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 *
테오스와 오브가 모종의 이유로 손을 잡는 것과 별개로 그와 아는 사이인 게 들통이 나는 건 위험한 문제였다.
‘제발, 제발.’
리티아는 시선을 바짝 내리깐 채 그가 그저 알은체를 하지 않고 지나가길 바랐다.
칼리프가 더욱 가까워질수록 리티아는 숨을 졸였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칼리프가 제 바로 옆에 멈추는 순간 리티아는 자신의 심장도 멈추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
“데모드 님?”
뒤에서 마치 멈춘 칼리프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데모드? 원래 이름이 칼리프 데모드였나? 아니면 원래 그를 데모드라 부르는 건가?’
그가 가르쳐 준 건 칼리프라는 세 글자뿐이었다. 실제로 그 어느 귀족 가문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낮게 깔린 음성에 리티아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칼리프와 그 뒤를 따르는 무리의 발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멀어지는 줄 알았던 그가 바로 옆에 착석한 건 리티아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
테니아 후보 네 명이 나란히 반대편에 앉아 있었고 리티아의 옆자리가 비어 있던 탓도 있지만, 그래도 대신관의 옆자리인 상석도 분명히 비워져 있음에도 칼리프는 그 빈 다섯 개의 자리 중 리티아의 바로 옆자리를 기어코 차지하고 앉았다.
덕분에 당연히 대신관의 옆자리에 앉을 줄 알았던 사제들도 술렁이고 덩달아 다른 오브 또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편한 대로 앉으시지요.”
대신관이 정리를 하자 다행히 다른 오브들도 남은 자리에 착석했다.
리티아는 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뒤부터는 본격적인 진행을 위한 회의가 이루어졌으나 리티아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을 보란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칼리프의 시선도 당황스러웠고 그를 따른 오브들이 모두 깍듯하게 그를 대하는 것도 리티아의 불안감을 키웠다.
‘이런 중요한 일에 나설 정도로 위치에 있는 남자가 왜. 왜 그날 거기에 있었던 거지?’
대놓고 알은체를 하면 어쩌지? 사람들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제 어깨에 나타난 문양을 그가 말하기라도 한다면?
툭. 허벅지 위에 얌전하게 올려두었던 손을 그가 툭 하고 건드렸다.
“아…….”
흠칫 놀란 리티아가 순간 고개를 돌렸지만 금세 정면을 향했다.
일부러,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다시 툭. 보란 듯이 칼리프가 옆에서 손가락 끝을 건드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리티아는 두 손을 아예 칼리프의 반대편으로 숨겨 버렸다.
“공녀님.”
“…….”
“몬트 공녀님?”
그 순간 리티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칼리프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리티아가 또 한 번 놀라며 옆으로 시선을 비껴갔다.
“네, 네?”
뭐라고 물었지?
다들 리티아를 보고 있는 걸 봐서는 질문을 한 모양인데 리티아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몬트 공녀님께서도 괜찮으십니까?”
레페가 다시 물었다.
눈을 데굴 굴려봤으나 다들 리티아의 대답을 기다릴 뿐 다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리티아는 우선 이 자리를 마무리하는 게 낫겠다고 결론지었다.
“아…… 네. 그럼요. 괜찮습니다.”
근데 진짜 뭐라고 물었지?
정신이 없으니 귀에 들어올 리가.
오늘 회의 자체가 마지막 활동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보나 마나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이야기겠지.
오브가 균열을 미리 감지할 수 있다고 하니까.
테니아 후보의 임무가 모두 끝나더라도 제국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그들과 협정을 계속 유지한다라는 말까지는 기억하는데…….
“저는 뭐든 괜찮아요.”
거부감이 있을 테니 물어보는 거라 생각하며 리티아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무슨 이야기였든 리티아는 이 회의실을 어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군요. 그럼 사흘 후 아테온 홀에서 부디 좋은 시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테온 홀?
리티아는 뒤늦게 그날 다시 연회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연회야 리티아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닌데 왜 물어봤는지 모르겠지만 리티아의 기도가 통하기라도 한 듯, 그녀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오브들과 짧은 대화 후에 회의가 끝났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데도 다섯 명의 오브의 얼굴이 모두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어둠의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외모로 영입하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독보적인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신기한 건 잘못 본 건지는 몰라도 하나같이 왼쪽 귀에 진보라색의 자수정 같은 보석을 단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
꾸밈을 위해서라면 각자 개성을 따질 텐데 신기하게도 다들 조금의 모양만 다를 뿐 똑같은 보석을 달고 있었다.
‘마석인지 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리티아는 대신관이 나가자마자 인사만 하고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리티아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내내 칼리프를 기다렸다.
