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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나는 5년이다 (14/79)


14화 나는 5년이다
2023.01.18.


몇 시간 전.

아침 댓바람부터 오센은 불만에 차 있었다.


“어제부터 왜 자꾸 웃으십니까?”

백작저에 다녀온 뒤로 헤르티안의 상태가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헤르티안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을 때면 어딘가를 바라보다 웃음을 툭툭 흘리곤 했다.

보나 마나 아네트와 결혼할 생각에 기뻐 저러겠지만.

물어봐 주길 바라는 걸 알기에, 알면서도 물었다.


“아네트가 내가 소중하대.”

어제 카시안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간 잠잘 시간을 아껴 쓴 편지의 내용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축하드립니다.”

행복에 빠져 있는 그에게 오센은 박수까지 쳐 주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는 각하께서 영애를 만나기 전에는 어땠는지 상상이 안 됩니다.”

헤르티안은 오센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늘 편지와 함께였으니.


“예전의 나?”

그 물음에 헤르티안은 걸음을 멈추고 5년 전, 어느 날을 기억해보려 했다.

곧 붉은 입술이 열렸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이젠 기억도 안 나.”

그는 굳이 과거를 돌이켜보려 하지 않았다.

그때의 헤르티안은 돌아갈 가족의 품도 없었으며 주변엔 적으로 가득 찼었다.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여린 손으로 검을 잡고, 두려움을 벗 삼아 외로운 밤을 보냈다. 아네트를 만나고 나서야 무채색이었던 그의 삶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오센.”

오센은 주책을 부리는 주인을 보며 눈을 흐렸다.


“소중한 상대인지 알아야 행복하겠죠. 각하께선 정체를 언제 드러내실 겁니까?”

헤르티안도 나름 고민이 많았다.

친한 친구였던 카시안이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결혼을 취소할까 봐.

아네트가 자신에게 결혼을 요청한 이유는 그저 도피처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그런데, 만약 여기서 정체를 드러낸다면 착해빠진 아네트는 친구를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질 게 뻔했다.


‘내가 지독히 빠진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아네트에게 다짜고짜 고백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밝힐 거야.”

헤르티안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아네트가 나를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한 다음에. 그 뒤에 밝혀도 늦지 않아.”

그렇게 대답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살롱은 처음 맞이하는 손님으로 부산스러웠다. 이윽고 살롱에 헤르티안이 들어서자 그를 발견한 직원 모두가 일동 차렷 자세를 취했다.


“블, 블란디체 대공 전하. 어서 오십시오.”

뒤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나왔다.


“대공 전하. 방문해 주시어 영광입니다. 마담 루안나예요.”

루안나가 운영하는 살롱은 수도에서도 내로라할 만큼 비싸고 고급소재를 다루었다.


“연락주신 대로 웨딩드레스를 미리 준비해 두었어요. 이쪽으로.”

특히, 루안나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건 부의 상징이자 모든 여인의 로망이었다.


“여기서 제일 비싼 걸로 하지.”

그의 대답은 담백했다.


“잠깐. 지휘관…… 아니 대공 전하.”

옆에서 위태롭게 주인을 지켜보던 오센은 주인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며 막아섰다.


“일단 드레스를 먼저 보셔야죠.”

“여자들은 제일 비싼 걸 좋아한다고 하던데. 아니야?”

“누가 그럽니까.”

“맥스가.”

헤르티안의 답에 오센은 여자라곤 만나본 적 없는 기사 놈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휘저었다.


“비싼 거라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일단 마담이 준비해준 옷을 다 보십시오.”

마담은 오센을 보고 싱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공을 특별 고객 룸으로 안내했다.


“그냥 가시면 서운할 뻔했어요. 자 여기 앉아서 편하게 보세요. 대공님.”

헤르티안이 쇼파에 앉자, 마담과 살롱 직원들이 날씬한 마네킹에 입혀진 드레스를 차례대로 가져왔다.

룸에 달아놓은 화려한 조명 탓인가.

눈앞에 놓인 드레스가 반짝반짝 은하수처럼 빛났다.


“과연. 실력이 남다르군.”

오센이 먼저 감탄했다. 하지만 헤르티안의 눈엔 다 거기서 거기였다.


“하나같이 다 고급스럽고 예쁘긴 하군. 그런데 차이가 뭐지?”

보석이 많이 달린 것과 덜 달린 것?

