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다, 단테?”
“플람이다. 아직은.”
로바르네는 무심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솟아나듯 나타난 남자의 눈은 노란색이었다.
플람은 기절해서 축 늘어진 랑케르트 공작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로바르네는 정신을 잃은 아버지를 보자 걱정보다도 덜컥 공포가 앞섰다.
“왜…… 당신이 이런 시간에…….”
이 남자는 위험하다.
로바르네는 적잖은 사람을 만나왔다. 하지만 플람만큼 위험하다는 인상을 받은 이는 별로 없었다.
그가 단순히 흑마법사여서만은 아니었다.
언행에서 느껴지는, 초연한 듯하면서도 뒤틀린 인성이 섬뜩함을 안겼던 탓이다.
“너희에게나 나에게나, 이번 사냥 대회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을 거야.”
“…….”
“아버지에게 전해 듣지 못했나?”
당연히 전해 듣지 못했다.
로바르네와 랑케르트 공작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부녀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플람을, 정확히는 눈앞의 존재를 알게 된 건 1년 전이었다.
어지간한 일은 마우제네를 통해 연락하던 아버지가 한밤중에 꼭 지금처럼 기별 없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카라딘을 황제의 자리에 올려줄 강력한 조력자를 찾았다.’
처음에는 헛소리하지 말라며 쫓아냈으나, 결국 그 조력자가 아쉬워진 건 로바르네였다.
그녀는 은밀히 아버지와 다시 접촉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남자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달라져 있었다.
그의 노란 눈에 잠시 붉은색 그림자가 맺혔다.
“캄파넬에 묻힌 성검……. 고작 그거 하나 가져오지 못한 너희가 감히 스승님을 건드려?”
축 처진 인형처럼 허공으로 들린 칼란도의 손발이 달랑거렸다.
“다, 다가오지 말…….”
“그분이 어떤 사람인데.”
플람의 목소리에서는 점점 노기가 가득 흘렀다.
“너희 같은 버러지는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태어나지도 못했을 텐데!”
로바르네가 감히 저를 향해 윽박지른 상대에게 고함치기는커녕, 한 번 더 뒷걸음질 쳤을 때였다.
플람에게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랑케르트 공작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았다.
심상치 않은 공기가 주변을 몰아친 것도 잠시. 마력이 모조리 빨려 나간 랑케르트 공작이 미라처럼 쪼그라들었다.
이윽고 쪼그라든 공작의 몸은 불에 탄 종이처럼 사락사락 재가 되어 날아가기 시작했고.
“아…… 아, 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었던 공작이 입었던 녹색 의복만이 땅에 떨어졌다.
로바르네는 공황에 빠졌다.
“하나뿐인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고 싶으니 뭐든지 하겠다고 했던 건 너희였잖아.”
“아, 아버, 아버지는…….”
“이미 죽은 사람 뭐하러 찾아? 내 말에 집중해.”
무릎에 힘이 풀린 로바르네는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당신이…….”
그는 현 랑케르트의 가주이자 공작을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어, 어떤, 일을 벌인 건지 아는 거예요?”
“…….”
“자, 장난이죠? 마법을…… 마법을 부린 거죠? 그렇죠……?”
플람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녀를 훑었다.
“내가 ‘일을 벌인’ 것 같지는 않은데.”
“제국의 공작을…….”
“벌레의 신분 같은 건 관심 없어.”
노란 눈동자는 그녀에게 박혔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
로바르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도 잠시.
그녀는 주저앉은 채 뒤뚱거리며 플람에게서 멀어졌다.
선반에 몸이 부딪치자 우당탕, 하고 큰소리가 났다.
세워둔 액자가 손가락 위에 떨어졌으나 로바르네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플람이 그녀를 무심하게 훑어볼 때였다.
요란한 소리를 들었는지 바깥을 지키고 있던 기사 한 명이 문밖에서 말을 걸어왔다.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방금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어올 것 없다! 아무 일도 없으니 들어오지 마!”
로바르네가 앙칼지게 외쳤다.
이 남자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지금 잘못했다간 저 또한 아버지와 같은 꼴이 될 게 분명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래. 실수로 물건을 떨어뜨렸다. 아무 일도 없으니까…… 다시 돌아가거라.”
겁에 질린 로바르네는 플람의 눈을 피하며 액자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는 등을 돌려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뒤를 돌았다.
그러자 뜻밖의 인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테.”
“저런. 떨고 있구나?”
로바르네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는 더 이상 노란색이 아니었다. 붉디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안심해라. 플람은 다시 내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아…….”
로바르네는 이 순간만큼은 마성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사내를 앞에 두고 안도했다.
“아, 흑…… 으윽, 으…….”
