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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재효였다..
" 형! 뉴스 보셨어요?! 지금 거리 장난 아니에요! 다들 피신중이예요! "
다급한 목소리. 이 상황에서 침착한 게 이상한 것일 테다.
" 그래! 침착하고 지금 집이니? "
" 네! 지금 미란이랑 같이 있어요! 형은 괜찮은가 해서요! "
이 상황에 걱정해주는 녀석이 매우 고마웠다. 그렇다고 마냥 고마워 할 틈 없이
말을 이어갔다.
" 그래 다행이네. 우선 집에서 먹을 거 왕창 들고 와서 우리 집에 같이 있자.
너희 부모님이 지방에 계시니까. 지금 내려 갈수도 없는 상황이니 뭉쳐 있는
게 좋아. 아직까지 시내는 크게 안 밀리니까 최대한 많은 물품을 챙겨와.
조심해서 오도록 하고 "
" 네 형! 근데 미란이랑 친구랑 같이 있어서 괜찮죠?"
" 그래. 안 될게 뭐가 있겠니. 조심해서 오고 형도 사태를 좀 알아봐야겠다! "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서는 담배를 물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 우후.... "
아무리 좀비라지만 동시에 수백만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평화롭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 전시국가였다. 80%가 넘는 병력은 전방에 배치되어있다고는
하지만 수방사와 경찰 등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이 있다. 대한민국 20대 후반의
남자라면 길가다가 아무나 잡고 실탄사격 해봤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예스다.
여차하면 예비군들 소집을 해도 된다. 그런데 왜... 만 하루도 안 돼서 계엄령까지 선포될 정도인가. TV를 켜놓고 계속해서 나오는 뉴스를 봤다.
- 현재 일부 병력이 통제력을 잃고...
- 시민들이 현재 약탈을 일삼고 있으며...
- 많은 예산이 들어간 무기들이 제 성능을...
암울한 소식들.. 군대는 사람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훈련한다. 현재는 사람과의 전쟁이 아닌 일종의 괴 생명체를 상대로 하는 전쟁. 당연히 지금까지 해왔던 훈련 중 쓸모 있는 건 사격술 그리고 체력정도 일 테다. 사격술이라 해봐야 서있는 표적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쏴보지 않고는 모른다. 만약 영화에서의 좀비와 같은 생명체라면 머리나 척추를 쏴서 피해줘야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머리를 노리고 사격을 할 수 있을까? 제대로 쏘지 못해 계속해서 자신 앞에 피를 뚝뚝 흘리며 다가오는 생명체를 보고 멀쩡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장교나 부사관 들은 뒤에서 소리만 지르고 앞에서는 겁에 질려 제대로 쏘지도 못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군을 이탈하는 병력이 많아질 것이다. 지급받은 총과 탄약을 가지고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
물론 전차나 장갑차로 밀어 버릴 수도 있으나 서울근교 군부대에서 얼마나 많은 전차를 가지고 있을까. 밟고 밟고 또 밟아도 언젠가는 떨어지는 연료. 노후화된 전차들은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고장으로 멈춰버리기 일수였다. 군, 경찰 내부에서도 하나둘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하자 상황을 점점 악화되어 갔다. 전투기의 미사일이나 전차의 무기들을 아직까지 생존자가 더 많은 서울시내에
쏠 수도 없었다. 상황이 나아져서 괴 생명체보다 일반인 사망자가 더 많아 버리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혹여나 잘못 쏴서 아파트 단지에 떨어져 버리면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 생명체로 만들어 버릴 짓이었다. 아파트 단지뿐만 아니라 어느 건물을 잘못 쏴도 수백의 사람이 죽어갈 것이었다. 차라리 일반소총탄이나 기관총탄이라도 많아야 할 텐데 대한민국 군대의 총기관리가 어떤지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
테다. 당연이 엄격한 만큼 꺼내 쓰기도 힘드니 보급조차 원활하지 못했다. 결국
전진보다는 문을 걸어 잠그고 밀려 도망가는 상황만 방지하고 있었다.
" 하...하... 뭐...이런 말도 안 되는... "
차라리 급하게라도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갔으면 죽더라도 식구들과 함께
있을 텐데 설마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나 했을까. 아직까지 통신이나
전기는 원활해서 미국에 전화를 해봤지만 국가끼리 통화는 힘든 상황인지 그 쪽
상황이 어떤지 통화가 되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 중에 재효가 도착하였다.
" 형!! "
겁에 질린 눈을 하고는 뛰어오는 재효. 감정에 휘둘리는 행동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 그래. 어디 다친 곳은 없냐? "
" 네! 아직까지 그렇게 심각한건 아닌가 봐요. 거리도 생각보다 밀리지 않았어요."
