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부인은 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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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부인은 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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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부인은 제 것이니까요
2023.06.17.
“돌고 돌아 드디어 예약했네요.”
오센이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습격을 받기 전, 오센이 추천해 주었던 레스토랑. 그는 얼마나 맛있으면 예약까지 사흘이나 걸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생했다.”
“드래곤 눈알 뽑은 주인님도 있으신데 고작 예약이 뭐라고요.”
그 말에 헤르티안이 말 고삐를 당기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멋있었나? 돌아오고 나서 다들 드래곤 얘기만 해대는데.”
어제오늘 기사들이며, 사용인들이며 지나가는 귀족들까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했다. 전쟁을 한두 번 치른 것도 아닌데 고작 피를 뒤집어썼다는 이유로 이러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대공 전하께서 드래곤의 사지를 찢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별 이상한 소문이 빠르게 돌고 있었다.
“그거야 굳이 얌전해진 드래곤의 눈을 찔렀으니까 그렇죠. 마님께서 주신 약초로 잠든 드래곤을 굳이 왜 건드린답니까? 반대쪽 눈도 멀게 만들어 두고요.”
오센은 어제의 끔찍했던 악몽을 다시 떠올렸다.
동굴에서 눈을 뜨자마자, 편지가 타오르고. 동굴 입구에서는 미물 떼가 쳐들어오는데 동굴 깊은 곳에서 드래곤 울음소리가 들렸던 그때를.
때마침 황실에서 온 기사가 가져온 약초 덕분에 드래곤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헤르티안은 드래곤을 두고 도망치지 않았다. 되레 잠이 든 드래곤의 두 눈을 멀게 하여 하마터면 편지뿐만 아니라 모두가 불에 타버릴 뻔하였다.
그럼에도 헤르티안은 개의치 않고 굳이 눈알을 전리품으로 챙겨왔다. 피 같은 붉은 안광을 내뿜는 그의 모습을 보며 오센은 한동안 잊고 있던 전쟁터에 돌아온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미 전쟁은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빈손으로 돌아가면 겨우 도망쳐 왔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우선 살아 돌아가야 복수를 할 것 아닙니까. 지난번엔 한 발짝 물러서는 것도 전략이라면서요.”
“여태까지는 그랬지. 앞으로는 물러서는 일은 없을 거다.”
헤르티안은 불안해하는 오센에게 재차 강조했다. 다시는 자신을 밀어내는 세력에게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물러선다고 안전한 게 아니라는 것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 방금 멋있었지?”
“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멋지냐고 물어보십니까?”
“나를 흉내 내는 놈보다는 멋있어야 하거든.”
헤르티안은 미카엘의 얼굴을 그린 종이를 꺼내 보다가 힘껏 구겨 쥐었다. 보기만 해도 느끼한 얼굴. 직접 보면 그 앞에서 아침에 빵에 발라먹은 버터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런 면상을 가진 놈을 앞세우다니. 급하긴 어지간히 급했나 보지.’
편지를 훔치고 내용을 파악하기까지. 짧으면 이틀, 길어봤자 나흘쯤 되는 시간. 아네트가 수도에 와 있는 지금 카시안을 흉내 내줄 사람을 찾기란 어려웠을 터다. 그래서 급하게 아무나 데려다 앞세운 게 분명했다.
그러니 첫 만남에 그녀가 싫어하는 생선 요리를 주문하지. 그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이런 짓을 꾸민 대가는 뒤에서 조종하는 놈이 받게 되겠지만.’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짓을 벌일수록 아네트의 마음을 얻기는커녕 남은 정마저 사라질 거라고 확신했다.
헤르티안은 그 누구보다 아네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함부로 카시안이라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고, 지금도 매 순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으니까.
“미카엘 발로소네라고 하셨죠? 제가 한 번 어떤 작자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아예 자리를 만들까요? 왜 주인님 흉내를 내는지 따져 물어야 할 것 아닙니까! 기가 막혀서 원.”
“그것보다 북부로 돌아가기 전에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오센이 누구를 초대할 거냐고 물으려다 누군가를 떠올리고 물었다.
“설마 발로소네 소후작을 초대하실 겁니까?”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수도에 온 김에 부인의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해드려야지.”
“마님도 모시고요?”
헤르티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는 가짜 카시안이 두렵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흉내를 낸다 해도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저 약간 가슴이 떨립니다.”
진짜 카시안과 가짜 카시안의 만남.
‘게다가 마님까지 있는 자리라니!’
“거기 저도 초대해주시면 안 됩니까?”
오센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거나 먹어.”
기대로 부푼 부하를 보며 헤르티안은 품 안에 있던 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내가 멋있는 건 알겠다만 네 가슴이 떨릴 필요는 없지.”
아네트가 늘 챙겨주었던 부정맥 치료제였다.
“누가 주인님 보고 설렜답니까!”
***
헤르티안의 연락을 받고 찾은 곳은 수도의 한가운데 위치한 레스토랑.
“와본 적 있는 곳이네.”
하도 유명한 곳이라 기념일이면 종종 와본 적 있는 곳이다. 맛과 분위기만큼은 최고. 하지만 매번 사람이 북적거려서 오기 싫어했었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니까.
‘여기도 여전하네.’
점심 시간 시간이라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렸다. 나는 꽉 찬 테이블을 지나쳐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갔다. 들어가기 전부터 사람들에게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를 위해 예약을 해준 건 고맙지만 벌써 기가 빨리는 기분이다.
