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귀역무간진 (3)
콰콰콰쾅-!
퍼퍽-! 퍼퍼퍽-!
거대한 공동 내부에 막대한 영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쳤다.
영기의 광풍에 괴기스러운 빛을 뿜던 기물(奇物)들이 모조리 휩쓸려 부러지더니, 사방의 벽에 마구 부딪히며 산산이 깨져나갔다.
그 강력한 힘이 바닥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바닥에 그려져 있던 문양에서 음산한 기운이 마구 흘러나왔으나, 어느새 본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쩍쩍 뜯기고 움푹 파여 있었다.
하지만 광풍의 피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키익-!]
[끼에에엑-!]
이미 여기저기 짓뜯겨 너덜너덜해진 악귀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소멸만은 피하고자 동굴이 떠나갈 정도로 귀곡성을 흘려대고 있었다. 귀(鬼)로라도 존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영기 앞에선 그 어떤 짓거리도 어림없었다. 명부의 신령한 영기는 악귀들은 끊임 없이 산화시켜 나갔다.
그때였다.
“뉘, 뉘시오?”
광풍에 날려가 한쪽 구석에 처박혀 널브러져 있던 사내, 흑명귀에게서 힘겨운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인기척조차 없었다.
“대체…… 어느 고인께서 왕림하셨소!”
흑명귀는 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음에도 힘을 짜내어 재차 외쳤다. 눈빛에 어린 광기가 심정을 대변했다.
그 순간!
[알 필요 없다!]
“헉-!”
흑명귀가 저도 모르게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처럼 심중에 음성을 새기는 절세의 기예가 있다면, 전설 속에서나 전해져오던 심어가 아닌가.
‘대체 누가 이렇게 지극한 경지에 올랐을까?’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한 줄기 생각이 번뜩였다.
“진, 진우선이구나! 맞아! 네놈밖에 없지!”
흑명귀가 허공을 향해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흑명귀는 이제 대답을 필요치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으니까.
“무서운 놈! 육신을 보이지 않고도 이토록 맹위를 떨칠 수 있는 까마득한 경지에 올랐구나!”
콰콰쾅!
[끼에-!]
공동이 계속 파괴되고, 악귀들은 비명을 지르며 소멸해간다.
흑명귀는 무너져가는 육신을 간신히 지탱한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흐흐!”
넋을 놓은 듯한 흑명귀가 섬찟한 웃음을 흘렸다.
“대단하구나. 하지만 한참 늦었어.”
흑명귀가 허공을 바라보며 미치광이처럼 지껄여댔다.
“네놈은 내가 죽어가는 걸 보고 즐거워하겠지? 음모를 파괴했다 생각하겠지? 그러나 오산이다. 네놈도 곧 죽게 될 거야. 크크큭! 이미 주군께서 삼층귀력(三層鬼力)의 귀역무간진을 여셨으니까. 이름하여 대귀역무간진(大鬼域無間陣)이지.”
[대귀역무간진이라고?]
“크하하하! 놀랐구나? 그럴 줄 알았지. 주군께서 이미 일천 악귀의 정수를 얻으시고 대귀역무간진을 선포하셨다. 삼악도의 온갖 악귀가 다 올라오는 거야!”
흑명귀가 실성한 듯이 광소를 마구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귀역무간진은 원래 땅 위에 펼쳐져 있었지. 하지만 여기 신마황동 내에서도 파동을 느꼈었지? 후후후후! 그게 바로 대귀역무간진이 선포된 거다. 지저부터 천상까지의 모든 영역이 귀역이지!”
본래 귀역무간진은 삼백의 귀기로써 펼쳐낼 수 있는데, 잔백마군은 이를 세 겹으로 쌓아 올려 강화해냈다. 그에 따라 위력은 세 배를 훨씬 상회하게 늘어났다.
삼층귀력의 어마어마한 진가였다.
그래서 흑명귀는 죽음을 앞두고도 실컷 웃어젖힐 수 있었다.
“비통해서 할 말조차 없나 보군. 없겠지! 당연히 없겠지! 네놈이 여기서 이 짓거리 하는 것도 다 헛수고일 뿐이야. 크하하하!”
흑명귀가 허공에 대고 마구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더니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광풍이 온몸에 불어닥쳐 휘청거리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흑명귀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땅에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주군이시여! 뜻을 이루소서!”
흑명귀가 사그라드는 음성으로 간신히 인사를 올렸다. 그의 목숨이 다해가고 있었다.
그때, 심어가 전해졌다.
[정수를 어떻게 얻어갔느냐?]
“글쎄?”
