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23화
“어찌된 것이냐?”
“상세한 것은 모르나 소궁주를 살리기 위해 무리를 한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혈맥이 끊어지고 뒤틀린 듯합니다.”
“흠…….”
냉천휘의 설명에 설관악은 침중한 음성을 내뱉었다.
“주군의 몸은 어떻습니까? 어찌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회회혈마가 마현을 진맥하는 구엽이 의원임을 알아보고 급히 다가와 물었다.
“휴우.”
구엽은 어두운 얼굴로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구 각주.”
그러자 설린이 초조한 얼굴로 구엽을 불렀다.
“지금으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구엽은 풀어헤친 마현의 옷을 다시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정 방법이 없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그 대답에 설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그녀의 몸에서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눈동자는 조금 전보다 더욱 흔들리고 있었다.
“비, 빙옥단.”
그러던 설린의 눈동자가 딱 멈췄다.
북해빙궁의 절세영약인 빙옥단을 떠올린 것이다.
빙옥단을 외치며 자신을 쳐다보는 설린의 간절한 시선에 구엽은 더욱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주, 주군!”
“주군!”
그러자 흑풍대와 회회혈마가 마현 곁을 에워싸며 울분과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마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오히려 설린을 자극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쇠해질 대로 쇠해진 몸이었다.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몸을 지탱하던 설린의 몸이 구엽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한순간 휘청거렸다.
“서, 설 사저.”
냉천휘가 급히 설린의 팔을 부축했다. 정신마저 놓을 정도로 심하게 몸을 떠는 딸의 모습에 설관악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설관악의 마음을 움직였다.
“구 각주,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인가?”
그래도 자신의 딸과 제자, 그리고 수하들을 살려준 이였다. 그 은혜 역시 가볍지 않았기에 설관악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천고의 영약이라면 모를까…….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마교 대공자의 몸에 북해의 얼음장보다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본신의 마기까지 함께 머물고 있어, 두 기운이 서로 반발하며 몸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어느 한 기운이 수그러지지 않아 사실상 대부분의 혈맥이 터지고 꼬였습니다. 그런 몸을 치유하며 두 기운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천고의 영약이 아니라면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설관악으로선 해줄 게 없는 셈이었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은 있었다. 하지만…….
바들바들 떨던 설린이 구엽의 말에 냉천휘의 부축을 뿌리쳤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구엽과 설관악 앞으로 걸어갔다.
“구 각주.”
“예, 소궁주님.”
“본궁에 만년설삼이 있지요?”
설린은 지금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구엽이 설린의 눈을 피하며 설관악의 눈치를 살폈다.
“린아!”
그 모습에 설관악이 나직하게 설린을 호통 쳤다.
만년설삼은 북해빙궁에서도 현재 한 뿌리밖에 없다.
만년설삼은 그 자체로도 매우 진귀한 영약이지만, 북해빙궁에게 만년설삼은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약재였다. 바로 빙옥단을 만들 때 반드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만년설삼은 북해뿐 아니라 중원에서도 백 년에 한 번 발견될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영약이다.
설관악이 설린을 질책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근 이백 년 동안 만년설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북해빙궁은 빙공을 익힐 때 없어서는 안 될 빙옥단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남은 빙옥단도 북해를 떠나올 때 설관악이 품에 넣어온 두 알이 전부였다. 그런 마당에 어찌 만년설삼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구 각주, 말씀해 보세요. 만년설삼이면 마 공자를 구할 수 있나요?”
설린의 굳은 눈동자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린아!”
결국 설관악의 언성이 높아졌다.
“지금 그게 북해빙궁의 소궁주로서 할 말이더냐?”
하지만 설린은 구엽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구 각주, 지금 마 공자를 구할 수 있는지 묻고 있어요.”
조금 전 바들바들 떨던 그녀의 여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원래 구엽과 설관악이 익히 알고 있던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설린아!”
결국 설관악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설린의 팔을 낚아채 자신 앞으로 당겼다.
힘없이 끌려온 설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설관악의 얼굴은 굳어졌다.
딸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눈에 가득 차 있던 눈물이 설린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딸의 눈물을 보자 설관악은 아이를 낳다가 죽은 아내가 떠올랐다. 아내를 떠올리자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설관악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게냐?”
“알아요.”
설린은 재빨리 눈물을 닦으며 다시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네 발언으로…….”
오히려 말문이 막힌 것은 설관악이었다.
“네 발언으로…….”
설관악은 똑같은 말을 내뱉으며 망설였지만, 결국 힘주어 말했다.
“소궁주 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주, 주군.”
“스, 스승님.”
그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구엽과 냉천휘가 놀라며 설관악을 불렀다.
설린은 고개를 돌려 마현을 잠시 쳐다보았다. 설관악의 말에 흔들리던 설린의 눈동자가 굳은 결의로 빛났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봤다.
“소궁주 자리를 내어놓으면…… 그에게 만년설삼을 내어줄 수 있나요?”
“소궁주님!”
“사저!”
설관악과 설린의 귀에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설관악은 설린의 말에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이 무어기에, 네가 감정까지 버리며 집착했던 소궁주 자리까지 포기한단 말이냐?’
설관악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단지 입 안에서 머금고 있다가 쓴맛을 느끼며 삼켜야 했다.
“아버지.”
설린은 설관악의 대답을 딱딱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오냐, 주마. 하지만 넌 소궁주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설관악은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 * *
어둑한 밤을 유일하게 밝혀주는 달빛 아래 청하진인이 서 있었다.
