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네? 어…… 네, 맞습니다. 왜 그러세요?”
“마탑주에게 연락을 넣고 싶어.”
“계획하고 계시는 사업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하지만 그건…….”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널 통해 해결했으니 괜찮아.”
“그럼 왜……?”
“다른 일로 의견 구할 게 생겼거든.”
흑마법의 기본 원리는 흑마법사의 마력을 이용하거나 제물에 깃든 마력을 빼앗아서 이용하는 것이다.
마성신 소환처럼 강력한 존재를 불러오기 위해선 그 두 가지를 모두 행할 때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흑마법사, 시체를 부리는 네크로맨서 또한 마력을 이용해 사역마를 다룬다.
하지만 그 어떤 흑마법도 시체…… 그러니까 ‘죽은 자’를 완벽히 되살리지는 못했다.
‘완전한 사자소생이 가능한 건 마성신뿐이었지.’
힐데가르트는 이 몸에 깃든, 빙의에 가까운 현상이 영혼을 불러오는 흑마법의 영향인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영혼의 주인이 있는 몸에 제 영혼을 불러와 심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때가 되면, 다시 자연스레 제 영혼이 마법이 끝날 때 흩어지며 소멸하고 다시 ‘힐데가르트’에게 제 삶을 돌려주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만약 제 영혼을 불러오는 흑마법에 마력만 쓴 게 아니었다면?
이오타는 그녀의 얼굴이 몰라보게 싸늘해진 걸 눈치챘다.
그때 곁에 있던 유시스가 끼어들 듯 말했다.
“힐데, 저는 이만 어머니께 가볼게요!”
“그래요.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부인께 안부 전해주세요.”
“네! 나중에 만나요!”
힐데가르트가 유시스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오타는 태연하게 웃고 있는 힐데가르트를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공녀님, 무슨 일 있으신 거죠?”
“…….”
“그래서 표정이 그렇게 어두우신 거고요. 그렇죠?”
“어떻게 알았어?”
“공녀님의 표정이 평소보다 훨씬 어두운걸요. 도무지 못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예요.”
밝은 무지개 같은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덩달아 제 마음에도 먹구름이 끼는 기분이었다.
이오타가 그녀를 본 뒤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하시면 바로 연락을 넣어 볼게요.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기대도 하면 안 될 정도야?”
“저도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고 싶지만…… 3년 전에 가게를 열 것 같다고 연락이 왔던 게 전부였거든요.”
“가게? 웬 가게?”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오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탑을 재건하기 위해 돈을 모을 겸 가게를 연다고 했거든요. 지금쯤 장사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
힐데가르트는 잠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세상이다.
하지만 마탑도 없는 마탑주가 돈 때문에 가게를 연다니…….
‘그걸 마탑주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그녀는 새삼스러운 의문을 가졌다.
‘달리 흑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긴 하지만……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네?’
어쩐지 만나보기도 전에 미심쩍은 인상이 들었다.
힐데가르트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 뒤 고개를 들었다.
“무슨 가게인지 이름은 알아?”
“아뇨, 제가 연락을 주고받았을 땐 가게 이름까진 못 들어서…… 그래도 편지를 보냈던 창고 주소는 알고 있어요. 그쪽으로 연락을 넣으면 될 거예요.”
“그럼 주소를 알려줄래? 차라리 내가 사람을 보내는 게 좋을 거 같아. 편지보단 그쪽이 더 정확할 것 같으니까.”
“알려드릴게요. 수첩에 주소를 적어뒀거든요.”
“응. 부탁할게.”
힐데가르트의 얼굴은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이오타는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그래서 돌아올 대답이 뻔할 걸 알면서도 일부러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공녀님, 무슨 일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저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 털어놓으셔도 돼요. 속이 후련해지실지도 몰라요.”
“응. 말만이라도 고마워.”
“말만이 아니에요.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알아.”
저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진심으로 생각해 주고, 위로해 주기 위한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이 무겁다.
만약 때가 되어, 영혼이 자연스레 육체를 떠나며 소멸하기는커녕, ‘진짜’ 힐데가르트의 영혼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를 되살리기 위해, 진짜 힐데가르트의 혼에 손을 댄 거라면…….’
그땐 플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으리라.
‘다시 만나러 올게요, 스승님.’
플람은 그 말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재회의 순간 알게 될 진실은 궁금한 한편으로 두렵기까지 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싸늘했다.
* * *
플람이자 단테인 사내가 떠난 날 아침.
로바르네 황자비는 저를 찾아온 아들과 평소처럼 아침 식사를 했다.
로바르네는 오늘도 아름답고 다정한 어머니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웃음으로, 오랜만에 보는 껴안고 격려했다.
“그깟 사냥 대회, 한 번 기권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정말이요?”
“그럼. 이 어미는 네가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해.”
풀이 죽은 카라딘은 어머니에게 꼭 안겨서 마음껏 응석을 부렸다.
로바르네 황자비는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카라딘이 돌아간 직후, 그녀는 식사를 모두 게워냈다.
