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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08)화 (108/166)

105화

Chapter 9. 사계의 끝

사냥 대회에서 돌아온 힐데가르트를 기다리는 건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이었다.

“엘리사 일족의 마리나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 마리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오타 대신 아카락시아 공작 저택을 찾은 사람은 고아한 분위기의 회색 머리칼을 지닌 여자였다.

그녀 또한 이오타와 마찬가지로 윤기가 흐르는 털을 두른 늑대처럼, 우아한 구석이 있었다.

“일족을 데리고 이주하느라 고생이 많았어. 식료품과 의원 말고도 더 필요한 게 있다면 편하게 이야기해. 바로 준비해 줄게.”

“아닙니다, 오늘은 감사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이오타는 잠시 아티팩트 판매 건으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대신 사촌이 찾아갈 거라며 미리 연락을 받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풍성하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찰랑거렸다.

“이오타에게 들었습니다. 저희 일족의 이주를 도와주신 건 전부 공녀님 덕분이라고요.”

“서로 얻을 수 있는 게 있었으니 나눈 거래인 걸.”

“그래도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연분홍색 입꼬리가 슬쩍 말아올라 갔다.

“꼼짝없이 올해 겨우내 숲에서 야영하다 얼어 죽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아, 사냥 대회 우승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힐데가르트는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덤펠트 광산은 앞으로 우리 가문이 관리하게 됐어. 엘리사 일족은 앞으로도 광산을 책임져 줬으면 해.”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이오타는 새로운 아티팩트 거래와 공녀님의 사업을 도울 거고, 전 마석 광산과 일족을 관리하는 데 힘쓸 겁니다.”

“그래. 우선 채굴한 마석은 내가 쓸 곳이 있으니 잘 보관해 줘. 오후엔 공작령의 지주 상단 책임자를 소개해 줄게.”

고개를 끄덕인 마리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마석을 판매하지 않고 보관만 해두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석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쌓여 있는 재고를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광산의 주인은 마리나의 예측을 한참 벗어난 의견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남과 궤를 달리하는 발상은 두 부류에서 나온다.

손가락질받는 바보. 혹은 세상을 바꾸는 천재.

그녀는 과연 어느 쪽일까.

마리나의 눈에 호기심이 돌았다.

“응. 아티팩트에 쓸 것만 빼고는 전부 보관해 두도록 해. 내 사업에 쓸 거거든.”

“그 많은 걸 전부…… 사업에요?”

“어디에 쓸지는 차차 알게 될 거야. 이오타가 돌아오면 그때 전할 테니 우선 마리나와 엘리사 일족 모두 공작령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마리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인 다음, 힐데가르트에게 준비해 왔던 서류를 건넸다.

“저…… 이걸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일족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추려놓은 리스트입니다.”

“고마워. 나중에 보도록 할게. 혹시 식사했어?”

“아, 아뇨. 아직입니다.”

“그럼 같이 먹자. 온 김에 우리 오빠도 소개해 줄게.”

그 후로도 방문객은 연이어 공작가 정문을 통과했다.

“이젠 공녀님을 뵐 때마다 심장을 튼튼하게 해주는 약이라도 하나씩 먹고 와야겠습니다.”

라이그너 상단주의 손에서 힘없이 계약서가 떨어졌다.

“오브론 대공가와 목재 거래라니! 공녀님,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아이 참, 칭찬이 과하세요.”

“과하긴요! 아카락시아산 목재는 그간 품질이 좋아도 많이 알려지질 못했는데……!”

랑케르트 가문은 여태껏 목재 시장을 꽉 잡고 있었다. 한때 아카락시아가 보석 시장을 꽉 잡고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큰손이 앞다퉈 랑케르트 가문의 목재만 찾으니, 서민들도 자연스레 질 좋은 목재가 필요할 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랑케르트 산만 찾았다.

따라서 커다란 거래처를 따오는 건, 소매상을 늘리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영업 방법이다.

“이건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렇죠. 기회니까 이 건을 상단주께 맡기는 거예요.”

힐데가르트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오브론 대공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에요. 랑케르트산 목재보다 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공급한다면 언제든 거래를 끊을 겁니다.”

“그, 그렇겠지요. 명심해서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긴장하실 거 없어요. 목재를 공급하기로 한 건 내년 봄부터니까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잖아요?”

“공녀님이 주신 기회를 헛되게 날리지 않으려면 이번 겨우내 부지런히 준비해야겠습니다.”