" 아닐걸. 넌 이 상황에서 사람들과 반대방향으로 온 거잖아. 다들 내려가는데
넌 올라온 거니까. "
재효 뒤를 보니 익숙한 미란이 옆에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재효가 말해줬다.
" 아.. 은혜라고 해요. 미란이랑 친한 동생인데 오늘 다 같이 놀기로 약속을
한 상황에...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170은 되어 보이는 키와 늘씬한 몸. 그리고 동양에서 보기 힘든 글래머
스타일 얼굴도 조막만하고 아름다운 외모라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 내가 소개시켜준다고 했던 동생인데. 이런 상황에 소개를 시켜주게 되네. "
미란이의 중얼거림에 난 미소를 지었다.
" 이런 상황이라니.. 아직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너무 부정적으로 가지 말자. 우선 뭐라도 마시면서 숨 좀 돌리고 뉴스를 보고
있어. 새로운 소식이나 대응법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재효는 내 노트북
가지고 응급법이나 생존법 같은 종류 모두 다운받아서 넣어놔. 돈 들어가도
상관없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되니까. 아직까지 전기나 수도, 인터넷은
돌아가니까 준비는 해놓자. "
그러나 기대와 달리 뉴스와 인터넷에서는 암울한 소식만 들려왔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전 세계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그나마 대한민국은 상황이 좋은
쪽이었다. 옆 나라 일본과 중국은 거의 쑥대밭 수준이라고 한다. 인구가 많은
중국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변해갔고 인구밀도가 높은 일본에서도
감염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맞서 싸웠지만 체력과 무기의 한계로 결국 감염체로
변해갔다. 어제부터 내린 세찬비로 생존자들은 더욱더 힘들어져 갔고 방송용
헬기가 상공에서 찍은 영상은 수만의 감염체들이 뭉쳐 다니는 모습만 보였다.
" 좋은 결과는 버려야 하는 건가... "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다들 대답은 안했지만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 이젠.. 전화가 안 되네요 형. "
" 아마 통화량 폭주 때문이겠지. 가족이나 친구한테 제일 먼저 전화 할 테니까 "
다들 식구들의 안부가 걱정 되는 건 당연했다. 나는 가장 연장자로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짐을 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4명이 생존에서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 어..근데 우선 다들 옷부터 좀 갈아입자. 놀러가는 중 이었나 본데 그 계획은
접고 정리부터 하자. "
미란이와 은혜는 상당히 짧은 미니스커트에 노출이 있는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재효도 한껏 꾸민 정장스타일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그래요 형. 우선 옷부터.. "
현관에 대충 던져 논 캐리어들이 보였다. 흔히 말하는 이민가방과 화물용
캐리어들 몇 개가 보였다.
" 어디..이민 가냐.. "
어의가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그 상황에서 언제 저걸 다 챙긴 건가
싶었다.
" 옷가지들 하고 먹을거리요. 많이 챙겨 오는 게 좋을 듯해서요.."
" 전화 끊고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정말 빠르게 챙겨왔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재효였다. 빈방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미란이와
은혜가 나왔다.
" 아..아깐 정신없어서 제대로 소개해 줄게. 오빠. 여긴 은혜야. 나 어렸을 때
부터 알던 사이고 지금은 회사에서 모델도 해주고 제법 이쪽에서 유명해서
TV에도 나왔었는데 봤지? "
" 미안..TV 안 봐... "
" 아.. 아니에요. 이 은혜라고 해요. 어..잘 부탁드립니다.."
" 그래요. 저도 잘 부탁...을 뭘 부탁한다고 이런 인사를 하고 있는 거냐?
우선 편하게 있어요."
묘한 상황이었지만 생긋 웃으면 답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평소 모습은
굉장히 섹시해 보이는 이미지였지만 웃는 모습은 마냥 어린아이 같았다. 남자
꽤나 울렸을 거란생각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들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식료품을 챙겨 냉장고에 넣어 놨다. 대형 냉장고 2대와 김치냉장고
4대에 가득 담고는 캔 맥주들을 챙겨 거실에 앉았다. 이런 상황에 술이라도 조금
맥주 한 캔씩을 비우고는 다들 말없이 TV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 그리고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다들 표정에서 드러났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몰랐고 집에서는 빗소리와 맥주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 자..다들.. 죽어가는 사람처럼 그런 표정으로 있지 말고 앞으로 상황에 대해서
의견을 말해보자. 난 한동안은 여기서 머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재효와 미란이는 부모님에게 전화 드렸어? 지방에 계시는
걸로 아는데..?"