황자비는 공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고, 시종이 내온 차가 다 식을 때까지 머리를 감싸 안았다.
시계 초침은 이 순간조차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건 그녀의 목숨이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기도 했다.
‘어떡해야 하지?’
성검 아스톨.
마성신과 약속했던 그 물건을 빨리 찾지 않으면…….
로바르네는 제 얼굴을 긁어 내리듯 쓸었다.
‘성검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전부 들통날 거야.’
오브론의 주치의를 매수해 일리야 공녀를 시험 삼아 저주한 건 물론, 황제를 죽여서 혼란을 틈타 카라딘의 즉위를 밀어붙이려 했던 것까지, 모두 다.
앞선 두 가지와 비교하면 아카락시아의 상단을 무너뜨리려 했던 건 애교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덮어야 해. 그 남자가 원하는 걸 쥐여주고, 입을 다물도록…… 더 큰 사건으로 눈속임을 하고, 그사이에 성검을 찾아야 해.’
하지만 어떻게? 시간이라곤 열흘밖에 없는데.
게다가 곧 랑케르트 공작이 실종된 일로 영지가 떠들썩해질 것이다.
로바르네의 눈앞에서 재로 변한 아버지의 죽음은 슬픔보다도 공포가 앞섰다.
“신이시여…….”
우습게도 마성신과 손을 잡은 로바르네는 어느새 흐느끼며 신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를 쥐어뜯고 울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제국에서 금지한 흑마법으로 황제를 저주했다는 것만 밝혀져도 그녀는 사형을 당할 것이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든 건 조금 전까지 얼굴을 마주했던 아들을 생각한 순간이었다.
‘카라딘…… 하나뿐인 내 아들.’
카라딘은 어두운 터널 속 출구처럼, 그녀에게는 빛줄기고 축복이었다.
로바르네가 열일곱이었을 때, 그녀는 남몰래 연심을 키워왔던 백작가의 남자와 결혼을 약속했다.
격이 맞지 않았으나, 그래 봤자 칼란도 공작에게 ‘흔하디흔한 딸인데다 어중간한 둘째’라고 험한 소리를 들으며 자란 로바르네였다.
이 정도 상대라면 제 아버지도 결혼을 허락하겠지. 그녀는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으나 착각은 금방 깨졌다.
‘뭐라고요?’
‘네 짝은 오래전부터 결정해 놨다. 레널드와 결혼하거라.’
‘제정신이에요? 그분은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요.’
‘그러니까 더더욱 널 존중하며 아껴줄 거다.’
‘요전번 연회에서 저에게 추근거렸단 말이에요!’
그녀가 비명을 질러도 칼란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역겨운 아버지였다.
그는 단순히 무뚝뚝하고, 딸을 대하는 게 서투른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레널드와 네 자식이 랑케르트 가문을 잇는 게 우리의 최선이야!’
‘그건 아버지의 최선이겠죠! 왜 항상 아버지는 그런 식인 거예요? 내가 싫다고 하잖아요!’
‘레널드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면 네겐 아무 가치가 없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요? 더러워…… 이런 게 내 아버지라니, 끔찍해!’
청혼서에 거절로 화답한 아버지를 보며 그때 깨달았다. 칼란도 랑케르트는 가문을 위해서라면 딸을 얼마든지 내놓을 인간이라고.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가문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로바르네에게는 칼란도가 청혼을 거절하지 못할 유일한 상대가 필요했다.
연회마다 새하얀 공작새처럼 꾸며 입은 건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어코 황실의 일원을 유혹하여 그 집을 나왔다.
타산적인 이유로 시작된 부부 관계였다. 하지만 아들인 카라딘을 위하는 마음만은 진짜였다.
그 끔찍했던 아버지와 손을 잡을 마음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칼란도 랑케르트의 실종으로 제국은 시끄러워질 게 자명했다.
만에 하나라도 칼란도와 제가 금기시되는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게 밝혀졌다간, 카라딘에게도 불똥이 튈 생길 것이다.
그러니 독을 독으로 다스리듯…… 다가올 혼란은 더 큰 혼란으로 덮어버려야 했다.
‘카라딘을 위해, 사랑하는 내 아들을 위해 눈엣가시를 모두 치워버리는 거야.’
어차피 성검을 찾아내려면 마지막 도박을 크게 벌이는 수밖에 없다.
남은 시간이 고작 열흘뿐이라면 더더욱 촉박했다.
“전하, 부르셨나요?”
“그래. 지금 가서 편지지를 가져오렴.”
키스케를 죽이고, 그 혐의를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뒤집어씌운다면.
가산 일체를 몰수하고 혼란을 틈타 문제의 캄파넬에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서 성검을 찾을 수 있다.
‘카라딘을 생각해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다!’
로바르네는 저를 내쫓을 적, 황제가 쳤던 호통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래. 나라면 모를까, 카라딘은 버리지 않으실 거야. 손자니까.”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라면 그녀도 오래전의 칼란도 랑케르트가 그러했듯 못할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