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죄질을 따지는 자리가 아닌 만큼, 재판정은 협소했다.
황실에서 파견된 법관은 두툼한 자료를 들고 나타나, 은색 안경테 너머로 힐데가르트와 백작 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힐데가르트의 뒤편에는 미하일과 레디스, 그리고 로빈이 서 있었다.
반면 백작 부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양산 끝으로 바닥을 짚은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는 이까짓 재판은 빠르게 끝내고 돌아가겠다는 모습이었다.
“지금부터 후견인 지위 박탈에 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송 당사자가 조정을 거부하였으므로 빠르게 진행하도록 합니다.”
예복 차림의 힐데가르트는 공손히 인사했다. 곧 재판정의 문이 닫혔다.
“힐데가르트 공녀님, 후견인의 지위 박탈을 요구한 게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사유를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법관은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편했다.
말속에서 상대의 나이와 상관없이 절차를 지키며 존중하겠다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적법한 사유가 없다면 요구는 기각됩니다. 무엇을 근거로 지위 박탈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힐데가르트는 대답 대신 이마의 거즈를 떼어냈다. 그러자 부어오른 피부와 손톱자국이 드러났다.
“이 자리를 빌려 저는 레이첼 솔베르 백작 부인의 정서적 학대와 신체적 학대를 고발합니다.”
“……!”
“저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한 진료 소견서 또한 제출합니다. 함께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작 부인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힐데가르트가 초장부터 너무 강하게 나와서였다.
그녀가 황급히 외쳤다.
“잠시만요, 저건 망상입니다!”
“망상이 아닙니다. 백작 부인은 최근 5년간 사용인 대다수를 해고하고, 피보호자 교육을 방치했습니다.”
솔베르 백작 부인은 기가 막혔다.
도대체 어떤 열두 살짜리 소녀가 저토록 똑 부러지게 법관 앞에서 말한단 말인가?
‘설마 진짜로 그 편지를 쓴 사람이 힐데였단 말이야?’
백작 부인은 침을 삼켰다.
힐데가르트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백작 부인은 그간 차기 가주인 미하일 공자에게 어떠한 후계자 교육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는 명백히 후견인으로서의 방임 행위입니다.”
“오해예요!”
우선 소리부터 질렀던 백작 부인은 가슴에 손을 얹고 후우, 한숨을 쉬었다.
“법관님, 제 말부터 들어보세요. 제 아이가 아닌 만큼 더욱 조심히 훈육하느라 그랬을 뿐입니다. 게다가 후계자 수업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아 뒤로 미뤄둔 건 미하일 본인이에요.”
“증거는요?”
“뭐?”
“그렇게 말씀하시는 백작 부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있나요?”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냥 미하일 본인에게 물어보면…….”
“증거조차 없다면 제 발언을 끊지 말아주시겠어요? 저는 증거를 전부 갖추고 드리는 말씀이라서요.”
힐데가르트가 냉랭하게 백작 부인에게 쏘아붙였다.
“공녀님, 증거라고 하심은?”
“우선 이쪽을 봐주세요. 그동안 백작 부인이 생활비 명목으로 지급한 내역과 장부입니다. 로빈?”
로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툼한 서류 봉투를 법관에게 건넸다.
서류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한 법관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보시다시피 교육비에는 어떠한 투자도 없었습니다. 후계자 교육에 필요한 가정 교사를 고용한 것도 아니고요.”
보통 후계자를 교육할 때는 가문의 역사와 영지의 특성을 자세히 알고 있는 교사를 붙인다.
공작가처럼 가문의 규모가 클수록 후계자 교육에 참여하는 교사의 수도 많아지는데, 때로는 공작 부부 내외가 나서서 교육할 때도 있다.
반대로 규모가 작은 집안이라 교사를 붙일 여력이 없을 때는 집사가 대신하여 교육을 돕는다.
하지만 미하일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교육은커녕 백작 부인이 직접 찾아오시는 일도 드물었죠.”
완전한 방치.
법관은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서류와 힐데가르트의 이마에 난 상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백작 부인도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녀가 슬픈 표정으로 한숨지었다.
“아이들과 제 사이에 자그마한 골이 생긴 것이 이렇게 큰 문제로 번지게 되는 것이 억울하네요.”
“자그마한 골이라 하셨습니까?”
“그럼요.”
솔베르 백작 부인은 양산 손잡이를 꼭 쥐고 말했다.
“그간 후견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봤어요. 필요하다면 공작가의 예산안을 책정하는 일까지 도맡아 하면서요.”
백작 부인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오히려 장부를 확인해 보셨으니 아실 거예요. 제가 얼마나 빠듯한 공작가의 예산을 활용해서 아이들을 돌봐왔는지요.”
힐데가르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백작 부인은 장부를 빌미로 책임을 다했다고 주장할 셈이겠지.
“제가 드린 서류의 두 번째 자료를 자세히 봐주세요.”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백작 부인이 분기별로 보낸 공작가의 수입금 명세입니다. 중요한 항목이 빠져 있다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중요한 항목?”
법관은 넘겼던 서류를 다시 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무겁고 느리게 굴러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철광석……?!”
“네, 맞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차가운 눈으로 백작 부인을 보았다.
“황실에 납품하는 철광석 수익 내역이 전부 누락되어 있습니다.”
백작 부인은 정전기에 닿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황급히 변명했다.
“그, 그건 다른 장부에 적어……!”
“이중 장부를 만드셨다는 소리십니까?”
순식간에 창백해진 백작 부인이 입을 가렸다. 말실수였다.
“백작 부인, 대답하십시오. 다른 장부가 있으신 겁니까?”