“저런. 울어버리긴. 하기야 플람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지 아마?”
그러나 로바르네의 안도는 오래갈 수 없었다.
“다, 단테…….”
“그러니까 그 애의 마지막 경고를 귀담아들었어야지.”
플람과 같은 육체를 쓰고 있는 남자는 기지개를 쭉 켠 다음, 좀 전까지 랑케르트 공작이었던 모래가루와 옷가지를 발로 차버렸으니까.
“후우! 바깥 공기는 마실 때마다 각별하단 말이야.”
“아…… 으윽…… 흑…….”
“왜 그래?”
단테가 실소를 흘렸다.
“설마 슬픈 거야? 아니지?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가 죽은 거잖아?”
눈앞의 남자는 오랜만에 주도권을 되찾아서 기뻐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웃어. 얼른.”
“흡…… 끄윽…….”
“웃으라니까. 아니면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
로바르네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한참 후 그녀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자, 단테는 잘했다는 듯 상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옳지. 그렇게 해야지. 이거라도 줄 테니까 울지 말고 내 말 똑바로 들어.”
단테는 주머니에서 플람이 주웠던 머리 장신구를 꺼냈다.
그 장신구는 힐데가르트가 차고 있었던 것으로 아직 축축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플람이 물에 빠진 힐데가르트에게 돌려주려 했던 것이었으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단테였다.
그는 플람과 같은 몸을 쓰면서도 일부분의 기억만을 공유하는 관계였으니까.
“그런데 이거 참 난처해졌네. 이제 곧 겨울이 올 테니…….”
살얼음과 피부가 맞닿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흠칫, 떨었다.
“너희와 내가 약속했던 기간은 끝이겠지?”
단테의 발밑에서 솟아난 검은 그림자가 뾰족한 송곳처럼 변하더니 순식간에 로바르네의 목젖까지 닿았다.
“열흘 주지.”
“아…… 아아…….”
“그 안에 성검을 찾아와. 그러지 못한다면 너와 네 아들도 저렇게 만들 거야.”
최후통첩이었다.
“아니면 찢어 죽이든가.”
* * *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에게 받았던 선물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물에 빠졌을 때 떨어졌던 걸까.’
유시스와 티모시 남작의 시종들이 다시 찾아봐 주었으나 장신구의 행방은 묘연했다.
키스케는 그녀가 물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장신구를 잃어버린 걸 밝히고 사과하자, 네가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참고로 없어진 건 물건뿐만이 아니었다.
밤 산책을 나선 주인께서 돌아오지 않으셨다며, 오전부터 랑케르트 측 시종이 급히 소식을 알린 채였다.
힐데가르트는 공작의 실종과 플람이 연관되어 있다고 직감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데리고 사라졌던 것도 플람이니까.
힐데가르트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플람이 흑마법사가 되었고, 랑케르트와 협력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상으로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였다.
‘플람이 나를 되살렸다.’
무덤가에 그려놓은 흑마법진과 돌아오리라 확신하고 있었던 그 태도.
그리고 징그러울 정도의 맹목성과 집착까지.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깊은 한숨과 함께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건 정말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지만 곁에 있던 유시스를 놀라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공녀님, 아프세요?!”
“아, 아니에요. 미안해요.”
힐데가르트는 곧바로 표정을 다잡았다.
“잠깐 졸려서 하품했어요.”
“다행이다…… 안색이 안 좋으셔서 걱정했어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그보다, 혹시 본 사람은 있대요?”
힐데가르트가 묻자 유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작별 인사하면서 물어봤는데, 다들 보라색 긴 머리의 남자는 사냥 대회 기간 내내 본 적 없대요.”
“……그렇군요.”
“오빠한테도 도와달라고 해볼까요? 이왕이면 찾아야죠! 물에 빠진 공녀님을 도와주신 분인데!”
유시스는 의욕적으로 말했으나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이제부턴 제가 혼자서 찾아볼게요.”
플람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기에, 어제 보트가 뒤집힌 저를 도와주고 사라졌다고만 얼버무렸다.
예상대로 그동안 몸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겠지.’
하지만 언제가 되었든, 플람은 다시 한번 저를 찾아오리라.
그때 꼭 확인해야 하는 게 생겼다.
“고마워요, 유시스 양,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네요.”
“그냥 유시스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힐데라고 부를 테니까.”
“좋아요.”
힐데가르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고 있을 때였다.
“공녀님!”
“이오타, 협상은 잘 마무리했어?”
“네!”
저쪽에서 달려온 이오타가 숨을 고른 뒤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됐다. 네게 확인해야 할 게 있는데.”
“확인이요? 어떤 일로 그러시는 건데요?”
“이오타, 너 마탑주와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던 게 삼 년 전이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