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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29)화 (129/166)

126화

대사제는 제 입으로 참담한 현실을 고백하는 것조차 괴로운 눈치였다.

그러나 사정을 봐가며 캐물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힐데가르트는 심상치 않은 사안임을 직감하며 물었다.

“어째서죠? 왜 사제들이 신성력을 잃어버린 건가요?”

“……신성력은 마성신을 견제하는 힘입니다. 따라서 마성신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사제도 많이 나타났지요.”

그 사실은 힐데가르트도 익히 알고 있었다.

검은 별 교단이 한창 사람들을 현혹하던 당시, 신전의 위세는 대단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반대로 강림의 샘에 성검을 봉납하면, 저울추를 맞추듯 신성력을 지닌 사제의 숫자가 다시 줄어듭니다.”

“하지만 아직 성검을 봉납하지 않았잖아요. 더더욱 신성력이 사라진 게 이상하지 않나요?”

“……교단은 성검을 봉납하면 신성력을 지닌 사제들이 줄어든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설마…….”

“신전은 성검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찾지 않았던 것입니다.”

“…….”

“오르녹스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대사제 미네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기도했다.

신전의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는 대사제의 안색은 괴로워 보였다.

“교단은 성직자의 본분을 잊고 강력한 신성력에 취해 있었습니다. 신성력은 사제들을 귀족 못지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힐데가르트는 핵심을 간파했다.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신성력은 신전에게 강한 권위를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신성력이 없어진다면 이전만큼 굳건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병 육성이 금지된 귀족과 달리, 검은 별 교단이라는 좋은 핑곗거리를 내세워 성 기사단까지 창설했던 신전이다.

처음에는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들은 언제부턴가 기부금에 따라 선별적으로 봉사하는 집단으로 변해버렸다.

그건 단순히 신전의 권위가 추락한 수준이 아니었다.

‘고인 끝에 썩어버린 거였어.’

대사제는 맹독을 들이켜는 사람처럼 괴로운 얼굴을 했다.

“오르녹스교는 신성력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일부러 성검을 찾지 않았던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이대로, 신성력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건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오래전 작고하신 마지막 성녀께서 오르녹스 신의 부름을 받고 남기신 진언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들어라. 너희는 새로운 성녀가 태어나기 전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

오르녹스 교단에 신벌(神罰)이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사제가 입을 다물자, 그대로 고요함이 두 사람의 주변을 메웠다.

“이 어리석은 종자에게는 공녀님께서 성검을 찾으신 게 참으로 기이한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대고모님과 같은 이름이라서요?”

어렵사리 침묵을 깬 대사제가 어색하게 웃었다.

“예. ……신전은 그분께 참으로 몹쓸 짓을 벌였습니다.”

“…….”

“오래전, 성검의 주인이셨던 힐데가르트 공녀께서 사망하셨을 당시 당대의 레온하르트 공작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대사제의 한숨은 옅었다.

“캄파넬에서 실종된 누이의 시신과 성검을 회수할 수 있게 랑케르트 공작가와의 중재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으셨지요.”

“…….”

그 이후의 일은 힐데가르트도 알고 있다.

캄파넬에서 여동생의 시신을 되찾고자 했던 레온하르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교단에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오빠의 일기를 읽었을 땐 왜 거절했던 건가 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참 더러운 이야기였다.

“뒤늦게 저희가 성검을 되찾기 위해 연락을 취했을 땐, 레온하르트 공작께서 완고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업자득이지요.”

“……오빠는 그런 원한을 잊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예?”

“아뇨, 혼잣말입니다.”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은 사과지만, 부디 교단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사제님, 이러지 마세요.”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숙이려 하는 대사제를 황급히 말렸다.

“자초지종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오르녹스 신께서 그토록 노하셨다니, 그럼 더더욱 빨리 성검을 봉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케케묵은 옛이야기는 이쯤 하면 됐다.

‘뒷맛이 나쁜 이야기를 질질 끌 필요 없지.’

하루가 다르게 신망을 잃고 있는 오르녹스 교단이다.

지금 중요한 건,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사제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성검을 봉인하는 일이었다.