흑명귀가 피식 웃었다. 생기를 일어가는 눈동자에서 조소의 빛이 흘러나왔다. 너라면 그걸 말하겠냐는 반문이리라.
그러더니.
“안녕.”
한 마디와 함께 고개가 꺾이며, 흑명귀가 죽음을 맞이했다.
잠시 후, 광풍이 멎고 명부의 기운이 회수되며 장내가 고요해졌다.
[허허!]
검노야가 마구 부숴진 채로 공동 바닥에 나뒹구는 기물 조각들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강력한 마기를 머금은 여덟 기물이 귀기 서린 빛을 내뿜으니 단박에 부숴버렸건만, 이미 늦은 대응에 불과했던 까닭이었다.
[대귀역무간진이 펼쳐졌구나! 대체 얼마나 큰 피해를 일으키려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때, 공동 한쪽에서 진우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우선은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스승님! 귀기들을 이미 다 명부로 보내셨군요! 저자 홀로 비역을 지키고 있었습니까?”
[그랬다. 하지만 잔백마군이 이미 여기서 일천 악귀의 정수를 얻어갔더구나.]
“잔백마군이 대체 언제 다녀간 것입니까?”
진우선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두세 시진 전인 것 같다. 잔백마군은 귀안이 된 왼쪽 눈에 삼층귀력을 받아들였고, 그걸로 귀역무간진을 훨씬 넘어서는 대귀역무간진을 연 모양이다!]
흑명귀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도 입에 담지 않았으나, 검노야가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모든 정황을 알아챈 상태였다.
“아-!”
진우선이 탄식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스승님.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찾아오던 중에 짙은 귀기가 묻어 있던 동혈이 있었습니다. 귀기들이 흘러가는 탓이라 생각하며 재빨리 이리로 왔는데,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잔백마군이 그리로 움직였을 거란 말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듣고 보니 매우 일리가 있구나. 얼른 가보는 게 좋겠다!]
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우선과 함께 곧장 비역을 빠져나갔다.
***
무흔과 은조가 산 중턱에 뚫려있는 삼문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신마황동을 지휘하는 장 방형의 석실, 천실(天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삼층귀력의 귀역무간진이라니. 마군께서도 대계를 위해 단단히 준비하셨었군.”
“전에 흑명귀가 언뜻 대귀역무간진이라고도 말했었는데, 그 말이 과장된 게 아니었습니다. 일층귀력으로 처음 펼쳐졌던 것보다 몇 배나 더 강해 보이더군요.”
“신녀께서도 구음대라진력(九陰大羅眞力)을 극성으로 펼치셨어. 월령마화종의 성과도 상당하겠지?”
“그럴 겁니다. 구음의 기운이 땅에 가득하니, 귀역무간진 속에서 효력이 배가될 테니까요.”
무흔과 은조가 귀문탈백종과 월령마화종에 대한 호평을 늘어놓았다.
둘은 삼문 앞에 나가 아수라장이 된 일대를 둘러보며 가공할만한 위력을 느낀 상태였다.
“이제 대계의 마지막 순서로 접어들었다.”
무흔이 무거운 말을 던졌다.
흑암무영종이 온 교도를 아우르며 삼문협의 대계를 처음부터 주관해왔는데, 화룡점정의 순간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은조. 혈불께서는?”
“엊저녁에 서안을 지나셨습니다. 마영이 모시러 갔으며, 내일 이곳에 당도하실 겁니다.”
“그렇군. 주군께서도 곧 도착하실 것이니, 잘 채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은조의 음성에서 단단한 기합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알고 있었다.
“후후후! 원단이 나흘 남았다. 천하가 피투성이가 된 채 엎드려 만마의 주인을 맞이하겠군.”
무흔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직 눈엣가시가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진우선은 어찌할까요? 잔백마군께서 그를 올려보내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쯤 제혼소를 찾았을까?”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찾았을 거야. 이틀째니까.”
“하지만 통로를 찾지 못하면, 더 올라오진 못할 겁니다.”
삼 구역으로 올라오는 통로는 흑암 속에 기관진식으로 숨겨져 있었다. 장소와 방법을 알아도 드나들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무흔은 왠지 모를 불길함에 마음이 계속 찝찝했다.
무인들을 일 구역에 가둬놓기 위해서 미리반천진으로 막아두었는데, 진우선은 별로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은 채 통과해버렸지 않은가.
그런 진우선을 저지하기 위해 이 구역을 서둘러 열었고, 탐심에 눈이 먼 정사외도의 무인들과 만나게 했다.
