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16화 (116/650)

116화 자네가 받는 것은 무엇인가?

김종운 기획실 실장의 말에 양준 팀장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임재홍은 한진영에게 미리 이야기 듣지 못했다면 이런 모습에 크게 놀랐을지도 몰랐다.

두선그룹의 제안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에 고민하는 LZ그룹을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을 임재홍이었다.

그만큼 제안한 사람이나 받은 사람 그리고 그 제안을 고민하는 사람 모두 미쳤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에게 미리 이야기 들은 뒤 보인 양측의 모습은 마치 잘 짜인 극본 속에 맞춰 움직이는 배우처럼 보일 뿐이었다.

양준 사장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려달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한진영과 임재홍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한진영이 임재홍의 시선을 받은 뒤 임재홍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임재홍이 조금 전 차 안에서 한진영이 확인했던 서류를 들고 양준 사장에게로 다가갔다.

“고맙습니다.”

양준 사장은 임재홍에게 짧은 감사의 말을 전한 후 건네받은 서류를 확인했다.

한진영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두선화학의 가치 분석 자료였다.

양준 사장은 그렇게 1조 3천억이라 판단 내린 서류를 확인한 뒤 임재홍에게 서류 속에 적힌 숫자를 가리키고 물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임재홍은 이제 자기가 할 일은 모두 마쳤다고 생각하여 인사를 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양준 사장은 그런 임재홍 너머에 있는 한진영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고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김종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제안 깊게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종운의 눈에는 의외라는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는 급히 임재홍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종운은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다.

위에서 이 협상에 더는 미련이 없다고 판단하여 1조 3천억을 부르라고 시킨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LZ그룹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김종운은 양준 사장이 임재홍에게 서류를 받아 든 뒤 고민해보겠다는 모습을 보인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자료에 무언가가 쓰여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재홍 리서치센터장과 함께 자리에 앉은 젊은 사람의 모습이 이제야 들어왔다.

지원팀이라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협상 자리에서 그가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었다.

김종운은 이런 중요한 자리에 앉아있는 젊은 친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김종운의 시선을 따라 한진영이 있는 곳을 바라본 양준 사장은 한진영을 소개했다.

“신성증권의 투자전략사업부 부부문장을 맡은 한진영 씨입니다.”

“한진영? 부부문장? 저렇게 젊은 사람이 사업부 부부문장이라는 말입니까?”

김종운의 말에 양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군요.”

“네?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제가 드릴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차차 김 사장님께서도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다음 자리에서는 좀 더 진행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되기를 빌겠습니다.”

김종운은 양준의 말에 무언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위에서 지시한 1조 3천억짜리 딜이 성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마 저 사람이?’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어린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뀐 상황에 영향을 미칠만한 사람이라고는 한진영이 유일했다.

그 외에는 지난 협상 자리에서 있었던 것과 바뀐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종운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자리가 마무리되며 LZ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떠나는 LZ그룹 사람들을 김종운은 몇 차례 잡았다.

그러나 협상 내용을 가지고 위에 보고해야 한다는 말에 더는 그들을 잡지 못했다.

양준의 위라면 그룹의 회장밖에 없었다.

즉, 1조 3천억에 달하는 딜을 받아들일지에 대한 의중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종운은 양준에게 계속 식사라도 하자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빠르게 건물 밖으로 나온 LZ그룹 일행은 각자 왔던 차에 몸을 싣기 시작했다.

양준 사장은 로펌 사람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한 부부문장님.”

한진영은 임재홍과 함께 차를 타려 하다 양준의 말에 멈춰 섰다.

양준은 차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 한진영에게 물었다.

“혹시 이후에 다른 스케줄이 있으십니까?”

“스케줄이요? 딱히 그런 건 없지만…… 어쩐 일로 그건 물으시는지요?”

“그렇다면 잠시 저와 함께 저희 회사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저와 말입니까? LZ그룹으로요?”

“네.”

한진영은 차 문을 잡은 채 가만히 양준을 바라봤다.

양준이 자기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면 굳이 그룹 본사로 가기 전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도 됐다.

그리고 김종운이 잡는 것도 마다하고 자리를 떴다는 것은 그룹으로 돌아가 회장에게 보고하겠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양준의 지금 말이 회장과 만나러 가자는 뜻으로 들렸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차에 타 있던 임재홍에게 자기는 LZ그룹에 들렀다 가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차 문을 닫은 뒤 양준의 차로 향했다.

***

양준과 함께 LZ그룹에 도착한 한진영은 이번에는 인포데스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로비에 자리한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임원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두선그룹에 들어갈 때 함께 했던 서른 명의 수행원 중 지금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엘리베이터 앞에는 한진영과 양준 사장만이 서서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안은 물론이고 그룹 건물에 들어와서도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치 양준은 안내자에 불과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길을 안내할 뿐이었다.

한진영도 굳이 입을 열어 양준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도 대답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저 위에 있으며, 지금 만나러 가는 길에 굳이 양준과 기운을 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한진영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양준이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40층 버튼으로 눌렀다.

이번에도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갔다.

처음 느꼈을 때와 같은 귀 먹먹함을 느낀 한진영은 조용재 상무가 위치한 곳을 지나 제일 꼭대기 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곳은 조용재 상무가 있던 곳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커다란 한 층을 다 쓰는 것인지 이번에는 문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나 있는 복도만이 한진영의 눈에 보일 뿐이었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자 좌우로 회장 비서실이 눈에 들어왔다.

비서실에 있던 비서들이 양준 사장을 향해 인사를 했고, 비서실장으로 보이는 이가 양준 사장에게 찾아왔다.

