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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임신 소식은? (58/79)


58화 임신 소식은?
2023.06.21.


제 것?

헤르티안이 한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결혼하기 전, 황궁에서 세르디스에게.


“제가 헤르티안 것이라고요?”

“기분 나쁘십니까?”

그는 내 감정을 꼬집어 물었다.

세르디스에게 들었을 때는 불쾌하고 불안해서 눈물이 줄줄 나왔었다.

그에 의해서 내 미래가 망가지는 게 싫었으니까. 아니, 무엇에 의해 내 삶이 비틀리는 게 싫었다.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건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이번 생만큼은 무엇에도 발목 잡히지 않고 살길 바랐다.


“부인?”

헤르티안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분명히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완벽한 파트너.’

그런 그가 내 것이라고 표현하는 건 전부 계약 결혼 탓이다. 결혼을 유지하는 한 나는 헤르티안의 것이고 그는 내 것이니까.

근데, 방금 말은…….

선을 긋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가. 서운했던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기분…… 나쁘지 않아요.”

지금은 그저 헤르티안이 곁에 있는 걸로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이건 장난 아니고 진짜 선물입니까?”

그러고 보니 선물을 열어보지 않았지.


“네. 오늘 좋은 음식을 대접해 주어서 고마워요.”

그가 선물 상자를 소중하게 제 품으로 끌어당기더니 꽃을 한아름 안은 사람처럼 밝게 웃었다.


“정말 기쁩니다. 이건 제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과한 반응에 나는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성에 박아두고 열어보지 않으려고요?”

그러자 헤르티안이 작게 웃었다.


“열어보겠습니다.”

상자 뚜껑이 열리고 에메랄드빛의 인첸트 브로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햇볕 아래서 더 맑은 빛을 내는 인첸트를 보자 그가 재킷에서 장갑을 꺼내 소중하게 그것을 꺼냈다.


“감동입니다.”

“마음에 들어요?”

“무척이나. 부인의 눈 색을 닮은 보석이잖습니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눈 색과 닮은 것이 헤르티안을 더욱 감동을 준 모양이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이 나는 기분이었다.


“제가 달아 드릴게요.”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일어난 탓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걸 보고서도 헤르티안은 나만을 직시했다. 포근한 눈빛이 나를 감싸 안았다.

왼쪽 재킷 칼라.

그곳에 인첸트를 달아 주었다. 하얀 재킷 위라 잘 어울렸다.

그가 살포시 인첸트를 매만지며 나직이 말했다.


“부정맥이 모두 나은 느낌입니다.”

“그런 치유 효과가 있는 걸로 살 걸 그랬네요.”

보석상 직원에게 물어볼걸. 짧게 후회했다.


“그런 것도 있습니까?”

헤르티안은 인첸트인 줄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뇨. 있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에게 위치 추적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당신을 위한 거라는 걸 알아줘요.’

나는 그가 이해해주길 바라며 입을 살포시 다물었다.

그런데, 한창 싱글벙글 웃던 그의 표정이 일순 굳어 버렸다.


“혹시 다른 이의 선물도 구매하셨습니까?”

“네. 하나 더 샀어요.”

비올렛 선물도 구매했으니까.

헤르티안은 그 말에 시무룩한 티를 내었다. 단독 선물이 아니라 섭섭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머지는 카시안이란 사람 겁니까?”

“비올렛 공녀님 거예요.”

카시안 것을 살까 고민을 했었지.

하지만 사지 않았다.

발로소네 소후작인 그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렇군요.”

그는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선물을 하긴 해야할 텐데…….”

고민이 깊어졌다.


“제가 직접 대접하겠습니다.”

“헤르티안이 카시안을요?”

내가 놀라 묻자, 그가 빙긋 웃었다.


“부인의 오랜 친구이면 저에게도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식사를 마치고 타운하우스로 돌아가기 전.

