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미녀는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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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미녀는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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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미녀는 괴로워
2023.01.14.
흔한 갈색 머리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스리피스. 인상은 순해 보이는 게 연애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영식이었다.
“반가워요. 아네트 르앙베리아예요.”
예의상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 품에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향긋한 꽃 내음이 콧속을 간질였다.
“평소 꽃을 좋아하신다길래. 처음이라 부담스럽겠지만 제 작은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주십시오.”
분홍빛의 셀로티아.
내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아카데미 교정에 핀 셀로티아를 보면 리안이랑 놀던 날이 종종 생각나곤 했으니까. 나는 문득 그때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옅게 미소 지었다.
“예쁘네요. 향긋하고.”
“다행입니다. 혹여 싫어하실까 봐 밤새 고민했습니다.”
에드워드 영식은 나보다 기쁘게 웃었다. 순수한 모습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 등쌀에 떠밀려 나오긴 했다만, 우리가 인연이 될 확률은 없어요.
“밤새 고민까지야.”
“정말입니다. 꼭 기뻐하셨으면 했으니까……요.”
그는 내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수줍게 볼을 붉혔다.
진짜인지 눈동자도 충혈되었고, 피부도 퍼석해 보였다. 첫 만남이라 만발의 준비한 티가 역력했다. 미안하게 말이다.
“에드워드 영식. 피곤하면 다른 날로 잡을까요? 저는 괜찮은데.”
애초에 나는 적당히 빠져나와 대공을 만나러 갈 작정이었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빨리 자리를 비켜준다면 내겐 좋은 일이었다.
“아닙니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가시죠.”
하지만 에드워드는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다. 순진한 얼굴이 다급함으로 물들었다. 나는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그럼 빨리 출발이나 하죠.”
에드워드는 착실히 내 에스코트에 임했다.
마차를 타는 내내 잠을 쫓아 보려 허벅지를 꼬집는 걸 목격했지만, 모르는 척해주었다. 어차피 데이트는 오래가지 못할 테니.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따사로운 햇볕에 눈을 찡그리기도 잠시. 시원한 바람과 함께 탁 트인 전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오라 호수입니다.”
대공의 눈을 연상케 했던 요정이 산다는 그 호수였다.
‘지금쯤 편지는 전달받았을까?’
다시금 헤르티안과 결혼 문제로 고민이 깊어졌다.
아버지의 편지로 그가 기분이 상해서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할까 봐, 그게 가장 신경 쓰였다.
“영애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호수가 진풍경입니다.”
반대로 에드워드는 그저 신이 났다.
“갑니다. 가요.”
나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발 다치지 않게 천천히 오십시오.”
우리는 호수를 끼고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와서 다행이었다. 에드워드의 뜨거운 시선을 차단시켜 주니 말이다.
“근데 저희 언제까지 걸어요?”
지금 몇 분째 걷고 있는 거야.
시간이 아까웠다. 에드워드는 그제야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곤 곰곰이 무언가를 계산했다.
“30분 걷기 끝냈고……. 그럼 다음으로는 배를 타러 갑시다!”
당신, 다 계획이 있었구나?
보아하니 열심히 짜 놓은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나 곧 가 봐야 하는데.
함박웃음을 지으며 뿌듯해 보이는 그를 보니 계획이 망가지면 크게 실망할 것 같았다. 그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미리 그의 계획을 망가트리기로 했다.
“저 조금 이따 수업에 가야 해서 오래 못 있어요.”
“백작님이 오늘 영애는 쉬는 날이라고 하셨는데.”
“나오기 직전에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컨디션도 안 좋구요.”
그가 딴소리를 할까 싶어 재빨리 맥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무척, 무척이나 아쉽지만 나머지는 다음에 만나서 해보도록 하죠.”
“그래요.”
다음이 있다면 말이죠.
무척 아쉬워하는 모습에 나는 배를 타는 것까지는 어울려주기로 했다. 주선자인 아버지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런데 선착장에 거의 도착하던 그때, 대뜸 에드워드가 고백했다.
“사실, 아카데미 때 영애께 고백했다 차인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앞서가던 내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기억하시려나 모르겠지만.”
“저한테요? 기억에 없는데.”
뚫어지게 쳐다봐도 이 남자.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다.
에드워드가 얼굴을 붉히더니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용암이 터진 듯한 홍조가 나를 좋아한다는 증거인 양 눈에 들어왔다.
“기억 못 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렇게 영애와 제가 다시 만났으니까요.”
“하하. 제가 머리가 나빠서.”
나는 미안함에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 만남일 텐데요. 하하.
“그땐 저도 너무 어리숙했습니다. 오히려 그때 차인 게 다행이에요.”
에드워드는 쿨한 척 시선을 사선으로 들었다.
“드디어 영애를 정면에서 마주 보게 되었으니까요.”
“…….”
딱딱한 음절.
딱 봐도 준비된 멘트였다.
“네. 키가 비슷해서 정면에서도 눈이 잘 보이네요.”
나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영식, 저 배 타기 전에 손 좀 씻고 올게요. 꽃도 맡겨 두고 올게요.”
