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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새로운 노예 (4/39)

제3장. 새로운 노예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침구를 가지러 배급 막사에 갔다가 황제의 시중 노예가 갖추어야 할 주의 사항을 꼼꼼히 전해 들었다. 주의사항은 주로 황제가 싫어하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황제 앞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말만 짧게 해야 했고, 두 번 묻지 않아야 했으며, 행동은 소리 나지 않게 해야 했다.

주의 사항을 모두 들은 아델라이드는 황제가 매우 까다로운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거나 황제의 마음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걸 뜻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걱정이 앞서고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델라이드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눈에 띄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자고 다짐했으니 말이다.

밍크같이 부드러운 털 이불과 베개를 받아 품 안에 넣고 걸어가면서 괜히 미리 걱정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길 뿐.

* * *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아델라이드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황제의 저녁까지 챙기려면 누구보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침구를 챙겨 든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막사 앞에 이르러 문을 열고 중문 앞에 섰다. 어쩐지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걸 느끼며, 문에 대고 고했다.

“폐하. 에드가입니다. 침구를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와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황제를 바라보지 않고 소리가 난 쪽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러곤 곧장 침대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져온 이불과 베개를 내려놓는다든지 침대 위의 시트 모서리를 잡아당긴다든지 하는 이 모든 행동이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밍크 이불을 가지런히 펼치고 베개를 살며시 머리맡에 놓았다.

베르톨트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면서도 곁눈으로는 아델라이드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움직임이 조용하고 기민했다. 아직까진 거슬리지 않고 그런대로 봐 줄 만했다.

침대를 모두 정리한 아델라이드는 그제야 허리를 폈다. 베르톨트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폐하.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녀는 살짝 시선을 들어 베르톨트의 반응을 살폈다. 베르톨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몸을 돌려 막사를 나갔다.

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베르톨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나쁘지 않군.’

황제의 식사를 준비하는 막사는 황제가 기거하는 막사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마 음식이 식을 것을 염려해 일부러 지척에 막사를 설치한 것 같았다.

아델라이드는 식사를 준비하는 막사에서 황제의 전용 수통을 받아 들어 어깨에 멨다. 황제가 먹을 음식이 담겨진 식판은 손에 들었다.

황제의 저녁 식사거리는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가짓수는 많지 않았지만 오늘은 특별히 고기 한 덩이가 올라와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판을 들고 잰걸음으로 다시 황제의 막사 앞으로 왔다. 그녀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폐하. 에드가입니다.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와라.”

안으로 들어온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들어 황제의 위치를 확인했다. 황제가 있는 책상 위에 식판을 내려놓고 황제의 전용 수통도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황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에서 황제의 그 낮은 음성이 들렸다.

“다음부터는 일일이 막사 밖에서 고하지 않아도 된다.”

아델라이드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돌려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베르톨트의 잘생긴 미간이 약간 일그러졌다.

“너는 나의 시중 노예다. 난 이 막사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는,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하, 하지만 폐하께 가까이 접근하는 자를 누군지 모르고 마구 들이시면….”

“난 들어오는 이의 기척을 다 구별할 줄 안다. 자고 있을 때라도 알 수 있어.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들어올 때 고하지 말거라. 시끄러우니.”

마지막 말을 듣지 않았다면 노예인 저를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그의 진정한 심중을 알 수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제 입술이 조금 비틀어지는 것을 느꼈다.

‘말을 더 줄여야겠군.’

아델라이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막사 밖으로 나왔다. 자신도 식사가 준비되고 있는 막사로 가서 저녁을 먹어야 했다. 발걸음을 옮기며 하루가 매우 길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막사로 돌아왔다. 황제의 식판과 물통을 치운 다음 막사 한쪽에 조용히 그림처럼 서 있었다. 그만 가서 자라는 명령을 받고서야 취침 막사로 향했다.

취침 막사는 식사를 준비하던 막사 바로 옆이었다. 그곳은 고위 장군들의 시중 노예들이 모두 모여 잠을 자는 곳이었다.

막사에는 몇몇 시중 노예들이 벌써 들어와 있었다. 서로 통성명을 하며 떠드는 노예들도 있었지만 아델라이드는 배급받은 침의로 갈아입자마자 침대에 몸을 묻었다. 오늘 하루 정말 많은 일을 겪었던지라 긴장이 풀리자 금세 노곤해졌다.

눈이 감기기 전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얹고는 달라진 처지를 생각했다.

예전보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자는데도 마음만은 편했다. 이제 그녀의 밤은 두려움과 공포, 고통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죽여야 하는 일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이 밤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잠이 밤하늘의 별처럼 쏟아졌다.

* * *

원래 아침형 인간인 아델라이드는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해가 뜨기 전이라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그녀는 막사 한쪽에 마련된 세숫대야에 물을 부어 세수와 양치를 했다. 작은 거울 앞에 서서는 옷매무새를 고쳤다.

어제 벗어 두었던 먹색 두건은 머리에 맞게 둘러 뒷머리에서 묶어 고정했다. 그러자 얼굴이 조금 더 가려졌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외모를 더 가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에 노예들끼리 자신의 외모를 보며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저 얼굴로 반드시 침대 안으로 들어갈 거라는 둥, 누굴 홀리려고 들어왔냐는 둥, 저런 얼굴이 있었냐는 둥 하는 잡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지금도 이런데 만약 마력석으로 외모를 바꾸지 않았다면 너무 눈에 띄어 조용히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이의 시선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다시 한 번 굳게 마음을 먹으며, 아델라이드는 거울 속의 암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더 조용히 지내자. 황제도 조용한 것을 원하니 잘되었어.’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새벽안개가 푸르스름한 공기 사이를 흐르는 이 시간에도 움직이는 몇몇 군사들이 보였다.