우리는 다른 목적지로 향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네.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던 적은 처음이라서 많이 보고 싶어요.”

르앙베리아 백작저를 가는 길이었다.

수도의 광장을 지나치는 이 길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어제 지나갔던 길처럼 익숙했다.

나는 창을 열어둔 채로 지나치는 길목을 그대로 눈에 담았다.


‘언제 또 여기 올지 모르니까.’

부모님과 가문 사람들이랑도 좋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백작저로 가는 골목길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긴 보랏빛 생머리를 흩날리는 여인.


‘비올렛 공녀?’

살짝 내리쬔 빛에 그녀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비올렛이었다.


“잠깐. 잠깐 마차 좀 세워주세요!”

나는 반사적으로 마차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기 공녀님이 있어서요.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돌아올게요.”

헤르티안에게 짧게 설명하고 마차에 내려 빠르게 골목으로 달려갔다.

손에는 그녀에게 줄 선물을 든 채였다.

골목 어귀에서 다시 그녀를 발견했다. 나는 곧바로 소리쳤다.


“공녀님!”

하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는지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두운 그늘 안으로 그녀는 자취를 감추었다. 뒤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비올렛이 있을 만한 골목은 아니었다. 시장이 있는 광장 뒷골목은 주로 평민이 사는 골목이니까. 좁은 간격으로 지어진 건물 탓에 햇볕이 들지 않아, 낮에도 어두운 곳이었다. 나는 그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그녀를 계속 찾았다.


“비올렛 공녀님 계세요?”

내 목소리가 낮게 골목에 울려 퍼졌다. 골목은 고요했고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저 끝을 지나가는 사람을 발견했다.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작은 체구는 분명 여인이었다.


“공녀님!”

나는 그녀가 사라진 곳을 따라 골목 어귀를 돌았다. 그리고 그때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과 마주했다.


“아네트?”

로브를 걷어 내린 끝에 정갈하게 묶은 은발이 보였다.


“미카엘?”

비올렛이 아닌 미카엘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비올렛 공녀님이 보이길래 따라 들어왔어. 혹시 못 봤어?”

“공녀님이 이곳에 왜 계시겠어.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는데 그림자도 보지 못했어.”

미카엘의 말에 나는 골목을 다시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봤는데…….”

“캄캄해서 다른 사람을 착각한 거 아니야?”

“그런가.”

하기야 비올렛이 이곳에 올 일은 없을 테니까.


“근데 미카엘. 너는 여기 왜 있어?”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평민이 사는 동네에 미카엘이 올 일이 뭐가 있지?

미카엘이 가장 친한 카시안이라고는 하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것 외에 아는 정보가 없었다.


“나는 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서.”

“누구를?”

내가 되묻자 미카엘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람이야. 가문 일 때문이라 말하기 어려워.”

“아……”

나는 곧장 그를 이해했다.

늘 이런식으로 카시안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니까.

그게 나를 만나고 나서도 이어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조금 마음이 쓰렸다.


“내가 골목까지 데려다 줄게.”

“응.”

나와 미카엘은 말없이 골목길을 걸었다. 어색한 분위기는 싫었지만, 당장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상 이야기를 하면 되건만 무언가 내키지 않았달까.


‘카시안이랑은 만나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다른 현실이었다.


“미카엘.”

나는 겨우 할 말을 떠올렸다.


“응?”

“혹시 이번 주에 시간 돼?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아까 헤르티안이 했던 말.

나와 가장 친한 친구를 대접해 주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당연히 되지. 안 그래도 너를 다시 못 보고 북부에 갈까 봐 걱정했어.”

미카엘이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그래. 정확한 날짜랑 시간은 따로 초대장을 보낼게.”

“응. 기다릴게.”

초대 대화로 어색한 분위기가 단번에 풀렸다. 아까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미카엘도 나름의 노력 중일 테니까.


“저기 대공님이다.”