요 며칠 담담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의 얼굴에 오늘은 왠지 깊은 수심이 담겨 있었다.
뒷짐을 지고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는 청하진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러운 검림의 등장도, 화산파에서 일어났던 일도, 거기에서 파생된 모든 탐욕들도. 그리고 불쑥 떠오른 스승 현도상인의 유언까지도 요 한 달 일어난 모든 것들이 청하진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고, 뒤헝클었다.
그동안 도를 닦아오며 세상과 사람을 볼 수 있는 식견을 가졌다고 내심 자부하고 살았는데, 헛것이었나 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헤아릴 수 없었다.
괜스레 선문답만 던져놓고 타계한 스승 현도상인이 얄미워졌다.
‘답답하구나, 답답해.’
청하진인은 달에서 눈을 돌려 밤하늘에 뜬 별들을 쳐다보았다. 별들을 보자 지금쯤 본문에 있을 청명진인과 학성, 그리고 학방이 떠올랐다.
‘무량수불.’
학성 때문에 시름하고 있을 사제 청명진인이, 이 일로 상심하고 괴로워할 사질 학성이, 그런 둘을 보며 역시나 착잡해할 제자 학방이, 모두 걱정되었다.
달을 봐도, 별을 봐도 청하진인의 마음속에서는 그저 깊은 시름과 한숨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청하진인이 한숨을 내쉬고 있을 그 시각.
쾅 쾅 쾅 쾅 쾅!
고즈넉한 무당파 경내에 철문이 강한 내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문을 두드려대는 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장장 반 시진이나 철문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지치기 마련.
결국 지친 이는 철문을 두드리는 것을 포기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철문을 두드린 이는 학성이었고, 그가 있는 곳은 화산파로 가기 전 수련했던 수련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수련동이 아니라 학성을 잡아두는 일종의 감금동으로 변해 있었다. 수련동으로 들어가는 두꺼운 철문을 밖에서 꽉 닫아걸고 학성이 그 안에서 나올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지쳐서 주저앉은 학성 앞에는 서찰 한 장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사랑하는 내 제자 보아라.
화산파에서 있었던 일은 이 스승에게도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구나. 더욱이 마교 대공자와 너의 인연을 알기에 이 스승의 마음 또한 심히 괴롭다.
하지만 너는 무당의 제자다.
그러니 힘이 들더라도 이겨내거라.
이 스승을 원망해도 좋다.
아니 원망하거라.
그래서 네 한이 달래어진다면 내 원망을 들은 들 어떠랴.
모든 짐은 이 스승이 질 터이니 너는 부디 무당의 미래가 되어다오.
청명 서.
안타까움과 슬픔이 배인 서찰을 다시 읽은 학성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스승님.”
며칠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서인지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다가 바싹 마르고 거칠어진 피부로 스며들었다.
* * *
쾅 쾅 쾅 쾅 쾅!
철문을 뒤흔들며 터져 나오는 그 소리를 청명진인은 방에서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그는 며칠 동안 자신의 방에서, 탁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고만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았다.
귀도 닫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학성이 수련동에 갇힌 이후 내내 식음을 전폐한다는 소리에, 그 역시 곡기를 끊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눕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의자에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청명 사숙님, 학방입니다.”
학방은 쟁반에 죽 한 그릇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청명진인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다 사숙님의 몸이 먼저 축나시겠습니다.”
학방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쟁반을 좀 더 청명진인 앞으로 밀었다.
그때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던 청명진인의 입술이 떨어졌다.
“학성은 무얼 좀 먹더냐?”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는 듯싶습니다.”
대답하는 학방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제야 청명진인이 눈을 뜨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죽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청명진인은 손을 뻗어 쟁반을 학방 앞으로 밀었다.
“자식이 굶는데 어느 아비가 배를 채운다더냐? 도로 가져가거라.”
“사숙님.”
학방은 한 번 더 권하려 했지만 청명진인은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 모습에 학방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학성과 함께 청명진인까지 기력을 잃고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생긴 것이다.
쾅 쾅 쾅 쾅 쾅!
무거운 침묵이 방 안에 깊게 가라앉았을 때 다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미미하지만 청명진인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한 번 시작하면 반 시진 가까이 그 소리는 어김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날이 갈수록 그 소리가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학성의 몸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청명진인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그리고 너무도 걱정되어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정말로 이삼 일만 더 곡기를 끊고 하루 종일 철문만 때려댄다면, 죽을 것이 분명했다.
‘마현이 네게 그리 중한 인연이라는 소리냐? 이 무당보다, 이 스승보다.’
청명진인의 가슴 속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스승님, 이 제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청명진인은 무거운 신음을 머금으며 이미 오래전 타계한 스승을 떠올렸다. 그리고 걸왕이 전해준 현도 사숙의 유언도 떠올렸다. 고심을 거듭하던 청명진인은 결국 잠시 눈을 감았다뜨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성을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좀 쉬어야겠구나.”
그렇게 쉴 청명진인이 아니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침식마저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함에 학방은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탁자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열쇠 하나를 보았다.
학성이 갇혀 있는 수련동 열쇠였다.
“사, 사숙…….”
“쉬어야 하니 나를 찾지 마라.”
청명진인은 진무각주실에 붙어 있는 그의 침소로 들어가 버렸다.
학방은 한동안 탁자 위에 놓인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아비가 자식의 죽음을 원하겠는가? 어느 스승이 제자의 죽음을 원하겠는가? 인명은 재천인 것을…….』
열쇠를 보며 망설이던 학방의 귀에 청명진인의 전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