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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16화 (116/123)

116화

아스트릴라를 돕는 일은 끝이 없었다. 단순히 일의 강도 탓은 아니었다.

제 동생이지만 그녀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이었다. 아스트릴라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도무지 한 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빈틈이 없었고,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없었다.

도대체 누굴 닮은 건지.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성격이라는 걸 모른 채 데반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별궁 정문에 도착한 그에게 노집사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오늘도 오지 못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서둘러 나온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뭐…….”

대충 얼버무리자 노집사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담겼다.

“내일도 새벽 일찍 나가 보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황궁에서 지내시는 게 더 편하실 텐데 어째서…….”

데반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며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블린은. 자고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집사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띠웠다.

“대공비 마님이 보고 싶어 오신 겁니까?”

“뭐?”

데반이 황당한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보고 싶다니?

“여러모로 걱정이 돼서 왔을 뿐이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그게 보고 싶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마님께서는 조금 전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하지만 시녀의 말에 따르면 요새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신다고 하더군요.”

올라가 보라는 듯, 노집사가 계단 난간을 향해 정중히 두 손을 뻗었다.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그를 황당하게 바라보다 데반은 결국 못 이기는 척 계단을 올랐다.

데반이 짧게 혀를 찼다.

보고 싶다니. 나이가 들더니 노망이 든 모양이었다.

그건 꼭…… 사적인 감정 때문에 할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온 얼간이처럼 보이지 않는가.

저는 그저 건국제 이후로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한 에블린이 걱정됐을 뿐인데.

대신관에게 공격당할 뻔하기도 했고, 눈앞에서 사람의 팔이 잘리는 모습도 봤으니까. 그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사람으로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요새 잠을 이루지 못한단 소리는 또 뭐지?

어느새 도착한 에블린의 방문 앞에서 데반은 미간을 지그시 찌푸렸다.

똑똑―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면서도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에블린이 아직 잠이 들지 않아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푹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에블린, 들어가도 되겠나?”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데반?”

그러나 다행히도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데반은 저도 모르게 벌컥 문을 열었다. 마치 그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얼간이처럼 굴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아직 안 자고 있었군.”

“데반, 이 시간에 무슨…….”

에블린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있었다. 달빛이 그녀의 등 뒤로 쏟아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데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얼굴 한 번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이래서야 보람이 없었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와 산책을 해주지 않겠나.”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당연하다는 듯 재킷을 벗어 입혀주면서도, 데반은 제 행동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머리 위론 달빛이 쏟아졌고, 눈앞엔 아름다운 화목이 가득했다. 이보다 상쾌할 수 있을까.

평소엔 정원에 관심도 없었던 주제에 꽃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쉬지 않고 일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냥 걸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에블린도 저와 같은 생각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데반은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저기 데반……. 일은 다 끝난 거예요?”

“일?”

“황태녀 전하의 일을 돕고 있다고…….”

“아아…….”

그러다 에블린이 꺼낸 말에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이니까. 아스트릴라가 포기해야 끝나는 거라서.”

“포기를 해야만 끝난다는 건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거군요? 만약 그렇게 되면 귀족들이 노리는 대로 신전이…….”

“에블린.”

“……네?”

데반은 걸음을 멈추고 에블린을 돌아봤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건지는 몰라도… 뭐랄까,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저와 에블린, 오직 둘과 관련된….

곰곰이 생각하다 그가 문득 물었다.

“정원 한구석에 날 위한 선물을 준비해 뒀다고 하지 않았던가?”

“……네?”

에블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당황이라니. 먼저 선물을 준비해 뒀다고 해놓고 그새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건가?

“그새 사라졌나? 너무 늦은 거야?”

“그건 아니지만요…….”

“그럼?”

데반이 집요하게 물었다. 에블린은 초조한 얼굴로 바닥을 한 번, 조금 먼 발치를 한 번 바라봤다.

“에블린?”

데반은 그녀가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주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뭔가가 곤란한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뭐지?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뭔가 결심한 듯 에블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요. 줄게요.”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선물을 주는 데 왜 저런 각오가 필요한 건지는 몰라도 데반은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얼마 안 가 도착한 곳은 담장 근처였다. 담 아래론 여러 종류의 꽃이 흐드러지게 펴 있었다.

“……저거예요.”

“응?”

우뚝 발걸음을 멈춘 에블린이 손가락질했다.

“뭘 말하는 거지?”

“그러니까…….”

입술을 말던 에블린이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도착한 곳은 담장 아래였다.

“이거예요. 이 꽃이… 데반과 닮은 것 같아서….”