골목 끝에 나를 찾고 있는 헤르티안이 보였다. 그가 나를 발견하도록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곧 그의 시선이 이쪽에 멈추었다.

동시에 미카엘의 발걸음도 멈추었다. 나는 오도카니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네트. 나는 남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어?”

“나중에 봐.”

그에게 미처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골목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쪽을 보고 있자니 헤르티안이 한달음에 다가왔다.


“공녀는 찾았습니까?”

“아뇨.”

“방금까지 옆에 사람이 있던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었습니까?”

“미카엘이었어요.”

나직한 중얼거리자 헤르티안이 단박에 인상을 구겼다.


“미카엘 발로소네, 그자가…….”

그러고는 무어라 들리지 않게 읊조렸다.

***

눈물의 재회는 꽤 긴 시간 이어졌다.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한 저택 사용인들의 눈물을 찍어낸 손수건만 한 바구니나 쌓였다.

게다가 드레스는 또 얼마나 엉망인지.

서로의 눈물 콧물이 묻어 얼룩이 잔뜩이었다.


“갈아입을 드레스가 있을까요?”

내가 코를 훌쩍거리며 묻자, 어머니가 손을 잡아끌었다.


“네 방이랑 옷이 아직 그대로야. 거기서 갈아입자.”

어머니 말대로 방은 내가 떠나기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침구도, 화장대도 모두 그대로였다.


“북부로 간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왜 아직 치우지 않으셨어요.”

“언제든 네가 돌아올 때 쉴 곳이 있어야지. 피곤하면 자고 힘들면 쉴 수 있게 말이야.”

또 울컥 눈물이 솟았다.

옷을 막 갈아입었는데, 또 엉망이 되어버리겠다.


“그런 말 금지예요…….”

어머니는 따뜻한 손길로 내 볼을 쓸어 주었다.


“오랜만에 잔소리가 실컷 해줄까? 내가 여기서 네 건강 걱정을 얼마나 했게?”

“이제 잔소리는 대공님으로도 충분해요.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듣고 있거든요.”

눈가가 벌게진 어머니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래도 대공 전하가 너를 계속 아껴주셔서 안심이야.”

“말도 말아요. 제 몸은 나 몰라라 하고 제 걱정이거든요.”

어머니는 내 몸 곳곳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살이 오른 걸 보니까 잘 먹고 잘 자나 보네.”

많이 먹기는 하죠.

매일 고기 요리를 다 비우면 헤르티안이 디저트를 들고 나타나니까요.

북부에서 입맛이 사라질 거라는 걱정은 기우였다.

오히려 새로운 맛에 눈을 뜨는 중이었다.


“당연하죠. 제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어머니의 걱정을 아예 덜어 드리도록 드레스 소매를 걷어 팔을 불끈 쥐어 보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얇은 팔뚝에 어머니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잘 먹고 다니기는 무슨. 얼굴이 부은 걸 착각했구나.”

“저는 팔다리보다 배가 많이 찌는 편이잖아요.”

스르륵 소매를 내리고 멋쩍게 웃자, 어머니가 이번엔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심란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부부 사이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소식은 없는 거니?”

 

 
어머니가 눈을 반짝거리며 슬며시 물었다.


‘아이를 기다리고 계시는구나.’

미안해서 어쩌죠. 어머니.

아이는 영원히 생기지 않을 거예요.


“원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느긋하게 기다리세요.”

“너는 몸이 약해서 나이가 들어 아이가 생기면 많이 힘들어질 거야. 생겨도 지금 생기는 게 낫지.”

“지금은 영지 일로 신경 쓸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있어서 싫어요.”

나는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며 아이를 당장 가지지 않을 거라는 걸 넌지시 말했다.


“그건 아이가 나오기 전에 다 익숙해질 일이야.”

물론 어머니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다 이 엄마가 도와줄 테니까 걱정 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휴. 엄마 속도 모르고.”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간절히 아기를 원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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