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보여주기식의 자리
한진영이 조용재 상무를 만나고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조용재 상무 측은 만나자는 연락은 물론이고,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처음부터 한진영과 함께 일을 진행했던 이성우가 오히려 자기가 조용재 상무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낼 정도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차분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지난 시절을 겪었던 한진영이었기에 LZ그룹이 자기가 한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LZ그룹을 대신하여 두선그룹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LZ그룹이 두선화학을 1조 3천억에 인수를 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투자법인을 설립하여 1,000억의 자금을 투자할 용의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투자금은 한진영이 있는 투자전략사업부가 될 거라는 확답도 전했다.
두선그룹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자기 물건을 비싸게 사주겠다는데 싫다고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000억을 그냥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라 투자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 계약서를 쓰며 따져봐야겠지만, 수익금의 30%를 신성증권이 먹는다는 것에서 조금 이상함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무조건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수익이 났을 때 그러겠다고 하는 것이니 두선그룹은 한진영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지금은 LZ그룹이 두선화학을 1조 3천억에 사겠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원석 또한 내키지는 않았지만 LZ그룹이 확답만 주면 담보대출을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놓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LZ그룹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LZ그룹이 침묵을 지키는 사이 시간이 흘러 LZ그룹과 두선그룹간의 빅딜에 관한 4차 협상 자리가 마련되게 됐다.
***
협상 자리의 대표로 신성증권에서는 한진영과 임재홍이 초대를 받았다.
본래는 실무진이 자리하여 논의하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LZ그룹의 요청에 따라 대표 격인 한진영과 임재홍이 참석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임재홍은 두선그룹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몇 번이나 한진영에게 얼마만큼 진행됐냐는 말을 묻고 싶었다.
알려지기로는 LZ그룹에서 아직도 확답을 주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1조 3천억의 딜을 진행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재홍은 차마 한진영 앞에서 질문하기 힘들어 가만히 한진영의 눈치만 살폈다.
그저 직접 이야기해주기만을 기다렸던 임재홍이었다.
한진영은 임재홍이 건넨 서류를 살핀 뒤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 이걸로 다 된 건가요?”
“네. 이거면 충분합니다.”
“저기 부부문장님. 오늘은…… 왜 만나자고 하는 걸까요?”
한진영은 함께 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임재홍을 돌아보고는 그를 향해 웃었다.
“저보다 임 센터장님이 더 잘 아실 텐데 저한테 물어보시는 것을 보니 진짜 궁금한 건 다른 게 있는 것 같군요. 그렇지요?”
“어…… 그게…….”
임재홍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한진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함께 가는 것이 바로 LZ그룹의 대답입니다.”
“저와 부부문장이 함께 가는 게 답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딜을 진행할 생각이 없으면 우리 둘이 함께 갈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아니. 어쩌면 이미 조 상무와 만났던 자리에서 이미 대답을 들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조 상무와 만났을 때 뭐라고 했는데요?”
“인수합병에 제가 있는 사업부가 참여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 이미 그때 대답을 했다고 봐도 될 것 같네요.”
“아~”
임재홍은 그제야 한진영이 태연하게 있었던 게 이해가 갔다.
애초에 NO라는 대답을 할 것이었으면 한진영의 투자전략사업부를 인수합병에 참여시키지도 않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수합병에 관한 논의를 하러 가는 자리에 한진영과 함께 불렀다는 것만으로 LZ그룹이 대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한진영의 말이 이해됐다.
LZ그룹은 비싼 돈을 지불하더라도 두선화학을 인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두선그룹의 본사가 위치한 중구에 도착하자 회사 앞은 LZ그룹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수합병을 진행하는 전략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법리적인 조언을 해줄 외부 로펌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지원팀까지 벌써 서른 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어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우리가 너무 소수로 온 건가요?”
임재홍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당황한 눈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단순하게 서로의 의견을 묻는 자리라 생각하여 LZ그룹에서 요청한 대로 한진영과 임재홍 둘만 왔던 신성증권이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단순한 이야기만을 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달랑 둘만 온 게 창피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차피 보여주기식의 자리입니다. 100명이 오든 1,000명이 오든 큰 의미가 없는 자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친 후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내렸다.
이미 신성증권에서 온 차라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차 문이 열리고 나온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임재홍 센터장이 차에서 내렸다.
LZ그룹의 전략팀의 사람들이 임재홍에게 아는 척을 했다.
지난 협상자리에서 홍지란의 후임으로 소개를 한번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임 센터장님. 오셨습니까?”
전략팀의 부팀장을 맡은 장 부사장이 임재홍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한진영을 슬쩍 본 이후에 임재홍을 향해 물었다.
“한 부부문장? 그분은 언제 오는 겁니까?”
임재홍은 장 부사장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은 뒤 한진영을 가리키고 말했다.
“여기 계신 분이 한진영 투자전략사업부 부부문장님입니다.”
임재홍의 소개에 직접 인사를 했던 장 부사장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랐다.
듣던 것보다 더 어린 모습의 한진영이었다.
임재홍의 수행원 혹은 지원해줄 직원쯤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진영을 살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장 부사장의 사과에 한진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후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왜 들어가지 않으시는 거죠?”
“아직 양 사장님께서 도착하지 않으셔서요.”
“같이 회사에서 출발하신 것 아니십니까?”
“양 사장님은 회장님의 지시를 받고 오신다고 하셔서…….”