“……워낙 세 수익이 많다 보니 복잡하고 적을 양이 많아서…….”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군요. 게다가 좀 전에는 공작가 예산이 빠듯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윽…….”
법관이 안경테를 들어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하겠군요. 철광석 납품 내역이 포함된 원본 장부를 따로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그, 그건……!”
“제출하십시오.”
법관은 더 이상의 이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솔베르 백작 부인은 부득부득 이를 갈며 힐데가르트를 노려보았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시면 따라야지요.”
백작 부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세요. 5년 동안 아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버팀목이 된 사람은 접니다. 그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요.”
“…….”
“후견인으로서 제가 모자란 부분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직도 아이들은 어리잖아요. 보호가 필요합니다.”
“흐음.”
한참 뒤 입을 뗀 법관은 앞선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이를 불렀다.
“미하일 아카락시아 공자님.”
“네, 네?”
“아무래도 여기서는 차기 가주이신 공자님의 의견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법관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후계자 교육 문제를 생각하면 이 일은 공자님과도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네.”
“공자님께서는 이 일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건…….”
“말씀하시는 발언은 이번 재판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칠 겁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신중하게 발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그러니까…….”
미하일은 습관처럼 고개 숙일 뻔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 예배당에 혼자 남아 있을 때처럼.
깊고 차갑고 어두운 곳에 뚝 떨어져서, 마냥 헤매는 미아가 된 기분.
“오빠.”
그 순간 따뜻한 손이 미하일의 팔을 붙잡았다.
“……힐데.”
미하일은 이틀 전, 저를 다정히 안아주었던 힐데가르트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가주 실격이라든가,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소리 하기에는 너무 일러. 오빤 도망치지 않았잖아.’
‘너무 혼자서 걱정하지 마. 이제 내가 지켜줄게.’
너무도 다정하고, 그래서 꼭 지켜주고 싶었던 여동생이다.
미하일은 입 안쪽 연한 살을 깨물었다.
“저는 그간 한 번도 후계자 교육을 받아본 적 없습니다. 예산안을 짜는 방법도, 회계 장부를 보는 법도 마찬가지예요.”
미하일은 하잘것없는 제 모습을 인정하며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은 공작으로서, 가주로서 모자라겠지만.
‘변하고 싶어.’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강한 내가 되기를 원해.
변하는 건 두렵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애써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더욱 나빠질까 봐 두렵다.
하지만 저를 따뜻하게 응원해 준 가족을 위해서라도, 미하일은 변해야 했다.
이번에는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힐데가르트 덕분이었다.
“힐데가르트의 말은 사실입니다. 이모님…… 아니, 솔베르 백작 부인은 후견인이 없으면 가족이 흩어지게 되는 것을 빌미로 제게서 가주 인장 반지를 거두어 가셨습니다.”
“미하일!!”
“정숙 하십시오, 백작 부인. 공자님, 계속 말씀하시지요.”
“적법한 권리를 되찾고 싶습니다. 제대로 된 후계자 교육을 받아서 동생들을 지켜줄 수 있는 가주가 되고 싶습니다.”
미하일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며 말했다.
“차기 가주로서, 백작 부인의 지위 박탈을 원합니다!”
레디스는 항상 참기만 하던 형이 이렇게 크게 소리치는 걸 오랜만에 듣는다고 생각했다.
‘말했다.’
미하일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불덩이를 지펴놓은 것처럼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 불덩이는 저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백작 부인을 마주할 때면 차가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미하일은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제 동생이 끝까지 잡고 있던 손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결론이 나온 것 같군요.”
“잠시만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할 말이…….”
“오늘부로 백작 부인의 후견인 권한을 박탈합니다.”
법관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그가 증언 서류와 장부를 내려놓았다.
“그간 후견인의 적절치 못했던 행실, 피보호자의 의견이 뚜렷한 점. 방치. 장부의 투명성이 보이지 않는 점. 뭣보다.”
그는 힐데가르트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어떤 이유로도 보호해야 하는 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결정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말, 말도 안 돼…….”
절망에 찬 백작 부인의 얼굴과는 달리, 미하일과 레디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걸렸다.
힐데가르트의 입가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만.”
법관은 크흠, 하고 기침을 했다.
“세 분은 아직 미성년입니다. 다음 후견인이 없다면 선례에 따라 다른 가문에 몸을 의탁해야 합니다.”
“맞, 맞아! 그래!”
얼이 나가 있던 백작 부인은 데인 것처럼 화들짝, 몸을 떨었다.
“미하일, 동생들과 떨어지는 걸 바라는 건 아니지 않니?”
그녀는 필사적으로 미하일을 설득하려 들었다.
“이모가 부족한 점이 있었던 건 인정하마! 하지만 현명하게 생각하렴. 이제 와서 새 후견인을 어떻게 구하려고…….”
물론 힐데가르트는 그 상황을 가만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녀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새로운 후견인이라면 이미 와 계세요.”
“뭐?”
“들어오세요.”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재판정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실례하겠소.”
저벅저벅.
빛을 등지고 나타난 사람은 중후한 노신사였다.
푸른 눈은 수많은 풍파를 담아둔 바다 같았고, 머리카락은 눈처럼 새하얬다.
지팡이를 쥔 손에도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하지만 노쇠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날카롭게 깎인 기암절벽처럼, 그곳에 있기만 해도 압도하는 특유의 카리스마.
“소개하겠습니다. 새로운 후견인을 맡아주실 오브론 대공이세요.”
“율리겐 마이스터 오브론이오.”
줄곧 냉정함을 지키던 법관의 입이 눈에 띄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