너무 겁을 줬나?

대충 쌓아놓은 목재를 준비해서 보낼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의미로 긴장감만 심어주려 했는데.

순식간에 식은땀을 흘리는 상단주를 보며 힐데가르트가 맑게 웃었다.

“한데 공녀님, 서신으로 말씀하신 오십 명의 인부 말입니다만…… 언제까지 고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캄파넬에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요. 그걸 찾을 때까지는 필요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써서라도 찾아야 할 물건입니까?”

“네.”

그녀가 딱 잘라 대답하자, 상단주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 알겠습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주실 순 있을지요?”

“사람을 구하기가 힘든가요?”

“예. 고용해 둔 인부들은 활석을 채굴하느라, 빠져나가는 만큼 새로 인원을 보충하려면 광고를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을 오래 드릴 수는 없어요. 열 명씩이라도 좋으니 준비되는 대로 비토에게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요번에 덤펠트 마석 광산을 얻어 온 건 알고 계시죠? 얼마 전 이주를 마친 엘리사 일족…… 왜 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힐데가르트는 약간 넋이 나간 라이그너 상단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제가 제일 바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공녀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벌여놓은 일도 있고,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소공작 미하일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그녀가 하고 있었다.

라이그너 상단주의 얼굴이 묘해졌다.

“엘리사 일족의 마리나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로빈을 따라가시면 소개해 줄 거예요.”

“예. 바로 가서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앙카와 안토니오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얼마 후 문이 닫히며 서재가 조용해졌다.

힐데가르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긴 숨을 내뱉었다.

물에 잠긴 것처럼 사방이 고요해지니 순식간에 나른해졌다.

그녀가 크게 하품을 할 때였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로빈, 상단주를 벌써 모신 거야?”

“로빈이 아니라서 미안하다.”

“키스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외출할 준비를 마친 사람이었다.

“어쩐 일이야? 어디 나가려고?”

“호수 산책하기 좋은 날인 거 잊고 있었어?”

“……어?”

벽에 걸린 달력을 확인한 힐데가르트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력 날짜에는 파란색 나비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왜 착각했지?’

오늘은 키스케와 선약을 잡았던 날이었다. 호수로 산책하러 나갈 겸, 마법 실험을 한 번 더 해보려 했는데.

“미안해! 다음 주인 줄 알고 착각했어! 오래 기다렸어?”

“한 시간 반 정도. 점심 먹고 가자고 했으니까, 계속 기다렸지.”

힐데가르트가 한창 마리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부터 기다렸단 소리였다.

“너무 안 오길래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어.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녀가 저와의 약속을 잊고 있었다는 말에 섭섭함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힐데가르트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진 걸 보는 건 더욱 불편했다.

“괜찮아. 어차피 피아노 치면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서재로 들어선 키스케는 웃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창문 밖에 머물렀다.

“산책은 내일 가자. 노바만 괜찮다고 하면 이 근처에 있는 마력의 우물에도 들리고.”

“응. 가서 다른 마법도 시험해 봐도 괜찮아?”

“전에 가르쳐 준 거 벌써 익혔어?”

힐데가르트는 깜짝 놀랐다.

사냥 대회가 끝나고 돌아온 뒤부터 키스케는 부쩍 마법을 배우는 태도가 진지해졌다.

“너 요즘 달라졌다? 예전에는 수업 듣기 싫다면서 계속 도망치더니.”

“언제 적 이야기야. ……그냥 모처럼 배우게 됐으니 진지하게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동시에,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길 바랐다.

말 못 할 진심을 삼키고 있으니 힐데가르트의 입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우리 전하, 철들었어?”

“자꾸 그럴 거야?”

그때였다. 키스케의 곁으로 다가간 힐데가르트가 창밖에서 소란을 감지했다.

정문이 소란스러웠다. 가만 보니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서 있었고, 누군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빨간 머리? 누구지? 오늘 찾아오기로 한 건 마리나와 라이그너 상단주뿐일 텐데.’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의 머리카락이 붉었다. 하지만 비토가 모는 마차라고 하기엔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

힐데가르트가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라?”

마차에 새겨져 있는, 닻이 그려진 문장은 익숙했다.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공작가.

“몬테를로 가문 마차잖아?”

“설마…… 아레스?”

마찬가지로 마차를 보고 있던 키스케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도 잠시.

그가 급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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