오늘은 조금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었는데.
“근데 어디로 가는 거죠?”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곳은 이곳에서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오늘만 특별히 운영하는 장소입니다. 예약하신 분이 직접 준비한 장소입니다.”
그가 정원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발 내딛자마자 펼쳐진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가게 뒤에 임시로 마련된 테라스에는 시야를 가득 채우는 셀로티아 꽃이 봄바람을 맞아 살랑거렸다. 그 가운데 놓여 있는 하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완벽한 헤르티안을 보자니, 꼭 천국에 온 것 같았다.
“당신은 천사?”
새하얀 슈트를 입은 모습도 잘 어울렸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웃어 보였다.
“죽기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아서요.”
나는 꽃을 감상하며 걷다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하고 싶은 게 뭔데요?”
“부인이랑 같이 백년해로 사는 거요.”
종업원이라도 있나 보다.
그가 이런 멘트를 날릴 때면 늘 누군가 나와 헤르티안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주변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하다 못해 문도 닫혀 있었다. 나는 그가 착각한 줄 알고 그에게 속삭였다.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편하게 있어도 돼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처럼 편하게 있습니다.”
“헤르티안도 참.”
나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마주 웃었다.
“언제 이런 데를 준비한 거예요? 어제까지 생사를 오갔으면서.”
“부인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이젠 몸에 밴 것인가. 이제 그의 호의는 남들의 눈을 떠난 곳에서도 여전했다.
‘그게 편한 거겠지.’
가려서 말을 했다가 헷갈릴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를 이해하기로 하고 나도 헤르티안처럼 철저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여기는 북부가 아닌 하이에나들이 가득한 수도였으므로.
“고마워요. 북부에서도 여기 음식이 종종 그리울 때가 있었는데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그래도 자주 오지 않으신 건 시끄러운 게 싫어서죠?”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정확한 이유였다.
하지만 헤르티안은 늘 그렇듯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헤르티안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 걸까?’
계약 상대에 관한 조사로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늘 꿰뚫고 있었으니까.
“벌써부터 놀라시면 안 됩니다.”
때마침 문을 열고 요리가 줄줄이 이어 나왔다. 진한 육향이 나는 송아지 스테이크와 향긋한 과일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 거기에 감자 요리까지. 죄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줄줄이 이어 나오는 요리들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제 못 드신 것까지 두 배로 많이 드십시오.”
“헤르티안 최고!”
자고로 맛있는 음식 사주는 사람이 최고다.
게다가 여기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으니.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요리를 훑어보며 순서를 매기다가, 이윽고 앞에 놓인 수프부터 공략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햇볕과 솔솔 부는 바람과 함께 먹는 요리는 단연 일품이었다.
“헤르티안은 안 먹어요?”
“먹고 있습니다만 부인께서 맛있는 먹는 모습을 보니 저는 배가 부릅니다.”
어머니나 할 법한 이야기였다.
가끔 보면 헤르티안은 어머니 아버지보다 나를 챙길 때가 있다. 과보호한다고 해야 하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과하게 나를 걱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기도 부정맥이면서.’
나는 그에게 고기 조각과 함께 혈액순환에 좋은 채소를 한가득 얹어 건네며 덧붙였다.
“자꾸 그러면 아버지라고 불러 버릴 거예요.”
“아버지? 제가 방금 백작 같았습니까?”
일순 울컥한 헤르티안이 몇 번이고 되물었다.
“정말로. 정말 제가 백작처럼 보이십니까?”
농담이었는데.
크게 반응하는 걸 보니 더 놀리고 싶어졌다.
“네! 헤르티안이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챙기는 건 아주 프로답고 좋은데, 너무 과하게 절 챙기실 때가 있어요. 가끔은 헤르티안보다 제가 우선인 것처럼 느껴진다니까요.”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헤르티안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바랬다.
심한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 같았다. 어떻게 된 게 점점 드래곤 눈알을 뽑아 왔을 때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거야.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그를 보며 쿡쿡 웃다가 가방에 넣어두었던 상자를 꺼냈다.
공단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한 선물 상자였다.
“자, 이거 받아요.”
미안하니까 특별히 일어나서 직접 선물을 건네주었다. 헤르티안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얼굴로 삐걱대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건 뭡니까?”
“아버지께 드리는 효도 선물이요.”
쨍그랑.
그가 포크까지 떨어트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헤르티안한테 농담도 못 하겠다니까요.”
그는 어느새 서글픈 눈빛이 되어 내게 물었다. 장난이 심했나 보다.
‘아직 팔팔한 청춘한테 아버지 같다는 건 너무했지.’
내가 그의 손에 선물을 꼭 쥐여주자, 그가 재차 물었다.
“진심으로 농담입니까?”
“당연하죠. 아버지처럼 저를 챙겨주시기는 하지만 엄연히 부모님과는 다르죠.”
나는 부드럽고 친근한 말투로 그를 달랬다.
그가 표정을 풀고 낮게 웃었다.
“저도 장난이었습니다. 부인께서 저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습니다.”
그러고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일순 씁쓸함이 몰려왔다.
‘내가 어떻게 보든 말든 계약 관계니까 상관없다 이거야?’
내가 싫어해도?
어차피 계약이 끝나는 순간 더는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나를 또렷이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부인은 제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