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밥상 차린 값은 받아야겠다
홍지란이 두선화학의 가격을 부풀려 지금의 사달이 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홍지란이 부풀린 가격으로 LZ그룹에 제안한 것도 모자라 고민하겠다는 답을 받아 왔다고 하니 두 사람은 한진영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저는 LZ그룹에 두선화학을 1조 3천억에 매수하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듣고 조용재 상무가 알았다고 했다고요?”
“그것도 조금 전에 들으신 대답 같은데요?”
“저도 알고 있지만…… 믿을 수가 없으니 자꾸 묻는 겁니다. 허 참. 혼자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제가 꿈을 꾸는 줄 알았을 겁니다.”
남원석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마셨다.
그리고 슬그머니 임재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은 자문역 자리에서 나가주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고도 고민해보겠다는 답을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의 능력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임재홍도 남원석의 시선을 받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묻는 것을 싫어하는 한진영의 모습에도 다시 묻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냥 1조 3천억을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혹 다른 제안이 포함되어 있나요?”
“역시 임 센터장님이십니다. 맞습니다. 그것만으로 마음을 돌리기는 어렵지요.”
“다른 제안? 어떤 제안 말입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남원석이 한진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물었다.
어떤 제안을 했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남원석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말에 그 마음이 산산이 조각나 버리는 것을 느꼈다.
“조용재 상무가 보유하고 있는 LZ신소재 주식을 담보로 우리 회사가 2천억을 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
“…….”
자리에 있던 남원석과 임재홍의 몸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멈춘 두 사람은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렸다.
“그리고 재무적 투자자를 유치하여 2천억을 더 지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잠시만요. 그 전에…… 뭐라고 했다고요?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요. 뭐…… 2천…… 억 이야기가 나온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 들어서요.”
“아 제대로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2천억을 우리 신성증권에서…….”
“잠깐!”
남원석이 손을 들어 한진영의 말을 막았다.
마치 끝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그걸 꼭 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나는 못 들었습니다. 못 들었어요.”
남원석은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2천억을 빌려준다니…… 나는 그런 이야기 절대 못 들었습니다.”
남원석의 격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남원석과 달리 이번에는 임재홍이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냥 넘기기에는 이야기의 사이즈가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재홍은 조금 더 한진영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개인 자격으로 인수에 참여하는 것은 아닐 테고…… 2천억을 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인수합병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수에 LZ상사가 참여하는 형태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리고 재무적 투자자는…….”
“TRS(Total Return Swap) 상품을 끼고 들어가겠군요.”
“맞습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재무적 투자자들이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하고 조용재 상무와 LZ상사의 지분을 놓고 총수익스와프 거래를 체결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조용재 상무는 당장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시간이 지나 LZ상사의 지분을 취득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특수목적법인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취득한다면…….”
“LZ상사를 중심으로 LZ그룹 재편?”
임재홍은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TRS인 총수익스와프 거래는 인수합병은 물론이고, 최대 주주가 회사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흔히 이용하는 파생상품이었다.
이 파생상품을 이용한다면 지금 당장 돈이 없는 상태에서도 인수합병은 물론이고 지분 획득이 가능했다.
투자자들에게 일정 수익을 보장하고 나중에 돈이 생기면 투자자들에게 인수 비용을 갚아 주식을 획득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여러 가지 세금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으며, 당장 돈이 없는 상태에서도 주식거래가 가능했다.
그래서 한진영이 있던 시절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 있는 곳에서는 유용한 방법의 하나였다.
법의 구속을 당하지도 않으며 양심에 찔리는 시점도 아니었다.
남들이 알게 되어도 좋은 방법을 썼다고 하지 편법을 이용했다고 말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한진영은 바로 이 방법을 쓰려 한 것이었고, 실제로도 LZ그룹이 후계 구도를 확립했던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한진영이 탁월한 방법을 떠올렸다고 하겠지만, 결국 이렇게 될 일에 한진영이 먼저 말을 꺼낸 것뿐이었다.
한진영은 놀란 얼굴의 임재홍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러면 좀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임재홍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남원석은 임재홍과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바뀐 상황에 눈을 굴렸다.
***
남원석은 안 된다며 몇 번이나 손을 내저었다.
수십억 수준도 아니라 2천억이라는 금액을 신성증권이 제공하기에는 너무나 큰 금액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그런 남원석을 한진영이 아니라 임재홍이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기만 하면 신성증권은 물론이고 모든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며 몇 번이나 찾아가 남원석을 설득했다.
나중에는 리서치센터보다 사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임재홍의 열렬한 설득과 자신 있는 한진영의 모습.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김정대를 비롯한 다른 임원들의 설득에 결국 남원석은 허락하고 말았다.
남원석을 설득하자마자 임재홍이 바쁘게 움직였다.
리서치센터가 맡은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두선화학의 가치를 1조 3천억에 맞게 만드는 작업을 리서치센터가 하는 것이었다.
LZ그룹이 두선화학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1조 3천억에 사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했고 그래야 주주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에게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어설프게 진행했다가는 시민단체를 비롯하여 여러 골치 아픈 곳에서 배임죄라며 딴지를 걸 수 있었다.
그래서 리서치센터는 두선화학을 완벽하게 1조 3천억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회사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보기 좋은 치장을 하는 중이었다.
임재홍과 한진영은 바쁘게 돌아가는 리서치센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LZ그룹에서 받아들일까요?”
