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109)화 (109/166)

106화

흥미로운 얼굴로 밖을 보던 힐데가르트도 키스케 뒤를 따랐다.

약속이 없는 방문이라면 우선 막고 보는 게 문지기가 할 일이었다.

하지만 몬테를로 공작가쯤 되는 곳이니 매몰차게 내쫓기에는 후환이 두려운 법.

신경질을 부리는 말과 경직된 문지기들 때문에 정문은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겠습니까?”

“조금 더 기다려 주시지요. 지금 사람을 보내서 확인하고 있으니…… 고, 공녀님?”

“수고가 많아.”

그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키스케와 힐데가르트가 나타났다.

“아레스? 너 진짜 아레스 맞아?”

키스케가 창문 안쪽을 들여다볼 때였다.

안쪽에서 불쑥, 장미처럼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고개를 내밀었다.

“야호!”

“아레스, 너……!”

“키스케! 오랜만이지? 그동안 잘 지냈어?”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너 보러 온 거지! 편지 못 받은 거야?”

“편지라니…… 무슨 편지?”

이윽고 마차 문이 열리더니 멀끔하게 예복을 차려입은 소년이 밖으로 나왔다.

한여름에 핀 장미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노란 수정 같은 눈동자가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뜨거움을 간직한 상대였다.

날렵하게 이리저리 뻗어 있는 앞머리를 매만진 소년이 볼을 긁었다.

“어라? 수도로 올라가는 길에 들리겠다고 저번 주에 편지했는데…… 설마 못 받은 거야?”

“편지를 받았으면 답장을 했겠지.”

“이상하다? 편지가 중간에 어디로 샌 건가?”

키스케는 눈앞의 상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너 보고 싶어서 잠깐 들렸어. 나 아니면 친구도 없잖아.”

“다시 돌아가.”

“농담이야! 어쨌든 잠깐 들어가도 돼?”

그건 키스케가 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시선이 슬쩍 저에게 꽂힌 걸 알고 웃었다.

“산책은 다음에 가는 걸로 미뤄야겠네.”

“이쪽에 계신 꼬마 숙녀분은?”

“……내 마법 스승인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뭐?”

감정이 쉽게 얼굴 위로 떠오르는 이였다.

키스케는 아레스에게서 스승이 이렇게 어렸냐는 말이 나오는 즉시 옆구리를 쿡 찌를 생각으로 비스듬히 섰다.

“힐데. 이쪽은 몬테를로 공작가의 아레스야.”

“만나서 반가워요, 힐데가르트 공녀님. 키스케의 친구인 아레스 몬테를로라고 해요.”

들여보내 줄 거죠? 네? 이 추운 겨울에 곧바로 쫓아내진 않으실 거죠?

소년이 초롱초롱 빛났다.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한 시선이었지만, 힐데가르트는 시원스레 웃으며 문지기를 향해 손짓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레스 공자님. 손님을 환영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아레스는 만세를 외치듯 팔을 하늘 높이 뻗었다.

* * *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몬테를로는 한때 남부의 으뜸이라 불렸다.

어업과 조선업을 기반으로 뛰어난 항해 기술을 갖추었고 지도 제작에는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건 오직 바다뿐. 더불어 그들이 사랑하는 것도 오직 바다뿐인 가문이었다.

“이 갑옷들 전부 진짜인가요? 몬테를로에는 갑옷이 없는데! 짠바람 때문에 쉽게 녹슬거든요.”

“거짓말하지 마. 어릴 적에 네가 사고 쳐서 그랬다며.”

“그것도 있긴 하지. 제가 어렸을 때 숨바꼭질하다가 복도에 있는 갑옷을 전부 넘어뜨렸거든요. 갑옷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데…… 나중에 형에게 엄청나게 혼났죠. 그날 이후 저택에서 갑옷을 싹 치웠어요! 공녀님도 갑옷 도미노 해본 적 있어요?”

힐데가르트는 저택으로 들어선 아레스가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드는 걸 보며 직감했다.

‘몬테를로 가문 사람 맞네. 사막에 떨궈 놔도 알겠다.’

예전에도 몬테를로의 가주 클레망스는 악기 하나만 쥐여주면 연회에서 뱃노래를 쉴 새 없이 부르며 혼자 밤을 꼬박 새우던 사람이었다.

후손인 아레스한테서도 그런 기질이 보이다니, 피가 무섭긴 무서웠다.

복도에서는 장식용 갑옷을 보며 감탄하고, 내실에서는 처음 보는 별자리 태피스트리라며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그래도 나이대가 비슷한 카유크에 비하면 훨씬 더 예의 바른 소년이었다.

그는 미하일 대신 찾아온 레디스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편지에 착오가 있었는지 미리 소식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형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요. 대신 제가 인사드리는 걸 이해해 주세요.”

“물론이죠.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편히 말해주세요.”

정중한 인사를 마친 아레스를 보며 힐데가르트가 눈짓했다.

“오빠, 나머진 내가 할게. 로빈을 올려보내 줄래?”

“알겠다. 키스케 전하, 노바도 불러드릴까요?”

“응. 고마워.”

레디스가 나가자, 키스케는 곧바로 소파에서 몸을 돌렸다.

“아레스 너 진짜 차만 마시러 온 거야? 그거 때문에 몬테를로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렇다니깐!”

키스케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그가 차를 입으로 옮겼다.

“형을 보러 수도에 올라갈 일이 생겼거든. 네가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있다길래 들린 거야.”

“며칠 더 있다 가도 괜찮아요.”

힐데가르트는 안 그러는 척, 아레스를 몹시 반가워하는 키스케를 보며 웃었다.

“먼 곳에서 온 객을 그날 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했어요. 푹 쉬고 가세요.”

