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2화 (2/110)

002. 돌이킬 수 없는 한 걸음

A Step You Can't Take Back

나는 운기한다. 고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

* * *

나는 허드슨 부인에게 정중히 사과한 다음 월말에 수리비를 지불하겠다고 약조했다.

진각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아까부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군…….”

뇌가 지쳐있는 게 틀림없다.

일단은 휴식을 취하면서 상황을 파악해야만―

-털썩

……했지만 결국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매트리스에 몸을 파묻고 곯아떨어졌다.

* * *

긴 꿈을 꾸었다.

나는 여전히 사설 수사 고문 셜록 홈즈였지만 꿈속에서 본 대영제국의 모습은 어딘가 낯설었다.

범죄자들이 하늘을 날고 건물을 부수는 등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힘을 발휘한다든지.

이를 상대하는 나도 기존에 알던 종합 격투술 바리츠보다 훨씬 위력적인 무술을 구사하는 등.

꿈에서 경험한 악인들과의 싸움은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오컬트 그 자체였다.

인간이 중력을 무시하고 허공을 걷는 거로 모자라 맨주먹으로 벽을 무너뜨리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건 과학의 신봉자로서 용납할 수가 없다.

‘이런 건 현실이 아니야!’

참다못해 꿈속에서 고함을 지른 순간 악몽에서 깨어났다.

“……끔찍하군.”

꿈에서 본 광경은 여전히 생생히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스승이라는 작자가 격체전력Succession이니 뭐니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괴상한 힘을 내 몸에 불어넣은 것부터.

끝없는 수련의 결과 고수의 반열에 들기까지, 전부.

내 비상한 오성과 기억력 덕에 꿈에서 접한 해괴한 개념과 지식은 전부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필요하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줄줄이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

나의 상상력은 탁월한 축에 속한다.

사건 해결을 의뢰받았을 때 몇 가지 단초만 보고 범인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꿈에서 접한 정보는 죄다 기존에 내가 쌓아 올린 지식 체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영약이니 무공이니, 온갖 허무맹랑한 것들.

동양의 문화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내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만들어 내는 취미는 없다.

어쩌면 내 무의식은 훌륭한 작가의 소질을 갖추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협탁 위에 놓인 지난밤의 석간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헛것을 본 게 아니었나.”

상단에 적힌 날짜는 그대로 1881년 3월 7일.

1면에는 여전히 회춘한 여왕 폐하의 사진이 보였다.

“확인할 필요는 있겠군.”

어젯밤부터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평소였다면 사건과 상관없는 의문이 들 땐 귀찮다며 모르핀 주사 한 대 맞고 누웠겠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지금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난 강렬한 호기심과 충동에 사로잡히는 중이었다.

이럴 땐 직접 거리로 나가 보는 게 낫다.

서둘러 코트와 모자, 그리고 돋보기를 챙기고 나가려다 무언가 빠트린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담배 파이프에 묶인 시선.

내가 애용하던 물건보다 훨씬 가느다랗고 길었지만.

“곰방대를 잊을 뻔했군.”

반사적으로 그것에 손을 뻗은 내 입에선, 어째서인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 * *

낯선 디자인이지만 자연스럽게 입에 감기는 수상한 파이프를 물고 거리로 나섰다.

허드슨 부인에게 인사하고 베이커가를 걸으면서도 나는 관찰과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이쪽 세상에서도 런던의 하늘은 음울했다. 새벽에 비가 내려 질척해진 바닥. 곳곳에 생겨난 물웅덩이를 피해 걸었다.

이곳이 정말 내가 알던 런던과 다르다면, 그리고 꿈에서 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곳곳에 있을 터.

“흠.”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베이커가 북쪽에서부터 나이 든 우체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타타탓!

60대 후반의 늙은 우체부는 베이커가의 거지 꼬맹이들보다 훨씬 날렵한 몸놀림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위화감은 들어도 기이하다는 생각까진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노인은 거리를 달리는 내내 좌우에 줄지어 선 건물들의 우편함에 향해 정확히 편지를 던져넣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웅덩이 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그 주위에 단 한 방울도 물이 튀지 않았다.

