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07화 (107/123)

107화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두렵고, 또 간절한 삼 일은 순식간에 지나 어느새 건국제 당일이었다.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아침부터 눈이 떠졌다.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호흡이 밭아졌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들어오렴.”

빼꼼 얼굴을 내민 것은 예상한 대로 유니스였다. 그녀 역시 잔뜩 흥분한 듯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마님!”

“벌써 모여야 한다니?”

“그건 아닌데 그냥…… 눈이 일찍 떠져서요. 마님도 그러실 것 같아서 와봤어요!”

슬쩍 웃으며 손짓하자, 유니스가 쪼르르 달려와 침대 앞에 섰다.

“그럼 우리 먼저 시작할까?”

“시작이라면…….”

유니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꼭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필요는 없으니까.”

“……좋아요!”

“그럼 여기 앉아 보렴.”

침대에 앉은 유니스가 꾹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힘을 준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내 몸의 신력이 그녀에게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녀와 실험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앞선 명령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진 그 어떤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그 말은 유니스에게 굳이 별다른 명령을 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내가 다 끝났다고 하기 전까지 평소의 유니스처럼 있어 주렴.’

신력이 부드럽게 유니스의 몸을 감싸는 걸 확인하고 손을 뗐다.

“다 끝났어.”

“……네?”

유니스가 말똥거리는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하지만 뭔가…… 저번과는 다른데요?”

“조종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니?”

“으음…….”

눈을 감고 무언가 가늠하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조종당하는 그 묘한 느낌은 있어요. 하지만 저번에는 제가 딴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냥 평소 같은데요?”

“제대로 걸린 모양이구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에?”

“내가 건 명령이 그거거든. 평소의 유니스대로 있는 것.”

“마님…….”

울상을 지은 유니스가 내 손을 다시 덥석 붙잡았다.

“감사해요.”

“뭐가?”

“……그냥요.”

슬쩍 웃으며 유니스의 손등을 쓸어줬다.

펠로스가 마음에 들어할 만했다. 역시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내가 평소의 유니스대로 있어 달라고 한 것은, 그녀를 믿는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나도 고마워.”

“뭐가요?”

“뭐……. 그냥, 이것저것.”

며칠 전 유니스가 해준 말 덕분에 마음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 오늘이 지나면, 코델리아에게 모든 걸 사과하고 떠나기로.

속뜻도 모르면서, 유니스는 마냥 좋다며 웃었다.

“그럼 그만 나갈까?”

“네, 마님!”

마침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

“에블린, 따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나?”

“…….”

입술만 달싹거리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오늘 아침, 유니스에게 신력을 불어넣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수많은 사람이 지나치는 번화가 한복판에…… 데반과 단둘이 서 있게 될 줄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급히 지나가던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가볍게 밀치고 지나갔다.

“아……!”

비틀거리자, 데반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싸 잡아당겼다.

“에블린, 괜찮나?”

데반, 아니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연한 표정으로 남자의 목에 걸린 작은 목걸이를 바라봤다.

모두 저 목걸이 때문이었다. 데반이 화려한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를 가지게 된 것은.

목걸이는 사람의 외형을 바꿔주는 마도구였다. 내 목에도, 펠로스와 카렌, 코델리아의 목에도 모두 걸려 있었다.

아스트릴라의 제안이었다.

우리의 작전은 단순했고, 사실상 유니스와 아스트릴라를 제외한 사람은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구경할 수는 없지 않냐며 그녀가 제안한 게 바로 잠행이었다. 마도구로 얼굴을 바꾸고 건국제에 참여해 신전의 동태를 살피라고.

……그래,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둘씩 조를 나누고, 하필이면 나와 데반이 함께인 건지.

오늘이 지나면 나는 그를 떠나야 하는 사람일 뿐인데.

삼 일간 최대한 거리를 두며 겨우 억눌러둔 마음이 다시금 요동쳤다.

“뭐가 불편한가?”

화려한 금발의…… 데반이 나를 바라보며 갸웃거렸다.

마도구는 외향을 바꿔준다곤 해도 아예 딴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인상을 바꿔주는 것에 가까웠다.

때문에 지금의 데반은 뭐랄까. 평소와 비슷하면서 어딘가 다른…… 조금 밝은 데반이라고나 할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유한 느낌이었다.

어색한 눈초리로 시선을 피하자 데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픈 거야? 혹시 마도구가―”

“……아니, 아니에요.”

서둘러 손사래를 쳤지만,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불편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하필 버티고 버틴 삼 일의 마지막 날, 데반과 단둘이 남게 돼서.

“그럼 일단 저쪽부터 가지. 잠깐 앉아 있으면 좋을 것 같으니.”

데반이 자연스럽게 내 손을 붙잡았다.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잡힌 손을 움찔거렸다.

“…….”