헤르티안에겐 그 정도 차이만 느껴질 뿐이었다. 오센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전하는 아직 여인의 마음을 아시려면 멀었습니다.”

“이럴 땐 다 사면 된다고 하던데.”

“누가요?”

“맥스가.”

“맥스 말은 머릿속에서 지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충언입니다.”

헤르티안은 미간을 와락 구기며 드레스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런다고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그냥 전부 사지. 아네트가 원하는 걸 알아서 고르라고 하게.”

그가 시원하게 백지 수표를 꺼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센에게 저지당했다.


“그럼 뭐, 어떡하라고.”

오센은 백지 수표를 착실히 챙기며 차분하게 헤르티안을 설득했다.


“자. 상상해보십시오. 저 드레스를 입고 나올 르앙베리아 영애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네트를……?”

아네트의 이름이 나오자 헤르티안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네. 저 첫 번째 드레스. 영애가 입으시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녀의 이름이 마치 주문과도 같았다.

헤르티안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첫 번째 드레스를 입고 나온 아네트를 쉽게 상상해냈다.


“아네트는 어깨선이 매끄러우니까 저런 어깨가 트인 드레스를 입으면 분명 아름답겠지. 가슴 부분에 보석이 많이 박힌 게 마음에 들어. 그런데 어깨가 파인 것도 모자라 허리 라인까지 드러내는 건 딴 놈들 눈에 보여주기 싫어.”

드레스의 ‘ㄷ’ 자도 모른다는 그가 뱉은 말이었다. 아네트를 대입시키니 디자이너보다 꼼꼼하게 답이 나왔다.


“바로 그겁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꼼꼼히 봐야 합니다.”

헤르티안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드레스 여러 개를 번갈아 보았다.


“너한테도 쓸모가 있구나.”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데는 빠삭합니다. 누나만 4명이거든요.”

오센도 연애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누나들에게 이끌려 살롱에 가는 게 일상과도 같았기에 드레스 고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헤르티안은 웨딩드레스를 순탄하게 고르는 듯했다.

르앙베리아 백작이 결혼 거절 보낸 편지를 보기 전까진.


 

***

그리고 현재 상황.

아네트를 배에서 구해 온 헤르티안은 큰 분노에 휩싸였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결혼 이야기가 오갔는데, 통보식으로 결혼을 못 하겠다는 말을 전해 온 것도 모자라 다른 놈이랑 데이트를 해?

아네트가 다른 영식과 데이트한다는 소식까지 접한 헤르티안의 눈이 뒤집혔다.

당장 그녀를 봐야겠단 생각뿐이었다. 그녀 입에서 결혼을 직접 파기하자는 이야기를 들어도 이 상황을 납득할 리는 없었겠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간신히 마주한 아네트가 제 앞에서 피범벅이 되어 정신을 잃었다. 그는 순간 눈이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네트가 어쩌다가 호수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지. 그것도 왜 이런 몸 상태로.”

“배 관리인 말에 의하면 영애께서 갑자기 배에 올라타더니 몸을 숨겼다고 합니다. 마법이 걸려 있는 배인지라 사람이 타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출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센의 답에 날카로운 눈빛이 향한 방향은 에드워드 쪽이었다.


‘이런 머저리 때문에.’

안 그래도 약한 아네트가 쓰러졌다는 게 화가 났다.


“네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아닙니다! 저는 영애께서 손을 씻고 온다기에 기다렸을 뿐인데. 갑자기 영애께서 혼자 배에 오르시고…….”

“같잖은 소리. 애초에 호수에 데려왔다는 게 잘못이라고.”

“예?”

고개를 푹 숙인 채 변명을 늘어놓던 에드워드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네트가 어렸을 적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는 것도 몰랐나?”

헤르티안이 따지듯 물었다. 당황으로 물든 에드워드의 눈동자만 보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그, 그건…….”

“뭐. 고작 정략결혼 상대였을 테니 관심도 없었겠지.”

에드워드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아니. 아닙니다!”

“꺼져라. 어차피 아네트는 너와 결혼하지 않을 거니까.”

싸늘한 음성이 병실 안을 울렸다. 얼음장처럼 굳은 분위기는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아, 안 됩니다. 그것만큼은. 제가 영애를 직접 보고 사과할 겁니다. 그럴 겁니다.”

에드워드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헤르티안에게 읍소했다. 두 다리에 힘을 줘 버텨보았다.


