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데반에게 꽃을 보여준 건 모두 내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에게 꽃을 주면, 떠나기 전 하려고 했던 일을 모두 마치는 거니까. 그러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그에게 반지를 주며 프러포즈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날 기억해 달라며 떼를 쓰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가 난데없이 꽃 이야기를 꺼낸 만큼, 나 역시도 대수롭지 않게 선물을 전해주면 그만이었다.
그저 꽃 한 송이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재미있긴 했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데반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 기대하며 준 건 절대 아니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모른 척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단지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했다. 네가 재미있어서, 그래서 자꾸 생각나는 거라고.”
두려움과 함께 기대감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설마 정말로 그가 나를…….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군.”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대감으로 마음이 술렁거렸다.
데반이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이는 나비의 날갯짓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라서였다. 그저 너라서였어.”
데반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방금 뭐라고…….
정처 없이 머릿속을 부유하는 생각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에블린……. 내가 너를―”
“잠, 잠깐만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게 정말인가? 정말로 그가 나를…… 좋아하기라도 한다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데반을 바라보자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대답해 달라는 건 아니야. 원하는 만큼 생각해도 된다.”
원하는 만큼 생각해도 된다니…….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간절한 목소리로 데반이 말했다.
“다만 너무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군. 그다지 인내심이 대단한 편은 아니라서 말이야.”
상황을 완벽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데반이 말을 쏟아냈다. 어쩌면 그도 부끄러운지 몰랐다.
난 어떻게든 데반의 말을 들리는 그대로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그가 지금 나에게 고백을 했고, 내 대답을 기다린다는 소리를 하는 건가?
도대체 왜 데반이 나를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데반이 나에게…… 고백을 했다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머릿속을 괴롭히던 수많은 걱정들이 휘발됐다.
내가 딱 한 마디만 한다면, 그러면…….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 채 데반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 두려움과 기대감이 섞여 일렁였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은 모두 거두고, 그저 그에게 알겠노라 대답하고 싶었다.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이라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벅차올라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대신해 고개라도 끄덕이고 싶었다.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데반의 붉은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거렸다.
그 순간, 그를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
희미한 달빛이 비추던,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데반의 그 얼굴이.
그날, 그는 저주를 풀기 위해 나를 납치했다. 엘리운으로 도망간 나를 붙잡으러 온 것도 저주 때문이었다. 나와 결혼을 한 것도 모두…….
데반의 붉은 눈동자 속에 검은 얼룩이 일렁거렸다.
문득 벼락처럼 깨달았다.
나는 그를 완벽히 치료하지 못했고, 저주는 여전히 그의 눈동자 안에 갇혀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의 고백에 대답한다면…… 그의 저주는 어떻게 되는 거지?
[데이지 꽃향기를 품은 어린 태양의 여신이, 너의 저주를 풀어 주리라.]
예언. 예언이 있지 않은가.
코델리아에게 뒤지지 않는 막대한 신력을 가진 내가 그의 저주를 풀지 못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서.
아,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코델리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행복하다고 했으니까. 나를 용서해 줬으니까……. 설령 그게 나를 위로하기 위한 그녀의 상냥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싶었다.
거기에 데반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중요한 건 용서니 마음 따위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미 정해진 운명.
데반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코델리아뿐이었다. 그게 정해진 운명이자 순리였다.
내가 모른 척, 못 이기는 척 그의 옆을 차지한다면 데반은 영원히 새까만 얼룩을 오른쪽 눈에 머금고 살아가게 되리라.
데반의 오른쪽 눈에서 일렁이는 새까만 얼룩은 꼭 지울 수 없는 상처 같았다.
나와 함께 하는 대가로 그는 영원히 상처를 가슴속에 간직해야 하겠지.
아니, 애초에 데반과 내가 함께 할 수 있긴 한 걸까? 이 고백이…… 그의 진심이긴 한 걸까?
그저 내가 코델리아의 자리를 차지했기에, 그가…… 착각한 건 아닐까?