" 아.. 간신히 통화가 됐어요. 서울보다는 심하지 않지만.. 비슷한 상황인
모습이에요."
" 은혜 부모님은..?"
" 지금 일본에 계세요. 휴가차... "
" 통화는 됐니?"
" 아뇨... 계속해서 하는데.. 신호가 가지를 않네요."
" 우선..계속해서 해보고."
" 네.."
표정을 보니 엄청 걱정이 되는 모습이었다. 물론 누구라고 걱정이 되지 않겠냐 만 다들 부모님과 떨어져 있으니 자신만 티 나게 걱정하는 것도 미안했나보다.
" 나도 부모님이 미국에 계시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무사하실 거야."
애써 위로의 말을 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는 모습은 아니었다.
국가는 현재 밀리고 있는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차츰
밀리고 있었다. 부랴부랴 서울을 버리고 경기도에 대피소를 마련하고 아직
피해가 심각하지 않은 남쪽을 중심으로 대피소를 마련 중에 있었다. 생존자들은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기대하고 집에 있거나 차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무작정
대피하고 있었다. 아직 경기권외에는 정식으로 마련된 대피소도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고 싶은 마음일 것이었다.
다행이 먹을거리는 충분한 듯 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4명이 잘만 한다면 꽤 버틸 듯 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전기가 들어온다는
조건이 있어야 했다. 전기가 없다면 냉장고는 물론이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TV, 컴퓨터등도 짐짝에 불과하게 변한다. 특히 냉장고 없이 보관 할 수 있는
식량은 며칠분도 안 된다. 집에서 먹을거리 꺼낼 때 90%는 냉장고에서 꺼낸다. 라면이나 건조식품이 아닌 이상 모든 식품들이 냉장 보관되어있다. 가장 중요한 식수는 그래도 꽤 많은 편이다. 생수도 상온에서 몇 달 이상 보관 할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그전에 다 소비가 되겠지만 당장 걱정할 거리는 아니었다.
" 천만 다행인건 우린 먹을거리가 꽤 되는 상황이지. 대충 봐도 보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디까지 아껴 먹는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우선 유통기한이
짧은 것부터 먹어치우고 저장이 오래되는 것들은 안쪽에서 보관하자. 미란이는
욕조에 물 좀 받아주고 은혜는 주방을 뒤져서 물을 담을 통에 물을 받아놔 줘.
재효는 나랑 창문에 빛이 세어나가지 않게 하자. 밖에서 봤을 때 사람이
머무르고 있는 것을 알면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 이럴 때 좀비 비슷한 것도
무섭지만 사람도 무서운 법이니. "
다들 내말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이제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한지 하루도
안된 시점. 앞으로 나아갈 길이 멀고 험한 길임을 알았다. 뉴스에서는 대피요령에 대해 방송하고 있었다. 굳이 저런 방송을 안 해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문을 잠글 텐데.. 그나마 좀비영화나 괴 생명체 영화의 영향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아마 지금은 사태가 주춤해도 먹을거리가 떨어지는 시점에서 또다시 감염이 늘어날 테다.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주요시설에 대한 피해는 거의 없는 듯 했다. 전쟁이라면 시작직후 바로 발전소나 주요 건물을 요격 했을 텐데 감염체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생존자뿐이라서 주요시설은 온전한 상태였다. 거기에 발전소만 하더라도 꽤 튼튼한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있어서 지능이 거의 없는 감염체가 올라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감염체중 아이슈타인 급이라 밧줄이라도 던져 보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은 말이다. 현재 빌라만 해도 원래 고급빌라로 신축하였으나 근처에 개발이 더디게 진행되어 시세가 엄청 낮게 되어있어서 입주가 가능했다. 50여 세대가 있는 단지였고 복층구조로 된 빌라였고 각각의 입구가 반대로 되어있어서 윗집아랫집에 누가 사는지 마주칠 일도 없었다. 주차장도 지하가 아닌 지상에 자동문을 둔 주차공간이 있어서 밖에서 보면 어떤 차를 가졌는지도 알 수도 없었다. 즉 일반 주택 같은 형태이지만 아파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폐쇄적인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지금 현재로서는 최적이 된 셈이었다.
" 오빠 대충 정리가 된 듯해요. "
" 응?? 아...수고했어요. "
잠시 딴 생각을 하며 앉아있는 나에게 와서 은혜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것도 있지만 정확히 얼굴을 본 것이 이번에 처음이라 놀란 것도 있었다.
