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화 (1/195)

Prologue. D-1

전문의 시험 전야.

이제 시험까지는 채 12시간도 남지 않았다.

공부는 충분했다.

최고의 교수님들 밑에서 가장 좋은 수련을 받았으며 시험 준비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

책장을 덮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의대 6년, 인턴 1년 그리고 레지던트 4년.

긴 시간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의학전문대학원을 통해 의사가 되었거나 중간에 군대를 다녀왔다면 15년 이상이 걸렸을 테니까.

레지던트 수련 동안 때로는 주 120시간 근무도 해야 했지만 큰 사고 없이 그런대로 잘 버텼다.

그리고 이제 전문의 시험이라는 최종 관문 앞에 섰다.

시험을 앞둔 긴장감이 적지 않았으나 그보다는 일단 시험 끝나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일이 지나면 정신과 전문의로서의 삶이 시작되리라.

그렇게 믿고 있었다.

늦은 시간 걸려온 후배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선생님, 9병동에 사고가 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병실 하나가 통째로 날아갈 정도의 폭발이 있었다고 했다.

사고 원인조차 파악이 되지 않는 상황.

“다친 분들 없어? 환자들은? 다른 선생님들은?”

“…….”

무거운 침묵.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

“바로 갈게. 의국이니?”

“선생님, 지금 조사 중이라 새로운 소식 나오면 알려드릴게요. 일단 병원엔 오지 마시고 거기 계세요. 내일 시험도…….”

후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차장으로 달려나갔다.

생각해보면 그때 후배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최소한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오는 화물 트럭에 차가 뭉개지는 사고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구겨진 운전석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지만 다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에 감각이 없었다.

‘젠장. 척수 손상인가…….’

이어지는 극심한 두통.

운전대를 쥔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의식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리고 나는,

정신과 레지던트 1년차로 근무를 시작한 첫날.

4년 전의 그 날로 되돌아갔다.

* * *

1화 Chapter 1. 회귀물의 주인공(1)

하루 전.

삼아대학교병원 9병동 면담실.

“몇 번을 말해야 아시겠어요? 저는 미치지 않았다고요! 제발 퇴원시켜 주십시오!”

세상 가장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환자.

“아직 퇴원은 어렵습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를 만류하는 의사.

벌써 30분째.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진정이요?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가족들이 위험합니다! 지금 당장 나가서 구해야 한다고요!”

환자는 금방이라도 폐쇄병동 문을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시현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환자의 눈을 피해 차트를 흘끔 보았다.

[정문수 남/34세 R4 천시현 / 담당 교수 Prof. 진철영]

- 입원 33일 차.

- 알 수 없는 세력이 자신과 가족들을 감시하고 괴롭히고 있다는 망상.

- 그에 동반된 극도의 불안감.

- 반복적인 퇴원 요구.

‘PANSS score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

망상의 심각도를 평가하는 척도는 입원 당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입원 후 꽤 오랜 기간이 지났다.

면담에 적잖이 공을 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태는 지금껏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더 나빠졌다.

덜덜덜.

환자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손은 언제부터 그런 겁니까?”

“며칠 됐어요. 지금 손이 중요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내가… 우리 아이가…….”

환자가 울먹였다.

그러나 시현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손 떨림,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구부정한 자세.

피해망상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하고 있는 약물, 팔리페리돈에 의한 추체외로증후군(Extrapyramidal syndrome, EPS)이 분명했다.

한때는 약을 몰래 버리는 것은 아닌지까지 의심했었다.

하지만 EPS는 약을 먹지 않고 있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부작용이었다.

‘항정신병약물은 이미 최대치…….’

몇 차례 약물을 교체하기도 했으나 환자는 어떤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망상장애 환자들을 진료했지만 이런 환자는 또 처음이었다.

- EPS 조절 목적으로 Procyclidine 5mg BID 투여할 것.

시현이 무신경하게 차트를 적어 내려갔다.

“가족들이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한 적이 없으시잖아요?”

답답하다는 듯 시현이 물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죠?”

“그걸 알게 된다면…… 천시현 선생님도 무사하지 못해요. 정말입니다.”

그간 줄곧 방어적인 면담 태도를 보여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담당 의사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해서였다니.

자꾸 퇴원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만 빼면 애초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저는 괜찮을 겁니다. 말씀해 보세요. 면담 내용에 대해선 비밀을 보장합니다.”

