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힘을 줘 열자, 간밤에 창틀에 쌓여 있던 눈이 바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아침인 걸 감안해도 밖은 지나치게 밝았다. 눈이 햇빛을 반사하기 때문이었다. 눈이 많이 오는 엘리운은 당연한 수순으로 전 제국이 밝았다.
엘리운에 도착한 지도 벌써 두 달째였다.
백작이 죽고, 킬리언마저 황궁 감옥에 갇힌 터라 백작가의 재산 일부가 나에게 상속돼 있었다.
얼마나 돈을 쌓아 두고 있었던 건지 일부만으로도 엘리운에 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건 벽돌집이었다.
방이 나눠져 있지 않은 벽돌집은 작지만 굉장히 깨끗하고, 또 포근했다.
두 달 동안 나는 이곳에서 먹고 잤다. 살 집부터 입을 옷, 크고 작은 가구들까지 필요한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이었지만, 데반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괜히 엘리운에 왔나…….”
이제는 습관이 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예 다른 제국으로 갔어야 했을지도.”
엘리운은 이미 내가 한 번 도망쳐 온 전적이 있는 제국이었다.
데반이 나를 찾아낼 확률도 다른 곳보다 높았지만, 그만큼 내가 적응하기 편하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일 년 간 살면서 이 나라의 문화니 의복, 화폐단위 등을 모두 익혔으니까.
거기에 이번엔 그가 준 브로치와 킬리언의 목걸이 따위를 모두 놓고 왔다.
물론 오팔로 만들어진 결혼반지만은 어쩔 수 없는 미련으로 챙겨 왔지만…… 그마저도 엘리운의 마도구점에 들러 아무런 마법도 걸려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였다.
한 마디로 엘리운 전역을 뒤지지 않는 이상 데반이 나를 찾아낼 방법은 없다는 소리였다.
물론 애초에 데반은 나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겠지만.
그 편지를, 내 고백을 봤다면…….
어쩌면 이미 나 같은 건 잊고 코델리아와 사랑에 빠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저주를 치료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지.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 위해 떠나온 주제에, 미운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슬슬 움직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옷장에서 두툼한 외투와 귀를 가리는 모자를 꺼내 썼다. 반찬거리를 사러 갈 생각이었다.
“오늘은 꼭 일자리도 구해야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돈은 차고 넘칠 만큼 넉넉했지만, 딴생각할 여유를 없애고 싶었다.
여전히 썰매를 탈 줄 모르는 나는 또 시장까지 긴 걸음을 떠나야 했으므로 두툼한 장화도 신었다.
그리곤 끼익― 문을 여는데 무언가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설마 또?”
새하얀 눈밭에 웬 꽃 한 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추위에 바짝 언 데다, 꽃잎 몇 장은 떨어지고 없었다.
팔짱을 끼고 그 꽃 한 송이를 빤히 바라봤다.
누군가가 주는 선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상태가 별로였다. 거기에 남의 집 문틈에 꽃을 끼워 두는 건 너무나 음침한 행위가 아닌가.
미간을 찌푸리다, 허리를 굽혀 꽃을 집어 들었다.
설령 악의적인 의도라고 할지라도 꽃에는 죄가 없었다. 거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꽃이었다.
조금 너덜너덜해졌지만, 꽃잎은 화려한 금빛이었다. 그걸 빤히 바라보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미 테이블 위의 화병에는 꽃이 한 아름 꽂혀 있었다. 모두 종류는 달라도 똑같은 황금빛이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정체 모를 꽃 한 송이가 문틈에 꽂혀 있는 것이.
처음에는 바람을 타고 우연히 날아온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꽃을 전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선물이라기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루에 한 송이씩 주는 선물이라니. 꼭 불길한 카운트다운 같지 않은가.
꽃을 잠시 노려보다, 다시 집 밖으로 나와 쾅― 문을 닫았다.
*
“헤론 아저씨!”
머리와 어깨에 가득 쌓인 눈을 털어 내고 서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레아 왔냐!”
수염이 가득 난 커다란 사내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천막 뒤에서 나타났다.
“안 추워? 차 한 잔 줄까?”
“네, 얼른요!”
그를 따라 익숙하게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따듯한 모닥불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을 비볐다. 눈길을 해쳐 오느라 꽁꽁 얼었던 몸이 점점 녹아 갔다.
얼마 안 가 헤론이 두 손에 놋쇠 잔을 들고 다가왔다.
“누가 보면 가게 주인인 줄 알겠어. 다시 온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주제에 앉은 폼이 아주 익숙해.”
