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2화 (2/122)

예비역 중사 박건 (2)

* * *

“···그건 또 뭔 소리래. 싸움도 못 하는데 거긴 무슨 수로 들어가.”

“그럼 입술은 왜 그래. 보니까 뺨만 맞은 것 같지도 않은데.”

박선은 입술을 오므리다가 터진 곳이 아픈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 회사에서 일이 좀 있었어. 내가 사고 비슷한 걸 쳐서.”

“무슨 일 하는데?”

“나 매니저로 엔터 입사했잖아. 형이 축하한다고 선물까지 보내 놓고, 기억 안 나?”

더마리앗 고원 점령전. 당장 병력을 충원해 달라는 파발을 왕성으로 띄웠던 건 기억났다.

그 개새끼들은 결국 지원이 없었고, 그는 몰려드는 악마들에게 찢겨 4번째 죽음을 맞았다.

“아무튼, 얘기해 봐.”

“별일 아니라니까 진짜······.”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쉰 동생이 털어놓은 전말은 이러했다.

원래 지망했던 팀은 배우 쪽이었는데, 인력 충원 때문에 아이돌 담당으로 배정되었다.

거기서 와우키즈라는 인기 보이그룹의 로드로 뛰던 중, 멤버들이 장난으로 ‘매니저 길들이기’를 했다는 거였다.

“매니저 길들이기? 그게 뭔데?”

“그냥···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편의점 심부름을 시키거나, 부탁한 걸 사 오면 다른 게 먹고 싶다거나··· 근데 이건 원래 내 일이니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오늘 생방 몇 분 전에 멤버 하나가 무대의상을 깜빡했고, 급히 챙겨 갔지만 결국 시간을 못 맞췄다.

리더는 공연을 망쳤다고 화를 냈고 팀장이 대기실에서 몇 대를 때렸다. 그 모습을 나머지 멤버들은 낄낄대며 보고 있었다.

“내분 유발에 아군 사기 저하, 태형감이네.”

“응? 무슨 소리야?”

“됐다. 계속 일하고 싶어?”

건의 물음에 박선은 고개를 떨궜다.

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얼마간 버티다가 그만두거나 쫓겨났겠지.

폭력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대기업 부장이 신입들을 서류철로 후려치는 것은 물론, 선진 병영을 표방한다는 군에서도 구타는 근절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하고 생각한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며 옛 기억이 떠올랐다.

가운데땅으로 끌려가기 전, 해군특수전전단에 입대하기도 한참 전, 맞고 온 동생을 데리고 이웃 고등학교로 찾아갔던 기억이었다.

‘저쪽’ 세상과 ‘이쪽’ 세상이 합쳐지며 한동안 잊고 있던 스위치가 켜졌다.

중사 박건이 물었다.

가족을 건드린 놈은 어떻게 했더라?

용사 고드가 대답했다.

가만히는 안 뒀지.

“그 사람들 지금 어딨는지 알아?”

“내일 또 스케줄이 있으니까··· 애들은 연습실 아니면 숙소에 있겠지? 실장님도 아직 퇴근 안 하셨을 거고.”

“잘 됐네, 타.”

건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 동생의 차 앞에 섰다.

박선은 잠깐 멍한 표정이 됐다가,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회사? 형이 거길 왜 가!”

“시동 걸어. 택시 부르기 전에.”

“아니, 일단 좀 진정을······.”

“안 오면 문짝 뜯는다.”

박선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

로만 엔터테인먼트.

‘와, 이 형 빠꾸가 더 없어졌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박선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정말로 와 버렸다.

엔터 앞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실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형은 망설임이 없었다. 여기냐? 한번 묻고는 그를 끌고 들어갔다.

-어제 계약한 소속 배웁니다. 제 매니저 얼굴은 아시죠?

출입증을 지참해야 하는 입구의 경비는 말 한 마디에 뚫렸다.

···대체 왜 믿는 건데?

짧은 머리에 전투복 차림이니 못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무참히 박살났다.

비주얼이 워낙 출중하니, 방금까지 작품을 찍다 온 배우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에 무사 승차.

‘몇 층이야? 너희 팀 사무실.’

‘7층인데······.’

원래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었지만, 입대 전과는 뭔가 달랐다.

아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도 달라진 것 같았다. 3개월 전 휴가 때 형과 쭉 붙어 다녔던 박선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어휘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조금씩 끊기는 말이라든가, 눈동자 뒤로 얼핏 스치는 낯선 그림자라든가.

‘작전을 뛰다 무슨 일이 있었나?’

슬쩍 곁눈질했을 때, 박건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어차피 그만둘 거였잖아.”

“어··· 응.”

“업계 대우가 원래 어떻고, 이런 건 핑계가 못 돼. 부당한 처우를 당했으면 확실하게 끝맺음을 지어야지. 일은 그만둬도 기억은 계속 남아.”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어디 그런 줄 몰라서 부조리와 부당함을 참던가?

