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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만남 (3/39)

제2장. 만남

세르비아 제국의 젊은 왕 베르톨트 한스 악셀 크라젤 폰 카롤링거 3세.

전쟁의 신, 피의 황제, 피의 군주, 악마의 황제, 악마의 군주, 냉혈 인간. 모두 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만큼 이 젊은 황제는 전장에서 철저하고 가혹하게 적을 무너뜨렸으며, 15세에 왕좌를 물려받은 이래로 12년째 무패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쟁의 신이었다.

세르비아 제국이 ‘왕국’에서 ‘제국’이 된 것도 그의 업적이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제국은 안달루스 제국뿐이었기에 에레브 대륙의 패권을 안달루스 제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에레브 대륙을 제외한 다른 두 대륙, 노엔틴과 사우린 대륙은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사람이 살기 적합하지 않아 그곳에는 제국이나 왕국이 아예 없었다. 사실상 안달루스 제국이 모든 대륙을 통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르비아 왕국을 포함한 모든 왕국이 안달루스 제국에 조공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베르톨트가 왕위에 오를 당시, 안달루스 제국은 삼대에 걸친 실정으로 그 힘이 매우 약해져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 세르비아 왕국은 완전한 독립을 꾀하였다. 베르톨트는 스스로 황제가 되어 왕국을 제국으로 격상한 후 주변 나라들을 점령해 갔다.

그의 살벌한 별칭이나 전장에서의 활약 등을 보면 적에게 가차 없을 것 같지만, 사실 베르톨트는 승복하는 자들에게는 의외로 관대했다. 그는 정복한 영지의 영지민과 노예, 항복하는 귀족가의 사람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하여 무시무시한 기존의 별명과 다르게 ‘세르비아의 가슴’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세르비아의 군사들은 젊은 군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그를 진심으로 따랐다.

번쩍이는 갑옷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병사들이 수에비 왕의 침실로 우르르 들어왔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행동들로 보아 잘 훈련된 정예 군사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폐하! 여기 왕과 왕비의 시체가 있사옵니다.”

병사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카리스마는 압도적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주위의 공기까지 달라졌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짧은 검은색 머리,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지닌 검푸른 눈동자, 짙고 굵은 눈썹과 곧고 우뚝 솟은 코, 강인한 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조화를 이루었다.

언뜻 보기에도 탄탄한 근육으로 뭉쳐진 단단한 몸은 검은색의 옷으로 휘감겨 있어 한 마리 검은 야생마와 같았다.

훤칠한 외모에 야성적인 매력을 내뿜고 있는 남자는 세르비아 제국의 황제, 베르톨트 한스 악셀 크라젤 폰 카롤링거 3세였다.

그 뒤를 이어 은발의 아름다운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카롤링거 3세가 압도적일 정도로 강인한 아름다움을 가졌다면 은발의 남자는 선이 고운 중성적 매력의 소유자였다.

“레니에 경, 이 시체가 왕과 왕비인지 확인토록 해.”

“존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발의 미남, 레니에 프랑수아 콩데 드 사르 공작은 시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베르톨트는 침실 안으로 뒤따라 들어선 기사들을 이끌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제부터 수에비 왕국의 성을 샅샅이 뒤져 취할 자와 버릴 자를 갈라야 했다.

* * *

수에비 왕국의 본성 앞마당에는 항복한 많은 시종과 시녀, 중간급 이하의 대신들이 모여 있었다.

국왕 카이스턴의 실정이 워낙 오래되고 그의 성정이 잔인했던 터라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한 이의 수가 다른 나라보다 많았다. 그러나 고위 관리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항복했다 하더라도 모두 처형되었다.

세르비아 제국은 정복한 나라의 국민들은 이민족으로, 정복한 나라의 궁에서 일했던 시종과 시녀, 하급 관리는 노예로 배정했다. 이 노예들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제국군과 함께 이동하면서, 군과 함께 전장에 나가거나 장군이나 관리들의 개인 노예로 일한다.

카롤링거 황제는 노예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었다. 능력이 출중한 노예는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제국의 관리가 되거나 상인이 될 수도 있었다. 혹은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일반 제국민보다 더 빠르게 기회를 잡는 셈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세르비아 제국에 소속된 노예로서 그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했다.

