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화 (1/164)

< 1. 프롤로그 - 1 >

‘무능은 죄다.’

내 상사인 강부장의 좌우명이자 삶의 신조였다.

과장 좀 보태 거의 종교에 가까웠다.

강부장에게 있어 가톨릭의 7죄종은 불충분했으며, 여기에 ‘무능’을 덧붙여 8죄종으로 하여야 완전해 지는 것이었다.

저스틴 비버가 빌보드 1위를 하는 이유?

대중이 무능해서다.

지구온난화가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이유?

지구가 무능해서다.

“이야, 이거 대단한 수준인데.”

“가, 감사합니···!”

“보고서가 무슨···. 너무 수준이 낮아서 우리 집 막내가 하루 만에 해치운 여름방학 일기 숙제인 줄 알았지 뭐냐. 참나. 난 이렇게 쓰려고 해도 못 쓰겠다.”

“······.”

내가 지금 이 순간에 까이는 이유도, 뭐, 그런 것이다.

“···하. 내가 대체 왜 이런 꼴을···.”

강부장은 답답함을 넘어 억울해 보였다.

무능이 죄라면, 그의 관점에서 우리 회사는 강력범죄자들의 수용소쯤 되는 곳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격이 다른 흉악범죄자, 찰스 맨슨이나 조두순 급으로서 강부장의 정신건강을 심각히 위협하는 존재인 듯했다.

대면 자체가 고역.

안구에 대한 지대한 실례.

말하자면 강부장의 한탄에는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홀로 눈 뜬 자의 비애가 담겨 있었다.

무능한 자들 사이에서 혼자 유능한 것은 어찌나 비극인가!

뭐 요딴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야 트과장.”

“예.”

“넌 대체 정체가 뭐야?”

“예?”

“뭐냐고. 경쟁사에서 보낸 암살자야? 나 스트레스로 보내버릴 작정이냐? 내가 몇 년 동안 네 기대치를 계속해서 낮춰왔거든? 땅바닥에 닿아서 더 낮아질 데도 없겠구나 했는데, 이야 이거, 이젠 아주 맨틀까지 뚫으셨네?”

“···죄송합니다.”

“뭘 맨날 죄송해. 죄송하지 말고 그냥 그만둬 인마. 어째 너는 멘트까지 구태의연하니?”

“······.”

입 다물고 있으니 강부장이 보고서를 훽 하고 던져왔다.

“뭘 멀뚱멀뚱 서 있어? 당장 싹 다 고쳐오지 못해?!”

정확히 안면을 강타하는 종이뭉치의 감촉.

음, 익숙한 감각이다.

나는 흩뿌려진 보고서를 추려서 신속하게 퇴각했다.

내 나이 마흔다섯에 능숙해진 거라곤 잘 도망치는 일밖에 없었다.

---

늦은 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홀로.

나는 스탠드등의 희끄무레한 빛에 의지해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거의 무아지경이었다.

완벽히 몰입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신을 반쯤 놓았다는 의미에서의 무아無我였다.

말하자면 골이 비었다는 것인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골 빈 상태일수록 골 빈 생각만 하게 되어있다.

무의미하고 쓸 데 없는,

이를 테면 ‘내가 앞으로 죽을 때까지 키보드를 몇 번이나 더 타건할 수 있을까’ 같은.

하루 평균 맥시멈 8,000자로 치면 한 달엔 240,000자, 그럼 세 달이면 720,000자···.

그렇군.

앞으로 나는 죽어라 노오오오력을 해봐야 고작 720,000자밖에 못 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생명이 깎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타건을 멈추었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췌장암. 세 달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열흘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최후통첩을 받은 다음 날에도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욕 처먹고, 똑같이 야근을 했다.

스스로 미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가뿐하게 그 미련한 짓을 해버렸다.

왜였을까.

상사 낯짝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버킷리스트를 체크하는 게 보통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유가 아주 어이없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내겐 버킷리스트가 없었다.

별로 살고 싶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 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이유도 없었다.