고백을 받아 붕 떠올랐던 마음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래, 데반이 착각하는 것이다. 설령 내가 그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코델리아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예언의 주인공이니까. 그들은 운명으로 엮인 사이니까.
내가 무슨 헛꿈을 꾼 거지.
건국제 날과 똑같았다. 이건 언젠가 사라질 꿈이었다. 하룻밤, 열흘, 한 달, 일 년……. 언젠가는 깨야 하는 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보같이…… 뭘 기대한 거지.
“데반…….”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여주인공이 아닌 나와 엮인 대가로 남아버린 저주의 얼룩을.
이제는 정말 떠날 시간이었다.
“데반, 나는…….”
“잠깐.”
그가 다급하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급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어.”
얼핏 오만해 보이는 말투 속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을 내뱉었다.
“……고마워요.”
데반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낼 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말은 취소하지. ……정말로 천천히 생각해도 돼, 그러니까 지금은―”
“정말…… 고마웠어요.”
“……에블린.”
데반의 음성에 얼핏 두려움이 비쳤다. 이토록 강한 사내가 내 대답 하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완벽한 해피엔딩에 걸맞는, 완벽한 여주인공을.
머리 위로 쏟아지는 달빛 너머로, 여전히 새까만 꽃 한 송이가 보였다.
빛 한 조각도 받지 못하고 홀로 그림자 속에 묻혀 있는 꽃.
어쩌면 저 꽃과 닮은 건 데반이 아니라 나였는지도 몰랐다.
*
떠나야 한다. 최대한 빨리.
그게 밤새 내린 결론이었다.
떠나자. 이 제국에서, 데반의 곁에서, 정해진 운명에서…….
내가 떠나면 모든 게 원래 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데반도 코델리아도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실상 내가 사라진다면 마음이 서로를 향할 것이다.
그래, 데반이 나를 사랑할 리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껏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준 적 없었다. 스스로조차 사랑해주지 않았으니까.
이런 나를 데반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그저 착각일 뿐이었다. 함께 한 시간들에 어쩌다 다른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리라.
내가 없어지면 데반의 저주도 무사히 풀리겠지.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리라.
이 제국을 떠나 원작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로 살아가자.
대단한 결심도 아니었다. 그저…… 전생을 기억해 냈을 때부터 내내 했던 생각이 아닌가.
나는 이곳을 떠나고, 남자주인공인 데반은 코델리아에게.
색다를 것도 없었다. 그래, 모두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동안 미련을 가졌던 게 이상할 정도로.
“마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마침 방 안으로 들어온 유니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유니스.”
“네, 마님.”
“종이와 펜을 가져다줄래? 편지를 써야겠다.”
평소처럼 웃으며 묻자, 유니스가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면 또 신관님께 보내시는 건가요? 금방 다녀올게요!”
얼마 안 가 돌아온 유니스가 종이와 펜을 테이블 위에 뒀다.
“잠시…… 자리를 피해줄래?”
그녀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도 냉큼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천천히 테이블에 앉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종이를 마주하자 막막함이 들이닥쳤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데반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직접 이야기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떤 식으로 전해야 할까.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뜬 후 천천히 종이를 채워 내려갔다.
처음 전생을 기억했을 때부터, 그에게 납치당했을 때, 코델리아에게 죄책감을 가졌던 이유와 데반의 저주가 풀리지 않은 이유까지.
그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는 건 사죄를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그가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편지를 읽으면 데반은 분노하리라. 자신을 기만한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겠지.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라 이름 붙인 감정이 모두 착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빼곡하게 채운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고, 다른 종이를 꺼냈다.
그곳에는 데반과의 이혼에 동의한다는 자필 문서를 만들어 서명했다.
이걸로 정말…… 끝이었다.
펜대를 든 손이 볼품없이 떨렸다.
눈 딱 감고 데반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차오를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나는 그와 함께할 자격이 없었다. 그는 분명…… 언제고 후회하리라.
이게 그를 위한 길이었다. 모두를 위한 해피엔딩이었다.
그렇게 그날 밤, 나는 엘리운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