개중에는 장군들의 침실로 들어가는 시침 노예도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성적 취향에 맞는 자를 골라 시침 노예가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장군의 제안을 받은 노예가 이를 받아들이면 시침 노예가 되는 것이다. 시침 노예를 선택한 노예들 대부분은 전쟁이 끝난 후 본인들이 모시는 장군의 첩이 되는 등 한자리를 차지할 심산이었다.

소니아는 시녀의 무리에, 아델라이드는 성 바깥출입을 도맡아 하는 심부름꾼 시종 무리에 섞여 있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색을 바꾸는 등 외모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워낙 정갈한 미모가 눈길을 끄는 탓에, 아델라이드는 두건을 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시종들의 앞을 다니며 한 명 한 명 훑어보던 세르비아 제국군의 제1대대 대장인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클리터스는 유독 그녀를 뜯어보다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두건을 벗어라.”

아델라이드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가리고자 한 것이 더 눈에 띈 것일까. 작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머리의 두건을 조심히 잡아 내렸다.

붉은 갈색에 가까운 짧은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클리터스가 그녀의 외모를 천천히 뜯어보는 그 시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긴장감에 굳었던 아델라이드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려는 순간, 클리터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을 하였던가?”

“시, 시종장님의 바깥심부름을 했습니다.”

왕의 시종장은 이미 죽었다. 그리고 바깥심부름을 했다고 하면 같이 있던 많은 시종들도 얼굴을 잘 모를 것이므로 아델라이드는 미리 그 직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외 다른 재주가 있는가?”

“외국어를 조금 할 수 있습니다. 해서 바깥심부름이 없을 때엔 외교실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겸했습니다.”

“흠, 외국어라. 어디 말을 할 줄 아는가?”

“아슬란어, 마이스터로어, 라스문어를 할 줄 압니다.”

외국어를 하는 인재는 대륙 어디에서든 귀하게 대우받았다. 몇 개 국어를 하는 이가 드물 뿐만 아니라, 지금 같은 전시에는 타국을 회유하고 정복하는 일이 잦아 언어 인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아델라이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오라버니를 찾기 위해서라도 외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해 왔다. 외국어 능력을 활용해 외국인을 접할 기회를 가지면 그녀의 오라비인 에드가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해도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름이 무언가?”

“에드가입니다.”

“성은?”

“고아인 저를 시종장님이 거두셨습니다. 성은 없습니다.”

“좋다. 에드가, 넌 나를 따라오너라.”

클리터스가 뒤를 돌아보며 병사에게 말했다.

“가서 내 말을 가져 오너라.”

“네, 대대장님.”

병사는 재게 몸을 돌려 사라졌다. 클리터스는 옆으로 다가온 아델라이드를 잠시 보더니 물었다.

“말을 탈 수 있는가?”

“타지 못합니다.”

클리터스는 가냘픈 몸매의 예쁘장한 미소년을 다시 한 번 힐긋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외모의 미소년을 태우고 말을 타면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찌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전장에서는 가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를 안는 장군들이나 상급 군인들이 있었지만 자신은 한 번도 남자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앞에 서 있는 청년에게는 은근히 남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시종장이라는 사람이 괜히 이 녀석을 거두었을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클리터스는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말을 가져온 병사에게서 고삐를 넘겨받았다.

“도와줄 테니 말에 올라라.”

클리터스의 말을 들은 아델라이드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사의 도움을 받아 안장에 올라탔다. 그다음 클리터스가 훌쩍 몸을 날려 아델라이드의 뒤에 올랐다.

아델라이드는 시녀의 무리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소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델라이드의 입 모양이 ‘괜찮아’를 그렸다.

* * *

세르비아 제국의 군영 막사는 수에비 왕국을 조금 지나 동쪽에 위치한 너른 평야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얀 천막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천막마다 푸른 바탕에 하얀 천마가 그려진 세르비아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클리터스를 태운 말이 그 사이를 달려가자 지나다니던 병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경례를 하였다.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의 앞에 앉아 본의 아니게 그 인사들을 받았다.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 민망해진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태우고 있는 이 남자가 꽤 높은 직위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클리터스는 중앙의 큰 막사 앞에서 말을 세우더니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아델라이드에게 손을 뻗어 그녀를 내렸다.