지난 사장실에서의 일 이후 임재홍은 이제 한진영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도저히 생각도 못 한 방법으로 LZ그룹에 제안을 던진 것에 임재홍은 그날 밤을 꼬박 새웠을 정도였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LZ그룹의 꼬여있는 지분구조를 한 번에 해결해 버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자가 싫다고 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임재홍은 과연 LZ그룹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가 걱정이었다.
“받아들일 겁니다.”
임재홍의 걱정과 달리 한진영의 대답에는 의심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임재홍은 이유를 묻지 못했다.
한진영을 오랫동안 겪지는 못했지만, 그가 그렇다고 하면 진짜로 그렇게 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제서야 좀 그럴듯하게 돌아가는 리서치센터를 살폈다.
홍지란 센터장 일로 인해 어수선했던 리서치센터였다.
LZ그룹의 자문역에서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직원들의 사기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런 리서치센터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다시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리서치센터를 살핀 뒤 임재홍에게 고개를 돌렸다.
“센터장님. 잠시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하시겠습니까?”
“사무실이요? 네. 그거야 뭐…….”
임재홍은 어떤 말을 하려고 사무실에 들어가자고 하는지 모른 채 한진영을 따라 자기 사무실로 향했다.
한진영은 마치 방 주인이 자기라도 된 것처럼 임재홍까지 사무실에 들어오자 사무실 문을 닫고 말했다.
“두선그룹과 만나고 싶습니다.”
“그거야 인수협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일 아닙니까?”
“아니요. 그냥 두선그룹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홍지란과 접촉했던 사람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말입니다.”
“네?”
임재홍은 한진영의 말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설마…… 부부문장님. LZ그룹에 제안한 이유가…….”
임재홍은 차마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한진영이 홍지란이 하려는 일을 이어받아 해 먹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복잡해져 가는 임재홍의 표정을 보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그래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두선화학에게 돈을 받아내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시지요?”
“돈을 받아내는 건 아니죠. 다만 다른 걸 받아낼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부부문장님.”
걱정하던 것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재홍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을 차분한 목소리로 진정시켰다.
“센터장님. 잘 생각해보세요. 제가 LZ그룹을 속인 건가요? 아니면 제 사욕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가격을 끌어올린 건가요? 먼저 LZ그룹에 제안을 한 것이고, 우리는 지금 LZ그룹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니 고객을 속이거나 기만한 행동이 아니지요.”
“그럼 어째서 두선화학을 만나신다는 겁니까? 그것도 홍지란과 접촉했던…… 그는 두선그룹의 직원도 아니라 브로커나 마찬가지입니다.”
임재홍은 말을 하고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한진영은 여전히 놀란 얼굴로 자리에 서 있는 임재홍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두선화학의 가격을 뻥튀기 시키는 것에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굴까요? 바로 두선그룹 아닙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임재홍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의 표정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밥상도 차리고 숟가락에 밥과 반찬도 올리고 있는데 그걸 남의 입에 그냥 넣어줘서야 하겠습니까?”
“그럼…….”
“최소한 밥상 차린 돈은 내놓으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셈법이 맞지 않겠습니까?”
임재홍은 한진영의 말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기존에 연결되었던 선을 이용해서 홍지란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과 자리를 마련해주십시오. 그 이후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말입니다.”
임재홍은 이제 더는 반응을 할 기운도 없다는 듯이 멍청히 서서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임재홍에게 과거 홍지란과 연결되었던 사람과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한 지 사흘째가 되는 날.
임재홍에게서 브로커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진영은 그쪽에게 자기 연락처를 건네줄 것을 이야기하고 임재홍도 이제 빠지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런 일에 여러 사람이 엮이는 것이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임재홍은 이런 한진영의 판단에 동의했다.
한진영이 어떤 식으로 일을 풀어갈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
람다 호텔 지하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깔끔하게 나온 음식과 은은한 분위기 그리고 연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어도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방음이 잘 된 방들로 인기몰이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 둘이 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뜻밖이군요. 이런 분위기가 취향인 줄 몰랐습니다.”
“분위기도 좋지만 이 집의 특징은 바로 이 파스타입니다. 이탈리아인들도 인정할 만큼 본토의 맛을 잘 표현해주지요. 한국에서 쉽게 맛볼 수 없는 정통 파스타입니다.”
한진영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는 한진영 앞에 놓인 음식을 권하고 자기도 포크를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그런 남자의 뜻에 따라 포크를 들어 음식을 맛봤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음식을 먹던 두 사람은 파스타가 반쯤 사라지고 나서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설마 홍 센터장 일 때문에 보자고 하신 것은 아니시죠? 아시겠지만 홍 센터장과는 그냥 간단히 밥을 먹은 게 전부입니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사람들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 제가 부부문장님과 이렇게 식사를 했다고 이상한 거래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는 입가에 묻은 토마토소스를 닦아내며 말했다.
한진영 또한 입가에 묻은 것들을 지웠다.
이 정도 먹었으면 먹는 시늉으로는 충분하다고 느낀 한진영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자의 질문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가요? 저는 거래를 하기 위해 자리에 온 건데. 이런. 제가 잘못 온 건가요?”
“네? 거래요?”
남자는 입가를 닦아내던 수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눈썹을 찡그렸다.
한진영은 그런 이명운을 향해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홍지란에게 뭘 주기로 하셨습니까? 우선 전임 센터장에게 무얼 약속했는지 알아야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명운은 한진영의 말이 끝났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한진영의 진심을 꿰뚫어 보겠다는 눈빛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진영은 이명운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어서 이야기해보라는 표정으로 이명운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