가벼운 화장만 했지만 하얀 피부에 잡티하나 없는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에
큰 눈과 옅은 갈색의 눈동자. 확실히 미인이었다. 거기에 큰 키에 엄청나 글래머!
늑대의 무리들이 떼로 몰려올 그런 존재였다. 175인 내 키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확실히 하체가 길어 나보다 커 보이는 모습이었다.
' 이런 상황에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정신 차리자! '
속으로 다짐을 했지만 눈은 은혜를 바라본다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는 늑대인가보다. 아침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다들 먹은 것이 없다보니 배가 고팠다. 부랴부랴 냉장고를 뒤져 고기를 꺼내서 굽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냄새가 심한 요리를 한다는 것은 위험하긴 했지만 아직 초기이고 어차피 전기가 없다면 금방 상해버릴 고기 빨리 먹어버려 체력이라도 보충하자는 의도였다. 다들 게 눈 감추듯 밥과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배가 부르고 나서야 슬슬 현재 이 상황에 대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우선 여기서 최대한 버틴 뒤에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봐요 형
지금 뉴스에서도 그렇지만 엄청난 인원이 이동하고 있어서 어디든
주차장일 텐데 괜히 거기서 감염체라도 만나면 그냥 저세상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아직까지는 안전한 곳이니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는 편도 나쁘지
않을 듯해요."
" 나도 찬성이야. 여긴 그래도 꽤 튼튼하게 지어져서 외부인이 들어 올 수 없으니
감염체도 마찬가지 일 테고 먹을거리도 버틸 만하고 상황을 좀 지켜보자. "
" 근데 오빠 만약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
나와 재효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란이 물었다. 직설적인 성격의 미란이라 그런지
역시 질문도 직설적이다.
" 만약...영화에서처럼 그런 상황이 오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살아야겠지.
영화에서는 총기류가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에겐 그런 게 없어. 그러니 최대한
조용히..빠르게 이동하면서 지내야겠지. 그나마 다행인건 옆 공터에 내 카라반
이 있으니까 생활은 되겠지. 그런 상황이 되면...그 때 가서 다시 생각해봐도
늦지 않을 듯한데... 지금은 우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자. "
나의 말에 미란이도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뭐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도
아니었을 테지만 말이다.
재효와 나는 열심이 인터넷을 뒤져 필요한 정보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다행히 용량이 큰 외장하드 덕에 용량 걱정 없이 닥치는 대로 다운을 받았다.
미드. 영화. 드라마 등 혹시나 장기전으로 갔을 경우 아무리 생존이라지만 어느
정도 놀이편이 필요했다. 손바닥 크기의 외장하드는 수천편의 영상이 들어가니
한동안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 했다. 미란이와 은혜는 뉴스를 시청하면서 여러
정보들을 노트에 적어갔다. 대피소 위치나 감염체의 약점, 감염경로등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중하며 TV를 시청 중 이었다. 다행히 인터넷 속도는 양호한 편이라
꽤 많은 양을 다운받았지만 시간을 오래 걸리지 않은 편이었다. 이 와중에
한가롭게 영화나 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밖에는 아직도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계가 없었다면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으니까.
비흡연자인 여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발코니로 담배를 피러갔다. 몇몇 빌라에
불빛이 보이는걸 봐서는 아직까지 여긴 안전한 듯 했다. 얼추 정리가 되어
정보를 종합해 본 결과 직접적으로 감염체의 체액이 일반사람의 피부 속으로 접촉이 되어야 감염이 되는 듯 했다. 단지 피부에 감염체의 침이나 피가 묻는다고 감염이 되는 것은 아니고 물리거나 상처부위에 체액이 침투해야 감염이 되는 듯 했다. 사지가 멀쩡한 감염체의 속도는 우리가 평균적으로 걷는 속도와 다르지 않았다. 단지 무식하게 밀고 들어오는 모습에 다들 사기가 떨어질 뿐..