아델라이드는 낯선 남자의 손이 자신의 겨드랑이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민망하고 불편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클리터스 또한 여자건 남자건 그런 배려를 한 적이 없었으므로 스스로가 퍽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자신이 데리고 온 심부름꾼 시종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땐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그 미려한 얼굴에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였다. 말하는 모양새도, 뒤따르는 걸음새도 고아한 레이디처럼 조용하며 우아했다. 그러나 결연해 보이는 눈빛을 보면 성정이 보통이 아닐 것 같았다.

남자들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무인 중의 무인인 클리터스는 풀 냄새와 옅은 꽃향기가 나는 것 같은 이 하얀 녀석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미모로 따지면야 이 녀석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여럿 있었다. 압도적인 외모의 황제도 있고 장군들 사이에서 곁눈으로 훔쳐보게 되는 아름다운 레니에 공작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뒤따르고 있는 이 녀석은 그들과는 달랐다. 녀석에게는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전장에서 저런 외모면 사내라 하더라도 군인들이 음심을 품는다. 험한 꼴을 몇 번 본 경험이 있는 클리터스는 이 녀석을 조금 특별히 관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막사 입구에는 두 명의 병사가 기합이 잔뜩 들어간 자세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클리터스가 다가가니 절도 있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정자세를 취했다.

‘카롤링거의 군대는 훈련이 매우 잘되어 있군.’

아델라이드는 피곤한 기색이 완연하지만 몸에서 긴장을 풀지 않는 병사들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병사들의 인사를 받은 클리터스가 천막을 젖히고는 한 발을 들여 놓았다. 그리고 아델라이드를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델라이드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 막사 안으로 몸을 들였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니 천으로 된 문이 또 있었다. 그 중문을 젖히고 들어서니 보이는 막사 안은 밖에서 봤을 때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형 탁자가 있고 그 탁자에는 많은 서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탁자 앞에 앉은 갈색 머리 남자가 그중 하나를 손에 들고 집중하여 보고 있었다.

그는 막사 안으로 들어온 클리터스를 보곤 황급히 일어나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클리터스 경, 오셨습니까?”

“수고하네, 휴고. 그 문서는 좀 해석이 되었는가?”

“아직입니다. 라스문어는 복잡하고 어려워 아는 이도 드문데, 답답합니다.”

“음. 레니에 전하는 어디 계신가?”

“폐하와 영지를 한번 둘러보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며칠간은 이곳에 머물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야겠지.”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클리터스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아델라이드를 뒤돌아보았다.

아델라이드는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비였을 당시 타인을 만날 때면 반드시 베일을 썼었지만 그래도 혹여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고로 앞으로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존재감을 없앨 생각이었다. 자신의 오라버니를 만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있어야 했다.

“시종들의 무리에서 찾았네. 외국어를 좀 한다기에 레니에 전하께 보고드리려 하네만.”

갈색 머리 남자 휴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델라이드를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름이?”

“에드가입니다.”

“에드가. 어떤 언어를 하실 수 있습니까?”

“아슬란어와 마이스터로어는 말하고 읽고 쓰기가 가능하고 라스문어는 말하고 읽을 수 있습니다.”

“좋네요.”

휴고가 잠시 동안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약간 내리깔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데도 이 잠깐의 정적이 견디기 힘들었다.

“클리터스 장군님. 일단 레니에 전하가 돌아오시면 에드가를 보여 드리죠.”

클리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병!”

휴고가 근위병을 부르자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들어왔다.

“이분을 제5막사인 접객 막사로 모셔다 드리게. 에드가, 가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곧 다시 부르겠습니다.”

아델라이드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절을 하고는 근위병을 따라 나섰다.

남아 있는 휴고와 클리터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클리터스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어떤가?”

“좀 묘하네요.”

“무엇이 말인가?”

“무슨 일을 했다고 합니까?”

“시종장의 심부름꾼이었다고 하네. 외국어를 잘해서 외교실 문서 정리를 돕기도 했던 것 같아.”

“손이 고운 것으로 봐선 궂은일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저나 클리터스 경과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것으로 봐선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면 누군가를 모시는 일을 해 온 듯하고요. 몸가짐이 단정하고 기품이 있으니 필시 막 구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들어서자마자 탁자 위의 문서들을 보더군요. 단순히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에드가가 한 말이 모두 맞다면 경께서 인재를 하나 발굴했다고 봐야죠. 비록 노예의 신분이지만.”

