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주머니를 털려 한다
새롭게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 밝자 여러 곳에서는 축포를 쏘아대기 바빴다.
특히, 주식시장에서의 축포가 가장 높게 올라갔다.
연말부터 시작된 상승세가 죽지 않고 연초까지 계속 상방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렇게 시장 참여자들이 행복해하는 순간에 김정대, 장근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한진영에게 앞으로의 일을 물어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진영을 통해 많은 것을 얻으려 했다.
한진영의 말대로 시장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 이후의 움직임까지도 한진영을 통해 미리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한진영 앞에 있는 것은 한진영이 의도한 일이었다.
한 사람에게는 빚을 갚기 위해서였으며, 한 사람은 주머니에 있는 것을 털기 위해서였다.
빚을 갚을 사람은 김정대였으며, 주머니를 털 사람은 장근수였다.
그런 것을 모르는 두 사람 중 장근수가 먼저 입을 열어 한진영에게 얻을 것이 없나 눈치를 살폈다.
“이거 뭐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스무스하게 돈을 버니 이렇게 좋은 시장이 어디 있냐?”
장근수가 편안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이제는 투자전략사업부의 회의실이 자기 사무실이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네가 2,100까지 간다고 했을 때 조금 긴가민가했는데 믿기를 잘한 것 같아. 2,000을 넘기고 주춤하나 했는데 이건 뭐 브레이크가 없네. 단봉으로 계속 오르는 게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 지난 고점이 2,080이었는데 여기 벗기면 신세계 펼쳐지는 거 아니냐?”
한진영은 은근슬쩍 물어보는 장근수의 말에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장근수에게 얻을 것이 있다고 해도 쉽사리 먼저 입을 여는 것보다 그가 안달 나게 만드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의 생각을 모르는 장근수는 한진영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떡밥을 던지며 한진영이 딸려오기를 바랐다.
“하긴, 지난번에 찍은 고점이 좀 남다르기는 했지. 밭일하던 노인네가 장화를 신고 찾아오고, 집에서 애 보던 아줌마가 포대기에 애를 둘러업고 나와 만든 자리니까. 그 자리를 쉽게 넘기지는 못할 거야. 그렇지?”
장근수는 이번에도 은근슬쩍 말을 던지고 한진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한진영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장근수는 이런 한진영의 반응에 답답한 듯이 몸을 이리저리 꼬았다.
“아 그냥 좀 이야기해 주면 안 되냐? 역사적 고점을 코앞에 뒀는데 여기서 뭐 어떻게 하란 말이야?”
“본부장님.”
“어. 그래. 이야기해 주려고?”
몸을 배배 꼬던 장근수는 한진영의 부름에 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탁자에 양팔을 기댄 채 한진영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래. 2,100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냐? 말해봐.”
“저는 분명 2,100까지 즐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즐기고…… 그다음은?”
“그다음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저 산타 랠리에 연초 상승장이 겹쳐지면 2,100까지는 가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드린 말씀이지요.”
“정말 몰라?”
“제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장근수가 눈을 흘겼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까지 알고 있다면 여기에 있겠습니까? 밖에 나가 자리를 깔아야겠지요.”
연신 모른다고 말하는 한진영의 발뺌에 장근수가 두 손을 들었다.
이렇게까지 모른다고 하는 모습의 한진영이었기에 그의 입에서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았다. 알았어. 모른다니까 내가 별수 있나. 진짜 그런가 보다 생각해야지.”
한진영은 충분히 장근수가 약이 올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정도 약이 올랐다면 한숨 돌린 후 다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장근수가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한진영이 이렇게 공을 들이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장근수가 확보한 VIP들과 만남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의 한진영은 기업이나 기업 총수의 개인적인 자금을 받는 게 전부였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닥칠지 모르는 투자금 회수를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투자유치는 결코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의 투자로 1,000억의 투자금을 유치하는 것보다 10억짜리 투자를 100번 받는 편을 선택하려 한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한두 군데에서 투자금을 회수한다고 해도 크게 영향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투자유치를 위해서는 장근수의 고객을 털어야만 했다.
그가 신성증권이 보유한 VIP들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이 VIP들을 현혹하기 가장 좋은 때였다.
바로 중동 문제를 비롯하여 임팩트 있는 일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걸 이용한다면 VIP 마음을 홀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런 한진영의 생각을 모르는 장근수는 스스로 알아서 바싹 올랐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바꿨다.
“아 참. 너 지난달에 대한정유에 갔다 왔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기는? 법무팀에서 아주 너 때문에 죽겠다고 하더라.”
“저 때문에요?”
“그래. 하루가 멀다고 법리 검토 좀 해달라고 서류뭉치를 던지는 통에 죽을 맛이라고 해. 너 때문에 법무팀 직원을 더 뽑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하더라고. 다른 곳들은 연말에 다들 푹 쉬는데 자기네만 쉬지 못했다고 말이야.”
“법리 검토?”
김정대는 전혀 듣지 못했던 이야기라는 표정으로 장근수와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말을 꺼낸 장근수를 향해 다시 물었다.
“법리 검토라니? 무슨 법리 검토를 한다는 말이야?”
“넌 못들었냐? 하긴 네가 여기 사업부에 2,000억 자금을 온전히 쓸 수 있게 다른 임원들 만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기는 했겠지. 한 부부문장. 우리 김 본부장에게 고마워해야 해. 김 본부장이 힘 많이 썼어.”
2,000억의 투자금을 투자전략사업부에서 온전히 쓰게 만들기 위해 김정대는 신성증권의 임원들을 하나하나 각각 만나 설득했다.
그들에게 투자전략사업부를 밀어줘야 하는 당위성과 실적, 그리고 미래를 열심히 설명하여 2,000억을 모두 투자전략사업부에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마치 투자전략사업부의 부문장처럼 열렬히 행동한 김정대였다.