“아~”
한진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양준 사장이 LZ그룹 회장의 결정을 이야기 들은 뒤에 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진영이 도착한 뒤 약 5분여가 흐르자 마지막으로 양준 LZ그룹 전략팀 팀장이 도착하게 됐다.
그는 먼저 와 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 후 임재홍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곁에 있는 한진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당신이 한진영 투자전략사업부 부부문장인가 보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한진영입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진영이 내민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주 많이요.”
“그렇습니까?”
“뭐 덕분에 일이 편하게 됐습니다.”
“제가 도움이 많이 됐나 봅니다.”
“많이 됐지요. 아주아주 많이 됐습니다.”
“제 핑계를 댈 수 있어서 말입니까?”
한진영의 말에 양준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LZ상사를 이용한 LZ그룹 지배구조 재편은 LZ그룹 전략팀의 성과라는 말을 지난 시절에 들었었다.
그리고 이 구상을 제일 처음 떠올린 사람은 당시 전략팀 팀장이었던 양준 사장이었다는 이야기도 한진영은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진영이 먼저 이야기하여 공을 가로챈 느낌이 나지만, 어쨌든 양준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마침 외부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만큼 그 핑계를 대서 고집불통 회장을 설득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으로 건넨 말이었다.
“네. 핑계 잘 댔습니다.”
양준은 손을 내리고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갑시다.”
양준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두선그룹 본사로 들어갔다.
가만히 서서 분위기를 살피던 임재홍은 가장 뒤에 서서 한진영의 곁을 따랐다.
LZ그룹의 사람들이 움직이자 그에 맞춰 두선그룹 사람들도 LZ그룹 사람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한 사람들이 로비에서 들어오는 LZ그룹 사람들을 맞아 협상이 진행될 대회의실로 LZ그룹 사람들을 안내했다.
한진영과 임재홍은 이번 협상의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맨 뒷줄에서 앞에 가는 사람들의 등을 쫓아 따라가기만 했다.
그러나 LZ그룹 사람들은 물론이고 두선그룹 사람들까지 한진영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생각 이상으로 이번 일에 영향을 끼친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들은 노골적인 시선을 한진영을 향해 보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시선을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즐기는 것이 마치 이런 시선을 많이 받아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부부문장님.”
오히려 이런 시선에 임재홍이 불편해했다.
지난번 협상 자리와 다른 듯한 분위기에 임재홍은 벌써 중압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조금 전 보여주기식의 자리라고 말씀드렸죠? 이미 결정이 끝난 상황에서 협상을 진행했다는 의사록만 남기기 위한 자리이니 편안히 생각하십시오.”
한진영이 말을 마치고 임재홍의 등을 쓰다듬자 임재홍은 압박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임재홍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자기보다 열대여섯 살이나 어린 한진영이 더 노련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한진영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이런 느낌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에도 같이 있는 리서치센터의 센터장보다 한진영이 더욱 평온해 보였다.
사회 경험은 물론이고 이런 자리를 여러 번 가져본 듯한 반응에 그들은 걸으면서도 뒤를 힐끔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한진영이 태연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몰랐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는 이런 자리를 여러 차례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이런 협상자리 특히 결정이 이미 나 있는 자리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두선그룹의 로비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 중에 한진영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진영은 긴장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태연한 발걸음으로 두선그룹으로 들어갔다.
***
긴 회의용 탁자를 가운데 놓고 마주한 양측은 짧은 인사 후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두선그룹은 두선화학과 LZ기계의 교환을 원칙적으로 원한다는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건설 부문에 힘을 쏟으려는 두선그룹의 계획상 중장비류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LZ기계는 매력적인 매물이었기 때문이다.
LZ그룹도 두선화학을 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재사업에 힘을 쏟는 LZ그룹의 특성상 원재료를 생산하는 두선화학을 소유하는 것이 소재 부문에 큰 힘을 실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차례나 서로 만난 것이었고,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주고받기를 바라는 양측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원하는 게 서로 맞닿아 있지만 물러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맞교환은 힘듭니다.”
두선그룹의 대표자로 나온 기획실의 김종운 사장은 양준 사장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매출과 영업이익 그리고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 어떤 것을 놓고 봐도 두선화학이 LZ기계에 비해 밀리는 게 없습니다. 오히려 최근 3년 동안의 매출을 놓고 봤을 때 두선화학은 LZ기계의 2배에 달하는 매출을 올렸습니다. 이건 둘을 같은 선상에 놓고 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매출이야 그렇지요. 하지만 영업이익은 서로 비슷한 수준 아닙니까? 그리고 최근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김 사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서브프라임으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건설 시장이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실적이 안 좋은 상태인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안 좋은 상황에서도 이런 실적을 올렸다면 시장이 다시 정상화에 돌입했을 때 어떨까요? 결코 두선화학에 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두선화학과 LZ기계의 맞교환은 저희 쪽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협상에 참석했던 임재홍이 한진영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과 같은 이야기네요.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기 위해서 모인 거라면 왜 모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끝자리에 앉아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임재홍은 뻔한 이야기를 하는 양측을 바라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임재홍을 향해 한진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도 알고 있지요. 그래서 아마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겁니다.”
한진영의 말에 임재홍이 한진영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한진영의 말대로 지난번과는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럼 두선그룹에서는 LZ기계에 무엇을 더 얹어 받기를 원하십니까?”
“현금 4천억. 혹은 그에 걸맞은 현물을 원합니다.”
한진영이 LZ그룹과 두선그룹에게 이야기했던 것들이 양측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