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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28)화 (128/166)

125화

수도 발프람으로 돌아온 뒤, 키스케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썼다.

답장을 자주 보내지 못할 거라는 말마따나 그녀의 소식은 드문드문 들을 수 있었다.

이동 게이트가 열렸을 때는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는데도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했다. 그녀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카라딘의 청혼 소식을 듣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만큼, 그의 마음이 가벼울 순 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그녀가 저를 다시 보게 될 만큼 자랄 때까지 참아왔다.

그 ‘언젠가’는 지금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

앞서가던 키스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노바. 미하일 공작에게 사람을 보내서, 힐데가르트가 수도에 온 이유를 알고 있냐고 물어봐.”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알아보시는 건가요?”

“힐데가 아무런 이유 없이 수도에 왔을 리 없어.”

키스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야.”

* * *

그 시각.

키스케의 짐작대로, 힐데가르트는 공작저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카라딘의 청혼으로 봉변 아닌 봉변을 당했지만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일을 해결해야 했다.

언제 봐도 압도적인 크기의 건물이다.

신전에 들어선 힐데가르트는 앞선 사제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눈에 익은 장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웅장한 크기의 샘 한가운데에 커다란 성모상이 놓여 있었다.

성모상은 무언가를 받들 듯, 양손을 가슴께까지 들어 올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저 손 위에 성검이 놓여 있었지.’

성모상의 주변에는 나팔을 부는 천사 조각상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유물이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의 시선은 그곳이 아닌 샘물에 닿아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지요?”

“……네. 그렇네요.”

“신전에 방문하신 분들은 다들 한 번씩 강림의 샘 앞에서 걸음을 멈추신답니다. 샘물이 아름다운 푸른빛이지요?”

사제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강림의 샘은 오르녹스 신의 축복이지요. 마성신의 위협에서 우리 모두 안전하다는 증거이기도…….”

“이게 ‘푸른빛’인가요?”

“그렇습니다. 오르녹스 신께서 저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증거이지요.”

힐데가르트는 단아하게 웃고 있는 사제를 바라보지 않았다.

강림의 샘에 다가간 그녀는 말없이 샘물을 내려다보며 그곳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볼 뿐이었다.

“…….”

“마성신이 풀려난다면 샘물은 붉게 변하지만, 지금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보시다시피 푸른색이니까요.”

“글쎄요.”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묘하게 삐딱했다.

“이게 정말 푸른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내하던 사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가 아무 말 없이 강림의 샘을 뒤로하자, 그녀를 성소까지 안내했다.

“대사제님. 아카락시아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노인이었다.

비록, 빛바랜 하얀색 사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상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품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오르녹스 신의 충실한 종자, 미네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네 대사제님. 아카락시아 가문의 힐데가르트라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신전에 접견을 청한 건 이틀 전이었다.

대사제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말에,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으나 약간의 금전적 성의 표시를 하니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어지간한 헌금으로도 얼굴을 보기 힘든 상대였는데.’

여러모로 신전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실감할 따름이다.

새삼스러운 변화였다.

“차를 마시기 좋은 날입니다. 신전에서 키우는 허브로 간단히 준비해 보았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좋아합니다. 감사히 들겠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이쪽으로.”

성소 내부에 자그마한 후원과 연결되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리 준비해 놓은 간단한 다과와 찻주전자가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대사제 미네가 직접 차를 따라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대사제를 가만 바라보기 바빴다.

마침내 대사제가 먼저 그녀의 용건을 물었다.

“공녀님처럼 바쁘신 분께서 어쩐 일로 신전까지 오셨습니까?”

“저를 알고 계시나요?”

“물론입니다. 신전이 아무리 속세와 떨어져 있다 한들, 세상의 변화조차 감지하지 못하겠습니까.”

주름이 가득한 미네의 얼굴 위로 짓궂은 기색이 스쳤다.

“저희 교단에서도 얼마 전 이동 게이트를 통해 식량을 배급했습니다. 천랑성처럼 특출난 마법사라 들었는데, 그 명성만큼이나 아름다우십니다.”

