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힐데가르트는 초조한 마음에 미하일을 다그치지 않도록 감정을 다잡았다.
지금껏 이 애는 누구와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초조함에 자기를 다그쳤을 레디스?
살림으로 바쁜 로빈?
차기 가주로서 불안한 마음이 클 텐데, 속내를 터놓은 적은 있었을까?
미하일은 저를 믿지 못하는 거냐며 동생을 혼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다. 오히려…….
‘변하는 걸 무서워해.’
힐데가르트는 미하일을 가만 살폈다.
“오빠가 백작 부인이 무슨 말을 하든 혼자서 버텨온 거 알아.”
동생을 핑계로 유약한 미하일을 정서적으로 몰아붙이는 건 쉬웠으리라.
“오빠는 정말 잘해왔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게 막은 거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하일은 다정한 말을 들을수록 눈두덩이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계속 이대로 지낼 수는 없다는 거, 오빠도 알고 있잖아.”
“……힐데.”
미하일은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모를 리 없다.
넓은 저택을 관리하며 세 남매를 돌봐주는 사람은 이제 로빈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쫓아내겠다고?
백작 부인이 진정 남매들을 고운 마음으로 돌봐주고 있다면 그럴 리 만무했다.
하지만…….
‘지쳤어.’
미하일은 어떨 때면 하루가 너무 길었다. 너무 길어서, 버겁고 힘든 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꼭 끌어안기며 격려받았던 게 언제였더라.
즐겁게 무언가를 배웠던 날들이 까마득했다.
그저 하루하루를 애매한 희망 속에서 견디고 넘길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후견인까지 없어져 버리면…….
“오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히, 힐데?”
힐데가르트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잘했어. 혼자서 힘들었지?”
미하일은 깜짝 놀랐다.
힐데가르트가 저를 어지간히도 못 미덥게 여겼으니 이런 일을 터뜨린 거라고 생각했건만.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건 전부 오빠 덕이야. 오빠가 버티지 못했다면, 공작가는 정말 끝장났을걸?”
각기 다른 집안으로 흩어진 아이들은 대부분 불행하게 산다.
자신이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근본적인 정체성이 박살 나는 탓에 정략결혼에 이용당하거나 가문 간의 다툼에 휘말려 이도 저도 아닌 삶을 살곤 했다.
미하일은 그런 최악의 상황을 고작 열한 살 때부터 막아왔다.
“가주 실격이라든가,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소리 하기에는 너무 일러. 오빤 도망치지 않았잖아.”
힐데가르트는 어느새 발갛게 달아오른 미하일의 눈을 보고 말했다.
“너무 혼자서 걱정하지 마. 이제 내가 지켜줄게.”
“힐데…….”
살다 보면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힐데가르트는 미하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렇게 될 사람이었다.
“나한테 계획이 있어. 오빠한테만 먼저 알려줄게.”
힐데는 그렇게 말하더니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편지를 집어 들었다.
페이퍼 나이프로 한 번 뜯어낸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편지 봉투에는 대공가의 문장이 찍혀져 있었다.
“레디스 오빠한테는 비밀이다?”
미하일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열어보았다.
“아…….”
편지를 읽어낸 그의 표정 위로 천천히 놀라움이 번져갔다.
힐데가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지독하게 불편한 식사 자리였다.
백작 부인은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는 로빈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 짐을 싸 둬.”
“네?”
“3일 뒤에도 이곳에 남아 있으면 매질을 해서 내쫓겠다.”
벼락같은 말이었으나, 먼저 식탁에 앉아 있던 힐데가르트가 태연히 대답했다.
“쌀 필요 없어, 로빈. 곧 새 후견인이 올 거야.”
“힐데가르트!”
“아니다. 혹시 더 넓은 방으로 옮기고 싶으면 네 마음대로 해. 다음 주에는 사용인도 새로 들일 거니 그전까지 짐 풀어 놓고.”
“너 아직도 그런 소릴 하고 있니?”
