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화 (1/122)

프롤로그 : 납치된 용사

* * *

2022년 5월 12일.

07시 13분.

이른 아침, 연병장에 전투복 차림의 대원들이 모였다.

임무를 나간 부대원과 휴가자들을 제외하면 전원 집합이었다.

“야, 빨리 모여! 곧 대대장님 오신다!”

“군악대 애들은?”

“지금 대기하고 있답니다, 행사 시작되면 바로 올라올 수 있습니다!”

본래 전역식은 이렇게 성대하게 하지 않는다. 전역자가 병이라면 더더욱.

기껏해야 남아 있는 부대원들이 모여 전역패와 전역증을 주고, 사회에 나가 잘 살리는 인사쯤으로 끝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박건 중사가 전역하는 날이었으니까.

박건이 누군가?

아라비아만 해적 소탕.

피랍된 상선 구출.

수십 건의 해외 작전 차출.

여러 민감한 외부 요인과의 마찰 중, 뛰어난 성과로 외교적 분쟁 타파.

부사관으로 입대했는데도 웬만한 장교들보다 높은 실적을 쌓고, 같은 기수들 중 단연 부대의 명예를 드높였다 평 받는 대원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특별히 중대장에 대대장까지 자리를 빛내기 위해 참석이 예정돼 있었다.

오전 07시 22분.

간부 한 명이 흘끗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저 앞으로 박건과 전역자들이 나와 박수를 받으면 오늘 행사도 끝난다.

원래라면 온갖 예우와 호사로 꾸려졌을 전역식이, 혼란에 휩싸이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주인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야, 박건이 어디 갔어!”

“모르겠습니다! 아까 분명히 전투복 입고 준비하는 걸 봤는데, 막사 안에도 없습니다!”

얼굴이 허옇게 된 인사병이 외쳤다. 행사를 주관하는 김 대위는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대대장님 기다리고 계신 거 안 보여! 당장 찾아내, 저분들 다 모인 이유가 사라지면 어쩌자는 거야!”

“예, 알겠습니다!”

인사병들이 황급히 달려갔다. 지루한 얼굴로 시계를 보는 별들을 보며, 김 대위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박건이 이 새끼··· 전역날 뭐 하는 거야, 속 한번 안 썩였던 놈이······!”

* * *

김 대위의 희망은 허무하게 스러졌다.

박건은 부대에도, 화장실에도, 부대 주변의 어느 CCTV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역자 실종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부대가 발칵 뒤집어진 2시간 뒤.

박건은 중대 기슭에서 실신한 채 발견됐다.

전역식을 위해 입었던 정복, 전투화, 군모 등 모든 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는 급히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링거를 꽂고, 수액을 흘려넣고, 삼십여 분간 처치한 끝에 닫혀 있던 눈꺼풀이 떠졌다.

“어, 정신이 듭니까?”

말하던 의사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지? 인지할 새도 없이 의식이 멀어지고 몸에 힘이 빠졌다.

박건 예비역 중사.

깨어난 전역자가 처음 한 일은 한 손으로 의사를 천장까지 들어올린 것이었다.

“용사 안 한다고, 개새끼들아.”

예비역 중사 박건 (1)

* * *

건은 생각한다.

나는 누구지?

박건. 나이는 26세.

용남대 경호학과 졸업, 해군특수전전단 특수임무대대 2팀장 출신.

부모님은 박열호와 한영신. 형제자매는 두 살 어린 남동생 박선.

난 뭘 하고 있었지?

드디어 찾아온 전역의 날이었다. 그는 전역식을 위해 대강당으로 가고 있었다.

전투복을 입고, 벨트를 차고, 전역모를 눌러쓰고 거울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계단을 내려와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그것’이 나타났다.

지면 1미터쯤 위. 허공에 소용돌이치는 블랙홀.

검게 타오르는 불구덩이 같기도, 아득한 해저통로 같기도 한 구멍을 본 순간 건은 그곳에 빨려들어갔다.

‘이건 무슨······.’

눈이 멀 듯한 빛줄기가 터지는 와중, 수천 개의 목소리가 윙윙대며 울렸다.

당신을 골라 미안합··· 부디 망가지지 말고··· 그들의 윤회 속에서··· 왕국과 세상을······.