“대사제님께서도 예전처럼 사제들이 신성력을 되찾길 바라시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감히 신의 분노를 산 일원으로서 그런 기적을 바라기도 부끄럽습니다.”

대사제는 심호흡하며 작게 성호를 그었다.

“저희는 마지막 성녀의 진언을 새긴 채, 새로운 성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죠. 신께 용서를 빌고자 한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눈앞의 상대가 몹시 확고한 말투를 해서일까.

미네는 그녀에게서 거역하기 어려우리만치 분명한 카리스마를 느꼈다.

‘맑은 거울처럼 밝고 투명한 이로구나.’

마지막 성검의 주인과 같은 이름을 지닌 자라서 그런 걸까?

신전의 일원으로서 적지 않은 사람을 접해왔다 자부하지만, 그녀만큼 특별한 느낌을 주는 이는 드물었다.

아니, 처음이라 말할 수 있었다.

“성검은 제가 보관하고 있지만, 하루라도 빨리 봉납해야 합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있고 말고요. 실은 성검 속에 가둔 마성신의 힘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건지, 분신을 만들어냈어요.

글쎄, 제 제자의 몸에 기생하고 있답니다.

오르녹스 교단에서 감당할 수 없다고 해도 저로선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네요.

‘……하아. 누군가에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인 줄은 몰랐어.’

힐데가르트는 속마음을 집어삼키곤 상대를 설득했다.

전부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일부만이라도 털어놓을 때였다.

“실은 성검을 발굴한 인부 중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 사람이 있어요.”

“……!”

“성검의 신성이 흐려진 걸지도 모릅니다. 예사 물건이 아닌 만큼, 아무쪼록 하루라도 빨리 봉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현재 성검 아스톨은 물방울의 방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곳은 힐데가르트가 알고 있는 가장 안전한 금고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안전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성검을 신전에 되돌려놓고 싶었다.

미하일에겐 물방울의 방에 당분간 들어가지 말라고 말해뒀지만…… 저택에 그런 물건을 계속 놓아두는 건 찝찝했다.

‘돌아가는 길에 기도라도 올리고 가야 하나?’

오르녹스 신님, 어리석은 사제들에게는 매몰차더라도 저에게는 그러지 말아 주세요.

제가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니 어여쁘게 봐주세요.

헌금 많이 내면, 플람의 몸속에서 단테를 완전히 분리할 방법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좋아. 하자.’

때론 제 마음이 가뿐해지기 위해 올리는 기도도 있는 법이다.

힐데가르트가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미네 대사제는 더없이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봉납 의식을 치를 수 있는 사제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황입니다만, 바로 연락을 넣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다만 봉납 의식을 준비하려면 보름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검은 당분간 신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곳에 보관하면 될 것 같군요.”

“그런 곳이 있나요?”

“예. 황궁의 성소가 있습니다. 그곳 또한 신의 숨결이 닿는 곳이지요.”

“……아!”

힐데가르트의 눈이 커졌다.

황궁의 성소는 건국 무렵, 강림의 샘에서 물을 길어 만든 유적이었다.

색이 바래지 않는 상아를 깎아 만든 오래된 작은 사원.

‘성검의 신성이 거기서도 유지되는 걸 줄은 몰랐는데.’

힐데가르트의 눈이 빛났다.

“성검을 회수하셨다는 사실은 아직 밝히지 않으셨지요?”

“네. 소란이 일 것 같아서요.”

“현명하십니다. 그럼 이 일은 극비로 진행하도록 하지요.”

대사제의 표정에는 희미한 활기가 돌았다.

“황궁에 연락을 넣어, 성소를 개방해 달라 요청하겠습니다. 답장이 오는 데는 사흘쯤 걸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여차하면 막시밀리언에게 직접 부탁해도 되는 일이지만, 힐데가르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오르녹스 신께 기도를 드리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공녀님.”

미네는 저보다도 한참 어린 공녀를 향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오르녹스 신께서는 어쩌면 공녀님을 기다리신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멈춰 있던 시간이 공녀님과 함께 움직일 것 같다는…… 그런 예감이 듭니다.”

대사제는 교교히 웃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답장이 오는 데는 사흘이 걸릴 거라던 대사제의 말이 무색하게도, 아카락시아 공작저 앞에 또다시 황실 마차가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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