“거짓 같지는 않았네.”

휴고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건 아니고요?”

클리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르 공작의 비서관인 휴고는 앳된 얼굴에 매우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성격은 외모와 달랐다. 그는 가끔 허를 찌를 정도로 날카로웠다.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클리터스는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때 막사 안으로 은색의 단발머리, 붉은 갈색 눈동자의 훤칠하고 아름다운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레니에 공작이었다.

“무엇을 믿고 싶다는 건가?”

“충성!”

“오셨습니까!”

클리터스는 세르비아 제국군의 제1대대 대대장이므로 군인의 경례를, 휴고는 군인이 아니라 사르 공작의 비서관이므로 평범한 인사를 올렸다.

“클리터스 경께서 수에비 궁에서 일했던 시종장의 심부름꾼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아슬란어와 마이스터로어, 라스문어를 할 줄 안다고 합니다.”

화려한 적색 망토를 벗던 레니에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클리터스를 바라보았다.

“라스문어?”

“네. 그 녀석이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지?”

“제5막사에 대기시켰습니다.”

“부르게.”

클리터스는 레니에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밖에 서 있던 근위병에게 아까 전 심부름꾼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잠시 뒤 천막이 열리면서 하얗고 말간 미청년이 들어왔다. 아델라이드였다.

아델라이드는 뒤돌아서 있는 레니에를 보고 순간 멍해졌다. 클리터스의 헛기침 소리가 나서야 화들짝 놀라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에드가입니다.”

오라버니의 이름을 말하는 아델라이드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구도 눈치채진 못했지만. 레니에는 몸을 돌려 아델라이드를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종장의 심부름꾼이었다고?”

그가 아델라이드에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네.”

“언어는 어떻게 배웠나?”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던 저를 시종장님이 심부름꾼으로 거두어 주셨습니다. 간혹 어렸을 적 아비로 보이는 자가 언어를 가르쳐 준 기억이 조각조각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어린 시절 아비에게 배운 것 같습니다.”

반은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가정교사와 오라버니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 후 아델라이드는 타고난 언어 능력으로 습자지처럼 언어를 빨아들였다. 그녀는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읽는 것이 정말 좋았다.

수에비 왕국의 왕비였던 그 2년 동안은 마음 놓고 책을 접할 수 없었다. 아델라이드가 책 읽는 것을 카이스턴이 대놓고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국정을 돌보지 않는 카이스턴 때문에 그녀가 대신 국정을 봐야 해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어떨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카이스턴의 핀잔뿐이었다.

꼼꼼하고 치밀하게 국정을 살피면 왕의 자리를 넘본다고 괴롭혔고, 조금 느슨하게 일하면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려 하느냐고 타박했다. 아델라이드는 일순간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

레니에는 탁자에 수북이 쌓여 있던 서류 중 하나를 집어 올리더니 아델라이드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읽어 보겠나?”

아델라이드는 레니에가 준 종이를 받아 들었다. 라스문어로 쓰인 서신이었다.

라스문어는 고대어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중간 계보가 끊겨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배우기도 어려운 복잡한 문자라서 바이온 왕국에서 소수 민족만이 쓰는 언어였다.

서신을 쭉 훑어본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들어 레니에의 붉은 갈색 눈동자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이것은 연시를 가장한 암호입니다.”

“암호?”

“네. 좀 더 시간을 들여야 정확히 해독하겠지만 잠깐 봐도 암호가 맞습니다. 임을 그리워하는 단어들을 나열했지만 앞뒤 의미가 맞지 않고 하나의 단락이 끝날 땐 그것이 가리키는 단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레니에는 소년 같은 외모의 이 영민한 청년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에게 보여 준 것은 레니에 본인과 휴고가 벌써 일주일 동안이나 골머리를 썩고 있는 문서였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그걸 몇 초 보지도 않고 실마리를 찾아냈다.

“첫 단락을 보면, ‘그 찰나에 보인 그대의 날씬한 눈썹은, 나를 달려가게 하네.’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날씬한 눈썹’은 초승달을 의미합니다. 바이온의 고대 문서에서 종종 나오는 표현입니다. 여인의 미려한 눈썹이 잘빠진 초승달을 닮았다고 이렇게 표현하곤 했지요.