망설임 없이 움직일 것 같던 데반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잡힌 손과 어색하게 굳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또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요새 들어 데반은 혼자 멍하니 있는 일이 잦았다.

이 기회에 손을 빼 버릴까 고민하는 찰나 데반의 입이 열렸다.

“이건…….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거다.”

살짝 들어 올린 손에, 나는 결국 고개만 끄덕였다.

“너는 워낙 잃어버리기가 쉬워서.”

장난처럼 나온 말과 다르게 커다란 손은 더욱 단단히 죄여졌다.

손끝에서부터 퍼지는 열기에 심장이 속절없이 두근거렸다.

주위를 지나치는 수많은 연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연인……처럼 보이고 있는 걸까?

알고 있었다. 데반과 내가 한 조가 된 건 부부이기 때문일 테고, 데반이 손을 잡은 건 사고를 예방하려는 것임을.

우리가 상점가를 거니는 것 역시, 데이트가 아니라 신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방법일 뿐이었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가 섞여선 안 되는 일이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앞장선 데반은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앉아 있을 곳이라……. 어딜 가려는 걸까?

목적지도 모른 채 그를 따라가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데반의 말대로 거리엔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가족이나 연인, 친구와 함께였고 행복한 듯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건물 여기저기엔 건국제를 기념하는 화려한 휘장이 어지럽게 걸려있었다. 이따금 화려한 꽃 장식도 보였는데, 오늘을 위해 준비된 건지 원래부터 있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데뷔탕트를 위해 데반이 마차를 끌고 데려다줬던 그 날을 제외하면 내가 번화가에 나오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날 역시 주위를 살피거나 할 여력이 없었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남은 시간이 삼 일뿐이라면, 데반과 평화로운 일상을 나눈 추억을 하나쯤 가지고 가고 싶다고.

가판대에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과 반짝이는 액세서리들이 가득했고, 하늘에는 종종 마도구로 만들어낸 듯한 작은 기구들이 떠다녔다.

가게 홍보를 위한 기구들처럼 보였는데, 겉으로 볼 때는 조그마한 동물들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꼭 병아리 같은 노란 새는 제 몸집의 몇 배나 되는 홍보지를 입에 물었고, 나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다람쥐는 가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앉아 입에서 돌돌 말린 홍보지를 뱉어 냈다.

여러모로 신기한 풍경이었다. 어느새 나는 건국제에 온 목적도 잊은 채, 사방을 둘러보기 바빴다.

“괜찮아진 건가?”

“……네?”

덕분에 데반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고 있다는 것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아…….”

“재미있나 보군.”

데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헛웃음에 가까웠지만, 다행히 비웃는 것 같이 보이진 않았다.

“그냥…… 기왕 나왔으니까요.”

변명처럼 중얼거리자, 데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괜찮아졌으면 앉을 필요는 없는 건가?”

그가 옆을 턱짓했다. 그곳엔 커다란 분수대가 자리해 있었다.

어찌나 크던지, 얼핏 바라보곤 호수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햇빛에 비쳐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물줄기가 끝을 모르고 솟구쳐 올랐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여기가 중앙광장이다. 제도에서도 가장 중심지라고 할 수 있지.”

만족스러운 얼굴의 데반이 나를 끌고 분수대로 다가갔다. 분수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괜찮아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앉지.”

얼떨결에 데반과 함께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등 뒤로는 물줄기가 솟구치고, 앞에는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화기애애한 웃음이 가득했다.

하늘은 맑았고, 햇빛은 따사로웠다.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결조차 부드러웠다.

내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데반의 손도 마찬가지로 따듯했다.

평범한 돌바닥 위에 떨어진 보잘것없는 잎사귀 하나도 특별해 보였다.

누군가가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물으면 꼭 지금을 떠올릴 것처럼.

이게 데반과 나의 마지막 추억이 되겠구나. 엘리운에 가서 나는 몇 번이나 오늘을 떠올릴까.

마지막 만찬과도 같은 하루였다. 서글퍼지는 한편,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기도 했다.

마지막이니까. 오늘 하루 정도, 아니 반나절 정도는…… 이기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여전히 붙잡고 있는 데반의 손을 바라보다, 슬쩍 손가락에 힘을 줬다.

데반의 손등에 손가락이 닿았다. 맞잡은 손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여기는 사람이 많아 복잡한 거리가 아니니, 서로를 잃어버릴 염려도 없었다. 그러니 사실 손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딱 이 정도가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였다.

데반이…… 손을 빼면 어쩌지?

곁눈질로 슬쩍 바라봤지만, 다행히 데반은 맞잡은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우리는 바로 옆에 앉아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서로 다른 방향만 보고 있었다.

앉아 있는 자세, 눈을 깜빡이는 것, 숨을 쉬는 것 하나하나가 대단한 행동인 양 의식됐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저 배경 음악처럼 느껴지고, 내 심장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이 커다란 광장 전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