“정말 괜찮은데…….”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몇 번 더 권하자 그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를 보내놓고 편지보다 일찍 도착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그래, 그래. 형이 만나러 와주니깐 엄청 기쁘지?”

“시끄러.”

“참, 우리 집 고양이 새끼 낳았다! 기억해? 요전에 한 마리 주기로 했었잖아. 기를 생각 있으면…….”

“아레스 공자님?”

벌컥, 문이 열리더니 노바와 로빈이 들어왔다.

노바는 수련하던 중에 정신없이 달려온 건지 평소보다 너저분한 땀투성이였다.

키스케가 눈을 찌푸리자, 노바는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몰골이 조금 형편없지요? 너무 놀라서…….”

“노바!”

아레스는 너저분한 노바의 차림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서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아레스 공자님, 이게 얼마 만인가요! 전보다 키가 훨씬 더 크셨잖아요?”

“당연하지. 그동안 내가 마신 우유가 얼만데! 눈 뜨면 송아지로 다시 태어날까 봐 겁났다니깐?”

“아하하!”

“이젠 키스케랑 같이 연회 때마다 개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힘들어졌…….”

“예?”

“조용히 해라. 조용히!”

순식간에 싸늘해진 노바의 표정을 보자마자 키스케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유효타를 맞은 아레스가 배를 부여잡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로빈에게 손님방을 준비하라 일렀다.

“사이가 정말 좋네요. 키스케랑 오랜 친구인가 봐요.”

키스케는 물론, 출신이 좋지 못해 눈총을 사던 노바에게까지 저렇게 소탈한 태도를 보이다니.

‘하긴, 몬테를로니까.’

바다와 더불어 사는 몬테를로 공작가는 자연 앞에서는 신분이 없다는 겸손을 배운다.

그들이 제작한 커다란 배를 아무리 유능한 선장이라도 혼자 몰 수는 없다는 걸 진즉부터 깨달은 이들이었다.

아레스가 해죽 웃었다.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신 키스케의 어머니와 학술원에서 함께 공부하신 사이였거든요.”

“같이 공부하라면서 붙여두셨는데 이 녀석이 항상 요리조리 빠져나갔어.”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는 걸 어떡해! 바다가 날 부르는데!”

“황궁 근처에 바다가 있었냐? 여기서도 개구멍을 찾아서 담벼락 뱅뱅 돌 생각 하지 마.”

“그으래, 나도 상식이라는 게 있다?”

진짜 친한가 보네.

힐데가르트는 신기한 눈으로 둘을 훑었다.

제가 편할 때만 바다를 찾는 친구를 보며 투덜거린 키스케였지만, 그의 입가에는 좀 전부터 미소가 그칠 줄을 몰랐다.

한편, 아레스는 키스케와 옥신각신하더니 그녀에게 부탁했다.

“공녀님, 괜찮으시면 절 아레스라고 불러주시겠어요?”

“대신 절 힐데로 부르시고요?”

“헤헤. 안 될까요?”

“좋아요. 편히 부르세요.”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힐데. 실은 몬테를로에도 벌써 소문이 자자해요.”

“소문이요?”

“키스케 전하의 마법 스승인데다, 브린힐드 지주 상단에서 만든 베이비 파우더가 공녀의 수완이라면서요?”

고작 두 계절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 몬테를로에서 제 소문이 돌고 있다니.

“사냥 대회 우승을 차지한 레디스 공자도 유명하고요.”

“그래요? 오빠가 들었으면 기뻐했을 말이네요.”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대한 평판이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예전과 달라졌다면서요. ……직접 와보니 소문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겠네요.”

소문의 공녀가 그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말까지도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아레스를 가만 보던 키스케가 툭, 요점을 짚었다.

“너 실은 날 구실로 삼아서 힐데를 만나러 온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아카락시아 공작령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거든. 너도 만나보고, 아카락시아 공작령도 구경하고, 형한테 줄 선물도 사려고 했지.”

“결국 날 보러 온 건 곁들인 거나 다름없잖아?”

“얘 맨날 이렇죠? 이렇게 투덜거리는 데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는 강아지 같죠? 전 고양이만 길러서 키스케랑 노는 게 재밌더라고요.”

“아레스!”

상당히 무례한 발언이지만 힐데가르트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레스의 표현이 너무 정확해서였다.

키스케는 내심 한탄했다.

왜 하필 세상에 둘밖에 없는 화내기 힘든 상대가 눈앞에 같이 앉아 있는 걸까.

“온 김에 키스케 네가 안내 좀 해 주면 안 돼? 여긴 나도 처음 오는 곳이란 말이야.”

“나도 몇 번 나가본 적 없어.”

“너 또 거북이처럼 등껍질 속에 쏙 숨어서 지냈냐? 그러다 사람이 음침해진다?”

키스케가 사정없이 아레스의 옆구리를 꼬집었을 때였다.

“그럼 다 같이 나갈까요?”

힐데가르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침 노바도 있고, 몬테를로에서 손님이 오셨는데 직접 아카락시아를 소개해 드릴게요.”

“공녀가 직접이요?”

“오브론 대공령의 백색 도시 화이칼만큼이나, 겨울을 맞은 아카락시아의 레벤도 아름답거든요.”

“네가 직접 그럴 것까진 없는데.”

“왜? 모처럼이니 다 같이 가자. 키스케 네가 거북이처럼 쏙 숨어서 지낸 건 사실이잖아.”

“정말요?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다음엔 송아지로 태어날 테니 넌 거북이로 태어나는 게 어때?”

“그만해!”

키스케는 거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약속한 뒤에야 함께 가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투덜거리는 키스케를 아레스가 슬쩍 곁눈질한 것도 잠시.

안도가 담은 미소가 소년의 입가에 스쳤다.

동시에 힐데가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공녀를 신기한 눈으로 응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