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프롤로그 - 2 >
“그 기타 저한테 파시죠.”
남자는 황당한듯했다.
나도 내가 황당했으므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거 파는 거 아닌데요.”
“그러시겠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꼭 좀 어떻게 안 될까요?”
“그렇게 말하셔봐야···. 이걸 팔면 저는 어쩌구요?”
“제가 드린 돈으로 새것을 사시죠.”
“아저씨가 그 돈으로 새것을 사면 되잖아요.”
“어···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됐죠?”
“하지만 전 그 기타를 원합니다.”
“저도 이놈이 필요한데요. 손에 익어서.”
“······.”
정론이로구나.
그러나 오늘의 나는 비뚤어지기로 했으므로 정론에 깽판으로 응하기로 했다.
“그래도 파시죠!”
“······.”
벙거지 모자 아래의 표정은 음영이 짙어 분간하기 힘들었다.
아마 경찰서와 정신병원 중 어느 쪽에 전화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겠지.
그러나 내겐 앞이 없으므로 뒤도 없었다.
지금만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남자의 음악이 필요했다.
어쩌겠나.
내겐 그와 같은 좋은 목소리가 없다. 음악적 재능도 없다. 내 압도적인 무재無才는 노력 따위로 메꿀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대신 그의 기타라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잠시의 침묵 후.
남자가 말했다.
“좋아요.”
“지, 진짜요?! 감사합니다!”
“근데 아저씨 재산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재산이요? 그건 왜···.”
“아저씨 전 재산 주세요. 그럼 팔게요.”
그렇군.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황당한 놈이 황당한 말을 하니, 그보다 더 황당한 제안으로 물리치려는 생각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남자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두 번째로 말하는 거지만, 오늘의 내게는 뒤가 없다.
“좋습니다.”
“네?”
“좋아요. 다 가져가세요. 집이야 융자금 범벅이니 안 가져가시는 편이 나을 거고. 여기 차키 있구요. 명의이전은 차차 합시다. 그리고 이거 직불 체크카드. 적금 통장은 지금 없는데, 주소 주시면 나중에 부쳐드릴게요. 비밀번호는 3320입니다. 뭐, 그래봐야 쥐꼬리만한 돈이지만···.”
남자의 손 위에 내 재산이라 할 만한 것을 다 털어내 쥐어주었다.
뭐, 묘비에 금칠할 것도 아니고.
좀 있으면 죽는 마당에 돈 따위 아깝지 않다.
“됐죠?”
“어어. 그건 그런데요···. 그래도···.”
“그래도 뭐요?!”
“외람되지만, 당신 두뇌 건강 안녕하신가요?”
“아 그런 거 모르겠고. 이걸로 거래 끝! 이거 제가 가져갑니다?”
“······.”
뭔가 떨떠름해 보이는 남자에게서 기타케이스를 받아들었다.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므로 얼른 튀자.
후다닥.
가슴에 안아 든 케이스는 조금 서늘했고, 두 발은 바쁘고, 심장은 콩닥콩닥 뛰었다.
재게 걸으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줄곧 음악이 하고 싶었던 거다.
어렸을 적 너바나의 1집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죽 그랬던 것 같다.
처참한 재능에 절망하고 사회생활에 파묻혀서 점점 흐릿해졌지만, 그 가느다란 열정은 기어코 살아남아 이 죽어가는 몸뚱이에서도 맥동하고 있었다.
“···하핫.”
나는 어딘지 모를 거리 한 가운데 자리 잡았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가는 와중에, 나는 어떤 공연장치도 없이 단지 기타만을 쥐었다.
튜닝은 대충.
목을 가다듬을 필요는 없다.
가다듬어봤자 어차피 난 노래를 겁나 못 부르니까.
그러나 나는, 자신의 욕망에 머뭇거려온 지난 반생이 무색하게도, 아주 흔쾌히 스트로크를 내리그었다.
기억나는 대로 코드를 짚고, 되는대로 피크를 놀리고, 무슨 노래인지 나조차 모를 정체불명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 음악은 정말로
끔찍했다.
박자는 어긋나고, 음정은 안 맞고, 코드와 멜로디가 사생결단을 낸 듯이 불협화음이 만개했다.
지금의 나는 관종짓이 주사인 취객1,
전문 소음공해꾼 김모 씨,
정신병원에서 막 가출한 질풍노도의 환자A,
이 셋 중의 하나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음이 명백했다.
“우와 저거 뭐야? 무슨 행위예술이야?”
“보지 마 보지 마. 눈 썩어.”
“안 봐도 귀가 썩는데?”
“에이씨. 빨리 지나가자.”
“대박. 존나 못함. 크크크. 찍어서 올리자.”
“우왓. 그 와중에 감정 잡는 거 봐! 저 아저씨 술 깨면 이불이 남아나질 않겠는데?”
그래 떠들어라 떠들어.
못 하는 거 나도 안다.
근데 뭐.
어쩌라고.
내가 부르고 싶다는데 너희들이 어쩔 건데?
평생,
재능이 없어서, 시도 자체가 민폐여서, 먹고 살아야 해서, 뭐 갖은 이유 때문에 억누르며 살아왔는데,
그리고 그마저도 이제 죽어나자빠진다는데, 이 정도 억지는 좀 부려도 되지 않아?
무능이 죄라고?
그래서 뭐!
팅!!
“······.”