황제의 막사에는 불이 켜져 있는 듯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델라이드는 빠르게 발을 놀려 조용하게 불빛을 향해 갔다.

막사 안으로 들어선 아델라이드는 아무리 둘러봐도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찾아 나서야 하는지, 아니면 막사 안에서 조용히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고. 알지도 못하는데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델라이드는 날이 환하게 밝아 올 때까지 한쪽 구석에서 가만히 서서 황제를 기다렸다.

사방이 완전히 환해지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소리가 막사 밖에서 들려왔다. 꼼짝 않고 고개를 반쯤 숙이고 서 있던 아델라이드는 아침 배식을 받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때 막사 문이 열렸다. 풀어 헤쳐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지도 않은 채 땀에 젖어 들어오는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훅 하고 지나치게 야생적인, 날 것의 공기가 쏟아졌다.

그도 남자다, 수에비 국왕과 같은 동물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꽂힌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머리가 띵하고 울리더니 다리가 휘청하고 몸이 흔들렸다.

비틀거리는 아델라이드의 어깨를 베르톨트가 한 손으로 감아 지탱해 줬다.

땀과 열기로 가득한 남자의 건장한 팔 안에 갇히니 아델라이드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순간 저도 모르게 매몰차게 황제의 팔을 뿌리쳤다.

“…….”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이 과민 반응을 보였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 어색하고 불편한 순간을 빨리 벗어나야 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

“잠시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고기를 먹거라.”

황제의 뜬금없는 말에 아델라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 검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멍한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 커다란 눈이 그저 껌뻑껌뻑하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을 그리 야무지게 내치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귀여운 표정이었다.

“너무 말랐다. 고기를 많이 먹고 햇볕을 좀 쐬거라. 그럼 어지럼증이 나을 거다.”

황제의 말에 아델라이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무뚝뚝하고 건조한 말투지만 왠지 자신을 위하는 것 같았다. 싫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웠다.

바로 앞에서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베르톨트는 그녀의 하얗고 뽀얀 목덜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가느다랗고 긴, 우아한 그 목덜미가 이상하게 시선을 붙들었다.

“씨, 씻을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델라이드는 둘 사이에 흐르는 팽팽하고도 녹진한 공기에서 급히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고개를 15도 정도 숙인 채로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여 대야에 물을 부었다. 황제는 그 몸놀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녀석이야. 몸놀림이 흐르는 바람 같아.’

아델라이드는 발루아 가문에 있을 때도 행동거지와 몸가짐이 물 흐르듯 유연하고 우아하기로 유명했다. 식사를 할 때도, 단장을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차를 마실 때도, 이상하게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부드러움과 기품이 흘렀다.

국왕 카이스턴은 그런 아델라이드를 보며 이상한 갈증을 느껴 더더욱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의 내면이 무너지기를, 철저히 자신에 의해 주저앉기를 바라는 것처럼.

아델라이드는 여전히 막사 문 앞에 서 있는 황제에게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준비되었습니다.”

베르톨트가 그녀 쪽으로 움직였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온 그는 땀으로 젖은 자신의 셔츠를 잡아 올려 몸을 빼냈다.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고 단단히 자리 잡은 근육들이 드러났다.

근육들은 흘러내릴 듯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바지의 허리춤까지 빼곡히 이어져 있었고, 근육을 뒤덮은 피부 위로 여기저기 상흔들이 보였다. 크고 작은 상처들은 황제가 그동안 얼마나 고단한 세월을 보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델라이드가 황제의 옆에 서서 수건을 팔에 두르고 기다리는 자세를 취했다. 황제는 그녀를 힐끔 보더니 한마디 했다.

“그럴 것 없다. 그냥 여기 걸어 두어라.”

황제의 시선이 대야 옆 수건걸이를 가리켰다. 아델라이드는 그가 말한 대로 수건걸이에 수건을 걸고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씻으시는 동안 아침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곤 예의 그 흐르는 듯한 몸가짐으로 막사 밖에 나갔다.

‘저 녀석은 나랑 눈을 맞추지 않기로 작정했나 보군’

베르톨트는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시중 노예와 일일이 눈을 맞출 필요가 없으면 자신에게도 다행이었다.

그는 세숫대야에 손을 담갔다. 주위에 왠지 싱그러운 풀 향이 나는 것 같다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세수를 했다.

아델라이드는 막사 밖으로 나와 작게 숨을 골랐다. 평소보다 살짝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발루아 가문에서도 수련을 하는 기사들의 벗은 몸을 보았었다. 결혼해서는 왕의 벗은 몸도 보았지만 이렇게 당황스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비록 상체이긴 했지만 황제의 벗은 몸을 봤을 때 아델라이드는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동공이 순간 흔들릴 정도였고 황제도 남자라는 자각이 몸 전체로 느껴졌었다.

그녀는 황제가 있는 막사를 뒤돌아보았다. 이곳을 언제 나갈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진 황제의 비위에 거슬리지도, 황제의 눈에 띄지도 않게 지내야 했다. 황제가 있는 저곳은 자신의 수련장이자 전쟁터라고 자기 암시를 걸었다.

아델라이드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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