정신이 들었을 때, 건은 거대한 대리석 홀의 한가운데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ㅡ성공했군요, 성녀시여!

천박하리만치 커다란 금왕관을 쓴 사내가 홀이 떠나가라 외쳤다. 볼살이 푸들거리는 것을 보니 방금까지 메슥대던 속이 다시 나빠졌다.

‘여긴 어디지, 저들은 누구고?’

반사적으로 몸을 도사리던 건은 흠칫 놀랐다.

바로 옆, 똑같이 나신에 한지처럼 얇은 천 한 장만 걸친 금발머리 여인이 꿇어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것이다.

ㅡ용사님, 미안.

검은 눈과 파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철왕국 엘도른. 용사를 소환한 성녀와 만난 첫 기억이었다.

*

“···그러니까, 철왕국이 뭐가 어쨌다고요?”

의사가 짜증스럽게 물었지만, 전투복 입은 미친놈한테서는 대답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철왕국 엘도른이니, 네 번째 대악마가 강림했다느니, 무슨 게임 속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더니 이젠 침묵이었다.

“저기요, 박건 씨.”

“아닙니다. 잠깐 꿈을 꿨나 봅니다.”

“꿈꾸다 깨어난 사람이 다짜고짜 사람 목을 부러뜨리려고 해요?”

“죄송합니다. 치료비는 후에 연락 주시면 보상하겠습니다.”

고개 숙인 박건을 노려보며, 의사는 더 화를 낼지 말지 고민에 빠졌다.

듣기로는 전역 당일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쳤다는데, 이 좋은 날 다친 것으로 모자라 남까지 죽이려 한 게 문제였다.

‘아니, 특수부대라고 죽어라 굴린 거 아냐? 이건 PTSD가 아니라 망상장애 급인데.’

그런 작자를 마구 내보내니 선량한 전문직이 교살당할 위기에 처한 것 아닌가.

책임감 없는 지휘체계에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더 갈궈 봤자 남는 것도 없었다.

결국 의사는 손자국이 퍼렇게 난 목을 어루만지면서 턱짓했다.

“됐고, 몸 괜찮아졌으면 가 봐요.”

“죄송합니다.”

“···나가서도 계속 그러면 꼭 정신과 들르고.”

박건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걸어나갔다.

마른기침을 몇 번 하다가, 의사는 문득 뒷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여기가 어딘지 말했던가······?”

*

“아이고, 전역하셨나 보네. 축하해요.”

“예.”

“놀다 갔어요? 아니면 집이 멀었나? 왜 이 시간에 들어가요, 해가 다 져 가는데.”

“예.”

택시기사는 잠깐 고민했다. 뒷좌석에 앉은 전투복 차림의 저 청년, 과연 ‘예’라는 단어밖에 못 하는 걸까?

고심 끝에 변화구를 던져 보았다.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네. 이렇게, 어? 잘생기고 듬직한 아들이 돌아와서.”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초점 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움직여 룸미러를 바라본 것이다.

마치 이쪽이 어딜 보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돌아왔다고요.”

“예?”

“내가? 아니면 누가?”

“······저기, 손님?”

“그래. 돌아오긴 했지.”

청년은 천천히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착 붙어 있던 눈동자가 떨어졌지만, 택시기사는 더 시험해 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렸다.

옷 속의 등줄기에는 몇 초 사이 쌀알만 한 소름이 다닥다닥 돋아 있었다.

다시 말을 걸면 저 군인이 와이어를 꺼내 목을 조를 것 같았다.

*

건은 행동한다.

부대 내 전우들에게, 박건 중사는 터미네이터로 불렸다.

쇠심줄 같은 집중력과 인간인가 싶은 동체시력,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육체능력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수많은 임무에 투입되어 전우들을 이끌었다.

어두컴컴한 해적선의 격실에서, 납치된 인질들을 수색하던 모래밭 기슭에서, 테러범과 대치하던 시리아의 어느 건물 옥상에서.

몸에 익은 습관대로 병기를 들고 돌입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체화된 기억이란 오래 가는 것이어서, 어느 새 건은 동작구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동작로 532-4.

주소를 확인했지만 왠지 아파트로 올라가기가 낯설었다.