이 구역은 개미굴보다 복잡해 거기서 한없이 헤매도 좋고, 혹여나 제혼소에 도착하더라도 많이 다치고 지쳤을 게 틀림없었다.
그 순간에 오마동에서 기다리고 있던 흡혈유령종이 귀기를 등에 업고서 차륜전으로 그를 덮칠 것이니, 그의 진을 다 빼놓을 수 있으리라.
결국, 생각대로라면 진우선으로선 시간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대계에 영향을 주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게 맞는데…… 느낌이 정말 좋지 않군.”
“그럼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무흔이 예민한 기색을 보이자, 은조의 신형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즉시 움직이려는 뜻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잠깐!”
은조가 가려다 말고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걸음을 멈춘 무흔이 눈을 감고서 감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무흔의 전음이 들려왔다.
[은조. 귀기의 흐름이 끊겼어!]
“……!”
은조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무흔이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제혼소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비역까지 무너진 거다!]
귀역무간진이 펼쳐지면 각 구역을 맴도는 귀기는 각 구역의 문으로 나가게 되어있었다.
삼문으로 이어진 이 통로는 삼 구역의 귀기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출구였다.
그런데 삼 구역에는 비역에서만 귀기가 존재하지 않는가.
[아! 올라갈 때와 다르게 귀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얼른 귀심결(鬼心訣)을 운용해본 은조의 얼굴에도 낭패한 기색이 어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려면 진우선밖에 없는데, 그가 벌써 올라왔단 말입니까?]
[준비해라.]
무흔이 짧게 답하며 전신에 기운을 피워 올렸다. 자세히 답해줄 겨를이 없었다.
[이럴 수가!]
곧, 은조도 빠르게 다가오는 강력한 기운을 느꼈다. 보지 않았어도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이윽고.
한 쌍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또렷이 빛나더니, 순식간에 눈앞에 당도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군.”
“진우선?”
“맞소.”
진우선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머뭇거릴 시간조차 없는데,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게 된 까닭이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거요?”
무흔이 여유롭게 물었다. 진우선의 다급한 면을 보며 다소 자극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 길이 밖으로 이어진 모양이오. 맞소?”
“맞소. 하지만 바깥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소. 나가시지 않는 게 좋소.”
“내가 상황이 급하니, 길게 상대할 시간이 없구려.”
퍽-!
진우선이 말을 하던 도중에 왼손으로 어둠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암흑 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은신하고 있던 이는 복면 사내, 은조였다.
“어, 어떻게…….”
은조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죽어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복면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는데, 혈향이 나는 게 아무래도 입에서 피를 마구 쏟아 낸 모양이었다.
단박에 당한 것이리라.
곧이어.
툭.
은조의 숨이 멎으며 목이 떨어져 내렸다.
무흔이 그 모습을 일별한 뒤, 싸늘한 음성을 던졌다.
“후우-! 진우선 당신은 정말 빈틈조차 없군. 사람이 이리 냉혹해도 되는 거요?”
“그게 당신들이 할 소리인가? 이토록 음모를 펼쳐 수많은 사람을 죽게 했는데.”
“그게 어찌 우리 잘못이오? 저들이 탐심을 부린 것이지.”
무흔이 뻔뻔하게 대꾸하며, 온 공력을 끌어올렸다.
“무릇 인간은 탐욕으로 성취를 이루나, 탐욕으로 망하는 법 아니겠소?”
“궤변이군. 천하를 가두는 음모를 꾸민 주제에.”
“진우선, 당신은 안 그렇소? 우리를 이토록 쓰러뜨렸으니, 당신의 살업(殺業)도 만만치 않소.”
무흔이 제 하고 싶은 말만 잔뜩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기묘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몸이 둘로, 넷으로, 여덟으로 늘어났다.
무영류의 상승절기인 극성의 팔형환마보(八形幻魔步)였다.
분신환영이 모두 실체 같았고, 음성마저 팔방에서 들려왔다.
“후후후! 청안의 복수요.”
그와 함께 환영들이 흐릿해지며 빛살처럼 쏘아지려는 순간.
콰아아-!
어느새 뿜어져 나온 눈부시게 밝은 여덟 줄기의 검강이 무흔의 여덟 분신을 모조리 꿰뚫었다.
광양찬망(光陽燦芒)의 한 수였다.
“컥!”
무흔이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냈다. 팔형환마보가 깨져 마지막 숨결은 하나였다.
진우선이 흘낏 내려보았다.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죽어서조차 노려보고 있었다.
“그도 이렇게 숨을 거두었소.”
진우선이 그렇게 한 마디만을 남기고 급히 무흔의 주검을 지나쳐 갔다.
저 앞에 출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