잔을 건네며 그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저번 가게랑 구조가 너무 똑같아서요.”
“허긴. 이 정도 우연이면 네 가게라고 해도 되지.”
헤론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 역시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의 말처럼 기막힌 우연이었다. 내가 이번에 엘리운으로 와서 자리를 잡은 곳은 저번에 살았던 곳과 정 반대편이었다.
그런데 이곳 시장에서도 헤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원래 장사꾼들은 제국 이곳저곳을 돌며 시장에 자리를 잡는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기막힌 우연임은 틀림없었다.
“썰매는 대체 언제 배울 생각이야? 언제까지 맨몸으로 왔다 갔다 할 거냐고.”
“그러게요.”
잔에 든 차를 호로록 마셨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지.”
헤론이 짧게 혀를 찼다. 확실히 그의 가게는 시장 어귀에 있어 여기까지 오는 내내 꽁꽁 언 몸을 녹이는 데 제격이었다. 덕분에 썰매를 타지 않고도 버틸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
“아, 맞다. 그 꽃이요. 또 있었어요.”
“또?”
슬쩍 말을 돌리자 흥미진진한 얼굴을 한 헤론이 잔을 바닥에 내려뒀다.
헤론이 있어서 좋은 점은 단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좋은 말동무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두 달간 나는 외로움을 견뎌 내지 못했으리라.
“또 같은 색이었어?”
“네. 이상하죠? 또 꽁꽁 얼어있었고요.”
“흐음…….”
헤론이 손으로 수염을 쓸었다.
“누군가 레아 널 찾아다니고 있는 거 아냐? 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녀석이니까.”
“떠돌아다니다뇨.”
내가 말도 없이 사라졌던 게 꽤 충격이었던 듯, 헤론은 다시 만난 이후로 나를 떠돌이라고 불러 댔다.
“또 모르지. 나처럼 말 한마디 없이 버림받은 누군가가 널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그리워하다니. 작게 코웃음을 쳤다.
처음 문틈에 꽂힌 꽃을 봤을 때…… 데반일 거란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가 나를 찾아온 건 아닐까, 그런 기대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일 리가.
데반이 나를 찾을 리도 없지만, 만약 찾는다고 해도 두 달 만에 이곳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에 설령 만에 하나 장소를 알아냈다면, 문을 열고 들이닥쳐도 모자라지 않은가. 하루에 꽃 한 송이씩을 건네는 어찌 보면 음침하고, 어찌 보면 로맨틱한 일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만약 그가 나타난다 해도…… 저번에 마물을 해치우며 나타났을 때처럼 느닷없이 나타나겠지.
“그럴 리가 없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헤론 아저씨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죠.”
“근데 왜 떠난겨?”
“그건…….”
무심코 대답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하마터면 헤론의 유도신문에 넘어갈 뻔했다.
“글쎄, 그런 사람 없다니까요!”
장난스럽게 대꾸했으나 헤론은 평소처럼 허허 웃지 않았다. 어쩐지 한심해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저씨?”
답지 않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아저씨가 왜 이러지?
“레아.”
“네, 갑자기 왜요?”
혹시나 내가 저번에 말없이 사라진 게 아직도 서운한 걸까? 사과는 처음 만난 날 열 번도 넘게 했었는데…….
“너는 지금 행복하니?”
“……네?”
뜬금없을뿐더러, 그다지 반갑지 않은 화제였다.
“지금 행복하느냐고. 다시 이곳에 온 건, 또다시 무언가를 버리고 왔다는 게 아니니.”
“……무언가를 버린다고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게 네 의지가 아니라면―”
“아저씨.”
헤론의 말을 뚝 끊었다. 시선을 떨어트리자 들고 있던 잔 속에 내 얼굴이 비쳤다.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은 얼굴이었다.
여봐란듯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금세 일렁이는 파동이 생겨 얼굴을 쉽게 감출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충분히 행복한걸요.’
도망치듯 엘리운에 왔을 때부터 틈만 나면 떠오르던 한 마디였다.
코델리아는 지금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니 사과는 필요 없다고, 가진 적 없는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죄송해요.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차마 헤론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그대로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원한 적 없으니 행복하지 않다고 불만을 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행복하진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았으니까.
“피한다고 뭐가 달라져?”
“……아저씨, 전―”
“에블린.”
무심코 대답하려다, 순간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방금… 뭐라고….”
아저씨는 분명 내 이름이 레아인 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내 진짜 이름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헤론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놀라워?”>
쨍―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잔이 시끄러운 파열음을 냈다.
“너, 너…….”
두 갈래로 갈라지는 목소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힐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