“과찬이세요.”

힐데가르트는 차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겼다.

“안내를 받아서 오는 동안, 신전에 있는 강림의 샘을 보았습니다.”

“그러셨군요. 많은 분께서 그곳을 유독 눈여겨보시곤 하지요. 독특한 곳이지요?”

“네. 놀랐습니다. 샘물이 제가 아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색이라서요.”

“…….”

힐데가르트를 따라서 차를 마시려던 대사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마성신이 해방되었을 때는 붉은 색으로 변하고, 반대로 온전히 봉인되어 있을 때는 푸른색으로 변한다는 그 샘이…… 제 눈에는 탁한 회색으로밖에 보이지 않더군요.”

“…….”

“마성신이 온전하게 봉인되면, 강림의 샘은 저것보다 훨씬 더 눈이 아플 정도로 푸른색을 띠는 걸로 알고 있어요.”

힐데가르트는 앞선 사제의 말에 빈말로도 동의할 수 없었다.

저게 푸른색으로 보인다고?

‘진짜 강림의 색이 푸른색일 때, 어떤 빛깔인지 모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푸르스름한 빛이 떠돌긴 하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샘물의 색은 80년 전과 확연히 달랐다.

“아무래도 제가 캄파넬에서 성검 아스톨을 발견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네요.”

“차, 참말이십니까?!”

대사제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네. 성검 아스톨을 찾았습니다.”

“성검은 지금 어, 어,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오르녹스 신이시여…….”

대사제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연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사제의 손끝이 애처로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렸다.

“80년 전, 마성신을 봉인하신 대고모께서 미처 봉납하지 못한 성검을 다시 강림의 샘에 돌려놓을 생각이었습니다.”

테리오 리브 수사관을 통해 사라진 플람의 행방을 쫓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캄파넬을 모두 뒤엎다시피 했다.

그 노력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으나…….

드디어 보름 전. 문제의 성검이 발견되었다.

힐데가르트는 즉시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캄파넬로 향했고, 성검을 회수했다.

지저분한 흙먼지를 모두 털어내고 나니 성검은 예전과 똑같이 새하얀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전의 상태가 제가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다른 것 같네요.”

당연히 본래대로 성검을 봉납하려 했으나, 힐데가르트는 그 계획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옛 영광만이 남은 을씨년스러운 신전.

탁한 회색빛과 푸른색이 공존하는 강림의 샘.

그리고 그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제까지.

“실례지만 여쭙겠습니다. 대사제께서는 신성력을 지니고 계십니까?”

“…….”

“강림의 샘에 성검을 봉납하고, 삿된 자들이 그 검을 차지하지 못할 만큼 강한 힘으로 봉인하실 수 있나요?”

힐데가르트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대사제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끈덕지게 대답을 조르는 대신, 충분한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힐데가르트 공녀님.”

마침내 대사제가 커다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성검을 쥐신 분과 같은 이름을 지닌 당신께서 성검을 되찾으신 것은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힐데가르트의 등줄기가 굳었다.

“물어보신 질문의 답을 드리겠습니다. 현재 드롯셀마이어 제국에서 성검을 봉인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신성력을 가진 사제는 단 두 명뿐입니다.”

“……네? 뭐라고요?”

힐데가르트는 헛숨을 삼켰다.

신성력.

다친 자를 치유하고 마(魔)를 몰아내는 오르녹스 신의 지엄한 권능.

그것은 교단의 사제들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신전의 힘이 강력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신성력에서 비롯되었다.

80년 전만 해도 일반 사제들은 물론이요 성기사 또한 신성력을 갈고닦아, 그 힘을 백방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이젠 두 명밖에 없다고?

“오래전 마성신 토벌은 대외적으로는 성공이라고 알려졌지만, 성검의 주인이 사망하는 바람에 불완전한 봉인으로 그쳤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교단에서는 단 한 명의 성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성력을 지닌 사제들은 모두 그 힘을 잃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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