양준과 비서실장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비서실장은 이야기를 나누며 한진영을 슬쩍슬쩍 바라보는 것이 한진영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들어가시죠.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비서실장이 양준과 한진영을 40층에 유일하게 나 있는 문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회장실 풍경이 한진영의 눈에 들어왔다.

지난 조용재 상무의 사무실이 너무 작아 보여서 그런 것인지 회장실이 더욱 크게 느껴진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크기만 다를 뿐이었지 조용재 상무의 사무실과 느낌은 비슷했다.

오래된 가구와 책 냄새가 느껴지는 사무실.

가구의 개수조차 조용재 사무실에 있던 것과 비슷한 숫자였다.

크기만 다를 뿐이지 조용재 상무의 사무실과 모든 것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도 조용재 상무와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왔나?”

안경을 쓰고 서류를 내려다보던 LZ그룹의 조병수 회장은 서류를 든 채로 들어온 사람들을 올려다봤다.

조병수는 동네 복덕방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옷도 최소한 20년은 된 것 같은 옛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가구만 봤을 때는 사무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옷과 사람까지 더해지자 차라리 이런 가구가 어울린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김 실장. 가서 손님께 내드릴 둥굴레차 좀 타와.”

“네. 알겠습니다.”

차 이름까지 콕 집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찻잔에 티백을 넣어 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병수는 한진영을 살피고 여전히 서류를 든 채 앞에 놓여 있는 의자를 턱짓했다.

“와서 앉게.”

조병수의 말에 한진영이 자기 나이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다리가 고장 났는지 앉자마자 기우뚱한 의자는 한진영이 힘을 주는 대로 까딱거렸다.

조병수는 조금의 긴장감도 없이 자기 앞에서 의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한진영을 보고 웃었다.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재미있는 친구 같구먼.”

“사귀어보면 보기보다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신성증권의…….”

“어디서 일하는지 알고 있네.”

조병수는 뒷말을 자르고 천천히 한진영을 살핀 뒤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지고 온 그거 나 보라고 가지고 온 거 아닌가?”

“아? 네. 죄송합니다.”

양준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머리 숙여 사죄한 후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서류를 양준에게 내밀었다.

조병수는 양준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를 보고 한진영을 쳐다봤다.

“자네가 작성한 건가?”

“저희 회사 리서치센터에서 맞춘 겁니다.”

“작성한 게 아니라 맞췄다? 어디 가서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오해하네.”

조병수는 웃음을 흘리며 서류 내용을 살폈다.

“1조 3천억에 아귀를 맞추느라 고생했겠어.”

“저희의 수고를 알아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병수는 안경 위로 한진영을 올려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라고 하지 않는 게…… 재미있군.”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 안 그런가? 양 사장?”

“아닙니다.”

양준은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조병수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조병수는 그런 양준을 쏘아보고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조병수는 서류를 찬찬히 살펴보며 이야기했다.

“아들내미와 여기 있는 양 사장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찾아와 이야기하더군. 우리에게 너무 좋은 기회라면서 말이야. T뭐?”

“TRS 말씀이십니까?”

“그래. TRS. 세상에 그렇게 좋은 게 있었다니. 아니. 있기는 오래전부터 있었겠지. 그런데 그걸 이렇게 써먹다니…… 국세청이 알면 자네를 많이 싫어하겠어.”

“과찬입니다.”

“칭찬이 아니야. 정말로 싫어할 거 같아 건넨 말이야.”

조병수는 서류를 든 채 안경 위로 한진영을 쳐다봤다.

한진영은 그런 조병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얽혔다.

그렇게 잠시 불꽃이 튀기던 시선을 한진영이 먼저 거뒀다.

조병수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흘러나온 뒤 다시 시선을 서류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그래. 자네 회사에서는 아들내미의 LZ신소재 주식을 담보로 받아주겠던가?”

“네. 그 부분은 모두 이야기를 마친 상태입니다.”

“돈을 대줄 투자자들은?”

“그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투자자 모집은 지금이라도 당장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조병수가 보던 서류를 덮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서류를 던진 뒤 몸을 뒤로 눕힌 뒤 얼굴 위에 씌어 있던 안경을 벗었다.

“이름이 뭐라고?”

“한진영입니다.”

“그래. 한진영.”

조병수는 피곤한 듯이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이까짓 서류 몇 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피곤해. 어서 이 자리에서 내려오든지 해야지.”

“회장님. 아니십니다. 회장님께서는 아직 정정하십니다.”

“용재에게 그룹 지배권이 넘어가는 이 일을 하라고 떼를 쓰는 모습이 나를 뒷방 노인네라 생각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럴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병수의 말에 양준이 펄쩍 뛰었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의자 옆 땅에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몸을 낮췄다.

“방법이 생겼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차기를 준비하는 것은 그룹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정말 그것만인가?”

의심이 가는 듯한 조병수의 말에 양준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저를 보십시오. 회장님의 곁에서 짐짝을 옮기던 20대의 양준이 아니라 고혈압에 당뇨로 고생하고 있는 60대의 양준입니다. 제가 LZ그룹을 위해 일을 한다면 얼마나 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제가 LZ그룹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입니다. 회장님.”

조병수는 양준의 말에 맨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한진영 씨.”

“네. 회장님.”

“두선그룹에서 뭘 받기로 했나?”

한진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여전히 얼굴을 쓸어내리는 조병수를 향해 대답했다.

“저희 사업부에 1,000억의 투자를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것 말고. 자네가 받은 것 말이야.”

“저는 따로 무언가를 받겠다는 약속을 한 게 없습니다.”

“따로 받는 게 없다고?”

“네. 없습니다.”

얼굴을 쓸어내린 조병수의 얼굴에서 손이 떠났다.

조병수는 살짝 붉어진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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