이 서신이 언제 쓰였는지는 모르나 초승달은 음력으로 매월 3일 정도에 뜹니다. 해가 진 후 잠시 동안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단락 하나하나가 때와 장소 혹은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을 끝낸 후에야 아델라이드는 자신이 지나치게 말을 많이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조금 드러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녀의 오라비를 찾는 데 도움 되는 정보가 오가는 곳으로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그곳이 바로 이 은발의 사내 옆이라고 생각했다.

아델라이드는 이 막사에 들어왔을 때 은발의 뒷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었다. 황제의 옆에 있다는 그 은발의 사내가 이 사람이라고 직감했고 그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선 그를 보고 자신의 오라비인 에드가가 아님을 알고 실망했지만, 그의 옷차림이나 그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모습 등을 보았을 때 이 세르비아 제국에서 매우 중요하고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곧 그가 행정 및 외교를 관장하는 유능한 관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잘 보이면 외부 정보를 다루는 곳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델라이드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에드가, 너는 당분간 나의 일을 도와라.”

“어떤 일입니까?”

“여기 휴고가 네게 몇 가지 번역거리를 주고 너의 그 영민한 머리를 빌릴 것이야. 그것을 해 주었으면 한다.”

클리터스와 휴고는 레니에의 결정을 듣고 깜짝 놀랐다.

레니에는 세르비아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유능하고 냉철한 재상이자 전략가였다. 그런 그가 속국이 된 왕국의 한낱 시종 심부름꾼에게 그 중요한 번역 일을 시키고 군사 문서를 보여 준단 말인가.

분명 무슨 깊은 뜻이 있을 텐데 두 사람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여기 있는 동안 해야 할 일 중 극히 일부분이다. 이제부터 너는 세르비아 제국의 노예이고 노예면 응당 주인이 있게 마련이지.”

“네, 하명하시면 주인으로 따르겠습니다.”

“너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황제 폐하이시다. 폐하의 시중을 들어라.”

고개를 숙인 채 레니에의 명을 듣고 있던 아델라이드는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놀라기는 클리터스와 휴고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그, 그게 무슨? 이 아이는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전하의 일을 덜 필요가 없다면 이 아이는 제 시중을 들었으면 합니다.”

“클리터스 경. 폐하의 시중을 들던 녀석이 열흘 전 경거망동하다가 목숨을 잃었네. 그 때문에 지금 폐하의 시중을 내가 들고 있지. 하여 나의 일을 도와준다는 것은 곧 폐하의 시중을 든다는 거야. 참고로 폐하는 아둔하고 눈치 없는 사람을 끔찍이 싫어하시고 누군가 곁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매우 언짢아하시지. 그러니 폐하의 곁에 있으면서 잔심부름도 하고 시중을 들기에는 이렇게 차분하고 조용한 녀석이 딱일세. 종일 시중을 들 필요는 없으니 하루에 서너 시간은 휴고와 나의 일을 도우면 되고.”

“…….”

“안 그런가? 내 말에 이의 있나?”

“그러나 전하. 신분이 뭔지도 아직 정확히….”

휴고는 클리터스와 레니에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신분이야 클리터스 경이 어련히 알아서 조사하고 데려왔을라고.”

레니에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조금 사악하게 느껴졌다. 클리터스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아델라이드는 세르비아 제국의 황제에게 정체가 들통나면 참수형을 당할 각오까지 했다. 에드가를 만나고 나서 죽으면 여한이 없겠지만 일이 잘못되어서 에드가를 못 보고 죽는다 해도 억울하거나 슬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난 2년 동안 심신의 고통을 겪으면서, 아델라이드는 본의 아니게 인간사에 대해 많은 성찰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비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세상일에 달관했을 뿐이었다. 집착도 욕심도 부질없고, 그저 물 흐르는 듯이 사는 것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다만 언젠가 죽더라도,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오라비, 찬란히 빛났던 오라비를 한 번만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러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으련만.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막사로 걸어가는 은발의 사내를 뒤따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황제의 시중 노예가 되더라도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면 되리라. 그것만이 자신이 살 길이었다.

물론 그래도 황제의 곁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카롤링거 3세는 악명 높은 냉혈 인간이 아니던가.