썩은 우물에 물을 부어봐야 썩은 물이 늘어날 뿐이 아니겠는가···라고

암중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 씁쓸한 깨달음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깨닫고 보니 왜인지 욱하고 치밀었다.

이 모든 걸 쉽게도 납득해버린 지난 열흘간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관성 같은 삶이었다.

내리막 같은 인생에, 무언가에 떠밀려 그저 굴러오기만 했다. 그러다 비대해진 눈덩이처럼 가속력이 붙어 죽음 앞에서도 스스로 멈추는 법을 몰랐다.

너무하잖아.

아무리 그렇게 살았다고 갈 때도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은가···.

난 데스크를 정리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시위하듯이 발을 쿵쿵 구르며 사무실을 나섰다.

“어, 트과장 이제 퇴근해요?”

“아, 예.”

경비 아저씨의 물음에 퉁명스레 답했다.

평소와 같은 관성적인 문답. 본래 나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오늘은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나는 말했다.

“경비 아저씨. 아니 배철환 씨. 혹시 제 이름 기억하십니까?”

“···어.”

그는 두꺼운 안경 너머로 나를 새삼스레 쳐다보다가 답했다.

“글세, 뭐였더라. 왜요? 청첩장이라도 주시게?”

“···아뇨. 아닙니다. 그냥 물어봤어요.”

“실없기는. 들어가요.”

“······.”

사소한 반항은 사소하게 끝났다.

나는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왔다.

뭔가 비참했다.

쏘아붙이기라도 했어야 했을까.

왜 내 이름을 모르느냐고.

그래도 매일 얼굴 보며 인사하고, 가끔 담배도 나눠 피고, 딸얘기 아들얘기 듣고 웃어주기도 하고···.

별 사이는 아니지만 이만하면 아무 사이도 아니랄 수는 없지 않나.

이름 석 자 별 거 아니라지만, 별 거 아니면 좀 기억해줄 수도 있잖은가.

그마저 귀찮을 만큼 난 하찮은 인물이었나.

무엇보다,

모르면 그냥 모를 것이지, 하필 트과장이라고만 기억하고 있을 건 또 뭐람.

트과장.

트리니티 과장, 줄여서 트과장이다.

강부장이 내게 특별히 붙여준 별칭으로, 무능 무지 무력 세 요소가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본인은 잘 지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날 볼 때마다 트과장으로 불렀고 결국 회사공식 명칭으로 박제되고 말았다.

사장에서부터 신입사원까지, 유래를 아는 사람은 비웃음을 담아, 모르는 사람은 무관심을 담아, 날 트과장이라고 불렀다.

내가 죽으면 저들은 내 장례식장에 찾아올 수는 있을까? 왔다가 못 찾아서 그냥 돌아가는 건 아닐까?

트과장 이름이 뭐야?

모르겠는데, 어쨌든 트씨겠지. 어디 트씨지? 김해 트씨인가?

식장에 트씨는 없는데?

없어? 그럼 그냥 돌아가지 뭐.

어차피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

중대한 발표를 한다.

오늘부터 나는 비뚤어질 것이다.

그 첫 번째 행보로 나는 깡소주를 까서 쩝쩝 들이켰다.

무려 지하철 안에서!

병째 나발을 부는 일탈을 감행한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상상도 못할 기행.

그러나 3달 시한부라는 무적 버프를 받은 나의 멘탈은 세인의 시선에도 끄떡없었다.

“에이씨, 아재 술냄새 나자나요.”

어떤 학생이 내게 핀잔을 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버럭했다.

“술을 마셨으니까!”

“하아?”

“술을 마셨으니까! 술냄새가 나지! 안 나는 게 더 이상하잖아! 아님 넌 땀샘에서 페브리즈라도 분비하냐아아?! 어어엉?!”

“······.”

“내가!! 술을 마셨다고오오!!”

“뭐야··· 이 아저씨 미쳤나봐···.”

내 계획은 이대로 깽판을 치다가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것이었다.