“다녀오십시오.”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뒤를 돌아섰다. 거추장스럽게 큰 꽃다발을 내려두고 손을 닦고 나와 눈으로 에드워드를 쫓았다. 멀찍이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그가 보였다.
그런데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선 채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가 있었다.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자 그늘에 가려있던 키가 큰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심장이 쿵 떨어진 기분이었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세르디스. 연회 이후로 보이지 않던 그가 여기 나타났다. 게다가 나와 데이트 중인 에드워드와 함께.
“방해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네.”
지겨움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나는 곧장 방향을 틀어 마차가 있는 쪽이 아닌 호수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테니 마차 또한 안전하지 못했다.
세르디스를 피해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다시 선착장 부근이었다. 나는 뻐근해진 다리를 통통 두드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보이는 세르디스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넘어질 뻔했다. 이젠 그가 내게 위치추적 마법이라도 걸어둔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십 분만. 배에 탔다가 내릴게요!”
나는 어쩔 수 없이 선착장 안으로 들어가 정박한 배에 올라탔다. 배를 관리하는 노인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따라 배 쪽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나는 오지 말라고 손짓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곧 내릴 테니까. 죄송한데 누가 제 인상착의를 물으면 다른 방향으로 갔다고 해주시겠어요? 부탁할게요.”
말이 끝나자 선착장 안으로 들어서는 세르디스를 보고 몸을 바짝 엎드렸다. 그렇게 숨을 죽이기를 잠시. 멀리서 들리던 말소리가 멎었다.
세르디스는 갔나? 나는 눈을 빼꼼 내밀어 선착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없었다. 못 찾고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었다. 나도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어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 빠른 속도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크게 뒤뚱거리는 배를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노 없이 움직이는 배의 비밀을. 마법이 걸려 있어 사람이 올라타고 시간이 지나자 자동으로 출발한 것이다.
멀찍이 배를 관리하는 노인이 급하게 뛰어왔지만,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시 돌아갈 방법이 없는 거구나…….”
반대편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홀로 배를 타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르오 호수는 요정들이 사는 넓고 넓은 호수다. 넓고 황량한 호숫가에 나 혼자 덜렁 남겨진 셈이다. 눈 앞에 펼쳐진 호수의 장대함에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 옛날에 물에 빠진 적 있지 않았나?”
난데없이 떠오른 옛 생각에 그만 커억, 숨이 막혔다. 뻣뻣하게 굳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심장은 쿵쾅거리다 못해 가슴을 뚫고 나올 만큼 거세게 요동쳤다.
“침착해……. 침착해. 아네트.”
나는 고개를 도리질 치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여긴 호수라 그리 깊진.’
슬쩍 옆에 내려다본 호숫물은 무척이나 투명했다. 호수 아래가 그대로 비칠 만큼.
요정이 아니라 괴물이 살고 있는 거 아니냐고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끊임없이 흘러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아오르 호수는 허허벌판에 놓인 일반 호수가 아니었다.
구불구불한 호수길을 따라 가시나무숲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장관일지 몰라도, 나에겐 환장할 풍경이었다.
“저기요!”
애처롭게 외쳐보았지만, 가시나무에 가려 노인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누……누구 없어요?”
누구 없어요~.
누구 없어요~.
목소리가 메아리쳐서 호숫가 숲을 울렸다.
왜 메아리가 울리고 난리인데!
여기가 무슨 정글이냐고.
안 되겠다.
“그냥, 가만히 있자…….”
아예 눈을 감아버리자.
그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자연에 버려진 기분은 정말 무서우니까.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그 기분.
나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모아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새카만 어둠이 시야를 가렸다.
저 나무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도, 호수 아래에서 들리는 괴상한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아예 귀를 꽉 틀어막았다.
이대로 조금만.
멈춘 것 같은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하지만 불현듯 무릎이 축축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들어보니, 드레스가 새빨간 피로 뒤덮여 있었다. 뒤따라 후드득 코피가 떨어졌다.
“사람 살려…….”
나는 거의 울부짖었다. 이 약한 몸뚱어리! 도움이 되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로 앞이 흐릿해질 만큼 엉엉 울었다.
두려움에 정신이 흐릿해질 무렵, 배가 한 차례 크게 출렁거렸다. 큰 움직임에 놀라 버둥거리니 누군가 내 팔을 잡아챘다.
“흐어.”
깜짝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옅게 쉬었던 숨통에 공기가 훅 들어왔다. 그리고 호수와 나무만 보였던 풍경 아래로 드디어 사람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남자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땀과 눈물로 범벅된 시야가 흐릿했다. 겨우 보이는 건 나를 부르는 남자의 인영. 머리카락이 어두운 걸 보니 세르디스는 아니었다.
“에드……워드 영식?”
갈라진 목소리가 성대를 긁으며 흘러나왔다.
“왜 이런 상태가 되신 겁니까…….”
남자의 목소리도 나 못지않을 만큼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피 묻은 손으로 그를 잡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저 좀 도와주세요. 여기서 빠져나가서 광장에 가야 해요.”
헤르티안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꼭 만나야 하는데.
“이 꼴로 어딜 가신다는 말입니까?”
“만날 사람이 있어서…….”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긴장이 풀려서 정신도 나가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