솔베르 백작 부인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미하일이 동생을 잘 타일러 보겠다고 하더니, 결국은 이 모양이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백작 부인을 무시하며 접시를 비웠다.
“미하일은 왜 안 내려오는 거지?”
“미하일 오빠는 따로 식사할 거예요. 아, 로빈. 백작 부인께는 냉수로 드려.”
마시고 속 좀 차리시라고.
“너…….”
“아침부터 화내지 마세요, 몸에 안 좋아요. 간밤에는 잘 주무셨어요?”
“신경 써주듯이 말할 것 없다.”
“매몰찬 말씀 마시고요.”
힐데는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곧 한숨도 못 자게 되실 텐데 푹 주무셔야죠.”
“…….”
백작 부인이 주먹을 쥐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너는 지방 수도원으로 보내야겠구나. 건방진 게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래서야 시집은 갈지 모르겠어.”
로빈은 깜짝 놀랐다.
지방에 있는 수도원은 사제뿐만 아니라 신분 높은 죄인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마음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운신에 제약이 생기고, 맨발로 찬물에 이불을 빨래하는 등 궂은일도 피할 수 없었다.
어린 공녀가 지내기에는 여러모로 적절치 않았다.
하지만 힐데가르트의 반응은 겁먹기는커녕 천연덕스러웠다.
“저보다는 백작 부인이 가시게 되지 않을까요?”
“……너!”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때였다.
“아! 목말라 죽겠다. 로빈! 나 주스 한 잔만!”
“오셨어요, 도련님?”
타이밍 좋게 수련을 끝내고 레디스가 돌아왔다.
화낼 타이밍을 놓친 백작 부인이 이를 갈았다.
“더 이야기를 나눌 가치도 없구나. 먼저 일어나마.”
“갈 때는 가시더라도 반지는 주고 가시겠어요?”
힐데가르트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백작 부인은 오늘도 보란 듯이 가주 인장 반지를 차고 있었다.
“왜 남의 가문의 중요한 반지를 자기 물건처럼 쓰고 계세요? 당장 돌려주세요.”
반지 내놔, 반지.
“대체 어느 가문의 후견인이 자기 마음대로 인장 반지까지 끼고 다니나요? 공작 부인이라도 되고 싶으신 건가요?”
힐데가르트의 눈에는 그녀가 도둑질한 물건을 자랑스럽게 차고 있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보면 내가 빼앗아 온 줄 알겠구나.”
“아니라면 돌려주시면 되겠네요.”
쯧, 하고 대놓고 혀를 찬 솔베르 백작 부인이 그녀를 품평하듯 흘겼다.
“날 못된 사람으로 몰아가고 싶은 네 마음은 알겠다만, 정 그러면 미하일을 설득하지 그러니?”
그녀는 절대로 미하일이 저에게 거스르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이 이모를 이렇게 괄시하는데 반지를 돌려주면 잡아먹기라도 하겠구나.”
백작 부인은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이든 뭐든 네 마음대로 하렴. 하지만 3일 뒤에 저 하녀는 매질을 해서 알몸으로 쫓아낼 거고, 너도 수도원으로 갈 테니 짐을 싸거라.”
그녀가 식당을 뒤로했다.
손님방으로 돌아온 백작 부인은 힐데가르트의 건방진 말투를 곱씹었다.
“당장 수도원을 알아봐야겠어.”
다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공작가를 오가느라 시간을 얼마나 낭비했는데?
좋아하는 보석 경매조차 참여하지 못하고 시간을 투자했더니, 저런 건방진 말투로 대드는 것도 모자라서 후견인 지위 박탈이라고?
“레인보우 글로우만 있으면 나도 이런 공작가에 용건은 없어!”
오래전 일이다.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가장 융성하던 당시, 유독 여동생을 아끼던 소공작이 사교계에 데뷔하는 공녀를 위해 특별한 목걸이를 만들었다.
그 이름하여 레인보우 글로우.
공작가에서 채굴한 일곱 가지 색의 보석을 가장 굵고 고운 것으로 구해와서 만든 목걸이였다.