황제의 막사는 다른 막사와 외양이 같았다. 아마 어느 곳에 황제가 머무르는지 적이 모르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여느 막사처럼 근위병 네 명이 두 명씩 앞뒤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레니에를 보자 짧게 경례를 하고 비켜섰다.

레니에는 뒤를 돌아보며 아델라이드에게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문을 젖히고 들어가니 역시 문이 하나 더 있었고, 그들은 이중문을 지나 본격적인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의 막사 내부는 보기보다 넓었다. 아델라이드는 재빠르게 내부를 훑었다.

한쪽에는 넓은 침대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커다란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침대 맞은편에는 갑옷과 목욕 시설이 있었다. 생각보다 단출했다.

그때 갑자기 뒤편에서 문이 열리더니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짧고 검은 머리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뒤돌아본 아델라이드는 그의 절대적인 존재감과 미모에 압도되어 호흡을 멈추었다. 이렇게 위험할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태어나 처음 보았다.

남자는 놀라 눈이 커다래진 아델라이드를 흘긋 바라보더니 곧 레니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니에.”

“예, 폐하.”

“누군가?”

“폐하의 시중을 들 노예입니다.”

“필요 없다.”

“필요합니다. 폐하가 거절하시면 다른 이들이 더 불편해집니다.”

남자는 아델라이드를 다시 흘긋 바라보더니 그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나를 많이들 불편해하는가?”

그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폐하, 불경스럽게도 그렇습니다. 폐하가 병사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모두들 느끼지만 폐하의 시중을 드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좀 더 편안해할 수 있도록 시중 노예를 들이십시오.”

“내 보기엔 자네가 가장 불편해하는 것 같아.”

황제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레니에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아니라곤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황제는 다시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에드가입니다.”

“나이는?”

“스물한 살입니다.”

“훨씬 어려 보이는데.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답하라.”

그렇잖아도 공기를 짓누르는 압도적인 그의 존재감에 숨도 잘 못 쉬겠는데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라니. 아델라이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빠져들 것 같이 깊은 검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몸을 관통할 듯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젊고 아름다운 황제가 내뿜는 압도적인 기운을 감당하지 못했겠지만 아델라이드는 달랐다. 그 눈빛을 오롯이 받아 내며 단단히 서 있었다. 황제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너! 남잔가?”

아델라이드는 숨을 훅 들이켰다. 그의 질문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벗어 보아라.”

황제의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에 아델라이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마력석 때문에 여성의 상징인 가슴은 없어졌지만 이렇게 외간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 본 적은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그러나 손가락은 상의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황제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너무 고운걸. 저 이마며 눈매, 콧날, 입술이 여느 여인보다도 곱다. 몸의 선도 너무 가늘어.’

베르톨트는 제 앞에 시중 노예라고 서 있는 녀석을 보며, 성별을 확인하지 않으면 순간순간 헷갈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웃옷을 벗는 손길이 수줍어 보였다. 마지막 단추를 풀고 옷깃을 젖히자 사내의 그것처럼 편평하고 뽀얀 맨가슴이 드러났다.

황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아래마저 마저 벗으라는 무언의 의미를 알아챘다.

마력석으로 남성의 상징까지 생겼지만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볼 새가 없었다. 처음 만난 두 남자 앞에서 그것을 보인다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이상했다. 아니, 그것보다 무엇이 달려 있건 간에 아래를 보인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숙이며 호흡을 갈무리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바지의 허리끈을 푸는 손가락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베르톨트는 시중 노예를 자처하는 녀석의 눈에서 약간의 물기가 차오르는 걸 보았다. 암갈색 눈동자에는 원망하는 기색이 스며 있는 듯도 했다.

그는 그저 사내의 몸을 확인한 것뿐이다. 한데 그런 눈동자를 마주하자, 강제로 무언가 취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피어났다.

“됐다. 그만 입어라.”

베르톨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뱉었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레니에, 알았으니 이 아이를 시중 노예로 삼아라. 숙소는 자네가 알아서 하고.”

“알겠습니다.”

레니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상의를 여미고 있는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에드가, 가서 오늘 밤 폐하께서 덮을 침구를 배급실에서 받아 오너라. 이 자수정 표식을 보여 주면 네가 폐하의 시중 노예임을 알 것이야. 배급실은 자주색 천막이다.”

