적으로 유명해지기는 글렀다. 아닌가? 그래도 유저가 몇만명은 되니까 많은 건가?
하여튼 동아시아 편은 당연히 한,중,일,몽골,여진,거란 등의 역사를 배경 삼아서 시대별로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드mod란 뭐냐.
제작사에서 직접 만든 건 아니지만, 게임을 도와주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이라고 할까?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오픈코드, 에디터를 이용해서 기존 게임에 없는 다른 종족이나 나라, 군주나 장수, 병종과 테크트리를 추가하거나 수정하는 걸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드디어 완성했다. 바로 국뽕모드!
이미 해볼 거 다 해보고,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다. 플레이시간만 몇천 시간이 넘는다.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니라 이것저것 집어넣은 나만의 게임을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욱이 남이 만든 온갖 모드까지 다 섭렵했으니까 말이다.
이제 남은 건,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온갖 장수들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일.
그 역사적인 순간의 마지막이 바로 오늘이다. 몇 주를 붙잡고 있던 작업이 드디어 끝이 보이니까.
처음 만드는 모드니까 쉽게 가야지. 시원하게 국뽕으로 지르고 시작!
“자자. 잘 작동하나 볼까?”
그는 호로록 맥주를 마시며 프로그램 창을 켜놓고 모드가 충돌하는 부분을 살폈다.
‘이펙트효과 오케이. 무브먼트 오케이. 배경설정 오케이. 스토리 모드 작용 오케이. 자원설정 오케이. 지형설정 오케이.’
메모장에 적어놓은 체크리스트가 무섭게 삭제되어 나가고, 모드는 점점 완성의 끝을 달려갔다.
‘어중간한 모드라면 그저 게임 속의 적용만 신경 쓰겠지만, 진짜 모드덕후는 더 깊게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등장할 세력이 띠용 하고 그냥 적용되는 게 아니라, 그 세력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그 장수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고 어떤 배경이 있는지. 텍스트로 하나하나 박아 넣었다는 말씀.
그 뿐일까? 나름 고증한답시고 어떤 지형과 어떤 자원이 있는지 고민하고, 없는 걸 한땀한땀 지도에 새겨 넣었다.
“오케이!”
체크리스트가 모두 확인되자, 그는 자화자찬하며 박수를 치고선 곧장 플레이 버튼을 클릭했다.
밖에서 볼 수 있는 건 다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실제 플레이를 해보면서 버그가 있는지 확인 하는 일.
다만 고민된다. 게임을 시작하기 앞서서, 옵션을 설정해야 하는데...
‘흐음.’
다른 거야 뭐. 대충하면 되지만 재해 옵션이 걸린다.
태풍, 지진, 가뭄, 홍수, 냉해, 폭염, 황충蝗蟲, 전염병, 등등등. 하나같이 도시 하나를 파괴 시키거나 약화시키는 옵션이다.
사실 이런 건 오케이다. 어떡하든 극복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는 화산이라 적혀 있는 버튼에서 옵션 삭제를 클릭했다.
게임인 만큼 땅 넓이가 곧 도시의 숫자고, 도시의 숫자가 곧 병력의 양이다. 그런데 화산 터지면 도시 한두개가 아니라 십수개가 날아간다.
안 그래도 땅덩어리 넓은 중국 왕조를 막는 것도 벅찬데, 백두산이나 후지산이라도 터지면 조선이나 일본은 그냥 날아간다.
이건 하드코어를 넘어서서, 재미없는 반복 노가다 전투만 해야 할 판국이다.
대신에 다른 걸 넣어 본다.
그건 바로!
아무나 한 명 걸려라. 돌려돌려 돌림판. 운석충돌!
‘이 정도면 괜찮지 않겠어? 어차피 운석 떨어지는 거야 복불복이고, 터져봐야 도시 한 두개 날아갈 거니까. 버틸 만 하겠지.’
실제라면 운석의 크기에 따라 지구가 절단 날지도 모르지만, 게임 상 운석충돌은 고작? 도시 하나 정도만 파괴할 수준으로 약했다.
물론 그게 실제라면 지옥이겠지만, 이건 게임이잖아?
양심의 죄책 따위는 전혀 없이 그저 ‘과연 누구 머리통이 깨질까?’ 기대하며, 그는 시작버튼을 클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