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49화 (149/351)

# 149

24화

머뭇거리던 학방은 눈을 질끈 감으며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진무각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선 죽에서 풍기는 구수한 향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쾅 쾅 쾅 쾅!

어두운 수련동 철문 안쪽.

검은빛이 맴도는 철문에 붉은 핏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스승님.”

이제는 목소리마저 갈라져 쇳소리처럼 들렸다.

“……현이를 봐야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스승님, 스승님…….”

다시 혼신의 힘으로 철문을 치던 학성의 몸이 무너지며 쓰러졌다.

갈라진 쇳소리로 쉭쉭거리며 말을 하는 학성의 메마른 입술은 쩍쩍 갈라져 있었다.

끼익―, 철컹.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환청이 들리는 것인가?’

곡식과 물을 끊은 지 오래라 정신이 혼미한 학성에겐 그 소리마저 몽롱하게 들렸다.

문이 열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학성이었기에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그저 환청이라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학성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철문 쪽을 쳐다보았다.

환청이라도 좋았다.

환시(幻視)라도 좋았다.

철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수련동으로 통하는 입구에 누군가 횃불을 세워놓는 게 보였다.

불빛이 밝아서 수련동 안으로 들어오는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불빛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본 것을 마지막으로 학성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학성아, 학성아!”

철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학방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잃고 고개가 젖혀지는 학성을 보자 학방은 횃불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내려놓고는 학성에게 다가왔다. 학방은 학성을 품에 안았다.

‘불쌍한 것…….’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학성의 얼굴에 학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측은함을 느꼈다.

“이놈아, 정신을 차려라. 정신을 차려야 마현이라는 놈을 찾아가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

학방은 격앙된 목소리로 학성의 몸을 흔들었다. 그 흔들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마현이라는 이름 때문이었을까. 학성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힘겹게 떠졌다.

“……사형?”

“그래, 나다!”

학방은 눈을 뜨는 학성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물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학방은 지체하지 않고 물주머니 마개를 열어 학성의 입술에 물렸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죠?”

몹시 갈증에 시달릴 텐데도 물조차 충분히 마시지 않고 학성은 물주머니에서 입을 떼며 물었다.

조금 전 다 죽어가던 눈빛이 지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이 정도였나? 마 공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청명진인이 열쇠를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간 것이.

정말 청명진인이 전음으로 넌지시 말해 주지 않았다면 분명 학성은 죽었을 것이다.

“마 공자를 찾아가자고 했다. 그러니 어서 물을 더 마셔라.”

“저, 정말이십니까?”

학성은 학방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방은 그런 학성에게 물주머니를 입에 물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꿀꺽 꿀꺽.

학성의 목젖이 꿈틀거렸다.

물주머니가 제법 가벼워지자 학성은 비틀거렸지만 스스로 몸을 가누었다.

“……스승님은?”

“사숙께선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찌?”

“내가 훔쳤다.”

학방은 씁쓸한 눈빛으로 열쇠를 보여 주었다.

“월담을 해야 할 게다.”

“고맙습니다, 사형.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학성은 학방이 들고 온 자신의 검을 허리에 차며 말했다.

“은혜는 무슨, 가자.”

“예?”

학방의 말에 학성은 입을 살짝 벌렸다.

“뭘 그리 놀라냐?”

“하, 하지만…….”

“너 혼자 보내기는 불안해서 그런다. 함께 가자구나. 그리고 혼자보다는 둘이 가는 게 나중에 덜 혼나지 않겠느냐?”

원래 학방은 학성과 함께 떠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학성의 저런 모습을 보니 마현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말했듯 이런 몰골을 하고 있는 학성을 혼자 내보내기엔 너무 불안했다.

게다가 학성은 무림에 대한 경험도 일천하지 않은가.

“지금 너의 몸으로는 혼자 걷는 것도 무리다. 업혀라.”

학방은 학성을 업고 수련동 밖으로 몸을 날렸다.