레니에는 자수정으로 된 납작한 메달 같은 물건을 아델라이드에게 건네주었다. 표면에는 천마가 새겨져 있었다.

“네, 레니에 님.”

아델라이드는 몸을 돌려 막사를 빠져나왔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막사를 나오자마자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심호흡으로 안정을 찾은 그녀는 그제야 황제의 노예가 된 자신의 처지를 자각했다. 아델라이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건 위험해. 세르비아 제국 황제의 노예라니.’

그녀는 아직도 떨리는 손끝을 바라보다 잠시 숨을 골랐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저 조용히 지내는 수밖에 없다. 되도록이면 황제의 눈에 띄지 않게,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결의를 다진 그녀는 자주색 막사를 눈으로 찾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레니에는 강렬히 그를 쏘아보는 검푸른 눈동자를 가까스로 마주하고 있었다. 황제의 노기를 고스란히 받은 레니에의 아름다운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어째서지?”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 녀석은 지나치게 눈에 띈다. 난 평범한 아이가 좋아.”

“에드가는 외국어를 할 줄 아는 매우 영민한 노예입니다.”

“그래서?”

“보석 같은 아이라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꼭 나의 시중 노예여야 하지? 자네 곁에 두면 되잖아.”

“제가 데리고 있으면서 노예에게 직접 일을 시키면 다른 행정관이나 내무관들이 불만을 품을 것입니다. 또한 제 근처에는 비밀문서가 넘쳐 나므로 제국 내부의 사정이 은연중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곁은 안 됩니다. 그리고….”

레니에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보셔서 아시겠지만 에드가의 외모가 범상치 않습니다. 클리터스가 수에비 왕국의 시종과 시녀들 중 쓸 만한 사람을 솎아 내어 데리고 왔는데 그는 벌써 에드가에게 맘을 뺏긴 것 같았습니다. 그 무뚝뚝하고 곰 같은 사람이 그럴 정도니 다른 이의 곁에 둔다면 필시 침실 노예로 전락하거나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곁에 두어도 클리터스처럼 제가 그 녀석에게 빠질 수 있습니다. 전력에도 좋지 않겠죠. 결국 가장 흔들림 없는 폐하의 곁이 어느 모로 보나 가장 안전합니다.”

베르톨트는 기가 찼다. 레니에의 말은 그러니까, 그 아이가 필요하긴 한데 위험할 것 같으니 황제인 자신한테 맡긴다는 뜻이었다. 필요할 때만 빼먹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렇지만 레니에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아까 그 노예 녀석은 자신이 봐도 여러모로 위험했다. 곁에 두려면 자신의 곁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또한 폐하께서는 시중 노예가 필요하지요. 더하거나 덜하지도 않게 알아서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시중만 들 노예가. 그 녀석은 영민하니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도, 제게도, 그 녀석에게도 모두 좋은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레니에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베르톨트는 얄미운 저 입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레니에 프랑수아 콩데 드 사르와 베르톨트 한스 악셀 크라젤 폰 카롤링거 3세. 그들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한 명은 날 때부터 황제의 재목이었고 한 명은 날 때부터 재상감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길러졌고 그 외의 것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너무 잘 알아 친구인 듯 군신인 듯 간혹 경계가 없이 지냈다.

베르톨트는 이렇게 얄미울 정도로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재상을 볼 때면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짜증이 났다. 어떨 때는 그가 자신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폐하, 저녁을 드시고 오늘은 이만 쉬십시오. 영지 시찰 보고서와 수에비 궁의 노예들 문서는 내일 아침 일찍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알았네. 군사들과 군마들도 지쳤으니 오늘 저녁은 좀 푸짐하게 준비하라 하게. 수에비 궁의 전리품과 노예들은 자네가 알아서 나누고.”

“폐하께서는 혹 필요하신 것이 없습니까?”

베르톨트는 레니에를 바라보면서 씁쓸하게 말했다.

“지금 막 시중 노예를 받지 않았나. 그거면 됐어.”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레니에는 자신의 군주에게 허리 숙여 예를 취하곤 막사를 나왔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사실, 황제가 무언가 미심쩍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청을 그대로 받아 준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믿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레니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막사로 가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을 분주하게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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