기타줄 하나가 끊어지고, 내 지리멸렬한 노래도 끝이 났다.
아까는 몰랐는데, 나는 울고 있었다.
후련한가 하면 서글프고, 비참한가 하면 뿌듯하고, 그래도 해냈다는 마음과, 해봐야 결국 이따위라는 마음, 결국은 나도 잘 모르겠는 그런 것들이 제멋대로 섞여서는 절절 끓었다.
신이시여.
무능은 정녕 죄입니까? 응? 그렇다고?
실화냐 시발.
거 그럼 내 죄 좀 사해주쇼. 기도하면 다 사해주는 거 아닌가!
진짜 이건 좀 아니잖아요!
“그래요. 사해드리죠.”
어잇 시발 깜짝이야.
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까 기타를 판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뭐, 뭡니까?”
“아뇨, 뭐. 그걸로 뭘 하려나 궁금하기도 하고. 거기다 생각해보니 계산이 안 맞는 거래더라구요.”
“이, 이제 와서 무르기 없습니다.”
“네네. 다시 뺏을 생각은 없어요. 그럴 수도 없고. 근데···. 아우 참.”
남자가 난처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처럼 불행한 인생도 참 드물단 말이죠. 보통 그런 팔자라면 불행에 짓눌려 요절해야 할 텐데. 어떻게 꾸역꾸역 살아서 지금까지 버텨서인지··· 뭐랄까, 이자가 엄청 쌓였달까.”
“···무슨 말을···.”
“당신이 저한테 준 ‘전 재산’ 말이에요. 당신의 인생. 이거 너무 구려서 받는 쪽이 손해에요. 이를테면 마이너스 통장 같은 거죠.”
거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요.
아니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 인생? 이자가 쌓였다고? 뭔 말이야 그게?
“그래서 뭐, 거슬러드리기로 한 거죠. 참내. 이런 손해 보는 장사라니. 이래서 인간이랑은 거래하는 게 아닌데.”
남자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아주 천천한 발걸음이었지만, 나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의 범접을 허용했다.
그가 내 가슴을 툭 건드리자, 무언가 싸-하고 내 안에서 퍼지는 듯했다.
“음. 그래, 이 정도면 되겠네요. 이 정도 인과율이면 계산이 맞겠어.”
“···어어···. 방금 뭘 한 겁···.”
“별거 아니에요. 등가교환. 내가 판 물건의 값어치에 당신 인생이 합당하지 않으니, 합당하도록 저울의 추를 맞춘 겁니다.”
“잘 모르겠지만··· 그럼 이거 안 돌려드려도 되나···.”
그가 건드린 가슴을 잠깐 내려다보았다가 시선을 올리니,
“···요?”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어···엉?
뒤를 돌아보았다.
없다.
공터는 날 비웃던 관객들조차 사라지고 텅 비어있었다.
내가 취했나?
그래. 취한 게 분명하다.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기타만은 잘 챙겨서 자리를 벗어났다.
근데 왜 이러지.
자꾸 졸립다. 발걸음이 느려진다.
취해서 그런가?
그래 나는 취했지. 암에도 걸렸고. 내 인생으로 산 기타도 있다. 눈이 자꾸 감기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무슨 말이지?
모르겠다.
현기증이 나서 주저앉았다.
반듯하던 거리가 옆으로 기울었다. 아니 내가 기울어진 건가? 어쨌든 지구와 내가 가까워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이윽고 땅과 내 몸이 접선했다. 열정적인 키스였다.
지구야 사랑해.
우리 오래 가자.
“이번엔 제대로 살아봐요. 이한열 씨. 당신 노래,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어.”
천천히 암전되는 의식 속에서
왠지 모르게 그런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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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나는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먼지가 앉은 낡은 선풍기도, 군데군데 삭은 촌스러운 페인트 벽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나.
이게 무슨 상황인가 파악하기 위해 잠시간의 시간을 할애했다.
가장 이성적인 답은 어제 술에 취해서 헛것을 보고 쓰러져 병실로 실려 왔다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답은?
글쎄.
어린 시절로 회귀라도 한 거 아닐까.
그럴 리가 있나.
나는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침 앉은키 높이에 벽거울이 있어 내 모습이 비추었다.
매우 지당하게도, 거울 안에는 중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웬 학생이···
···응?
으으응?
어라라라?
“이거 실화냐.”
그때 칸막이 커튼이 휙 열리며 흰 가운을 입은 여인이 등장했다.
“응? 한열이 일어났니?”
“어, 음, 당신은 누구십니까?”
“뭐야 그 반응은. 컨셉이니?”
여인은 웃음기 하나 없이 말을 받아넘기더니, 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 순간 오래된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난 그녀의 이름이 이현지이고, 내 고딩 시절의 보건교사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열은 내렸네. 더 안 좋은 곳은 없고? 괜찮으니까 말해봐.”
“선생님.”
“응?”
“제가 아무래도 회귀한 것 같습니다.”
이 선생님은 순식간에 측은한 표정이 되셨다.
“그래. 우리 한열이 아직 아프구나. 더 자자.”
그녀는 이마를 짚은 손을 쓱 밀어 나를 다시 눕혔다.
한창 현실감 없는 와중에 손의 온기만은 선명했다.
와 손 겁나 부드러워.
근데 내가 이름으로 불린 게 얼마만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 1. 프롤로그 - 2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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