" 후...등짝이 결리는데...너무 오래 앉아있었다.. "
난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다. 다들 긴장감으로 온몸이 굳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비까지 내리는 상황에 눅눅해져 버린 공기는 그런 느낌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버렸고 난 춥지는 않지만 눅눅한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보일러를 가동했다. 앞으로 상황이 나빠진다면 더 험한 환경에서 지내야
할 텐데 아직까지 안전한 상황에서는 최대한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 자자..다들 이만 하고 오늘은 쉬자. 내일을 위해 체력을 아껴야지. "
다들 얼마나 집중했는지 충혈 된 눈들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어찌 보면 귀여운
그 모습에 난 약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나의 미소를 본 아이들은 긴장이
풀리는지 약간은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 그런데 오빠 우린 어디서 자 ? "
" 난 내방에서 자고 미란이랑 재효는 작은 방에서 자. 그리고 은혜는 안방에서
자도록 해. 침구류는 많으니까 안방 장롱을 열어서 맘에 드는 것을 찾아가고
화장실도 2개니까 크게 불편이 없을 거야. 그리고 2층은 창고 비슷한 거니까
혹시나 필요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 내일 찾아보자. "
" 아..오빠 제가..안방을 써도...되나..싶은데요.. ? "
약간은 어색한지 은혜가 말을 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집인데 집에 가장 어른이
묵는다는 안방을 쓰기 조금 부담스러웠나 보다.
" 내가 흡연자라 내방은 좀 그렇고 아니면 재효랑 바꿔 자던지. 어차피 안방은
모양일 뿐이야. 이사 와서 집에서 주무신 시간보다 밖에서 지낸 날이 더 많은
부모님이라 크게 상관 하지 마 "
" 음..그럼 미란언니랑 바꿔서 잘게요. 조금... 부담스러워서.. "
" 편한 쪽으로 해. 최대한 배려 해줄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안방에 화장실이
따로 있어서 은혜를 배정할까 한 거니까. "
" 네. 감사 합니다 "
이 상황에서 처음 본 자기를 배려 해준다는 게 좋은 기분이었나 보다.. 생각보다
감정이 표정에 배어나오는 스타일이었다.
' 도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활발하네... '
은혜를 보면서 느낀 점이었다. 예쁘면 얼굴값 한다는 소리는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경험상 얼굴이 예쁘면 자신도 알기에 약간은 콧대가 높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허나 은혜는 그런 쪽은 아닌 듯 했다. 그래서 미란이가 몇 달 전부터
그렇게 소개해준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허영심에 가득한 아이보다는 순수한
성격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꾸밈없는 성격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아무리 예뻐도
심성이 좋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면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는 차라리 솔직한 애가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런 우리 둘을 보고 뭐가 좋은지 재효와 미란이는 귓속말과 함께 엷은 미소를 보였다.
" 난 먼저 들어갈 테니 다들 할거 해. 먹을거리나 그런 건 냉장고에 많으니
먹도록 하고. 그럼 난 이만. "
난 아이들을 뒤로 한 채 방에 들어왔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뭐든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잠이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눈이 일찍 떠졌다. 시계를 보니 아직 8시를 약간 넘긴 시간..긴장감에 잠이 들어서 인지 체력이 회복되는 선에서 잠이 깨어난 듯했다. 그리고 밖에서 쉴 틈 없이 번쩍거리는 천둥번개로 더 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집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편한 반바지와 티를 걸치고 나갔다. 이미 아이들은 일어나서 샤워를 마쳤는지 아직 머리가 마르지 않은 채 미란이가 수건을 머리에 감싸고 있었다.
" 일어났어? 오빠? "
" 응. 잘 잤니? 일찍 일어났네? "
" 아뇨..밤새도록 천둥번개에 빗소리에.. 그나마 재효 오빠가 옆에 있어서
좀 잘 수 있었어. 여기 왜 이렇게 방음이 허술해!"
평소 잠귀가 밝아 방에 시계조차 없다고 했었다. 어제의 상황은 정말 괴로웠겠지.
그리고는 화장실 문이 열리고 은혜가 나왔다. 긴 운동복바지에 몸의 굴곡이 그대로 나타나는 회색 티를 입은 채.. 여자가 가장 섹시해 보이는 순간이라고 한 젖은 머리를 한 채 수건을 머리에 감으며 나오고 있었다. 가슴부위에 티는 이미 탄력성을 잃었는지 바늘로 찔러도 바로 찢어져 버릴 만큼 늘어나 있었다. 난 나의 시선을 느낄까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이런 원초적인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 잘 주무셨어요. 오빠 ? "
" 으..? 응!! 난 한번 잠들면 잘 못 일어나는 편이라. 은혜는 잘 잤니? 잠자리가
바뀌어서 불편 했을 텐데.. ? "
" 아.. 괜찮았어요. 크게 불편함은 못 느꼈어요. "
" 다행이네... 그리고 말 편하게 해. 어차피 미란이랑 재효도 편히 하는데 너만
존대가 나한테는 더 불편하니까 "
" 그래도...되요? "
" 응! 편히 해 그래야 앞으로도 지내기 편하지 "
" 네! 아니..응! "
다들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아침부터 화기애애했다. 간단하게 아침 요깃거리를
한 후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