그만큼 한진영과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이해도를 가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김정대는 이런 공치사를 하기 위해 한진영을 찾아 앞에 앉아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장근수가 뜻밖의 말을 꺼낸 바람에 모든 흥미가 다른 곳에 쏠리고 말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 이야기만 해봐. 법리 검토라니? 무슨 법리를 검토한다는 말이야?”
“대한정유가 자사 보유분 지분을 매각한다고 하더라. 무슨 신사업에 진출하려고 그런다는데…… 뭐? 배터리 사업? 기름 파는 회사가 갑자기 뭔 배터리인가 싶은데…… 하여튼 관련 회사를 인수하고 투자하기 위해서 자사 지분을 매각한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 주관사로 우리를 선정했고…… 그 덕분에 법무팀에서 법리 검토에 들어갔다는데 법리 검토만 마치면 바로 공시 때린다고 해. 내 말이 맞지?”
한진영을 대신해서 잘 설명한 장근수의 모습에 한진영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정대는 한진영과 장근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대한정유에서 지분매각의 주관사로 우리를 선택했다고?”
김정대의 표정에는 의외라는 모습이 가득 담겨있었다.
김정대도 이와 비슷한 류의 소문을 듣기는 했었다.
그리고 분명 소문 속에서 주관사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주관사가 신성증권으로 선택되어 법리 검토까지 들어갔다는 말에 김정대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김정대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김정대의 시선에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우리 회사의 저를 선택한 것이지요.”
“너희 사업부가 지분매각 건까지 손을 댄다는 거야?”
“그럼요. 한 건 올릴 때마다 수십억의 수임료가 들어오는 건데 제가 마다할 일이 없지요. 그리고…….”
한진영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사실 수십억의 수임료 때문에 대한정유의 지분매각 건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지분매각 이후에 진행되고 있다는 신사업을 노리고 한진영이 지분매각 건에 발을 들이민 것이었다.
김정대는 한진영이 말을 아낀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진영의 곁에서 지금까지 한진영이 해온 행동들을 되짚어 봤을 때, 단순히 지분매각을 위해 대한정유에 접근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근수도 이런 김정대의 생각을 알고 있는 것인지 김정대가 궁금해하던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한정유가 왜 지분매각 주관사로 우리를 선택한 거야? 그것도 그쪽에서 우리를 선택하겠다는 게 아니라 네가 찾아가고 나서 주관사를 선택했다는 걸 보면 네가 뭘 이야기해서 우리를 선택한 것 같은데…….”
“장 본부장님이 잘 보셨네요. 제가 윤 회장님의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만족한 윤 회장님께서 주관사로 우리 회사의 저를 지목하신 것이고요.”
김정대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
“네. 대한정유가 관심을 가질만한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그 이야기는 김 본부장님도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너…… 설마.”
김정대의 머릿속에 담겨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모두 한꺼번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마음 한쪽을 짓누르고 있던 불편함이 다시 김정대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혹시 유가 이야기야?”
김정대의 말에 한진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이제 김 본부장님에게도 슬슬 이야기해도 될 때가 된 것 같네요. 벌써 1월 중순 아닙니까?”
“뭔데? 도대체 뭐가 있는데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그러는 거야?”
“넌 좀 가만히 있어.”
한진영의 말에 장근수가 오히려 더 흥분했다.
김정대는 그런 장근수를 타박하고는 한진영을 돌아보고 말했다.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면…… 지금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유가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거냐?”
“역시 김 본부장님께서는 상황을 잘 파악하시네요. 맞습니다. 지금의 파급이 중동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된다고 말씀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김정대의 표정을 살핀 한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정대는 한진영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긴가 민가라는 생각으로 아프리카 쪽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한진영의 말을 들으니 의심이 현실이 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유가를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진영은 이것저것 돌려 이야기하는 것보다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통해 김정대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김정대는 한진영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다잡은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나도 의심은 하고 있었는데 확신이 없었거든. 그런데 네 말을 들으니…… 이건 의심만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아. 확실히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김정대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진영을 내려다본 채 물었다.
“시기는?”
앞뒤 이야기를 다 자른 말이었다.
장근수는 도대체 무슨 시기를 말하는 거냐고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들은 당사자인 한진영은 김정대가 말한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모습이었다.
“설이 지나고 바로입니다.”
“설? 구정?”
“네.”
김정대는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력에는 2월 첫째 주에 빨갛게 숫자가 칠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며칠 남지 않았네.”
김정대의 눈에는 미리 이야기해주지 그랬냐는 듯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정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충분합니다.”
“얼마까지라고?”
“대한정유에 110불까지 이야기했으니 거기까지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110불?”
“기간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한 달이 채 걸리지 않는다고? 허.”
짧은 탄성을 지른 김정대였다.
이런 반응은 대한정유의 윤길영과 같은 반응이었다.
생각보다 짧고 강렬하게 오는 충격에 잠시 김정대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김정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걸로 서로 빚이 없어지는 거네.”
“네.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김정대는 아쉬운 듯이 입을 잠시 삐죽였다.
한진영에게 빚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걸 요긴하게 잘 써먹으려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나름 성공적인 일이었다고 자축하기로 했다.
80불 초반에 머물러 있는 유가가 단숨에 110불대를 찍을 거라는 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크나큰 이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김정대는 아직도 앉아 있는 장근수의 등을 두드렸다.
“나는 이걸로 진영이와의 셈을 끝냈는데 너는 어떻게 할 거냐?”
“나? 나 뭐?”
장근수는 모르는 척 딴짓을 했다.
한진영은 그런 장근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자리의 하이라이트인 장근수의 주머니를 털 순간이 찾아왔기 때문이다.