술 먹고 경찰서에 끌려가서 남천동 사는 느그 서장이랑 사우나도 가고 다 했다고 소리 지르면서 새벽 내내 진상짓을 해보고 싶었다.

경찰서에 묶여있으면, 적어도 거기 있는 경찰들은 내 얘기를 들어줄 거 아닌가.

그렇게라도 신세한탄을 해야겠다는 계산이었다.

실패했다.

사람들은 날 신고하는 대신 멀리 떨어지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지하철은 칸에 홀로 남겨진 나를 종점까지 안전하게 날라다 주었다.

종점이 날 뱉어냈다. 나는 어딘가의 역으로부터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로 추방됐다.

이게 뭐야···.

이젠 하다하다 깽판도 실패하다니.

이것도 해본 사람이나 하는 건가.

설마 깽판도 나름의 요령과 재능이 요구되는 분야였던가요. 아, 제가 그걸 몰랐군요. 이래서야 트과장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라질.

“······.”

그래도.

그래도 내게도 할 말은 있다.

난 무능하고 무지했을지언정, 적어도 무력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으니까.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다.

재능이 전부가 아니라고, 언젠가는 내 무재無才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어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내게 남은 건 뭐지.

허리디스크와 상환이 한참 남은 주택대출금, 몇백 그램의 암덩어리, 사십년 치의 외로움, 그리고 부러진 믿음.

결과적으로 강부장이 옳았다.

무능은 죄다.

내 인생은 그걸 부정하는 데서 시작해 긍정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유흥거리를 비틀비틀 걸었다.

내게 없는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 날 스쳐지나갔다.

나도 저들처럼 웃고 싶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외롭고 싶지 않았다. 혼자 죽어가는 건 싫다.

싫다.

···싫다.

비틀비틀.

아.

그리고.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왔다.

음표가 공중을 둥둥, 떠다녔다.

봄바람에 실려 표류하는 꽃가루처럼.

그건 직접 부딪혀오지 않고 내 주위를 살근살근 맴돌다 어딘가로 흘러갔다.

나는 홀린 듯이, 음악이 흐르는 계류를 거슬러 올라갔다.

이윽고 도착한 낡은 지하터널.

한 남자가 기타를 빗겨 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음- 우우-.

여긴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적어도 보이기에는 그랬다.

색이 바랜 백열등 아래서, 비닐봉지나 낙엽들이 지박령처럼 배회하다가 잠시 머물러 관객이 되고, 스피커도 앰프도 없이 다만 길을 잘못 든 가을바람만이 소리를 실어 날랐다.

그러나 남자의 읊조리는 듯한 허밍과,

낮고 딥한 목소리에 스며든 스틸기타의 쨍한 쇳소리는, 이 누추한 공간을 하나의 무대로 격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무지 꼼짝할 수가 없었거든.

묘기 같은 기교나 고음 하나 없이도, 남자의 음악은 늪처럼 내 몸을 장악했던 것이었다.

‘···소리가.’

마치 만져질듯했다.

색色도 형形도 없이, 그러나 분명한 질감으로 살갗에 달라붙는-

발밑에 차오르는 물. 덧없는 먼지. 광택을 잃은 네온사인과 길을 잃은 도시의 향기.

머물러 와류를 일으키다 또 어딘가로 흐르는

선율.

손을 뻗으면 도망가고 물러서면 머뭇머뭇 다가오는, 음과 박자로 이루어진 작은 짐승처럼

그것은.

“···아.”

꿈에서 깬 듯 음악이 끝났다.

박수도 앵콜도 없었다. 남자는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며 공연장을 다시 낡은 지하통로로 되돌려놓았다.

나는 그가 기타를 케이스에 담아 일어서려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그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충동이 들었다.

난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저, 저기요!”

“···예?”

그리고

나는

나도 생각지 못한 말을, 묵은 결석을 토하듯 뱉어냈다.

“그 기타 저한테 파시죠.”

< 1. 프롤로그 - 1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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