-7층입니다.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박선은 마지막으로 설득을 시도했다.

“형, 아직 안 늦었어. 그냥 돌아가자. 당한 건 나중에 담당 실장님한테 말하면 돼. 애들도 그때 되면 사과할 거야.”

“퇴사하는 신입 하소연을 들어 줄까?”

“아직 남아 있는 인류애로다가······.”

“인류애는 무슨. 알아서 할 테니 휴대폰 줘 봐.”

“뭘 어쩌려고?”

박건은 대답 대신 그의 휴대폰을 받아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늦은 시간임에도 퇴근 안 한 직원들이 더러 보였다. 반질반질한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웬 군복이야?”

“옆엔 오귀준이네 신입 아냐? 와우키즈 새로 맡은 그 로드. 싹싹하니 기합은 좋더만.”

“맞네, 오늘 대판 깨졌다던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형제는 [홍보팀]이라고 적힌 문에서 나오던 사내와 딱 마주쳤다.

거무죽죽한 낯빛과 일에 찌든 표정. 누가 봐도 ‘나 매니저요’라고 얼굴에 써붙인 사내는 박선을 보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박선이 너 인마, 가서 반성하라니까 회사엔 왜 또 왔어? 옆에 분은 누구··· 아, 혹시 새로 오신다는 배우님이십니까?”

귀찮은 반말이 뒤로 갈수록 깍듯한 존대로 바뀌었다.

사내는 숫제 눈을 빛내며 박건을 뜯어보았다.

“유 실장님은 지금 퇴근하셨는데요. 나머지 실장님들도 계시긴 한데, 지금은 손님이 오셔서요. 괜찮으면 잠깐 아래층 라운지에서······.”

“오귀준 팀장.”

“······어, 예?”

“박선 매니저 친형입니다. 내 동생한테 한 상습적 괴롭힘, 폭언, 구타에 대해 사과하세요. 와우키즈 멤버들도 함께.”

이제 지나다니던 직원들도 본격적으로 이 흥미진진한 상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깐 작던 소곤거림이 조금 더 커졌다.

방금 친형이랬지? 마스크가 저런데 배우가 아니라고? 그럼 군복은 왜 입고 있는 거야?

어리둥절해하던 오 팀장의 얼굴이 열기구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야, 박선. 너 지금 일 못해서 쿠사리 좀 먹었다고 형한테 일러바친 거야? 또 그걸 쫄래쫄래 달고 회사까지 데려와?”

“팀장님, 그게 아니라······.

“당신은 또 뭐야. 군인이야? 깡패야? 출입증도 없이 들어와서, 군복 입고 사람 겁 준다고 뭐라도 될 것 같아, 어?”

오귀준은 불리하거나 창피한 상황이 생기면 오히려 더 밀어붙이는 타입이었다.

소란이 일자 시선이 모였고, 사무실 문들에서 빼꼼 고개가 나왔다.

‘이럴까봐 오지 말자고 한 거였는데.’

박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일은 커질 대로 커졌다.

무단으로 외부인을 들인 것도 사실이었고, 개싸움을 해 봐야 시큐리티가 오면 끝이었다.

축하해도 모자랄 전역날, 괜히 자신 때문에 형까지 망신을 당하는 꼴 아닌가.

마음을 정한 박선이 앞으로 나서려던 때였다.

“그럼 그쪽은, 군인도 깡패도 아닌데 남의 동생한테 손찌검을 했군.”

비스듬히 서 있던 군복 사내가 말한 순간, 좌중의 입이 닫혔다.

‘무슨 놈의 분위기가 갑자기······.’

오귀준은 증거 있냐고 따지려던 것도 잊고 침을 삼켰다. 그러나 마른침은 졸아붙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박건은 한 걸음 걸어나와 말을 이었다.

“겁을 주면.”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오귀준은 조금 다른 것을 느꼈다.

뺨에 무언가가 닿는 감촉이었다.

‘······뭐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위험 없는 사회에서 무뎌진 본성, 퇴화된 현대인의 육감이 경종을 울렸다.

“사과할 생각이 들까?”

사형선고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조심스레 곁눈질을 했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척추째 뽑혀 나온 오귀준 자신의 얼굴이 뺨에 닿아 있었다.

“······.”

박건 형제와 오귀준 외 6인.

그 자리에 있던 로만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은 기괴한 장면을 보았다.

군복 남자가 한 발을 내딛은 순간, 오귀준의 등이 갑자기 경직됐다.

그러더니 덜덜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마치 공포영화 속 주인공··· 자신에게만 보이는 끔찍한 악령이라도 본 것처럼.

‘어, 웬 지린내?’

직원 하나가 코를 찡그렸을 때, 돌연 오귀준이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눈은 흰자가 보이도록 뒤집혀 있었고 입가엔 게거품이 보글거렸다.

“꺄아아아악!”

뒤늦게,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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