시현이 최대한 환자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긴 침묵 끝에 환자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라면, 일종의 예지력인가요?”

시현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간혹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환자들은 자신이 앞날을 훤히 꿰고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기도 하니까.

“이렇게 말하면 미친놈 취급받을 게 뻔하지만…… 알면 안 되는 걸 너무 많이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망할 정보들 때문에 지금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거고요.”

환자가 울분을 터트렸다.

지금껏 퇴원만을 요구할 뿐 극도로 말을 아끼던 그였다.

‘앞날에 대한 정보 때문에 고생을 한다, 라.’

이해하기 힘든 말들뿐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큰 진전이었다.

“응급실에 같이 오셨던 가족분들 잘 지내고 계세요. 어제도 정문수님이 잘 계신지 궁금하다고 병동으로 전화 주셨어요. 그러니 우선은 안심하세요.”

“그 사람들 진짜 제 가족이 아닙니다! 다 가짜예요! 선생님도 속고 있는 거라고요!”

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카그라스 증후군(Capgras syndrome)?’

다른 사람이 가족과 똑같이 변장하여 가족 행세를 하고 다닌다고 믿는 망상의 일종이었다.

피해망상에 과대망상 그리고 카그라스 증후군까지.

- 이 환자는 4년차가 봐라.

입원 당일 담당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레지던트 4년차인 시현이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환자였다.

“뭔가 사정이 있으셨군요.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시현이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환자는 진실로 자신의 가족이 위협에 처했다고 믿고 있다.

비록 망상이라 할지라도,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겪는 힘듦만큼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였다.

“가족들 생사라도 확인하고 싶은데 도저히…… 그러니까 어서 퇴원시켜 주세요! 당장!”

“사정은 알겠지만 지금 퇴원은 무리입니다. 당분간은 이곳 병동에서 치료를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대로 퇴원해버리면 환자는 평생 어디에도 없는 ‘진짜 가족’들을 찾아 돌아다니게 될 테니까.

“그리고 죄송하지만 이제 제게는 정문수님을 퇴원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내일부터 담당의가 바뀌게 될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시현의 말에 환자는 꽤나 당황한 듯했다.

“내일이 저희 전문의 시험이라서, 오늘 근무가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중간에 담당의가 바뀌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문수를 처음 맡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시험 바로 전날까지 진료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시험이 채 24시간도 남지 않은 탓에 시현도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제는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의외로 환자는 바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하루빨리 완쾌하시길 바랍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가족분들도 무사하셨으면 좋겠어요.”

시현은 환자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향후 치료 계획을 차트에 남기기 시작했다.

- 팔리페리돈 12mg까지 증량하여 유지 중이나 망상 공고하며 부분 반응조차 없음.

- 향후 항정신병약물 변경 필요할 것으로 생각됨.

“천시현 선생님.”

면담실 문을 열다 말고 환자가 시현을 불렀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제 생각이 맞는다면 선생님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위험하다니?”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게 다 저 때문이었어요.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망상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당분간은 꼭 조심을…….”

환자는 말끝을 흐리며 그렇게 면담실을 나갔다.

* * *

“내일 시험인데 지금까지 병원에 있으면 어떡하니?”

면담실을 나서자 흰 가운을 입은 남성이 시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정신과 전임의 김석용.

오늘따라 가운 포켓에 달린 은색 명찰이 눈에 띄었다.

그는 시현의 1년 선배로 지금은 삼아대병원 정신과의 펠로우로 근무하고 있었다.

“심한 환자가 있어서요. 어쩌다 보니 오늘까지 하게 됐습니다.”

“애썼다. 그래도 어서 가봐야지. 그랜드 힐온 호텔인가?”

“네. 올해도 같네요.”

시험 전 며칠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레지던트 4년차들이 호텔을 빌려 합숙을 하곤 했다.

한 해 동안 학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내용들도 공유하고 시험 직전에 나오는 정보들도 최종 정리하면서 마무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우리 천 선생 애먹인 환자는 누구야? 정문수님?”

“네. 지금껏 이렇게 치료 반응이 없는 환자도 처음이에요.”

“그렇단 말이지. 내가 보기에도 좀 독특한 것 같긴 했어. 전형적인 망상 같으면서도 뭔가 좀 달라. 묘한 느낌이 있달까.”

“일단 3년차에게 인계하긴 했는데. 걱정입니다.”