당시 이름난 세공사를 들볶아서 만든 이 물건은 유색 보석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주인이었던 공녀는 목걸이에 관심이 없었고, 유행이 지나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공작가의 재산이 찢어지는 동안에도, 레인보우 글로우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만한 물건이 80년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아직도 숨겨져 있다는 소리다.
솔베르 백작 부인은 보석 경매에 참여하며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도 장물로 나온 적 없으니 아직도 이 집 안 어딘가에 있는 거야.”
장장 5년.
공작가의 금고며, 땅이며, 재산이 묻힌 곳이라면 어디든지 파헤쳤다.
미하일에게도 천연덕스레 캐묻기도 했으며, 인장 반지를 가지고 은행을 돌아다니며 가문의 비밀스러운 은행 금고가 있는지도 알아보았다.
하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해고한 사용인들에게 캐물어서 몇 가지 사실은 알아내기는 했다.
공작가의 중요한 물건은 따로 보관한다는 점. 그곳에 드나들기 위해선 가주 인장 반지가 필요하다는 점.
하나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레인보우 글로우의 행방은 줄곧 묘연했다.
이제는 그녀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힐데뿐만이 아니라 당분간은 모두 다 멀리 보내야겠어. 한 달은 저택을 비우도록 해야지.”
새 후견인?
찾는 물건만 발견한다면 이깟 후견인 노릇은 부탁받아도 사양이었다.
솔베르 백작 부인은 코웃음을 치곤 구두를 집어 던졌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자그맣게 빛나던 빛의 구슬이 깜빡거리다 사라졌다.
* * *
힐데가르트는 마력을 끊으며 엿듣기를 그만두었다.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테라스로 나온 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손을 댄 채 한숨을 쉬었다.
“……그깟 목걸이 때문에 이랬던 거야, 지금?”
레인보우 글로우.
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단어야, 그게.
“레인보우 글로우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던 귀부인이 많기는 했지만……. 어이가 없네.”
힐데가르트는 그 물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사교계에 데뷔하는 그녀를 위해 오만가지 난리를 피우며 만들어 낸 목걸이였기 때문이다.
정작 힐데가르트는 데뷔탕트 무도회를 마치고, 사교계에 몇 번 얼굴을 내비친 뒤 집어던져 버렸지만.
기가 찬 레온하르트가 버럭 화를 내며 잔소리를 퍼부었던 게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그게 아직도 저택 안에 있단 말이야?”
비싼 물건은 죄다 가져다 판 줄 알았는데.
“레온 오빠 성격에 그걸 해체해 버리진 않았을 거고. 그럼 가져가서 보관했다는 건데……. 아!”
힐데가르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거기 있겠구나! 외부인이 절대 못 찾을 금고라면 거기밖에 없지!’
물방울의 방.
초대 가주가 만들었던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비밀 금고!
“역시 거기에 있었구나, 우리 집 재산.”
그럼 그렇지.
그 많은 재산이 전부 흩어졌을 리 없지!
로빈의 말에 따르면, 전대 공작인 미카엘리스는 부부 여행을 다녀와서 곧바로 폐결핵으로 쓰러졌다고 했다.
죽을병은 아니니 괜찮을 거라며 주변을 안심시키던 공작 부부는 자식에게 병을 옮길까 봐 멀리했던 게 그대로 마지막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유언장이나 후견인을 정하기는커녕, 물방울의 방을 알려줄 새도 없는 단명이었다.
왜 백작 부인이 굳이 가주 인장 반지를 빼앗은 건지 알겠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역시 일은 풀리려면 한 번에 풀린다니까!”
힐데가르트는 기분 좋게 웃었다.
“좋아. 일이 다 끝나면 거기부터 확인해야겠다.”
정말로 이 집에 레인보우 글로우가 숨겨져 있다면?
‘더 이상 돈 걱정할 필요도 없어!’
힐데가르트는 슬그머니 올라오는 입꼬리를 찻잔으로 가렸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내일 있을 재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