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 *
“오래 기다리게 해 미안합니다.”
동시에 다섯 명의 테니아 후보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어나 대신관에게 예를 표했다.
“빛의 축복을. 성하를 뵙습니다.”
“빛의 축복을, 성하를 뵙습니다.”
대신관을 주축으로 모두가 착석한 가운데 분위기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계속해서 바깥 상황이 어떤지 들었기 때문에 대신관이 말하는 현 상황에 대해서는 그다지 놀라는 일이 없었다.
“이번 일로 후보 모두 걱정하고 놀라셨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하나 이 또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시련이며 우리는 오랜 의논 끝에 아테스 님의 뜻을 이어가기로 하였습니다.”
회의실에 약간의 술렁임이 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신관을 향해 물어보지 않아 리티아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성하께 여쭙습니다. 그럼 예정대로 일정이 진행이 되는 건가요?”
로아 캐번디시와 지밀 로베르가 대번에 리티아에게 눈총을 보냈다. 감히 성하께 질문을 올리냐는 얼굴이다.
“예, 공녀. 맞습니다. 하나 모두의 안전이 우려되는바 우리는 좀 더 안전한 방향을 택하기로 하였습니다.”
원래라면 다섯 명의 후보는 제국을 다섯 개로 나누어 각자 선택된 지역을 테메스와 함께 정화해야 한다.
누군가는 남쪽 모리움으로 또 누군가는 동쪽 테리움으로.
서쪽인 웨이타스와 북부 오브의 지역을 제외한 라움의 유일한 테오리스의 마을 레민까지는 워낙 땅덩어리가 넓고 마수가 잦게 나타나는 지역이라 실제로 많이 꺼리기도 해서 세 명의 후보가 일정 구역을 나누어 출발한다.
그중 가장 선호하는 지역은 모리움이었다.
높은 산맥 하나 없는 평야가 쭉 이어지고 가야 하는 길 또한 가장 불편함이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테니아 후보들이 가장 바라는 곳이기도 했다.
모두가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기에 무작위로 선택을 하여 출발을 하지만 이번에는 다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게 대신관의 발언이었다.
“모두가 함께요?”
“예, 그렇습니다. 안전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제국 전체 땅의 오염도가 급속도로 심해져 모두가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만 그 계획에는 큰 단점이 있었다.
짧게는 3주에서 한 달 이내로 끝나야 할 행보가 함께 움직이게 되고, 정화할 지역이 훨씬 넓어지면서 3개월로 일정이 늘어난 탓이었다.
3개월 동안 외부에서 지내야 한다니 테니아 후보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 반해 리티아는 3개월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3개월 동안 외부에서만 어떻게 먹고 자고 생활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을 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였다.
말이 순례지 역대 후보들이 한 걸 봐서는 온갖 필요한 물건들을 마차에 싣고 다녀서 하루에 한 번 드레스를 갈아입지 못하는 걸 제외하고는 그렇게 어려움을 느끼진 못했다던데.
심한 경우에는 각자 저택에서 보낸 마차로 길이 막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걸 3개월이나 다들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계속 천막을 치고 지내나? 아니면 신전에서 머물 수 있게 되나? 스스로의 힘을 보여야 하는 시간이라 신전을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고 알고 있는데.’
리티아의 고민이 무색하게 대신관 옆에 앉은 레페 신관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성하께서는 그 일정 동안 후보들의 거취도 걱정하셨습니다. 하여 이번에는 예외로 제국의 모든 신전을 개방하여 3개월의 순례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신전에서도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입니다. 다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저렇게 걱정하는 이유도 서두르는 이유도 잘 알았다.
새로운 테니아가 필요하다는 신탁이 내려옴과 동시에 세 명의 테니아 중 한 사람은 가진 힘을 잃는다.
성력은 있지만 본래의 자신이 가졌던 힘만 가진 채이기 때문에 보통은 신탁이 내려옴과 동시에 다음 대의 테니아가 정해질 때까지 테니아의 모든 책임에서 빠진다.
그래서 하루빨리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데, 원래라면 무사히 일정대로 순례까지 마친 후보들이 스스로 성력을 키워 아테스 신의 선택을 받아 테니아의 힘을 이어받아야 하지만 그러질 못하고 있으니 큰 문제인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계속되는 균열 발생으로 인한 대처 탓에 본래 함께 움직여야 할 성기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레페 신관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가만히 있던 유디트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그럼 저희는 테메스 분들만 데려가야 하나요?”