“그래? 그럼 내가 맡아서 볼까?”

뜻밖의 제안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이미 전문의인 데다 성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석용이라면 안심이었다.

“저야 감사하죠.”

“그래. 환자 걱정은 말고 어서 가서 마무리 잘해.”

김석용이 싱긋 웃어 보였다.

“수선생님, 어서 병동 문 열어주세요. 천시현 선생 환자 본다고 공부를 못해서 잘못하면 시험 떨어지게 생겼어요.”

그리고는 수간호사 쪽을 보며 말했다.

정신과 폐쇄병동은 자살사고가 있는 환자부터 행동 문제가 심한 환자까지 다양한 환자들이 입원하는 곳.

병동을 나가기 위해서는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문을 열어줘야만 했다.

“엥? 나 천쌤 보내기 싫은데? 여기서 레지던트 4년만 더 하고 가요. 하하하.”

수간호사가 아쉽다는 듯 농을 건넸다.

‘차라리 욕을 하세요. 욕을…….’

4년을 더 하라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시현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어? 근데 이게 왜 안 열리지?”

수간호사가 반복해서 버튼을 눌렀으나 병동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지 마시고 얼른 열어주세요. 우리 천 선생 진짜 바쁘다니까요?”

“이거 개폐 장치가 먹통인데요?”

“네? 그게 갑자기 왜…… 제가 한 번 볼게요.”

철컥.

김석용과 수간호사가 한참을 매달려 낑낑댄 후에야 병동 문이 열렸다.

“휴, 이제 되네. 천쌤 시험 잘 보고 와요.”

“우리 병원 정신과 39년 연속 전원 합격인 거 알지? 40년 연속 가자!”

김석용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네. 그럼 시험 마치고 뵙겠습니다.”

시현 또한 두 사람을 향해 씩 웃어 보인 뒤 서둘러 병동을 나섰다.

* * *

7 : 30 PM

그랜드 힐온 호텔.

타 병원 레지던트들을 만나 자료를 교환하고 이야기를 나눈 시현은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밖에는 전구 장식을 한 조경수들이 빛나고 있었다.

새해가 밝았지만, 아직도 연말 분위기였다.

‘느긋하게 쉬고 싶다. 시험만 아니면.’

깔끔하게 정돈된 침구가 그를 유혹했다.

시현은 보고 있던 책을 덮고 침대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날이 오기까지 참 긴 시간이 있었다.

‘11년인가.’

의예과에 입학해서 본과를 졸업하기까지. 삼아대 병원 인턴에서 정신과 레지던트가 되기까지. 졸음과 싸우며 지샜던 수많은 당직. 기억에 남는 환자들.

참 힘든 시간이었는데 막상 돌아보니 웃음이 나왔다.

시험을 앞둔 긴장감도 적지 않았으나 그보다는 일단 시험 끝나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일이 지나면 정신과 전문의로서의 삶이 시작되리라.

물론 2차 시험도 남아있고 합격자 발표가 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일단은 그렇게 믿으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딱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 그랬다.

[R3 김원기]

발신자는 후배 레지던트 김원기였다.

시험 잘 보라는 덕담은 진즉 주고받았기에 이 시간에 오는 전화는 좀 의외였다.

“원기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선생님, 큰일 났어요. 병동에 사고가 났는데…….”

김원기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고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병동이 불이 났습니다. 지금 김석용 선생님하고 수간호사님이 중태예요. ICU(중환자실) 담당 말로는 바이탈이 너무 불안하다고 합니다.”

“갑자기 병동에 왜? 대체 무슨 일인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근무했던 병동이었다.

“아직 원인도 못 찾고 있어요. 뭔가 폭발한 것 같은데 904호 병실 쪽은 완전히 날아갔어요. 4년차 선생님들한테는 따로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차피 곧 뉴스에 나올 것 같아서…….”

“…….”

[속보] 삼아대병원 병동에서 화재. 사상자 총…….

TV를 켜자 그의 말대로 화재 소식이 속보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게 뭐야…….’

비현실감.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아까까지도 함께 웃고 떠들었던 동료들이 의식을 잃고 누워있다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바로 갈게. 의국이니?”

“안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지금 조사 중이라 다 폐쇄돼 있고 내일 시험도 있으신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진정이 되지 않는다.

시현은 김원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텔 방을 나서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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