사람을 등에 업은 큰 그림자가 무당파 담을 넘었다.

학방과 학성이었다.

그 둘이 담을 넘는 것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으니, 바로 청명진인이었다.

‘……정아.’

청명진인은 길을 떠나가는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진이나 서 있던 청명진인은 면벽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성을 대신해 이제는 그가 갇히려는 것이다.

* * *

대전회의에서 허진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지금 뭐라고 그랬나?”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허진의 눈동자에서 마기가 폭사되었다.

“마현이 무림맹에게 쫓기고 있다고?”

허진은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보고를 올리던 율기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율기는 그 마기를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부교주.”

그런 허진을 사공소가 나직하게 불렀다.

그때서야 허진은 율기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마기를 거뒀다. 하지만 사람 좋아 보이던 평소의 온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공소의 말에 마기를 거뒀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군사.”

율기를 부르는 허진의 목소리에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예, 부교주님.”

“지금 그 말이 사실인가?”

“그, 그렇습니다.”

율기는 허진의 기세에 눌려 말까지 더듬거렸다.

허진은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사공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감추지 않는 그의 모습에, 대전회의장에 모인 마교 수뇌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감히! 정파 나부랭이들이!”

허진의 눈동자에서 마기가 무시무시하게 맴돌며 가득 찼다. 허진은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사공소를 향해 몸을 돌렸다.

“교주님.”

사공소는 허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다.”

사공소 역시 평소 허진을 대하던 친근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천하에 교주님을 제외하고 그 어느 누가 저를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크하하하하!”

허진의 목소리에 사공소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교주.”

“하명하시옵소서.”

“귀갑철마대(鬼鉀鐵馬隊)면 되겠나?”

“감사하옵니다.”

사공소의 말에 허진은 허리를 숙였다.

“출교를 허락한다. 들끓어오르는 마인의 피가 얼마나 뜨거운지 보여줘라.”

“교주님이 그리 말씀을 하시지 않으셔도 제가 그리했을 겁니다.”

“그래, 언제 떠날 건가?”

“지금 떠나겠습니다.”

허진의 대답에 사공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갑철마대주는 들으라.”

“예, 교주님.”

말석에 자리하고 있던 한 사내가 일어났다.

흡사 군부의 장수처럼 그는 온통 묵철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출병을 준비하라.”

“명!”

“그리고 율 군사.”

“하명하시옵소서.”

“대공자에 관한 자료를 모두 부교주에게 넘기며, 차후 긴밀한 연락책을 강구해두라.”

“예, 교주님.”

그리 명하고 사공소는 허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출교를 허락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었다.

허진은 사공소를 향해 허리를 숙인 후 몸을 돌려 대전을 벗어났다.

‘현이에게 손을 댄 자, 누구라도 죽인다!’

대전회의장에서 내내 억눌렀던 마기가 허진의 눈동자에서 다시금 폭사되었다.

* * *

두두두두두!

흑백으로 이루어진 두 무리의 인마가 질풍처럼 달렸다.

바로 북해빙궁과 흑풍대였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대는 사막을 갓 지나자 듬성듬성 키 작은 나무들이 서 있는 초원이 보였다. 하지만 그곳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보통의 초원과 달리 듬성듬성 하얀 눈이 깔려 있었다.

북해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섰다는 뜻이었다.

뒤쪽에서 말을 몰던 설관악은 마현을 등에 업은 채 말을 몰고 있는 흑풍대주 왕귀진을 쳐다보았다.

그는 엉덩이를 말안장에서 떼고 있었다. 말의 흔들림을 무릎으로 흡수하여 충격을 덜 받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장장 열흘을 그렇게 달려온 것이다.

마현을 업고 있는 왕귀진은 지금 시체처럼 창백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가 다가가서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런 행동은 비단 왕귀진뿐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 그를 에워싸고 말을 타고 달리는 흑풍대원들 역시 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왕귀진에게 마현을 넘기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단지 왕귀진을 호위하며 묵묵히 달릴 뿐이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마현과 왕귀진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엿보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자부심과 긍지처럼 보였다.