대규모로 균열이 발생한 적도 있다고 했고, 10년마다 테니아의 한 자리가 비워지지만,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 일은 이번이 전례 없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러니 신전에서도 우왕좌왕하는 게 눈에 보였다. 최적의 방법을 찾은 것 같긴 한데…….
걱정이 깊어지는 가운데 유디트의 질문까지 더해지자 모두가 레페 신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레페가 잠시 주저하더니 짧게 헛기침을 했다.
“아닙니다. 일정에 참여할 성기사분들은 현재 준비 중에 있습니다. 더불어 두 분의 테니아께서도 최선을 다하고 계시고 저희 또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나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하다 판단하여……. 이건 성하께서 말씀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대신관이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여기서 더 지체할 순 없습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마수들은 오염된 땅을 지배하고 균열을 일으켜 더 큰 혼란을 가져올 겁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균열을 미리 감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균열을 미리 감지할 수 있다고?
그 말에 리티아가 내심 불안함을 느꼈다.
에밀리아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들의 도움을 꼭 받아야 했다고.
거기다 이미 온갖 정보를 수집하며 이런 일이 닥칠 때 어떻게 신전이 일을 해결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제국은 본디 우리의 것만이 아니지요. 과거의 그랬듯 이번에는 모두가 책임을 함께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오브와 손을 잡았다고 해도 마주치는 건 성기사들 뿐이지 평범한 사람들은 알지도 못할 만큼 은밀하게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설마 아무리 문제가 겹쳤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들과 일정을 다 같이 하진 않을 거다. 설마. 그런 전례 없는 일을 하려고.
다들 리티아처럼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지 네 명의 후보 모두 얼굴에 의문을 띄운 상태였다.
“제국의 안전을 위해 우리와 황실은 오브와의 일정 기간 협약을 맺기로 결정을 한 상태입니다.”
“오브라고요?”
내내 가장 조용함을 유지하던 미젤라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대신관이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 우리는 가장 안전을 빠르게 찾을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오브 쪽에서도 무리 없이 협약을 맺기로 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간 황실과 대신전이 계속 긴밀히 회의를 했다는 게 이 내용이었나 보다.
오브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니.
다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미 회의 진행 전에 알고 있었을 신관들도 모두 납득하고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럼 대체 어떻…….”
미젤라가 말하다 말고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리티아가 설마. 설마 하며 짐작을 하는 동시에 회의실 문 양옆을 지키던 성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몰린 가운데 몇 명의 인영이 빛을 등지고 나타났다.
“…….”
네 명의 테니아 후보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놀라 숨을 들이켰다.
이래서 레페가 앉은 왼쪽이 아닌 대신관의 오른쪽 자리 다섯 개가 비워져 있었던 모양이다. 대신관과 딱 리티아의 사이 빈 공간이었다. 그저 인원이 남아서 빈자리겠거니 했는데.
“진짜 오브잖아!”
“세상에, 여기에 나타나다니.”
“말도 안 돼……!”
로아와 그 옆에 나란히 앉았던 유디트와 지밀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대신관의 앞이라 잘 참는다 싶었는데 결국 오브를 눈앞에 두고 경악과 혐오 그리고 조금의 두려움까지 거리낌 없이 내비쳤다.
“…….”
하지만 리티아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감상할 시간도 없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순간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본능적으로 시선을 마주치기도 전에 리티아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미친.’
리티아는 네 명과 다른 의미로 놀란 상태였다.
진짜 오브가 눈앞에 나타난 건 리티아에게 그토록 놀랄 일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뿐이니까.
문제는 왜 칼리프가 저기 떡하니 가운데 있는 것인지.
그가 오브라고 장난처럼 말했던 게 현실이 된 것과 동시에 이런 중요한 일에 나설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 눈으로 직접 확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오브가 소수긴 하지만 그래도 두 손 안에 들 정도로 적은 소수는 아니다. 테오스 쪽에서 알고 있는 오브의 수는 약 500명이 채 되지 못한 수백 명 남짓. 테오스가 알아낸 정보뿐이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적을 수도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제국의 커다란 지역 두 곳을 차지하고 있기에는 턱없이 작은 숫자지만 그 수백 명 중에서 다섯 명을 추리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중에서 하필이면 칼리프를!
“…….”
리티아가 시선을 내리깐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를 내리는 종소리 같았다.
Chapter4. 생각보다 더 위험한, 생각보다 더 달콤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