긴 터널에 붙잡힌··· 아니, 다른 삶을 살다가 돌아온 노인이 된 기분이다.

‘돌아왔다, 지구로.’

꿈이었나?

아니. 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이 꿈일 리가 없었다.

아비규환 속 지옥도, 몸을 감싸던 합기(合氣)의 전능감, 터져나가던 악마의 살점, 가죽, 그리고 악마가 아닌 자들의 피.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정확히 2시간을 사라져 있다가 중대 옆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 2시간 동안, 건은 무려 20년 동안을 다른 차원 속 대륙에서 싸웠다.

ㅡ저기요, 용사님.

드높은 천상과 불타는 지옥 사이, 인간들이 사는 ‘가운데땅’은 다섯 대악마의 공세로 전란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건은 그 중 철왕국의 성녀가 불러들인 용사로 대륙에 소환되었다.

인간군을 지휘하는 타차원의 용사. 천사의 힘을 빌어 악마와 맞서는 생체병기이자 산 제물로.

ㅡ그쪽은 선택받았거든요. 저도 미안하게 됐는데··· 아무튼, 살던 세계로 돌아가려면 대악마 다섯 놈을 다 썰어 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귀환시킬 방법 자체가 없으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 폭압적인 선고에 반항했겠지만, 상명하복에 익숙한 특수부대원은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하나, 이곳은 현실이다.

둘, 어차피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면 저들이 원하는 것을 이뤄줄밖에.

당시에는 군인정신을 십분 발휘해 기껍게 받아들였었다.

조국을 지키는 일이 비슷하기도 했고, 전쟁이 나서 장기복무로 전환했다고 생각하면 그리 억울하지도 않았다.

약자를 돕는다. 불의를 타파한다.

그것이 박열호 소방관의 장남, 박건의 지상과제였으니까.

첫 죽음을 경험하고 그 생각은 박살났다.

“아.”

건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쩐지 집이 집 같지 않더라니, 올라가려고 해도 현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몇 호에 살았더라?

이마를 찡그릴 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어, 형!”

돌아보자 체구가 왜소한 청년이 막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박선. 동생. 두 살 차이.

다행히 이십 년의 공백은 혈육 간 기억까지 훼손하진 못했다.

머릿속 회로를 점검하는 사이, 박선은 반가운 얼굴로 걸어와 그를 끌어안았다.

“어디 있다 이제 왔대. 아침에 전역한다더니, 기차표 놓쳤어?”

보아하니 부대에서는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 같았다.

비공식 훈장까지 받은 특수부대원이 전역날 아침 실종되었다?

당연히, 숨겨야 할 일이다.

“오다가 볼일 좀 보느라.”

“연락 좀 받지.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우리 자랑스러운 맏아들 왜 이리 늦냐면서.”

건은 꺼져 있는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배터리가 나가서.”

“···그래, 나가긴 했네. 일단 들어가자. 우리 한 여사님, 형 전역이라고 어젯밤부터 바리바리 뭘 사오셨어. 갈비찜에 킹크랩에, 지금쯤 아주 잔칫상 봐 두셨을 거야.”

신나게 떠든 박선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자 보안이 풀렸다.

박선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 때였다. 한 발짝 다가온 건이 동생의 팔을 잡았다.

“너, 맞았냐?”

“응? 로또 맞았냐고?”

씩씩하게 헛소리를 하는 동생을 보며 건은 확신했다.

물론 이 육체는 합기를 극한까지 단련한, 성녀의 축복이 깃든 용사의 몸이 아니다.

그러나 저 터진 입가는 굳이 특수부대원이 아니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랫입술이 찢어졌군. 몸놀림을 보아하니 복부 쪽에 타박상도 있고.’

그렇다고 못 걸을 정도는 아니니 사고일 리는 없다. 누군가에게 뺨을 맞고 조인트를 까인, 딱 그 정도일 것이다.

ㅡ탈영은 즉결 처분이다! 용사시여, 저들의 목을 직접 참해 위엄을 보이시옵소서!

칼을 쥐여 주며 목청껏 부르짖던 3사령관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기억을 쥐어짰지만 동생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건은 그냥 묻는 쪽을 택했다.

“너 조폭 됐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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