“등평도수Jesus walk…….”

맹세컨대 나는 헛것을 보지 않았다.

꿈에서 목격한 물 위를 달리는 경지의 신법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할 따름이었다.

괴상한 건 우체부만이 아니었다.

베이커가와 윅모어 가가 교차하는 곳에 있는 포트먼 광장에선 나이 든 여인들이 단체로 날을 세우지 않은 검이나 쇠로 만든 쥘부채 따위를 들고 모여 있었다.

그들은 축음기로 음악을 틀고 그에 맞춰 역동적인 춤을 추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나이가 무색해질 정도로 몸놀림이 민첩했다.

태극광장검무Tai-chi Square Sword Dance.

건강을 위해 나이 든 여성들이 수련하는 검무로 실전성이 없어 보여도 원본이 되는 검술의 묘리를 깨달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째서인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식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고작 10분도 걷지 않았는데 벌써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런던이 원래 살던 곳과 전혀 다른 곳이라는 증거가 차례차례 등장하고 있었다.

불가능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진실인 법.

내가 헛것을 봤거나 미치지 않은 이상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전부 현실이라는 뜻이겠지.

나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고, 이곳은  내가 알던 런던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장 시작해야 하는 건 역시 정보 수집.

런던이 어쩌다 이리도 달라진 건지 알아봐야만 한다.

“이거로 주게.”

나는 곧바로 가까운 서점으로 들어가 역사서를 구매했다.

그동안 범죄사 외의 역사는 흥미가 떨어지는 분야라는 이유로 관련 지식을 수급하는 것조차 거부해 왔지만 내겐 지금 이게 필요했다.

* * *

<중원Midfield에서 4,800마일은 족히 떨어진 대영제국.

이곳에 머나먼 동방의 무공이 전해지고 독자적인 개량이 이루어진 지 백 년이 넘게 지났다.

하지만, 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고작 한 송이의 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과연 몇이나 있을까.

17세기 초. 금융업이 발달했던 네덜란드의 부유층 사이에선 튤립과 그 구근을 수집하는 취미가 유행하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높은 가치가 매겨지던 건 희귀한 무늬를 지닌 튤립이었는데, 이런 변종 알뿌리는 투기 대상이 되어 수십 배로 가격이 뛰었다.

광기가 광기를 부르는 시장.

다행히도 사람들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제정신을 차렸고 수많은 이들의 인생을 뒤틀던 튤립 가격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튤립과 같은 중앙아시아의 톈샨 산맥天山山脈이 원산지인 꽃, 천산설련天山雪蓮이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머나먼 동방의 제국 청淸에서 자연산 천산설련이 귀중한 영약靈藥으로 취급된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가진 돈을 털어 이 귀한 꽃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금융업 종사자들은 이런 흐름이 튤립 파동처럼 잠시 유행하다 말 거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시험삼아 천산설련을 복용한 이들이 놀라운 효험에 감탄하며 입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천산설련을 섭취하자 근력이 향상되고 밤눈이 밝아졌다.

심지어 장시간 복용한 이의 경우 불치병이 치료되는 등 믿을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풍문과 항설은 산불처럼 유럽 전역에 퍼졌다.

각국의 지배계층은 앞다퉈 조사단을 꾸렸고, 동쪽으로 향한 뱃사람들의 목적지는 당연히 영약에  관한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청이었다.

그리고 수년 후.

유럽을 떠났던 조사단의 배가 차례차례 돌아오자 사람들은 전보다 한층 더 경악하게 되었다.

청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건 새로운 영약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힘을 발휘하는 신비로운 동양의 전사.

바로, 무림인이었다.

그들이 수백 년 동안 무학을 발전시키며 지내던 고토를 떠나 유럽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외치는 중원인Midfielder들에게 있어 변발은 치욕과 굴종의 상징.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삼류부터 현경의 고수에 이르기까지.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카락을 포기하고,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를 포기해야 하는 치발령薙髮令을 피해 무림인들은 유럽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유럽에 정착한 무림인들은 기적과도 같은 능력을 선보였다.