설관악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마현을 부러워했다. 한편으론 과연 내가 저리되었을 때 수하들이 저럴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물론 함께 동행한 이들 역시 모두가 충성스러운 수하들이었지만 아마 저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희대의 영웅은 가장 위험할 때 그 진면목이 나온다고 그랬다.

설관악은 지금 마현을 보며 그 말을 떠올렸다.

‘믿음과 목숨을 줄 수 있는 수하들이라…….’

설관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설린에게로 향했다.

설린은 이곳으로 달려오며 오로지 마현의 등만 보고 달렸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설관악은 깊은 시름이 담긴 눈으로 마현과 설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주군.”

설영대주의 말에 설관악은 고개를 들어 얼음으로 뒤덮인 전방을 바라보았다.

멀리, 뼛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바람에 휘날리는 북해의 깃발이 보였다.

“다 왔다, 가자!”

그렇게 일각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더 달리자 한 무리의 북해빙궁 무인들이 마중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이미 전서구를 통해 소식을 접한 그들은 아무리 길이 거칠어도 거의 흔들림이 없는 팔두마차를 대동하고 있었다.

흑풍대는 그 팔두마차 앞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대주.”

철용은 왕귀진에게 다가가 그의 등에 업혀 있는 마현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곧장 마차 문을 열고 들어가 마현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털썩!

마차 안에서 마현을 눕히는 철용의 귀에 묵직한 그 무엇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왕귀진이 기력이 다해 말 위에서 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걱정이 묻어났지만 이내 냉정하게 털어버렸다.

그때 백초신의 구엽이 한 중년사내와 함께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도 진한 약초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의원인 듯했다.

“가지고 왔느냐?”

“스승님 명대로 만들어 오긴 했지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이백 년 만에 겨우 찾아 빙옥단을 만들려던 만년설삼을, 그것도 며칠에 걸쳐 찌고 말려 냉기를 줄여 가져오라니, 그로선 당연히 의문이 들 법도 했다.

“쓸데없는 관심은 끊어라. 그리고 나가서 쓰러진 이를 살펴라. 몸이 많이 축났을 것이다.”

구엽의 나직한 호통에 중년의 제자는 몸을 움찔하더니 어깨를 바싹 움츠린 채 마차에서 나갔다.

구엽은 일단 마현의 옷을 몽땅 벗겼다. 그 후 제자에게서 받아든 목함을 열었다.

청아한 향이 순식간에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철용은 향을 맡는 것만으로 피로가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천고의 영약인 모양이었다.

몇 번 찌고 말리기를 반복해서인지 만년설삼 특유의 우윳빛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또한 원래 탱탱했던 외형은 쭈글쭈글 말라 있었다.

구엽은 마현의 목을 조금 젖혀 입을 벌리게 한 후 만년설삼을 입에 넣었다.

말라서 씹히지도 않을 것 같은 만년설삼은 신기하게도 마현의 입 안에서 스르륵 녹았다.

구엽은 익숙한 손길로 마현의 목젖을 비롯해 주요 혈도 몇 군데를 꾹꾹 눌렀다. 그러자 액체처럼 녹은 만년설삼이 자연스럽게 마현의 목 안으로 사라졌다.

만년설삼이 모두 목 안으로 넘어가자 구엽은 재빨리 품에서 침구통을 꺼냈다.

침구통 안에 담긴 침은 모두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구엽은 소매를 걷어 팔을 자유롭게 만든 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마현의 몸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흡사 금나수라도 펼치는 것처럼, 침을 놓는 구엽의 손놀림은 매우 빨랐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침구통에 가득 찼던 침도 모두 떨어졌다. 그 침들은 고슴도치가 연상될 정도로 마현의 몸에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후우…….”

구엽은 그제야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허리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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