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우리는 분수대에 마냥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기만 해도 좋았다. 언제까지 지속될 지 모르는 행복이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만 우리 쪽으로 꽂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마도구로 변한 게 티가 나나? 걱정되는 마음에 내 몸을 둘러봤다.
“왜 그러지?”
데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 그게 혹시 마도구가…….”
“마도구?”
“…….”
말끝이 흐려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반과 눈을 맞추고 있자니, 자꾸만 꽂히는 시선의 의미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데반이 너무…… 잘생겨서였다.
정확히는 마도구 덕에 냉기를 풍기던 얼굴이 유한 분위기로 바뀌어서. 거기에 지금의 그는 저주 받은 대공이 아니라 특별할 것 없는 평민으로 보일 테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얼굴로 시선을 끌다니…….
“에블린?”
“아니에요. 제가 뭘 착각했나 봐요.”
“응?”
원래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지 않냐는 듯 데반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렇다고 그에게 당신이 너무 잘생겨서 사람들이 쳐다본다고 말할 순 없었다.
내 입으로 잘생겼다고 하기도 민망했고, 데반은 그런 말을 칭찬으로 들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데반의 눈에는 제가 어떻게 보이나 해서요.”
“어떻게 보이냐니?”
“마도구를 착용하고 거울을 못 봤거든요.”
“아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다고 하던데, 안 한 건가?”
대충 둘러댄 말에 다행히 데반은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귀찮기도 하고…… 무작위로 변하는 게 신전에서도 더 못 알아보지 않을까 해서…….”
“그것도 그렇군.”
“데반은 원하는 대로 설정한 거예요?”
“그래.”
나는 그의 화려한 금발을 멍하니 바라봤다. 햇빛에 반사된 금발은 이 광장 전체의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매일 어두운 옷만 입더니, 사실은 이런 게 취향인 건가?
물론 데반은 어두운 거든 화려한 거든 아주 잘 어울렸지만, 의외긴 했다.
빤히 바라보자 데반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왜 이렇게 한 건지 궁금해?”
“……네.”
솔직하게 대답하자, 데반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누구 취향이 이쪽인가 했지.”
“누구요?”
“모르면 됐어.”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지? 설마 코델리아를 말하는 건가? 순간 아연해지자 데반이 생각을 끊어내듯 표정을 구기며 말을 뱉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네 취향은 어떤데. 평소와 지금 중에 뭐가 더 낫지?”
“저요? 전…….”
갑자기 날아든 질문에 골똘히 생각하며 데반을 바라봤다. 분명 지금의 데반은 평소보다 유해 보이고, 조금 더 다정해 보이고, 다가가기 쉬운 분위기가 있어서 좋았지만…….
“전…… 평소의 데반이 좋아요.”
크게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데반이 의외라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굳이 따지자면 내 취향은 평소의 데반 쪽에 가까웠다. 익숙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쪽이 훨씬 더 데반 같았으니까.
“그런가……. 헛수고를 했군.”
데반이 한 번 더 헛웃음을 터트렸다.
“헛수고요?”
“됐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데반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다는 건지. 데반은 끝내 대답해 주지 않았다.
*
데반은 선선한 바람에 흐트러지는 에블린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기다란 머리카락은, 그러나 색이 달라진 탓인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거기에 저 붉은 눈동자는 어떻고.
데반은 거기까지 생각하다, 문득 자신들의 겉모습이 서로의 것으로 변했다는 걸 깨닫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느냐고 한다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일까.
같은 흑발이래도 에블린의 것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거렸고, 핏빛으로 불길하게 빛나는 제 눈동자와 달리 에블린의 것은 따스한 다홍빛에 가까웠으니까.
거기에 데반 역시 딱히 에블린과 비슷한 색을 갖기 위해 일부러 이런 겉모습을 설정한 건 아니었다.
그저…… 펠로스 쪽이 취향이라는 소리가 내내 머릿속에 맴돌아, 저도 모르게 화려한 외양을 바란 거였다.
에블린은 평소의 모습이 더 좋다고 했으니 큰 보람은 없었지만.
그럼 설마 펠로스의 얼굴이 아니라 성격이 취향이라는 소리였나? 그 성격이?
데반은 미간을 좁혔다가,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맞다, 황태녀 전하의 연설은 저녁이라고 했었죠?”
옆에서 들려오는 에블린의 물음에 데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가 지고 나서야 할 거다.”
아스트릴라의 연설은 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였다. 연설의 첫마디가 곧 모든 일의 신호탄이었다.