꽃? 데반의 시선이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곳을 향했다. 사방에 널리고 널린 게 꽃이었다.

그중 무슨 꽃을 말하는 건지……. 그러다 그의 시선이 못 박힌 듯 멈췄다.

“그게…… 그냥 데반이 생각나서요. 검은색이 잘 어울려서―”

에블린이 가리키고 있는 건 검은색 꽃이었다.

그냥 검은색이 아니었다. 줄기부터 꽃잎까지 모두 새까만 꽃이 달빛을 삼켜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완벽히 똑같은 색이었다.

“근처에는 없다길래 일부러 멀리서 가져온 거예요…. 시종도 시키지 않고 제가 직접 심었고요….”

대답 없는 그의 반응을 어떻게 오해한 것인지 에블린이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검은색 꽃이라고.

데반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나 비슷했다. 어린 시절의 그가 했던 행동과.

그는 하나뿐인 동생을 위해 가져갔던, 그러나 짓밟혀 엉망이 되고 말았던 붉은 꽃을 떠올렸다.

“……데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에게 에블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데반은 그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에블린.”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이 제국에서는 저주를 걸 때 머리색과 똑같은 색의 꽃을 사용한다더군.”

“……네?”

멍하니 데반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녀가 당황한 채 소리쳤다.

“저는, 저는 몰랐어요! 그러니까 전혀…… 저는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 알아.”

자신에게 저주를 건 사람을 앞에 두고, 데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블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그저 주고 싶어서,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그게 다였다. 그 어떤 의도도, 속임수도 담기지 않은 순정이었다.

‘제 아무리 천한 신분이라도 제국에 내려오는 저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요.’

어린아이에게 비수로 꽂혔던 황후의 싸늘한 말이 떠올랐다.

황후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봤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다. 저주받은 황자가 제 아이를 해칠 거라는 두려움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데반은 한 번 더 헛웃음을 터트렸다. 두려움, 제 눈을 가리고 있던 것도 그거였다.

“……데반?”

“황궁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네?”

뜬금없는 이야기에 에블린의 얼굴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네 얼굴이 자꾸 떠오르더군.”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신전 놈들이 그 안에 독을 뿌려 뒀었어. 정신 차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 한 번 잠들면 쉽게 일어날 수 없었거든.”

“네에? 그 말을 왜 지금 해요!”

“그런데 너를 떠올리면…… 그나마 견딜 만했어. 놀랍도록 마음이 편해지더군.”

에블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끔 웃음이 날 때면 왜 그런 걸까 생각했지. 너는 딱히 웃긴 사람도 아니니까.”

그래, 도대체 왜 자꾸 에블린이 떠오르는 걸까. 왜 그 얼굴에, 주고받았던 말 몇 마디에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

데반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끝내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재미있긴 했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이 제국을 떠나서 살 수 있는 돈이 필요해요. 적당한 지위까지 있으면 더 좋고요.’

그때를 떠올리자, 그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번졌다.

“납치당한 주제에 겁도 없이 돈과 지위를 달라고 하질 않나……. 두려운 얼굴을 하고서 제 손의 상처보단 바닥에 흘린 핏자국을 걱정했었지.”

그는 에블린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바다를 닮은 새파란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단지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했다. 네가 재미있어서, 그래서 자꾸 생각나는 거라고.”

그녀의 금빛 머리칼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데반은 제 마음을 내내 괴롭히던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군.”

보고 싶은 걸 보지 않고, 믿고 싶은 걸 믿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제 눈을 가리고 있던 건 검은 안대도, 저주도 아닌 두려움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겐 버림받았다. 쥐죽은 듯 살다가 겨우 용기를 냈던 게 동생에게 건넨 꽃 한 송이였다.

그 꽃은 무참히 짓밟혀 엉망이 됐다.

그는 제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애정을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데반은 건국제에서 에블린의 손을 놓쳤던 날을 떠올렸다. 인파를 헤치며 그녀를 찾는 동안 얼마나 후회했던가.

거절하더라도 손을 붙잡을걸. 내 옆에 단단히 붙잡아둘걸. 놓치지 말걸.

그 마음이 뭐였는지 데반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제 어린 시절을 똑 닮은, 에블린의 불순물 하나 없는 순수한 애정을 마주하고서야.

그건 두려움을 넘어선 감정이었다.

거절당해도 좋았다. 짓밟혀도 좋았다. 그저 딱 하나…….

에블린을 잃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이 가시자, 감정은 깜짝 놀랄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왔다. 데반은 가슴이 빠듯하게 채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사랑이었다. 사랑이 아닐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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