반드시 칼리프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생각해 저녁을 먹은 후에는 일찍 잠이 들겠다는 핑계로 일부러 침실 근처로는 에밀리아까지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저녁부터 또 어느새 나타나 리티아를 졸졸 쫓아다니던 고양이만 잠깐 방에 머물다가 가버렸을 뿐이다.
에밀리아도 이제 자주 봐 정이 들었는지 고양이가 나타나면 먼저 나비라고 부르며 반기기까지 했다. 따로 이름을 정해주지 않았는데도 고양이의 이름은 어느새 나비가 되었다.
하지만 꽤 밤이 늦었는데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그는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회의실 안에서. 그것도 대신전에 있는 회의실에서!
사람을 그렇게 곤란하게 해놓고선. 분명히 곤란하게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보란 듯이 자신을 놀렸다.
결국 밖에서 한 시간을 더 기다렸으나 나타날 기미가 안 보이기에 리티아는 그대로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정원 문을 열고 들어옴과 동시에 뒤에 익숙한 체향이 등을 덮치듯 다가왔다.
문이 닫히고 안으로 들어오며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에 리티아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휙 몸을 돌렸다.
“…….”
“나 기다렸어?”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리티아를 안은 채로 그녀의 키에 맞추어 고개를 숙인 탓이다.
언제나처럼 보이는 미소가 보이자 오전 일이 번뜩 다시 떠올랐다. 리티아가 밀어내듯 그의 팔을 잡았다. 워낙에 단단해 조금도 밀려나진 않았지만.
“드, 들어오면 어떡해요!”
“오늘 아무도 안 오잖아.”
대체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건지.
리티아가 그를 밀어내다 말고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일부러 나온 거 아니죠.”
“음?”
“일부러 나온…… 거 아니죠? 들키면 곤란해질 거라고 내가 말했는데. 위험한 일 안 만들겠다고 했잖아요. 일부러 나온 거예요? 다른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잖아요.”
칼리프가 고개를 모로 살짝 기울였다.
“그야 내가 결정해야 하니까?”
“네?”
“내가 결정해야 움직이니까.”
리티아의 눈이 세차게 떨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남자가 결정을 해야 오브들이 움직인다고?
그렇다는 건 설마 그가 오브들의 수장이라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그렇지 자신이 오브의 수장을 건드렸을 리가.
분명히 리티아가 그들의 수장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할 때도 칼리프가 대꾸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여유가 있던 거였어.”
미친. 하필 가장 위험한 존재 중에서도 가장, 가장, 가장, 위험한 존재라니.
리티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칼리프가 놀라 있는 리티아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여전히 다른 한 손은 리티아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친 상태였다.
“널 위험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지금, 지금 충분히 위험한 상태에 있어요. 아까도 일부러 보란 듯이 건드려 놓고.”
“알은체 안 하면 화낼까 봐.”
“……알은체 안 하는 게 나았어요. 그쪽 때문에 회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고요.”
“나한테 신경 쓰느라?”
리티아가 눈을 흘겼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누구는 심장이 튀어나오다 못해 바닥에 뚝 떨어질 뻔했는데.
어느새 대화를 하느라 정신이 빠진 사이 그와의 거리는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가 되었다. 유난히 콧대가 도드라진 탓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가까웠다.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잖아요. 제발 좀 떨어져요.”
리티아가 두 손으로 아예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자 칼리프가 키득거렸다.
“왜, 저번처럼 하녀가 나올 수도 있잖아. 숨어야지.”
“오늘은 안 와요. 그러니까 좀 떨어져요.”
“그래? 아쉽네.”
한 뼘 정도 사이가 멀어졌다. 리티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안 하겠다고 해요.”
“이미 결정된 일이야.”
“그럼 사람을 바꿔요.”
“그것도 별론데.”
“왜요?”
“딴 놈한테 한눈팔까 봐.”
“장난치지 말고요. 나는 심각해요.”
리티아는 자꾸만 장난처럼 구는 칼리프가 야속했다.
협정은 말 그대로 협정. 아까 네 명의 반응만 봐도 테오스와 오브의 사이가 어떤지 확실하게 가늠이 됐다.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것처럼.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신관들조차 거부하는 얼굴을 했다.
오브 쪽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수장-이제야 알았지만-의 의견대로 온 것뿐 온몸으로 불쾌함을 뿜어내고 있지 않았던가.
물과 기름처럼 아예 엮일 수가 없는 사이 같아 보였다.
실제로 힘 또한 전혀 상반되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그럼 우리 사이에 딱딱한 명령 말고 부탁을 해야지. 공주님.”
“뭐라고요? 내가 왜 공주예요, 미쳤…….”
미쳤냐고 말하는데 그의 손이 입술에 닿았다.
“공주님이 부탁하면 조금 들어줄지도.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