“축포가 터진 뒤일 테니까.”
“축포요?”
“매년 하는 행사라더군.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에블린의 얼굴이 금세 흥미로운 표정으로 변했다.
“보고 싶은 건가?”
“네? 아니에요.”
그래놓고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주위를 구경하고서도 티 내지 않으려고 했던 표정과 똑같았다.
어린 시절은 신전에서, 자라고 난 뒤에는 백작가에 갇혀 있었으니 신기하기도 하겠지.
데반의 입장이라고 썩 다르진 않았다.
제도에 살았을 때는 별궁에 처박혀 있었고, 그 이후엔 대공 저에서 살았으니까.
물론 황족이니만큼 연설에 참여하거나 가끔 명목상의 외출을 하긴 했지만, 그로서도 이렇게 축제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차피 연설이 시작돼도 우리가 특별히 할 일은 없지 않나? 연락이 오길 멍하니 기다리느니 축포라도 구경하는 게 좋겠군.”
“그래도 그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하고서, 에블린은 자꾸 머뭇거렸다.
어디까지나 공적인 일로 왔는데 제 사사로운 감정을 채워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녀는 이런 면에선 은근히 고집이 셌다.
“다들 구경하는 와중에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눈에 띌 텐데?”
“아…….”
“최대한 인파에 섞이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한데.”
“그렇지?”
못 이기는 척 대답하는 에블린의 모습에, 데반은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축포가 터지기 전까지 그들은 번화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중간에 배가 고파 식당에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일 정도였다.
에블린은 제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음식 하나를 보고서도, 이렇게 신기한 건 처음 본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데반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데반, 연락은 안 와요?”
좌판 앞에 서서 에블린이 물었다. 그녀는 싸구려 광석들로 만든 게 분명한 액세서리조차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연락?”
“네,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요.”
“아아…….”
데반은 새삼스럽게 그들이 작전을 위해 이곳에 나왔다는 걸 상기했다.
신전을 무너뜨린다.
어쩌다 보니 축제를 몸소 즐기고 있긴 했지만, 애초에 건국제에 참여한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펠로스나 코델리아에게서…… 뭐 온 것 없어요?”
데반과 에블린, 펠로스와 카렌, 유니스와 코델리아. 이렇게 세 개의 조로 찢어져 있는 그들은 서로 마도구를 통해 연락을 취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래, 딱히 오지 않는군.”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건 맞을까요? 그러니까 유니스 말이에요.”
슬쩍 주위를 둘러본 에블린이 발뒤꿈치를 들곤 데반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부러 신전의 눈에 띄기 위해 돌아다니는 중이잖아요.”
데반은 귓가에 닿은 에블린의 숨결에 홱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에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아니……. 그래, 잘하고 있겠지.”
“정말 그럴까요? 그 애만 마도구를 하지 않아서…….”
마도구로 외양을 변화시킨 다른 사람과 달리 유니스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가 구슬을 운반할 거라는 정보를 일부러 흘렸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신전이 유니스를 알아봐야, 작전이 진행될 수 있었으니까.
코델리아는 그런 그녀의 옆에서 동료 하녀로 위장하고 있었다.
“코델리아도…….”
말을 하다 말고 에블린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연락이 없으니 다행인 거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주고받기로 했으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안심시키기 위해 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에블린의 심란한 표정은 통 사라지지 않았다.
데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다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좌판을 구경했으면 했다. 그래봐야 싸구려 액세서리일 뿐인데도.
유니스와 코델리아에 대한 걱정도, 신전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생각도 모두 잊어버렸으면 했다. 그저 건국제를 즐기는 다른 이들처럼…….
거기까지 생각하다 데반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다른 이들처럼 그저 축제를 즐기라고? 신전을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온 그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 셈인가?
애초에 신전을 무너뜨리려는 이유 역시 에블린을 위해서였다. 그녀의 끝없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녀가 더 이상 그 어떤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길 바라서.
그런데 지금은 에블린이 신전이니 신력이니 모두 잊고, 그저 현재를 즐겼으면 했다.
불행이라곤 겪어보지 않은 사람처럼. 좌판에 가득한 액세서리 중 무엇을 살지 결정하는 것 인생 최대의 고민이었으면 했다.
몇 분 전처럼 부서지는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에 행복한 미소를 지어줬으면 했다.
……왜? 왜지?
데반은 어느새 제가 절실할 정도로 타인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답지 않은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