“영애가 깨어날 때까지만…….”

“꺼지라고 했다.”

하지만, 아네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선 헤르티안의 오라에 범접하기 어려웠다. 마치 그녀에게 결계라도 씐 듯 말이다.

에드워드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아네트와 다신 볼 수 없단 생각에 답답해졌다.


“대공 전하께서도 상관없는 일 아니십니까. 어떻게 계신지는 몰라도 영애를 구해주신 건 감사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저와 영애 둘 사이의 일입니다.”

답답함에 무서운 줄 모르고 대공을 향해 소리쳤다.

헤르티안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첫째로, 곤히 잠든 아네트가 깰까 봐.

둘째로, 이 버러지 같은 놈이 아네트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게 기분이 더러워서.

마지막으로.


“둘 사이의 일? 그딴 건 없는 거다. 앞으로도.”

에드워드는 뭐라 반박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조가비처럼 딱 다물었다. 따지고 싶었지만 애먼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야수처럼 목덜미를 뜯어먹기라도 할 것처럼 대공의 음성은 분노로 휩싸여 있었으니까.


“됐으니까 나가. 다신 아네트 앞에 나타나지 마라.”

헤르티안의 날 선 축객령에 에드워드는 손톱을 뜯다 소심하게 대꾸했다.


“오늘 만남은 백작님께서 제게 먼저 요청하시어…….”

“그래서 다시 만나겠다고?”

“그, 하지만 전 백작님께서 자리를 만들어 주시면 언제든지 만날 겁니다.”

이내 헤르티안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깨졌다. 만약 전쟁터였다면 사람을 찢어 죽일 수도 있는 눈빛이었다.


“집에서 귀하게 자라서 그런가, 곱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 건가?”

“…….”

“피를 봐야 제대로 알아들으려나.”

병실 안에 감도는 살기가 아찔했다. 결국 헤르티안의 기에 어깨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불쌍한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오센이 나섰다. 이대로 있다간 에드워드까지 입원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고, 딱하셔라.”

그는 무사히 에드워드를 데리고 나가려고 대충 등을 몇 번 도닥여 주었다.


“영애는 저희에게 맡기고 이만 돌아가시지요.”

그리고 은근슬쩍 등을 밀었다. 조용히 빠져나갈 기회를 준 것이기도 했다.


“크흡. 제가 뭘 잘못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에드워드는 예의상 건넨 위로에 봇물 터지듯 서러움을 쏟아냈다.


“왜 다들 영애를 포기하라 말하시냔 말입니다. 황자 전하도 그렇고 대공 전하도 그렇고…….”

“저기요. 일단 진정하시고.”

“백작께서도 허락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다들 저한테 그러십니까!”

오센은 괜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하필 백작의 편지를 받고 화가 잔뜩 난 대공 앞에 걸리다니. 운이 없네.


“더 추한 꼴을 보이고 싶은 건가?”

헤르티안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에드워드는 이제 거리낄 게 없었다. 이대로 쫓겨나면 아네트를 다시는 못 볼 걸 알고 있으니.


“영애는. 아니 아네트는 단순히 제게 정략결혼 상대가 아닙니다.”

헤르티안은 버티고 서 있는 등을 발로 걷어차 버릴까 고민하다, 곧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지는 걸 보고 발을 거뒀다. 에드워드에 눈에서 맑은 눈물이 토독 떨어졌다.


“……흐윽. 아네트는 제 첫사랑이란 말입니다…….”

“…….”

“그것도 짝사랑만 3년째라고요…….”

처음 보는 대공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울면서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는 것보다 나았다.


“단념해.”

하지만, 헤르티안은 야속하게도 한 줌의 동정도 품지 않은 얼굴로 차갑게 내뱉었다. 덕분에 눈물범벅이 된 에드워드의 얼굴이 더욱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단념…….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끄윽, 단념이 된 답니까? 저도 그럴 수만 있다면…….”

“5년이다.”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던 헤르티안이 말허리를 자르고 말했다.


“예……? 끄윽, 뭐가 5년입니까?”

에드워드는 뜬금없는 대공의 말에 의문을 표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넌 고작 3년이지만, 난 5년이라고.”

 

 
짝사랑한 시간.

말뜻을 이해한 에드워드의 눈이 끔뻑거렸다. 오센은 주인의 고백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애송이는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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