날카로운 칼을 맨몸으로 막아내거나 멀리 떨어진 벽을 부수는 건 물론이고 세월을 거슬러 젊음을 되찾기까지 했으니 유럽인들이 경악하는 건 당연지사.

불로불사를 꿈꿔 온 왕족과 귀족은 물론 군인과 부유층까지, 모두가 앞다퉈 무림인을 극진히 대한 결과 중원의 지식은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단전과 기경팔맥의 개념, 영약의 정확한 복용법, 내공을 쌓고 운용하는 심법, 그리고 공력을 외부에 발현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초식까지.

무武는 순식간에 유럽을 매료했고, 다수의 거대 문파와 명문세가를 유치한 대영제국에선 무공 수련이 신사 숙녀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바야흐로, 런던무림 시대가 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와 역사서의 서문을 읽은 난 작게 탄식을 흘렸다.

과연, 이쪽 세상의 역사는 내가 살던 곳과는 지독하리만치 동떨어져 있었다.

런던의 지리와 사는 이들이 같을지언정, 이 세계는 분명 내가 겪어본 적 없는 곳이었다.

아니.

역사서를 산 건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증거를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나는 이미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지난밤 꿈에서 경험한 또 다른 셜록 홈즈의 삶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그런 거였나.”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허드슨 부인이 그대로 이쪽 세상에도 있다는 건 왓슨과 레스트레이드 경감, 그리고 모리어티까지, 내가 아는 모두가 똑같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회귀하기 전처럼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고 범죄자를 감방에 처넣는 것.

나의 가장 큰 기쁨은 그 과정에서 태어나고, 범죄 수사야말로 내가 지닌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분야다.

“재미만 따지면 이쪽 런던이 확실히 낫군그래…….”

단전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하자마자 아랫배에서부터 몸 안을 간지럽히며 끓어오르는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이쪽 세상의 내가 쌓아온 업業.

내공이라고 불리는 무형의 힘.

“이걸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무武는 실존한다.

지식과 지혜에 더해 새로운 힘까지 얻은 나라면.

이번에야말로 모리어티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내 목숨을 내놓지 않고도 놈의 손에서 런던을 지켜 낼 수 있겠지.

“네놈만큼은 지상의 법원보다 더욱 높은 법정으로 보내 주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무얼 해야 하는지는 이미 정했으니까.

6일 후 만나게 될 내 둘도 없는 친구이자 조수인 왓슨의 신뢰를 얻는 데 필요한 건 수사 고문 셜록 홈즈의 압도적인 실력.

“힘만 충분하다면 모든 것이 수월해질 터.”

나는 아까 집을 나설 때 저절로 곰방대를 집었다.

그 말은 즉 이쪽 세상에서 살던 또 다른 나의 기억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오고 있다는 뜻.

지난밤 실수로 바닥을 부순 것만 보아도 머리와 몸이 무공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쪽 세상의 내가 쌓아 올린 모든 힘을 완벽히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이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일이다.

우체부조차 경공을 쓰는 세상에서 무공을 다루지 못하는 반푼어치가 범죄자와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 만무하니.

그러니까.

“다시 시작해야겠지Let’s Begin Again.”

나는 방문을 잠근 다음 머릿속에 들어찬 낯선 지식이 이끄는 대로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이쪽 세상의 셜록 홈즈가 익힌 건 정체불명의 일대종사가 유럽과 아시아를 돌며 다양한 문파의 심법과 초식, 투로 등을 하나로 모아 만든 일인전승 비인부전의 독문무공 바리츠Baritsu.

눈을 감고 심법의 구결을 따라 내력을 순환시키자 기맥을 따라 뜨거운 기운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더는 새로운 지식을 거부하거나 허황된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이쪽 세상의 내가 피와 땀을 흘리며 쌓아 올린 힘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고오오!

그리하여 나, 셜록 홈즈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반드시 거쳐 가는 기초 중의 기초Elementary.

운기조식Breath Control을 시작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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